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길이 날뛰었다. 그따위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며 대꾸하면서도, 끔찍한 27개월 12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눈앞이 깜깜했다. 징집관(徵集官)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급기야 비웃음을 입안 가득 담고서,
“법이 바뀌었다는 걸, 모르나? 제대한 부대로 신병 입대야.”
라며 약 올렸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말년병장이었는데, 이등병이라니! 딱히 괴롭힌 부하 소대원은 없지만, 그들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꺼림칙했다. 고참이 되자 성질머리 드러내는 놈이 저녁 점호가 끝나자마자 화장실 뒤로 불러내 주먹을 명치에 꽂을지 모를 일이고, 페치카에서 라면을 끓여오라며 귀찮게 할 수도 있었다. 군인들 사이에서 선행(善行)이 해코지로 돌아오는 일은 흔했다.
“그런 개떡 같은 법이 어디 있어요! 절대로! 절대로 재입대할 수 없어요!”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아무리 엉망진창으로 세상이 망가져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법이라며 악다구니를 써도, 그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외통수에 걸렸다는 생각에 울화통이 치밀어올랐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썹을 곧추세우며 눈에 불을 켰다. 어둡다. 창문으로 별빛이 들어왔다. 형광등이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방안을 찬찬히 둘러본 뒤에 목덜미로 흐르는 식은땀을 훔쳤다. 새벽빛이 여리게 피어나고 있었다. 거실로 나와 냉장고를 열고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재입대라니. 지독한 악몽이었던 시절이 며칠 전이라는 식으로, 세월이 무심하다는 투로 설레발치고 싶지 않다. 태어나기 전부터 그러했고, 죽은 후에도 무심할 터이니. 숲되미산에서 산화(散花)한 이들이나 살아남은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여름 땡볕에 썩어가는 살점들과 서럽도록 희디흰 뼈들이 드문드문 드러난 시체들 너머로 낙동강은 가뭄으로 말랐을 터, 도강(渡江)을 감시하는 경계병의 눈빛은 날카로웠을 것이다. 일본군 군기가 충만한 지휘관의 어설픈 판단으로 중대 병력이 몰살당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경계병은 피아(彼我) 구별이 어려웠을 터였다. 자신의 목숨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현실은 수억 년을 반복했다. 목숨 앞에서 이념은 언제나 천덕꾸러기였다. 수시로 얼굴을 바꾸었고, 욕망과 탐욕에 따라 유불리를 결정했다.
군수물자를 지게에 짊어지고 한 걸음씩 산정(山頂)을 향해 힘겹게 올라온 노무자에게서 간간이 들을 수 있는 정치에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으나,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을 것이다. 초저녁부터 집요하게 달려드는 모기떼에게 피 빨리는 일과 뭐가 다를까, 물음표를 던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경계병은 좌표를 잃은105mm 포격과 총격 사이에서, 찰나에 찾아오는 정적 속에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념을 위해 사람을 죽어야 하는 처지를 저주했을지도.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척후병은 어김없이 피비린내의 고지전(高地戰)을 불러왔고, 다음 끼니때까지 살아남기 위해 경비병은 매캐한 화약 냄새 속에서 정신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잔인한 8월의 밤은 멈추지 않았다.
“이봐! 저게 뭐지? 꿈틀거리잖아?”
“어디?”
“저 아래, 나무 뒤에서 움직이지 않아?”
달빛도 없는 밤, 숲되미산 정상은 코 고는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왔다. 바람에 실린 시체 썩는 냄새가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너무 예민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아. 낮에 봤던 그놈이겠지.”
“그런가?”
“오마니, 내래 집에 꼭 돌아가겠슴다. 그 편지를 손에 쥐고 죽은 놈 말이야.”
“창자를 쏟아내고 죽은 놈?”
“삵이 파먹고 있을지도 모르지.”
한참 후에야 구름에 가려진 달이 나타났다. 달빛만으로도 숲되미산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사과나무 과수원으로 물러선 놈들이 언제 다시 능선을 기어오를지 몰랐다. 방어선이 뚫리면 대구가 위험해지기에, 일본군 군기로 옥쇄(玉碎)하라는 지휘관의 닦달이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경계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고향집 마당에서도 소나기처럼 내리던 그 별빛을 몸으로 느끼는 순간, 귀를 뚫는 엄청난 굉음에 이어 왼쪽 어깨가 따뜻해졌다. 굉음은 쉬지 않고 들려왔고, 참호 안으로 쏟아지는 별빛들, 포탄들. 경계병은 떨어져 나간 왼팔을 보면서 제 자리에 꼬꾸라졌다. 어깨뼈에서 붉은 피가 날개처럼 솟구쳤다.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은 간신히 붙잡아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머니, 집으로 꼭 돌아가겠어요.”
경계병의 죽음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숱한 시체의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그 밤, 숲되미산에 인공기가 펄럭거렸다. 더듬어 보면 그런 경계병이 한두 명이었겠나? 전쟁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모르는 일본군 특유의 반자이(ばんざい) 정신, 또는 가미카제(しんぷう) 정신으로 무장한 지휘관이 한두 명이었겠나?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반자이와 가미카제를 요구하면서 자신은 총소리조차 희미한 후방 깊숙한 야전 천막 안에서 참모들에게 둘러싸여 인근 학교에서 뜯어온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았나. 군번도 없는 학도병을 숲되미산 재탈환에 집어넣을 궁리를 하면서. 죽음은 병사에게, 전공(戰功)은 지휘관에게 주는 것이 오늘날까지 덕목이 아닌가. 그것이 과연 역사인가?
“재입대라고요?”
“시니어 부대를 창설할 예정이야.”
악몽은 현실이었다. 징집관은 한 건 했다는 만족감으로 밝게 웃었다.
“의식주 해결에, 용돈까지 두둑하게 챙겨 주는데, 병력 부족을 메꿔야 할 게 아니야? 탑골 공원에서 장기 두거나 잔술에 시시덕거리는 것보단 낫잖아? 훌륭한 아이디어지?”
눈을 치켜뜨고 징집관을 쏘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또 봐도 징집관은 이목구비가 없다. 정말, 미쳐버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