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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Aug 25. 2023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 했다 35

"결국 한바탕 했어. 온갖 욕을 해대면서. 날 왜 버렸냐고. 아버지가 빤히 살아 있으면서, 왜 고아로 만들었냐고. 세상에 있는 욕, 없는 욕 모조리 내뱉으면서. 살림살이도 마구잡이로 부수면서. 방이고 거실이고 할 것 없이 개판을 만들었다. 잠자코 있더라. 당연했어. 지은 죄가 있으니까, 무슨 변명을 하겠어?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거잖아? 자식을 버린다는 건. 네 말처럼 천륜을 어기는 거니까."


도일의 표정이 차츰 침울해져 갔다.


"욕하고 부수고…, 지쳐갈 즈음 갈 데가 있다고 하더라. 버스 타고 몇 시간을 갔어. 해가 뉘엿뉘엿 지는데, 산으로 올라가는 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호프집이나 가서 나를 달랠 줄 알았거든. 한참을 올라갔어. 그러더니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거야. 해는 자꾸만 산 아래로 떨어지는데, 바닷바람이 밀려왔어. 죽을죄를 지었으니 죽여달라는 줄 알았어. 목도 쉬고, 산에 올라오느라 다리 힘도 빠졌지만, 못 할 것도 없었지. 씩씩거리며 아버지를 노려보는데, 낮고 천천히 말하는 거야. 내가 약속을 다 지키지 못하고, 자네 아들을 여기에 기어코 데리고 오고 말았어…, 라고. 땅바닥을 천천히 두드리면서. 자네한테 정말 미안해…, 낮게 읊조리듯 말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묘비도 없는 낮은 봉분이었어."


"결혼을 하려는데 내가 걸림돌이었어. 아저씨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보육원에 맡길 수밖에 없었지. 그것도 모르고 새장가니, 뭐니 씨부렁댔으니…, 욕사발을 퍼부었으니…."


도일은 급기야 탁자 위에 대추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묘비도 없는 봉분에 누운 아버지를 위해서 우는 것인지, 아저씨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의 패악질이 떠올라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불독과 나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섣부른 지레짐작으로 말참견한 것을 후회할 따름이었다.


*


데스크는 표정부터 거만했다. 다른 신문사는 사회면에 4줄짜리 단신 기사로 짤막하게 언급했던 사건을, 기획물 시리즈로 몇 달째 대기업의 횡포 사례로써 회사를 까발리고 있었다. 원청의 갑질이라며 마땅히 지탄받아야 한다는 논조도 문제였다. 솔직히 톡, 까놓고 얘기하면 갑질 없는 원청이 어디 있는가? 납품가를 후려치지 않고, 제값을 쳐주는 원청이 어디 있어? 있으면 얘기해봐라! 데스크에 따지고 싶지만, 나는 을이었다. 데스크는 흑마술의 마왕이었다. 불매운동이라도 일어나면 뒷수습도 문제지만, 회사 이미지는 바닥을 찍고 지하로 내려갈 게 뻔했다.


상범이가 똥을 싸질러놨는데, 어떡하겠나? 치워야 하지 않나? 본부장의 말이 귓가에 여전히 맴돌았다. 닮은꼴 팀장이 낙하산으로 내려오기 전에, 걸핏하면 말년 팀장에게 엄청나게 욕바가지를 퍼붓더니, 본부장이 달라졌나, 착해졌나, 듣는 귀가 의심할 정도였다. 한편으로 말년 팀장이 퇴직하면 당연히 팀장으로 승진할 것이 분명해, 지랄 같은 성격의 본부장 때문에 은근히 쓸데없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창고지기로 추락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짓거리였다.


"바빠서 숨 돌릴 틈도 없는데, 왜 만나자고 한 거요?"


데스크는 인사가 끝나자마자 못마땅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퍼런 칼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자신만만함과 여유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회사에서 얼마나 많이 뜯어먹었는지, 마왕의 품격이 느껴졌다.


"기사를 내려줄 수 있을까, 해서…, 부탁합니다."


처음은 정공법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연히, 전혀 먹혀들지 않겠지만.


"기사라는 게, 그렇잖아요? 이미 나가버린 걸 데스크가 무슨 수로 되돌립니까?"


이미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실제로 되돌릴 수 없었다.


"신문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홈페이지에 있는 기사는 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요즘은 신문 읽는 사람들보다 스마트폰으로 읽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데스크는 입술을 앙다물고, 단호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맨입으로, 그게 가당키나 한 요구라는 뜻이었다. 받는 게 있어야 주는 것도 있다는 업계의 오래된 관습이 몸에서 뚝뚝 떨어졌다.


독자의 알 권리보다 데스크의 편집권을 우선하는, 독자가 알아야 할 것들을 조목조목 지정해주는 편집권의 위대함을 몸소 실천한다는 자부심마저 풍겼다.


"다음 달에 광고 하나를 더 발주할 계획인데…, 저희 사정도 좀 봐주시면, 새로운 광고 건이 윗선에서 결재가 순조롭게 처리될 것 같습니다."


결국, 히든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나가고 있는 광고는 계속하고, 하나 더 준다니까, 데스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러나 단호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편집권이야말로 독점적 권력이라는 믿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팀장님도 아시잖습니까? 언론의 생명은 정확한 사실 전달이지요. 독자들을 기만하는 가짜뉴스는 찌라시고. 이번 기획물 시리즈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자는 취지에서 특별히 계획된 것이라, 저희 신문사가 찌라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고…."


데스크의 명분 뒤에 숨은 탐욕이 징그러웠다. 앞뒤와 겉과 속이 다른 데스크의 두꺼운 얼굴을 보면서 욕지기를 느꼈지만, 나는 을이었다. 가타부타 따지면서 물음표를 붙여, 마왕의 가면을 뜯어내고 싶어도 그럴 상황도, 처지도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저 술값 정도…. 받으시죠."


탁자 위로 봉투를 데스크 앞으로 밀었다. 데스크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데스크의 손은 눈보다 빨랐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검증한 사실도 의심해야겠죠. 주장일 가능성은 항상 있으니까요."


데스크는 안주머니에 봉투를 집어넣으면서 입꼬리가 살짝 더 올라갔다. 본부장의 말이 맞았다. 이 새끼가 돈 냄새를 맡았어. 광고만으론 넘어오지 않을 거야. 전쟁할 순 없잖아? 광고를 뺀다고 하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덤벼들 테고, 광고 하나 더 준다고 해도 대기업 횡포 사례에서 빼지 않을 거야. 물론 조금 덜 언급할 순 있겠지. 깨끗하게 처리하려면 봉투를 줄 수밖에 없어. 본부장은 봉투를 내밀었다. 장 팀장! 무슨 얘긴지 알겠지?


"당연하죠.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고개를 일부러 격하게 끄덕였다. 데스크의 얼굴 가득 포만감이 넘치는, 만족스러운 엷은 미소가 번졌다.


"신문으로 나간 기사는 어쩔 수 없더라도 홈페이지 있는 기사는 다시 검증해야 하니까, 기사를 수정하고, 앞으로 시리즈에선 언급될 일이 없을 겁니다."


"만족합니다."


"그렇게 해야, 찌라시에서 벗어날 수 있죠. 그렇지 않나요?"


"암요, 그렇고 말고요."


다시금 욕지기가 올라왔다. 침을 꿀꺽 삼키며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대화 즐거웠습니다. 다시 검증해야 하니까, 이만…."


데스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당하게 걸어가는 좍 펼친 어깨가 슬프게만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이 새끼는 사실을 재가공하는 놈이야. 있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슬로건은 일찌감치 엿과 바꿔 먹은 놈이라고! 급기야 뉴스를 창작하는 놈이라고! 비록 상범이가 똥을 싸질러 놓긴 했지만. 엘에이에 가서도 또 그 짓을 할까, 조마조마하네. 본부장의 욕지거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나는 씩씩하게 걸어가는 데스크를 통유리 밖으로 내다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이게 누구야? 장 대리, 아니 장 팀장이 아닌가?"


본부장에게 데스크와 만난 결과를 보고하고, 전략기획팀으로 돌아가려는데, 옆 복도에서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화성 물류센터 파트장이었다. 몇 개월 동안 얼굴 보지 못한 탓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환한 표정이었다. 무엇보다 무슨 일로 본사에 왔는지 의아했다. 창고지기로 있을 때, 정기적으로 출장을 간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중의 하나가 본사인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본사 다른 곳에서 마주쳤다면 업무 때문에 왔거니, 여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본부장 사무실 앞이 아닌가?


"정말 축하하네. 다른 부서도 아니고 전략기획팀 팀장이라…, 완전히 내 예상을 깨부수는 파격인데."


파트장의 반가워하는 표정에서 엷은 경계심을 읽었다. 당당하고, 창고지기 동료들에게 호령하던 늠름한 자세도 아니었다. 본사여서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걸까? 파트장은 내 손을 덥석 잡아 흔들었다.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별일 없고요?"


"나야 맨날 똑같지. 장 팀장이 있을 때와 같아. 예전에 섭섭한 일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게. 알겠지? 부탁하네."


"섭섭한 일이요?"


전략기획팀 팀장으로 승진한 다음부터 파트장의 비리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깨 너머로 팀장의 업무를 어느 정도 파악한 것은 닮은꼴 팀장이 낙하산으로 오기 전이긴 해도, 당장 눈에 떨어진 업무를 처리하기에 느긋할 틈조차 없었다.


"잘 알면서, 왜 그래요? 가만히 있으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거, 아닙니까?"


파트장은 은밀한 윙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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