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는 차차 생각할 문제고, 우선 네가 동의해 준다면 일을 추진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유전자 검사를 또 하겠다고?"
"당연하지. 공신력 있는 클리닉에. 부모도 찾고, 부잣집 도련님도 되고. 얼마나 쌈박한 계획이나? 팔자를 새로 쓰는 거지. 천애고아가."
"한심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네가 봤다는 노인네에게 전화해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냐고 묻는 게 빠르겠다. 미국 가면 돈 버려, 시간 버려, 그것뿐이냐? 쓸데없는 일에 신경 써, 정력 낭비에 정신까지 피폐해져. 알겠냐?"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잖아?"
"왜?"
"넌 갓난아이 때 보육원 입구에 버려졌다며? 누가 버린 짓을 실토하겠어?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해도. 버린 것하고, 잃어버린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 유기는 의도적이지만, 분실은 의지가 개입하지 않았어. 듣기가 좀 거북하겠지만, 사실은 사실이잖아?"
아픈 상처는 불문율처럼 입 밖으로 서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불쑥 꺼낸 도일의 말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깊은 새벽, 어스름 속에서 보육원 정문을 서성거리는 얼굴 없는 부모가 더욱 미워졌다. 지금껏 살면서 마음 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는데, 이런 식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나타날지 정말 몰랐다.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아무도 모르게 끄집어낼 때마다 꺼이꺼이 울음을 삼켰었는데, 벌건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이 많은 카페에서 도일이가 꺼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옛날 얘기할 생각은 없었어. 말하다 보니까, 실수로…."
도일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난 뒤, 고개를 숙이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불독이 채용된다니까, 꼬장이냐?"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어릴 때, 보육원의 궁핍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해도 마지노선을 넘었다.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라도 지나가면 대부분 웃으면서 얘기하는 추억이 되지만, 결코 그렇지 못한 일들도 있었다. 알고 있더라도 모른 척, 절대 입 밖으로 내놓아서 안 되는 일들도 있었다. 더구나 당사자 앞에서는.
도일이가 아니라면 벌써 주먹다짐하고도 남았다. 송진을 잔뜩 머금은 장작불같이 삽시간에 치솟아 오르는 악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가라앉히면서 도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때리면 잘못을 알아, 군말 없이 맞을 도일이었다.
"미안하…, 다. 정말. 내가 잠시 정신머리가 나갔나 봐. 미안해."
나는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때린들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화가 풀릴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일어날게. 다음에 또 보자."
도일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카페를 나갔다. 도일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노려보면서 천천히 화를 삭였다. 도일이가 아니라 불독이었다면, 보육원 시절과 다르게 한판 거칠게 부딪혔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불독은 그저 맞고 있겠지만.
*
"조상범 팀장을 잘 알지요?"
미팅 내내 힐끔힐끔 곁눈질하던 본부장이 회의실을 나가며 물었다.
"잠시나마 같이 일했으니까, 모르진 않죠. 왜요?"
"못되게 굴었지? 아마?"
본부장은 짐짓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자네를 전략기획팀으로 다시 불러들였어. 알고 있었나?"
창고지기로 쫓아낼 때도 본부장의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터에, 이제는 생색을 내겠다? 하긴 직장인은 언제나 윗사람들의 손바닥 위를 벗어나긴 힘들지.
일찌감치 개인 물품을 옮긴 박 주임에게서 다음 날 인계인수랍시고 이것저것 넘겨받았지만, 전략기획팀의 업무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업무 건건이마다 억지로 일하는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처음부터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시작하면 뒷감당이 몇 배가 힘들었다. 박 주임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해할 수 없었다. 팀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면 불협화음은 당연하고,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했다. 땜질할수록 업무는 누더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본부장은 파악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엎드려 절받기를 바란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고개까지 정중하게 숙였다.
"상범이가 심성은 착한 놈인데, 아직도 껄끄러운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진 않을 테지?"
"네?"
본부장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직장 부하인데 허물없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며, 말투가 닮은꼴 조 팀장을 에둘러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니면 자신의 묵인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 본부장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지도 모르니, 솔직하게 얘기하지. 내가 상범이한테 시켰어."
"네?"
묵인이 아니라 지시였다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전략기획팀에 대리로 있으면서 본부장과 부딪치는 일도 없었는데, 속된 말로 나를 제거하려고 했다고? 본부장은 언젠가 내가 알게 될 거라고 했으나, 입 다물고 모른 척하며 넘어가면, 달리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굳이 말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판단 착오였어. 전략기획팀이 이럭저럭 굴러가긴 했지만, 엉성하고, 잦은 실수가 골치 아팠거든. 그러다 상범이가 사고치고 말았지. 엘에이로 간 것도 쫓겨난 거야."
본부장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미국 지사는 엘리트 코스인데 쫓겨났다는 표현부터 이해할 수 없고, 하도급 업체들에 무리한 납품가 후려치기를 하면서도 언론플레이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마추어나 빼먹는 실수였다. 그로 인해서 회사 이미지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흑마술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그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무엇보다 기획팀 팀원들의 손발이 서로 맞지 않은 영향도 있으리라.
"앞으로 잘해봅시다."
본부장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잡았다는 점을 확인하는, 혹은 지난 일은 잊으라는 의미의 악수는 거북했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부장의 실토 뒤에 아직 내가 모르는 숨겨진 사실들이 웅크리고 있다는 막연한 지레짐작은 어쩔 수 없었다. 본부장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염두에 두고, 물밑 작업을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일개 대리에 불과한 나를 다시 불러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중에 내가 따로 부를 테니, 오늘은 이쯤 하지."
본부장은 복도를 힘차게 걸어갔다. 본부장의 씩씩한 걸음이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본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를 저성과자로 몰아붙여 창고지기로 추락시킨 큰 그림을 완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개 팀장 주제에 본부장을 상대로 보복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팀장으로 승진시켜주었다는데, 반감을 품을 수 없었다. 냉온탕을 오락가락하게 한 본부장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행동대장 역할을 한 박 주임과 황이 더없이 허접하게 보였다.
닮은꼴 조 팀장이 시킨다고 해서, 내게 귀띔조차 없이 하루아침에 안면을 몰수하고 괴롭히다니! 뒤늦게 심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시켜서 한 일이어서 죄를 묻기 어렵다고,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어도, 기회가 오면 따끔한 맛을 보여주리라. 배알도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게 아무리 바른생활이라 할지라도 도가 넘은 짓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본부장실을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기획팀을 향해 걸어갔다.
"회의가 끝났나 봐요?"
화장실에서 나온 볼펜이었다. 뒤따라 박 주임이 나왔다. 나를 보자 멈칫, 걸음을 잠시 주춤거렸다. 기획팀 팀장에서 졸지에 영업 1팀 주임으로 추락했으니 억울할 만도 한데, 뜻밖에도 얼굴은 싱글벙글거려서 의아했다.
"장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목소리마저 명랑했다.
"좋은 일이 있는가 봅니다."
"영업이 적성에 맞습니다. 책상머리에서 대갈통 굴리는 짓을 다시 하라면 절대 못 할 겁니다. 그렇다고 장 팀장님이 대갈통을 굴린다는 건, 아닙니다. 머리를 쓰는 거죠."
내 앞에서 몸을 사린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지만, 박 주임의 말이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었다. 낯가림은 애당초 없고, 상대가 하는 말을 덥석덥석 잘도 받아먹으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철저하게 믿는 성격이라, 영업이 체질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성격에 힘입어, 본부장이 지시하고, 닮은꼴 조 팀장이 계획한 <저성과자로 몰아내기>에 사무실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행동대장으로 나섰을 것이다.
"외근이 많아 피곤하긴 하지만, 재미에 비교할 바는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