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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직 Aug 22. 2023

그래서 그는 자수성가 했다 34

싸늘한 눈길조차 주지 않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 팔자는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박 주임은 허리 굽혀 깍듯이 인사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몇 주 사이에 아주 딴사람이 됐어요. 화장실에서 얼마나 떠드는지, 귀찮아질 정도라니까요. 궁금한 게 뭐가 그렇게 많은지. 기획팀도 아니면서."


볼펜이 멀어지는 박 주임의 등짝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궁금해? 뭘?"


"기획팀이 잘 돌아가는지 묻고, 장 팀장님이 무슨 생각하는지도. 내가 독심술을 하는 줄 아는가 봐요. 어떻게 사람 속으로 알아요?"


"행동을 보면 알지. 표정이라든가."


"독심술을요?"


"당연하지. 마음은 말보다 행동에 먼저 나타나지."


"장 팀장은 볼수록 신기합니다. 생각하지도 않는 그런 말들을 어떻게 금방 떠올리는지, 정말 대단합니다."

    

"박 주임이 가까운 화장실을 두고, 무엇 때문에 기획팀 근처에 있는 화장실에 왔다고 생각해?"


"그거야, 습관이 아닐까요? 잠자리 바꾸면 잠을 설치는 사람이 있듯이 화장실도 마찬가지겠죠."


"과연 그럴까?"


"박 주임은 몰라도 저는 그래요. 똥이 나오지 않거든요."


볼펜은 대단한 비밀이라고 되는 듯이 속삭였다.


"적응하기 무척 힘들었습니다. 무려 한 달 넘게 고생했거든요. 변비에 걸릴 뻔했다니까요."


볼펜은 실없이 웃었다. 나는 싱겁게 따라 웃었다. 박 주임이 염탐하러 왔다고 일러줄 필요는 없었다. 박 주임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그의 행패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은 속내를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이미 한참이나 지나버린 일에 대한 앙갚음이나 궁리하는 쪼잔한 팀장으로 볼펜의 머릿속에 박힌다면 나만 곤란해졌다. 그런 인상이 깊어지면, 볼펜 역시, 박 주임에게 그랬듯이 나에게도 등을 돌릴 게 뻔했다.


비록 부하 직원이라고 해도 팀원들이 팀장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마음이 서로 맞지 않으면 기획팀 업무는 헝클어지고 엉성해질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하는 일은 항상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부서 실적으로 연결되고, 저성과자로 낙인찍힐 터였다. 복수는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된 후에야 해도 늦지 않았다. 엊그제 불독의 취업을 축하는 자리에서 얻어들은 도일의 경우에 비춰보면 더욱 현명한 결정이었다.


*


"빚진 거야. 그것도 엄청나게 큰."


도일은 불독에게 충고하듯이 연거푸 말했다. 보육원 시절 같으면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이었다. 무슨 트집을 잡아 또 괴롭힐까, 보육원 뒤뜰로 불러내서 거친 주먹질을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 불독의 눈치만 봤을 것이다. 그런데, 도일은 대놓고 마음에 품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간 세월이 새삼 느껴졌다. 둘이 간혹 만난다더니 좋은 의미에서 비로소 불알친구가 된 듯했다.


"알지. 알고말고. 그래서 이렇게 한 턱 쏘잖아? 사실 면접할 때, 범죄경력 조회서를 제출하란 말에 속으로 뜨끔했지. 다 틀려먹었구나. 네 주제에 무슨 대기업 사원씩이나 하나. 그런데 백호가 아는 사이라고 나서주는 거야. 신원보증을 서준다고. 거짓말 하나 없이,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 비로소 봄이 앞에서 떳떳한 남자가 되는구나. 사람 구실 할 수 있겠구나. 그러니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한 턱 쏘지 않을 수 없잖아?"


"이까짓 한 턱 가지고 되겠어?"


"두고, 두고 갚을 거다. 그런데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벌써 몇 번째냐?"


도일의 지나칠 정도로 심한 다그침에 불독은 마음으로 스스로 다짐하듯 정색했다. 꽉 다문 입술, 반짝거리는 눈빛,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보육원을 나온 후로 길거리에서 거친 삶을 살아온 불독으로서는 자신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취업이었다. 아침에 출근하고, 해지는 저녁에 퇴근하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통해서 봄이와의 관계도 더욱 돈독해질 것이다. 불독도 불독이지만, 봄이를 생각하면 신원보증을 서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괜히 낯간지러워졌다. 도일의 말이 공치사처럼 느껴져서였다.


"봄이도 데리고 나오지, 그랬어?"


"미용학원 다니잖아. 돈 걱정을 말라고 했지."


"기사 식당에 나가지 않았어?"


"식당 일이 완전히 공사판 막노동 저리 가라야. 그래서 평소에 미용사 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지. 낮엔 학원 가고, 밤엔 동네 미장원에서 일 배우고. 꿈이 아주 커. 미용실을 차리고 싶다니까."


"밑바닥까지 추락하더니, 불독을 만나 날아오를 일만 남았네. 잘된 일이야. 그동안 불독 때문에 오죽 애간장을 태웠냐? 백호한테도 잘해야 하지만, 봄이도 빼먹으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을 거다."


도일은 짐짓 주먹을 불끈 쥐고, 탁자를 툭툭 쳤다. 불독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당근이지!"


불독은 빙그레 웃었다. 보육원 시절, 돈을 뜯으면서 웃던 비굴한 웃음이 아니었다.


"일은 할만해? 무리하게 끼어들기 하지 말고, 차분하게 운전해야지? 요즘은 특히 우회전할 때, 조심해야 한다던데?"


"조심하고 또 조심하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갖게 된 직장인데, 쫓겨날 순 없잖아?"


"잘 생각했어. 욱하는 성질머리를 많이 뜯어고쳤네. 새사람이 됐어."


도일은 흐뭇해했다.


"일이 생기면 내가 불독을 불러낼 수 없어서, 섭섭하긴 하지만. 어쩌겠어? 직접 혼자서 뛰어야지. 틈만 나면 도망치는 놈들이 생겨서, 완전 추노꾼이 되어버렸다니까."


"그 정도야?"


"다른 업체에서도 의뢰가 들어올 정도니까. 계약만기를 앞두고, 불법체류자가 되는 거지. 동남아로 돌아가봤자, 백수밖에 더 되겠어? 어떡하든 남아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달리 방법도 없겠지.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왔다가 불법체류자로 전락하는 거지. 사실, 못된 사장을 만나면 도망칠 수밖에 없어. 밀린 급여는 받기 힘들지, 돈을 가족에게 보내줘야지, 어쩌겠어? 도망가서 일자리를 찾는 거야. 잡는 나도 마음이 그다지 편하진 않아. 법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


도일은 씁쓸해진 입가를 손등으로 쓰윽 닦았다.


"아버진 잘 계셔?"


불독이 물었다. 도일은 순간적으로 침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공을 쏘아보았다.


"복수한다더니 마음을 고쳐먹었구나? 잘했다."


도일의 성격이 불독 같았으면 벌써 일을 저지르고 말았을 터인데, 지금까지 잠잠한 것을 보니 복수 근처에도 가지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도일은 답변처럼 나를 텅 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왜?"


나는 묻고 나서, 도일의 눈빛에서 깊은 우물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냉기를 느꼈다. 그동안 만나면서도 아버지 얘기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짐작했다. 도일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불독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서 침묵했다. 도일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버지가 아니었어."


언젠가는 털어놓아야 한다는 체념 엇비슷한 감정이 짧게 도일의 얼굴을 스쳤다.


"너한테 면목이 서지 않으니까, 드문드문 보육원에 왔던 거겠지. 어쨌거나 피붙이인데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는 건, 좀 심했다. 복수심보다 피가 더 진한 거야. 그걸 천륜이라고 하잖아?"


"아버지가 아니라니까! …아저씨야!"


도일은 별안간 고함을 내질렀다. 무슨 생각에 골몰하는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불독도 나도 뜻밖의 상황이라 도일의 눈치만 보았다. 어쭙잖은 말참견을 괜스레 했다, 후회했다. 보육원 시절을 함께했다 해도 끝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거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마지막 자존심? 혹은 마지막 남은 자긍심? 도일이가 <유기와 분실의 차이>를 얘기했을 때처럼.


"포항에 간지, 삼 년쯤 지났을 때였어. 사 년인가? 암튼 그 무렵이었어.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더라. 나도 질 수 없어 째려보았지. 한판 대판 하려고. 이미 지나간 내 시간을 앙갚음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괴롭혀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어. 늘 그렇듯이."


"함께 살면 그만이지, 아버지를 괴롭혔다고? 얼마나 악담을 퍼부었냐? 지난 일을 자꾸 되살려내서 뭘 어쩌자고?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괴로운 일들도 깃털처럼 가벼워져. 그리고, 희미해지는 거지.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 관계가 그렇잖아? 내가 너희를 괴롭혔지만, 너희가 날 용서해주니까 이렇게 새사람이 되었고."


불독은 꾸짖듯이 말했다. 불알친구를 걱정하는 따뜻한 충고였다. 도일은 불독을 보며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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