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며칠 동안 조마조마 마음 졸이며 계장의 전화를 기다렸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괜스레 차량 부서에 들러 시답잖은 농담도 건넸지만, 계장은 까맣게 잊기라도 했는지 불독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얘기를 꺼내면 부담을 느낄 것 같아, 모르는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불독의 취업에 노골적으로 개입한다는 인상을 줄 경우,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아무리 친한 계장이라도. 또 눈치가 백단이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화성 물류센터 파트장의 본사 소식통일지도 모르는 터에.
"그래도 친구니까, 잘 됐으면 좋겠어."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잠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
"아니지. 내가 불독 얘기를 들으려고 만난 게 아니지. 묻는 말에 거짓말 없기다?"
라며 정색했다.
"무슨 무서운 얘길 하려고, 겁부터 주냐?"
나는 비실비실 웃었다.
"너와 얼굴이 닮았다는 팀장, 있지?"
"지금 엘에이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쌍둥이가 분명해. 틀림없어!"
"어디서 무슨 소릴 듣고 와서 장난치냐? 얘기했잖아? 유전자 검사를 했다고."
도일은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지었다.
"둘이 손잡고 병원에 가서?"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유전자 검사를 했어?"
"꽁초와 머리카락…, 그리고 내 타액."
"어디서?"
"유전자 검사해주는 클리닉에서. 우편으로 발송하면 결과지를 보내줘."
"초등학생이냐?"
"갑자기 만나자더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초등학생이라니? 유전자 검사는 과학이야. 빼도 박도 못하는."
"공신력이 있는 클리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 게네들도 결국 돈 벌자고 하는 사업이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둘이 손잡고 클리닉에 가서, 채혈하는 거야."
"누가 모르냐? 잡아먹겠다고 괴롭히는데, 손잡고 어딜 가? 어림도 없다."
도일은 입가에 엷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시간 날 때마다 뒷조사를 좀 해봤지. 생각보다 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네가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서, 뒷조사를?"
"사람 장사하면서 아주 빠삭해졌다. 미행부터 시작해서 탐문은 물론이고, 잠복 역시. 간혹 불독이 도와주기도 했고. 암튼, 도망친 동남아 애들 잡지 못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수수료가 공중에 흩어지니까."
"서론은 이만 됐고, 본론이 뭔데?"
"처음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내 친구를 괴롭혀? 네가 뭔데? 불독이라면 참고 넘어갈 수 있지. 같은 보육원 출신이니까. 그런데 가족도 있고, 때가 되면 조상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놈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어. 나나 불독은 그래도 아버지가 없진 않았잖아. 구실을 못 해서 그렇지만. 너는 말 그대로 천애고아 아니냐? 가진 것 쥐뿔도 없으면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기업에 취직해 머리에 쥐 나도록 정신없이 사는데, 앞길을 막아? 울화통이 터져, 잠이 오지 않더라니까."
도일은 분에 못 이겨 씩씩거렸다.
"퇴근하는 길을 미행하다가,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가면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듯이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 다짐했지. 아니면 시비를 걸다가 선빵으로 죽사발을 만들어놔야겠다고 단단히 작심했어. 누가 알겠어? 널 괴롭혀서 처맞는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작전계획까지 짰지. 묻지만 폭행이 얼마나 많냐?"
닮은꼴 조 팀장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 얼굴은 물론이고 걸음걸이도 멀쩡했다. 어디에도 구타당한 흔적은 없었다. 이 자식이 뻥 치고 있네!
"미행하기 시작했지. 어느 길로 다니는지 알면, 숨어 있다가 다짜고짜 혼내주기 쉽거든. 몇 번 실패하기도 했어. 퇴근 시간에 도로 사정이 만만치 않잖아? 잠깐 한눈판 사이에 사라지는 거야. 몇 번 놓쳤어. 한 달쯤 지나서 집을 알아냈지. 한남동 으리으리한 집으로 들어가는 거야. 딱 봐도 돈 좀 있어 보이는 집이잖아. 높은 담벼락에 한강뷰가 끝내 주는 거대한 단독주택이야. 야, 이거 잘못 건드렸다간 똥별 달게 생겼다고 투덜거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너랑 닮았다는 말이 떠오른 거야. 이거, 뭔가가 분명히 있다. 영감이 확, 오는 거야."
웃음이 입안에서 슬슬 피어올랐다. 닮은꼴이라는 것은 매일 만나 알고 있는 터라, 도일의 수작이 눈에 빤히 보였다. 닮은꼴 조 팀장이 나처럼 고아 출신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남동 단독주택에 산다는 것은 확실히 새로운 소식이었다. 닮은꼴과 한남동을 엮어, 그럴싸한 꿍꿍이를 꾸려보자는 속내가 분명했다. 그래서 유전자 검사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어댄 것이고. 그렇게 연막을 친다고 귀가 솔깃해지는 내가 아니었다.
"바로 잠복수사에 들어갔지."
"네가 공무원이냐?"
"끼어들지 말고, 끝까지 들어 봐. 열흘 잠복수사 끝에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몇 명인지 알아냈지. 노인네가 아침마다 벤츠를 타고 나오고, 조금 후에 팀장이 나오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긴 했지만, 진짜, 너랑 닮았더라. 백호가 왜 저기 있지? 순간적으로 헷갈렸다니까. 중년 여자도 가끔 대문 밖으로 나오더라고. 개를 산책시키러. 처음엔 팀장 엄마인가, 의심했지. 그런데 나이가 맞지 않아. 노인네 세컨드이거나 도우미겠지."
"숨어서, 꼼꼼하게도 봤네."
"어떻게 생각해?"
도일은 모종의 계획을 염두에 둔 듯이 싱긋 윙크까지 지었다.
"뭘?"
"손잡고 클리닉에 갈 수 없으니까, 지금 엘에이에 있다고 했나? 피가 필요하거든. 내가 미국으로 날아갈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너도 참, 답답하다. 꿍꿍이가 미국에 가는 거냐? 만일 간다고 해도 피를 줄 거 같냐? 생판 모르는 남자가 찾아와서, 당신 피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네네, 어서 가져가세요, 그럴 것 같아? 너라면 주겠냐? 주머니에 넣어두는 것도 아닌데?"
"그거는 차차 생각할 문제고, 우선 네가 동의해 준다면 일을 추진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해?"
"유전자 검사를 또 하겠다고?"
"당연하지. 공신력 있는 클리닉에. 부모도 찾고, 부잣집 도련님도 되고. 얼마나 쌈박한 계획이나? 팔자를 새로 쓰는 거지. 천애고아가."
"한심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네가 봤다는 노인네에게 전화해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냐고 묻는 게 빠르겠다. 미국 가면 돈 버려, 시간 버려, 그것뿐이냐? 쓸데없는 일에 신경 써, 정력 낭비에 정신까지 피폐해져. 알겠냐?"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잖아?"
"왜?"
"넌 갓난아이 때 보육원 입구에 버려졌다며? 누가 버린 짓을 실토하겠어?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해도. 버린 것하고, 잃어버린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 유기는 의도적이지만, 분실은 의지가 개입하지 않았어. 듣기가 좀 거북하겠지만, 사실은 사실이잖아?"
아픈 상처는 불문율처럼 입 밖으로 서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불쑥 꺼낸 도일의 말에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깊은 새벽, 어스름 속에서 보육원 정문을 서성거리는 얼굴 없는 부모가 더욱 미워졌다. 지금껏 살면서 마음 저 깊은 곳에 묻어두었는데, 이런 식으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불쑥 나타날지 정말 몰랐다.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아무도 모르게 끄집어낼 때마다 꺼이꺼이 울음을 삼켰었는데, 벌건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이 많은 카페에서 도일이가 꺼낼 줄은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옛날 얘기할 생각은 없었어. 말하다 보니까, 실수로…."
도일은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난 뒤, 고개를 숙이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불독이 채용된다니까, 꼬장이냐?"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어릴 때, 보육원의 궁핍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해도 마지노선을 넘었다.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라도 지나가면 대부분 웃으면서 얘기하는 추억이 되지만, 결코 그렇지 못한 일들도 있었다. 알고 있더라도 모른 척, 절대 입 밖으로 내놓아서 안 되는 일들도 있었다. 더구나 당사자 앞에서는.
도일이가 아니라면 벌써 주먹다짐하고도 남았다. 송진을 잔뜩 머금은 장작불같이 삽시간에 치솟아 오르는 악감정을 억지로 꾹꾹 눌러 가라앉히면서 도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때리면 잘못을 알아, 군말 없이 맞을 도일이었다.
"미안하…, 다. 정말. 내가 잠시 정신머리가 나갔나 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