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으니 70년대 중반쯤이다. 예천군 감천면 벌방 사갑리. 백여 가구 정도 지붕 낮은 농가들이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벌방은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이 고즈넉해서, 도시화의 광풍에서도 한발 비켜서 있으니 시간이 멈춘 공간이었다.
주민들은 해님과 같은 생활 리듬에 익숙해져 있고 마을을 관통하는 비포장도로에서 흙먼지 날리며 하루에 두 번씩 달리는 낡은 버스를 빼면 풍경은 오직 계절 따라 바뀔 뿐이었다. 물론 뒷산 늘 푸른 소나무를 빼고. 그리고 또 하나, 마을 앞을 흐르는 석개포. 여름 낮이면 동네 아이들이 벌거벗고 물놀이에 열중하고 밤이면 집집에서 여인들이 조용히 석개포로 내려와 비밀스럽게 몸을 씻었다. 간혹 짓궂은 청년 몇몇이 풀숲에 엎드려 고개 바짝 치켜들고 두 눈을 부라리곤 하지만 그때마다 달빛은 그들의 열망을 외면했다.
비무장지대(DMZ) 땅굴 발견이나 백건우 납치 미수나 이리역 폭발 사고는 주민 누구에게도 흥미 끌지 못했고 변함없이 달님이 고개 내밀던 조용한 여름, 찌르찌르릇 찌르레기 소리가 잦아드는 초저녁이었다.
“준호가 농약을 마셨나베!”
“마누라도 마신 모양이데. 대체 뭔 지랄들이여!”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도 사람 한 명 죽지 않았는데 이게 무슨 변고여?”
“부부 싸움했을까? 그래도 그렇지, 핏덩이 둘을 남겨놓고.”
“부부 싸움이면 우린 골백번 마셨어!”
벌방의 소문들은 1km 남짓 떨어진 사갑리 마을에도 단번에 도착했다. 사갑리에 사는 노모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이미 얼굴은 놀라움과 황망함과 눈물로 뒤범벅되었다.
“아이고. 넷째야, 넷째야. 눈 좀 떠봐라.”
손가락이 세 개뿐인 오른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노모는 울부짖었다. 주민들 웅성거림도 노모의 애절한 외침도 달님은 하늘 높이 떠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경찰이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정오 무렵이다. 그는 작은 몸집에 유난히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마당과 안방을 둘러보는데 쿠데타 사열을 받던 누구와 닮은꼴이다. 몸집과 몸짓이며 경상도 특유의 악센트까지.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안방 농약병을 확인하고 숨 없는 시체 두 구를 확인하고 고개를 잠시 끄덕이다가, 여전히 애절한 울음 쏟아내는 노모를 얼굴 찡그리며 쏘아보다가 돌아갔다.
“혹시 빚이 있어서가 아닐까?”
“작년에 논 열 마지기 살 때도 빚이 없었는데?”
“대구서 돈 벌어서 왔다니까, 이 사람들아. 정미소 차릴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빚은 무슨 빚!”
“그거야 모르지. 우리한테 빌리지 않았으면 대구 살 때 알던 사람한테서 빌릴 수도.”
“부부 싸움이라니까. 여편네가 오죽 까탈스러웠나! 동네 아이들 아이스께끼 하나 주는 것도 못 봤다니까. 준호야 사람 좋으니 넙죽넙죽 주고. 장사하는 건지 귀여워 아끼는 건지 헷갈릴 정도 아니었나?”
전국에 흩어져 살던 자식들이 부랴부랴 노모 옆으로 모였다. 슬픔과 분노는 항상 살아남은 자의 몫, 남겨진 재산도 당연히. 삼일장 치르는 장례를 마치고 와룡면 동막골 선산에 산소 마련하고 산소에서 보이는 백부님 집에 다들 모였다.
“내가 큰어미니까 맡아야지, 어쩔 수 있니껴?”
백모가 먼저 운을 뗐다. 아버지를 비롯한 도시 생활자들은 말이 없다.
“엄마가 아직 정정하니까 애들 키울 수 있을 거예요.”
고모가 한참 지나서 슬그머니 노모를 앞세웠다. 요컨대 후견인 싸움이다. 대구에서 무슨 일을 해 돈을 벌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준호는 형제 중에서 가장 부자였다. 다른 형제들은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도시 물가 감당하느라 도시 집값 버티느라, 눈코 뜨지 못한 형편이었다.
“아이 둘, 사갑리에 들어가 산다고 해도 돈 관리는 어메가 하기 좀 그렇잖니껴?”
백모가 노모를 보았다, 노모는 맏며느리의 눈길 피해 빗줄기 멈춘 질퍽한 마당 수없이 찍힌 발자국들을 내려다보았다. 악착스럽다는 소문이 자자한 대구 숙모는 입술 굳게 다물고 방바닥 장판만 뚫어져라 쏘아보고 있었다. 모두들 사는 형편이 바빠 준호에게 돈 빌려주었다는 뻥도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서로들 알고 있었다.
“준창이도 있으니까 애들 돌보는 건 문제없겠지요.”
아버지가 어깨 움츠리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노총각 막냇삼촌을 가리켰다.
“도련님 장가는 어떻게든 내가 해본다고 하지 않았니껴?”
백모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아버지는 마지못해 고개 끄덕였다. 새댁인 고모 옆에 고모부가 목이 타는지 쩝쩝 입맛 다시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해님은 어제와 다름없이 명랑했다.
현대아파트 사건은 이들에게 먼 나라 이야기일까. 오탁근 검찰총장의 지시로 파헤치기 시작한 현대아파트 사건은 정치에 번져 치욕적인 스캔들로 불붙었다. 현대그룹의 한국 도시개발 주식회사가 뇌물∙투기 등의 목적으로 각계각층에 특혜 분양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사건은 국민의 분노를 크게 샀다. 사건 수사 결과 총 6백61명이 특혜 분양받았고 공직자 1백90명, 언론계 34명, 교직계 16명, 법조계 7명, 금융기관 15명, 특수기관 21명, 기타 등이며 국회의원 6명, 차관급 2명, 대사 3명도 있었다. 곽후섭 서울시 제2부시장, 정몽구 한국 도시개발 사장 등이 구속돼 각각 3년∙2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도시 생활자들은 아파트는 고사하고 슬레이트 지붕 낮은 블록집도 사글세로 전전긍긍하는 헐벗은 생활을 노모가 생판 모르지 않지만 애절한 목소리는 먼저 떠난 넷째 부부보다 그들이 남긴 남매에 닿아 있었다. 그렇다고 맏며느리 눈치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꽃가마 타고 시집올 때 잎담배 허리춤에 차고 있던 억센 여자다. 방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침묵과 함께 무겁게 내려앉았다. 대낮인데도 뒷산 어디쯤에서 시작한 올빼미 울음이 질퍽한 마당에 부슬비처럼 내려앉았다.
“애들 성인 될 때까지 큰형수가 맡는 게 도리라고 봅니다.”
노총각 막냇삼촌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안도하는 백모의 엷은 입술.
남매의 첫째는 딸이고 둘째는 아들이다. 나는 그들의 유년 시절을 알지 못한다. 넷째 부부가 이승을 떠난 뒤 벌방에 내려갈 수 없었다. 가뜩이나 입이 두 개나 늘었는데 나까지 꼽사리 낄 수 없었다. 월곡동 산동네 비좁은 골목을 쏘다니거나 미아삼거리 대지극장까지 또래들과 진출해 극장 간판을 신기하게 올려다보곤 했다.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첫째와 둘째가 와룡면 동막골 백부를 간혹 찾아간다는 것뿐, 그들의 주머니 사정은 알 수 없었다.
세월이 징검다리 건너듯 껑충껑충 뛰어다녀 대학에 입학하고 불현듯 찾은 사갑리에서 둘째를 만날 수 있었다. 노모는 갈수록 몸집 커가고 차곡차곡 쌓이는 완력을 감당할 수 없던지 오냐, 오냐 키운 탓에 어느 사이 사갑리 말썽꾼으로 완벽하게 변신한 둘째는 나이 차이 얼마 나지 않는 백부님 첫째 아들과 어울려 안동 시내를 쏘다니며 말썽거리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사촌 사이라 뭐라 훈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아니 훈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을 알지 못했다.
조선대학교 교지(校誌) 편집장 이철규가 5월 3일 택시 타고 MT 장소로 가던 중 경찰관 검문을 받자, 산속으로 피해 달아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되었다가 5일 뒤 인근 저수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 아니나 다를까. 사체는 보통의 익사체와 달리 일부가 심하게 변색해서 고문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합리적이었다.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무렵 광주 민주항쟁을 체험한 이철규였다. 애당초 산속으로 달아났다는 경찰의 발표부터 국민을 상대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게다가 실족해 익사할 깊이가 겨우 허리 높이의 하천이었다.
학부 졸업하고 석사과정 밟을 때 밥상머리에서 아버지가 넷째 부부의 둘째를 얘기하며 끝내
“교도소에 있다는구나. 그 녀석을 어쩔꼬?”
혀를 끌끌 찼다.
“왜요?”
“도둑질했다는구나. 예전부터 손버릇이….”
마실 가듯 훌쩍 떠난 넷째 부부가 먼저 떠올랐고 와룡면 동막골 백부님 집에 두런두런 모여 앉아 남긴 재산 얘기하던 아버지의 형제들도 떠올랐다. 재산의 행방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첫째가 결혼할 때 얼마 쥐여주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넷째 부부의 무책임이었다, 핏덩이 자매에 대한. 숨이 붙어 있다고 삶이 살아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욕심은 많고 돈은 없고. 녀석도 참 불쌍하구나.”
“그렇다고 다들 도둑질하나요, 어디?”
얼굴도 보지 못한 조선대학교 이철규와 철딱서니 없는 둘째가 겹치자 씁쓸한 입 웃음을 지었다. 죽어도 살거나 살아도 죽거나. 다행스러운 점은 첫째는 원만한 남자 만나 나쁜 소문 없이 이럭저럭 살고 있으나 늘 동생 걱정에 골머리를 앓는다는 것. 어쨌거나 첫째도 동생 때문에 친척들 눈치 볼 수밖에 없는 터였다. 변함없이 달님이 고개 내밀던 조용한 여름. 찌르찌르릇 찌르레기 소리 잦아드는 초저녁을 기억하고 있을까. 방안 비어 있는 농약병도.
허름한 술집과 학교와 잠자리를 지치지 않고 순례하는 하루들이 화살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인천 시절도 짧은 가을처럼 지나갔다. 대구 숙모가 돌아가시고 아들딸 둘 낳은 막냇삼촌이 마산 희연병원에서 돌아가시고 둘째가 강단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딸을 보았다는 것도. 그리고 또 교도소. 몇 년 뒤 백부님이 돌아가시고. 나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두 눈 벌겋게 뜨고 찾기 시작했지만 늘 그렇듯이 성과 없이 절망과 자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우리는 정말 끝이 있는 길을 걷고 있는 걸까. 죽어라 살아도 늘 제자리인 뫼비우스의 길을 걷고 있는 걸까. 그나마 모죽(毛竹) 이야기가 위안이다. 아파트라 들리지 않는 귀뚜라미 소리 어디서 얻어들을 수 있을까. 첫째는 무탈하게 지내고 있을 게 분명 하나, 둘째는 강단 있는 아내 옆에서 비로소 제 아버지 앞에서 얌전하듯 고분고분 말 잘 들으며 살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쯤 또 교도소?
가을이 서서히 깊어 간다. 아침저녁으로 껄렁껄렁한 지난겨울의 바람이 작년에 왔던 각설이처럼 놀이터며 아파트 동과 동(棟) 사이의 좁은 길을 시끌벅적 쏘다닌다. 그때마다 어둠 속에서도 나뭇가지들은 일제히 아우성친다. 나무들도 겨울을 기억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며칠 사이에 무성한 푸른 잎들이 드론처럼 땅에 일제히 착륙할 것이고, 살기 위해 오로지 사는 사람들을 향해 온 땅의 점령군으로서 가을을 선포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겐 첫 가을이고, 다른 어떤 이들에겐 마지막 가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