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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Aug 31. 2023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 했다 36

“아, 네에. 다들 잘 있지요?”


딱 부러지게 대답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데스크 건만 해도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후속 조치가 필요하면 제때 대응해야 해서 골치 아픈데, 파트장의 비리를 공론화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얼핏 든 생각이지만, 눈치를 적절하게 장악할 수 있다면 손대지 않고 코를 풀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불독을 취직시켜, 보육원 시절과 완전히 역전된 관계로 만들었듯이. 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없는 상태에서 물류센터 차원에서의 공론화는 불똥이 어디로 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눈치의 성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다른 동료들은 거의 몰랐다.


“잘 있지요. 언제 기회가 되면 놀러 오세요. 다들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요? 기회가 있으면요.”


“꼭 오세요. 거나하게 대접하죠.”


달콤한 말은 듣는 지금의 귀가 고마울 뿐이다. 화성에 가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었다. 외지인 취급을 하던 동료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본사로 복귀해서 머지않아 권고사직 당할 거라는 예언을 저희끼리 수군대던 동료들이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승진하니까, 보고 싶다고? 내가 알량한 팀장이라는 권력에 취해 나를 잃어버릴 줄 알았나? 겨우?


“그럼, 꼭 오세요. 난 바빠서 이만….”


파트장은 가볍게 묵례까지 했다. 내게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인 적이 없는데, 의외였다. 당연히 마음 한쪽에서 왠지 뿌듯하고 따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내 털어버렸다. 이제 겨우 팀장이지 않은가.


파트장은 뒤돌아 성큼성큼, 망설이거나 주춤거림도 없이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트장이 본부장을 만날 업무가 있나? 의아했다. 영업팀장을 만난다면 몰라도. 혹시 파트장의 비리가 본부장과도 연결되어 있나? 수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눈 감아 주는 세력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했다. 눈치의 말처럼 화성에 창고지기로 있다가 복귀했는데, 권고사직을 받았다면 침묵할 이유가 없었다. 당장 나라도 곱게 퇴사 당하지 않을 터인데. 하, 이상하다, 수상하다….


“팀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합니까? 혹시라도 데스크를 만났던 일이 잘못되기라도 했나요?”


볼펜이었다. 안경은 옆에 서서 짐짓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들에게 봉투 얘기는 하지 않았다. 내심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조 팀장이 엄벙덤벙 일하는 스타일이라고….”


안경은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슬쩍 봤다. 뒤늦게 부담감을 가질 것 같아,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볼펜과 안경도 엘에이 지사에 근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쉬쉬하며 퍼지는 소문을 알고 있었다. 엘리트 코스라는 사실을.


“짜샤! 장 팀장님 눈치는 보지 않아도 돼. 만나진 못했지만 조 팀장은 완전 고집불통이라 거의 독재자였거든요. 팀원들이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것까지 빠삭하게 꿰뚫고 있었다고…, 그런 소문을 들었거든요.”


“같이 근무했다면서요? 정말 그랬나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


안경은 안도의 표정으로 지그시 웃었다. 볼펜의 물음에 동조함으로써 나 역시 그들과 한배를 탔다는 것을 각인시킨 셈이었다.


“그럼, 조 팀장의 눈 밖에 나서, 그러니까 찍혀서 화성으로 쫓겨났다는 소문도…, 사실인가요?”


볼펜과 안경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장 팀장님이 쫓겨나기 전에 퇴사한 사람도 있었다고 하던데, 그것도 진짜인가요?”


“신입이라고, 있었지. 그 친구, 지금은 뭘 하는지 통 소식이 없네. 내가 먼저 전화하기엔 좀 그렇고….”


“왜요?”


“어떻게 보면 나 때문에 사표를 던지고 나간 것일 수도 있으니까.”


“무슨 말인데요?”


“말하자면 길어. 대충 얘기하자면, 나와 너무 가깝게 지내서 조 팀장한테 미운털이 박힌 거지. 직장 동료 이상으로 친했으니까.”


보육원 출신임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지만, 오피스텔 원룸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황과의 원나잇 밤들의 최후를 어떻게 눈치챘는지, 걸핏하면 사촌누이를 소개해주겠다고 설레발을 쳤었다. 술에 취해 의지와 상관없이 흘렸을 수도 있고, 내게만 유난히 까탈스럽게 구는 황을 보며 넘겨짚었을 수도 있었다. 형님! 수상합니다. 황이 형님 주변에서 맴도는 게, 확실히 이상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업무처리는 어떻게 하는지, 쥐새끼처럼 숨어서, 하나도 빠지지 않고 관심을 가집니다. 신입의 말에 밀정 노릇을 하는 중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그다지 가깝게 지내지 않았는데, 밀정임을 알면 거부감을 가져서, 대놓고 곱지 않은 눈으로 황을 볼 게 뻔했다. 가뜩이나 팀워크가 중요한 기획실 업무를 생각하면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제가 안경과 친하게 지낸다고…, 설마 팀장님이 나를 내치진 않겠죠?”


볼펜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내가? 왜? 기획팀은 원팀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알겠습니다. 장 팀장님과 저희는 공동운명체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거창하게 운명체는…, 무슨….”


“그렇잖습니까? 제가 퇴사하기 전까지. 팀장님은 전략기획실 리더로서 확실하게 저희를 이끌어주시고….”     

“데스크를 만난 일은 앞으로 두고 봐야 할 것 같으니, 당분간 사내 여론을 주목하자고.”


볼펜의 말에 아부가 더해질 낌새가 보여, 말을 끊었다.


“데스크를 만난 일이 잘됐다는 말씀이네요?”


“그렇게까진 아직 확신할 수 없고, 두고 봐야 한다니까. 우리야 소문을 수집해서 영향 관계를 따지는 아마추어 수준이지만, 데스크는 말 그대로 프로니까. 그리고 거래처가 우리 회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도 수시로 점검해야지. 신문 기사로 나갈 일은 처음부터 만들지 말아야 하니까.”


“액땜했다고 쳐야겠네요.”


“그래야지. 본부장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엘에이에 있는 조 팀장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뻔한 허세를 부렸다. 내가 닮은꼴 조 팀장을 어떻게 하다니!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막상 말하고 나자 낯간지러웠다. 하지만, 볼펜과 안경은 닮은꼴 팀장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믿는 눈치였다. 실소가 입가에 비실비실 빠져나왔다. 의외로 단순한 구석이 있네? 볼펜과 안경은 전략기획팀 팀장의 권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화성 물류센터 파트장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보지 않아도 파트장 자리 하나쯤은 손쉽게 날려버릴 수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나하게 대접하겠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게다가 파트장의 비리를 알고 있는데?


사실, 전혀 근거가 없지 않았다. 닮은꼴 조 팀장이 비록 본부장의 부하이긴 하지만, 서로를 견제하면서 심심찮게 알력 싸움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시 퇴근>을 두고 서로 기 싸움했었다. 본부장이 직원들의 충분한 휴식이 일의 능률을 올릴 수 있다며 정시 퇴근을 강행하자, 닮은꼴 팀장은 딴지를 걸었다. 초과근무를 비롯해 야근도 강요했다. 본부장이 워라벨을 중요시했다면, 조 팀장은 워커홀릭이었다. 경쟁사를 지나치게 의식한 탓이었다. 이상하게도 둘 사이의 기 싸움에서 본부장이 일방적으로 패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


“얘기 좀 해요.”


황이었다. 모두 퇴근하고, 나 역시 사무실을 막 나가려던 참이었다.


“무슨…?”


비서실과 딱히 소통할 업무는 없었다. 요즘 들어 비서실은 회장 늙은이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자세히 알 수 없으나, SNS에 올리는 창업자의 신격화 동영상 작업에 문제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프리랜서 경제 기자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비서실과 어떤 상관도 없는 것처럼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서실과 계약을 맺은 사실은 일부 극소수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프리랜서 경제 기자가 앞으로 윤색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페이 논란이 일었다. 동영상 하나에 오백을 후원했는데, 천으로 올려달라는 요구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내용이었다.


“맛집에 가기로 했잖아요? 가요.”


황은 한발 앞서 걸었다. 한 번 거절했던 터라 부담감도 있고, 대충 핑계를 대고 피한다고 해도, 한 건물에 근무하는 이상 오며 가며 간간이 맞닥뜨릴 수 있었다. 가급적 둘이 만나는 경우를 피하고 싶은 속내를 황이 넘겨짚으면, 이래저래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기획팀과 비서실이 협업할 때도 있고, 팀장의 발언권이 세다고 해도, 비서실장에 비길 바는 아니었다. 회장 늙은이를 비롯해 총수 일가의 사생활까지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회장 늙은이를 권력의 정점으로 본다면 아무래도 가까이 서 있는 쪽이 발언권이 세질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당연히 맛난 것도 사줘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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