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숨을 깊이 몰아쉬었다. 때린들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화가 풀릴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먼저 일어날게. 다음에 또 보자."
도일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카페를 나갔다. 도일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노려보면서 천천히 화를 삭였다. 도일이가 아니라 불독이었다면, 보육원 시절과 다르게 한판 거칠게 부딪혔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불독은 그저 맞고 있겠지만.
*
"조상범 팀장을 잘 알지요?"
미팅 내내 힐끔힐끔 곁눈질하던 본부장이 회의실을 나가며 물었다.
"잠시나마 같이 일했으니까, 모르진 않죠. 왜요?"
"못되게 굴었지? 아마?"
본부장은 짐짓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자네를 전략기획팀으로 다시 불러들였어. 알고 있었나?"
창고지기로 쫓아낼 때도 본부장의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터에, 이제는 생색을 내겠다? 하긴 직장인은 언제나 윗사람들의 손바닥 위를 벗어나긴 힘들지.
일찌감치 개인 물품을 옮긴 박 주임에게서 다음 날 인계인수랍시고 이것저것 넘겨받았지만, 전략기획팀의 업무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업무 건건이마다 억지로 일하는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처음부터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시작하면 뒷감당이 몇 배가 힘들었다. 박 주임이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이해할 수 없었다. 팀원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면 불협화음은 당연하고,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했다. 땜질할수록 업무는 누더기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본부장은 파악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엎드려 절받기를 바란다면 못 할 것도 없었다. 고개까지 정중하게 숙였다.
"상범이가 심성은 착한 놈인데, 아직도 껄끄러운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진 않을 테지?"
"네?"
본부장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직장 부하인데 허물없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며, 말투가 닮은꼴 조 팀장을 에둘러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니면 자신의 묵인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건가? 본부장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지도 모르니, 솔직하게 얘기하지. 내가 상범이한테 시켰어."
"네?"
묵인이 아니라 지시였다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전략기획팀에 대리로 있으면서 본부장과 부딪치는 일도 없었는데, 속된 말로 나를 제거하려고 했다고? 본부장은 언젠가 내가 알게 될 거라고 했으나, 입 다물고 모른 척하며 넘어가면, 달리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굳이 말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판단 착오였어. 전략기획팀이 이럭저럭 굴러가긴 했지만, 엉성하고, 잦은 실수가 골치 아팠거든. 그러다 상범이가 사고치고 말았지. 엘에이로 간 것도 쫓겨난 거야."
본부장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미국 지사는 엘리트 코스인데 쫓겨났다는 표현부터 이해할 수 없고, 하도급 업체들에 무리한 납품가 후려치기를 하면서도 언론플레이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도 아마추어나 빼먹는 실수였다. 그로 인해서 회사 이미지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흑마술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그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무엇보다 기획팀 팀원들의 손발이 서로 맞지 않은 영향도 있으리라.
"앞으로 잘해봅시다."
본부장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잡았다는 점을 확인하는, 혹은 지난 일은 잊으라는 의미의 악수는 거북했다. 그렇다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부장의 실토 뒤에 아직 내가 모르는 숨겨진 사실들이 웅크리고 있다는 막연한 지레짐작은 어쩔 수 없었다. 본부장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염두에 두고, 물밑 작업을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일개 대리에 불과한 나를 다시 불러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중에 내가 따로 부를 테니, 오늘은 이쯤 하지."
본부장은 복도를 힘차게 걸어갔다. 본부장의 씩씩한 걸음이 왠지 우스꽝스러웠다. 본부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를 저성과자로 몰아붙여 창고지기로 추락시킨 큰 그림을 완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일개 팀장 주제에 본부장을 상대로 보복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팀장으로 승진시켜주었다는데, 반감을 품을 수 없었다. 냉온탕을 오락가락하게 한 본부장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행동대장 역할을 한 박 주임과 황이 더없이 허접하게 보였다.
닮은꼴 조 팀장이 시킨다고 해서, 내게 귀띔조차 없이 하루아침에 안면을 몰수하고 괴롭히다니! 뒤늦게 심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시켜서 한 일이어서 죄를 묻기 어렵다고,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기 힘들었다.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어도, 기회가 오면 따끔한 맛을 보여주리라. 배알도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게 아무리 바른생활이라 할지라도 도가 넘은 짓이 아닌가.
"알겠습니다."
본부장실을 나왔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기획팀을 향해 걸어갔다.
*
처음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내 친구를 괴롭혀? 네가 뭔데? 불독이라면 참고 넘어갈 수 있지. 같은 보육원 출신이니까. 그런데 가족도 있고, 때가 되면 조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놈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 나나 불독은 그래도 아버지가 없진 않았잖아. 구실을 못 해서 그렇지만. 너는 말 그대로 천애고아 아니냐? 가진 것 쥐뿔도 없으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에 취직해 머리에 쥐 나도록 정신없이 사는데, 앞길을 막아? 울화통이 터져, 잠이 오지 않더라니까.
도일은 분에 못 이겨 씩씩거렸다.
"퇴근하는 길을 미행하다가,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가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듯이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 다짐했지. 아니면 시비를 걸다가 선빵으로 죽사발을 만들어놔야겠다고 단단히 작심했어. 누가 알겠어? 널 괴롭혀서 처맞는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작전계획까지 짰지. 묻지만 폭행이 얼마나 많냐?"
닮은꼴 조 팀장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얼굴은 물론이고 걸음걸이도 멀쩡했다. 어디에도 구타당한 흔적은 없었다. 이 자식이 뻥 치고 있네!
"미행하기 시작했지. 어느 길로 다니는지 알면, 숨어 있다가 다짜고짜 혼내주기 쉽거든. 몇 번 실패하기도 했어. 퇴근 시간에 도로 사정이 만만치 않잖아? 잠깐 한눈판 사이에 사라지는 거야. 몇 번 놓쳤어. 한 달쯤 지나서 집을 알아냈지. 한남동 으리으리한 집으로 들어가는 거야. 딱 봐도 돈 좀 있어 보이는 집이잖아. 높은 담벼락에 한강뷰가 끝내 주는 거대한 단독주택이야. 야,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똥별 달게 생겼다고 투덜거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랑 닮았다는 말이 떠오른 거야. 이거, 뭔가가 분명히 있다. 영감이 확, 오는 거야."
웃음이 입안에서 슬슬 피어올랐다. 닮은꼴이라는 것은 매일 만나 알고 있는 터라, 도일의 수작이 눈에 빤히 보였다. 닮은꼴 조 팀장이 나처럼 고아 출신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남동 단독주택에 산다는 것은 확실히 새로운 소식이었다. 닮은꼴과 한남동을 엮어, 그럴싸한 꿍꿍이를 꾸려보자는 속내가 분명했다. 그래서 유전자 검사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댄 것이고. 그렇게 연막을 친다고 귀가 솔깃해지는 내가 아니었다.
"바로 잠복수사에 들어갔지."
"네가 공무원이냐?"
"끼어들지 말고, 끝까지 들어 봐. 열흘 잠복수사 끝에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몇 명인지 알아냈지. 노인네가 아침마다 벤츠를 타고 나오고, 조금 후에 팀장이 나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긴 했지만, 진짜, 너랑 닮았더라. 백호가 왜 저기 있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니까. 중년 여자도 가끔 대문 밖으로 나오더라고. 개를 산책시키러. 처음엔 팀장 엄마인가, 의심했지. 그런데 나이가 맞지 않아. 노인네 세컨드이거나 도우미겠지."
"숨어서, 꼼꼼하게도 봤네."
"어떻게 생각해?"
도일은 모종의 계획을 염두에 둔 듯이 싱긋 윙크까지 지었다.
"뭘?"
"손잡고 클리닉에 갈 수 없으니까, 지금 엘에이에 있다고 했나? 피가 필요하거든. 내가 미국으로 날아갈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너도 참, 답답하다. 꿍꿍이가 미국에 가는 거냐? 만일 간다고 해도 피를 줄 거 같냐? 생판 모르는 남자가 찾아와서, 당신 피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네네, 어서 가져가세요, 그럴 것 같아? 너라면 주겠냐?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