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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Sep 01. 2023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 했다 37

황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게 아니라, 근거가 확실하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급기야 천연덕스럽기까지 했다. 살짝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닮은꼴 조 팀장의 밀정 노릇을 하던 때와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태세 전환이었다. 화성 물류센터에 검수한답시고 찾아와, 설렁설렁 눈대중으로 창고에서 돌아다닐 때부터 그런 기미가 엿보이긴 했지만.


“만사가 식후경이라, 배가 불러야 대화가 화기애애하겠죠? 저기로 들어가요.”


회사에서 1시간 이상 떨어진 대학가를 걷다가, 황이 국밥집을 가리켰다. 회사 밖에서 둘이 만나는 사실이 소문으로 알려지는 일을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당연히 조심해야 했다. 기획팀에서 같이 근무할 때는 기껏해야 사내 연애지만, 비서실장과 기획팀장이 마주 앉은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수군거린다면, 소문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막말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는 핵심 인사가 비공개적으로 비밀리에 만났다는 소문은, 왜 만났을까 하는 의문이었다가, 의혹으로 번져가고, 음모론으로 커질 공산이 컸다. 게다가, 닮은꼴 조 팀장을 은근슬쩍 견제하던 본부장을 생각하면, 나는 물론이고 황 역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개털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내 짐작이지만.


“할 얘기가 뭐죠?”


사적인 대화는 애당초 잘라버릴 작정으로 용건을 묻는 물음에 황은 잠시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더구나 나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백호 씨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야 걱정하지 않지만, 박 주임이…, 그러니까 영업 1팀에서 열심히 적응하고 있지만, 한쪽으로 걱정이 많다고…, 나한테 부탁하더라고요.”


“영업팀이 기획팀에 부탁할 게 뭐가 있나요?”


“그 말이 아니란 건, 백호 씨도 잘 알잖아요? 박 주임이 나만큼은 백호 씨를 몰라도, 잔머리는 잘 굴리잖아요?”


“그래서요?”


“어떤 식으로든 보복당할 거라고 예상하던데요? 지난번에 하는 것 봐서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자기 생각에는 보복할 거라면서…, 엄청나게 불안해하고 있어요. 기획팀 팀장이라도 비서실장은 건드릴 수 없으니, 영업팀 주임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라고, 나한테 눈물까지 보였어요.”


그제야 가까운 화장실을 두고, 전략기획팀이 주로 쓰는 화장실까지 기웃거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볼펜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아무도 없는 화장실 안으로 가서 무릎이라도 꿇었을 터였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복수를 얘기한 적이 없으나, 박 주임은 충분히 내 속내를 읽었던 모양이었다. 같이 일했던 경험이 있으니, 성격상 한 곳에 꽂히면 집요하리만치 지독하게 몰두하는 내 스타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박 주임이 영업 1팀에서 열심히 일하게 그냥, 가만히 놔두었으면 하고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황의 말처럼 박 주임 정도는 깨끗하게 날려버릴 수 있었다. 문제는 닮은꼴 조 팀장이 있을 때부터 박 주임이 황과 연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연대의 끈은 여전히 유효했다. 게다가 황은 비서실장이었다. 언제든지 필요하면 회장 늙은이를 독대할 수 있는 위치였다. 보복한다고 섣불리 움직였다간 오히려 역공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거예요? 사회 정의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황의 말에 짜증과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황은 나름대로 플랜A, 플랜B 등을 생각했을 터였다. 어떤 식으로 보복할지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완성하고, 내가 행동에 나선다면 자신도 가만히 앉아 당하고 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을 터였다. 비록 한때 원나잇을 즐기던 사이였을지라도, 박 주임에 대한 복수가 곧이어 자신으로 이어질 거라는 전조현상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의지의 실행은 당연히 박 주임에 대한 나의 보복이 시작된 시점일 것이다. 본부장을 꼬드기거나, 회장 늙은이를 독대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내가 곤경에 빠지도록 온 힘을 쏟을 터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화성 물류센터 창고에서 손을 잡았던 것도 연인 관계의 회복을 위한 사전 행동이 아니라 미인계가 아닐까, 의구심마저 들었다.


“백호 씨가 팀장이 된 것도, 본부장님이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내가 찬성했다는 사실을 알아두었으면 해요. 인사철도 아닌데.”


난감했다. <찬성>을 얼마든지 철회하고, 본부장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진 꼴이었다.


“내가 언제 보복한다고 얘기했나요?”


나는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지금, 말장난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대충 얼버무리거나, 선택을 강요받는 지금 순간을 어찌어찌 피할 수 있어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나만 구질구질해질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원나잇의 밤들을 통해서 나보다 더 나를 알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신중하게, 심각하게 고려해 보지요.”


“지금 당장은 안되고요?”


“마음을 정리해야 하니까…, 생각도 짚어봐야 하고….”


보복은 없을 거라고 선언하면 박 주임과의 관계에서 히든카드를 허공중에 날려버리는 꼴이었다. 보복의 대상이 아니라 내 사람으로 만들 대상으로 여기면,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형국이었다. 볼펜과 안경에게 신뢰를 얻으려는 숨은 의도도 있었다.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황은 흡족한 대답은 아니어도, 지금 상황에서 적절한 타협이라고 판단하는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입사 동기인 황과 박 주임의 관계를 생각할 때, 황의 요구가 지나치거나 얼토당토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획팀에서 나를 몰아낸 같은 패거리라는 점에서 뻔뻔함을 너머 심장에 철갑을 두르고 있었다.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이 없었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하겠지만.


“화성에 내려가 있는 동안, 변한 것 같아요.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황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를 조금 벌리면서 눈가에 갖다 대며 윙크했다. 사무적인 딱딱한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서론은 끝났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투였다. 황의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제 와서 나를 붙잡아 보겠다고? 이미 돌아선 내 마음도 마음이지만, 닮은꼴 조 팀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정말이지 아무 생각도 없는 건가? 아니면 집요한 건가? 소문이 사실과 달리 부풀려지고 엉뚱하다고 해도 연기를 피워낸 불쏘시개는 분명히 있지 않은가? 아마도 닮은꼴 조 팀장과의 데이트가 나와 했던 사내 비밀 연애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시 만날 거라고 얘기했죠? 예전처럼!”


대꾸가 없자 황은 목소리 톤을 더욱 밝고 가볍게 해서, 다시 말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무거운 분위기를 바꾸려는 계산된 행동이었다. 예전처럼이라니? 저성과자로 몰아붙여 왕따를 시키던 때? 아니면 원나잇의 밤들이 세상을 온통 휘황찬란하게 무지개로 뒤덮었던 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느낌에 비로소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착각이었다. 엄청난 학벌로 똘똘 뭉쳐진 그녀의 집안 내력을 알게 되자, 나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복귀할 거라 귀띔이라도 줬으면, 고생을 덜 했죠.”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일손 부족이 복귀를 뜻하진 않죠. 기획실에서 일할 사람이야 다른 부서에서 얼마든지 차출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어요. 요즘 조 팀장 뒤치다꺼리하느라, 신경 쓰였죠. 그 일을 매끄럽게 처리할 사람을 찾아야 했어요. 박 주임이 팀장으로 있으면서 엄벙덤벙 대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죠. 백호 씨가 마지막 적임자였어요.”


“그런가요?”


나는 최대한 떨떠름하게 말했다. 황과 예전처럼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비밀을 감추고, 원나잇의 밤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자고로, 끼리끼리 만나야 탈 없이 살 수 있다는 옛말 때문이 아니었다. 원장의 마리오네트에 불과했다는 사실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발견했고, 동시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장 눈앞에 앉아 있는 황도 마찬가지였다. 화성 물류센터로 내려가기 전까지 줄기차게 밀정 노릇을 하며, 나를 저성과자로 몰아붙이지 않았나.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이 바뀐다고 믿지 않았다. 닮은꼴 조 팀장에게 줄을 선 이유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눈치챘다. 가진 것 없는 변변찮은 보육원 출신은 몇 달 재미있게 가지고 놀다가 방구석에 처박아두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까놓고 얘기해서, 본부장의 주장에 편을 들어준 이유도 엉망이 된 기획팀을 추스르는 공을 어느 정도 차지함으로써, 비서실장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얘기 그만 해요. 술 한잔하고 싶은데, 어때요?”


황은 고혹적인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달콤한 원나잇의 밤들이 시작된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 밤 깊은 어둠 속에서도 황은 저런 눈빛이었다. 원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는 삐뚤어진 자신감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아니요, 오늘은 갈 데가 있어서….”


선약은 없었다. 하지만 술집 이후의 행로를 빤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술집은 원나잇의 밤을 여는 문이었다.


“아쉽네요. 몸도 매우 고픈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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