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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따져도 성급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이제 와 허겁지겁 주워 담는 짓도 마땅찮았다. 예상과 달리 빗나갔지만 밀어붙이는 길만 남았다. 여기서 쭈뼛쭈뼛 주춤거렸다간 죽도 밥도 아니다. 심심해서 장난친 거야. 우정을 잠시 흔들어 본 거야. 좀 짓궂었지? 미안한 척하면서 서둘러 둘러대면 나만 우습고 실없는 놈이었다. 신뢰를 깡그리 까먹고 모임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최악이었다. 머릿속 계획은 항상 어긋나게 마련이라 지나치게 자책할 필요는 없었다.
희라는 예상대로 덤덤하게 받아들이지만 민수가 유복자의 아들이라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바락바락 달려들 줄은 몰랐다. 여명학교에 다닐 때 사람들 앞에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늘어놓을 때도 대놓고 불쾌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속으로 어떤 판단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어도 웃는 얼굴로 잘 왔다며 열심히 살라고 어깨를 툭툭 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들 탈북 경험이 있었다.
그들과 달리 민수는 나와 대척점에 서 있었다. 내밀한 사생활까지는 아니더라도 주고받는 영향이 있었다.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현충원에 누워 있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헛짓거리로 만드는 불효라고 믿을 터였다. 민수 아버지가 힘겨웠다 해도 혜산의 삶만큼은 아닐 것이다. 노파심에 국군이었다가 인민군으로 제대한 할아버지 얘기를 했음에도 민수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희라를 염두에 둔 행동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운동회인데 와야지. 그동안 뜸했잖아? 꼭 와야 해. 보고 싶단 말이야.”
지아의 전화였다. 일주일 전부터 닦달이었다. 하나원을 졸업하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갔던 향우회는 한때 놀이터였다. 탈북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자유로웠다. 거리를 걷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낯섦은 보면 볼수록 신기했지만 사람들 속내는 날이 갈수록 지레짐작조차 어려웠다. 관계 맺기가 힘겨울 때마다 향우회에 의지했다. 얼굴과 이름과 성별과 나이만 다를 뿐이지 향우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엇비슷한 경험을 한 터라 마음은 편안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행동이든 금방 이해했다. 그들과 나누는 공감대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힘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면 마음은 여전히 압록강 강변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향우회 사람들과 어울리면 서울인지 혜산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민수에게 다가섰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마음 밑바닥까지 완전히 바꿀 수 없더라도 노력해야 했다. 내가 서울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싶었다. 지아의 간절함이 마음에 닿아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오피스텔 원룸을 나와 전철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행사 장소에 도착했다. 늦었다. 지아는 넓은 운동장에서 이어달리기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바통을 건네주고 몇 걸음 걷다가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어릴 때 체력이 평생 간다는 말은 맞았다. 먹거리가 변변찮아 얼마 뛰지도 못하고 지쳤을 것이다. 개마고원 잎갈나무 숲에서 토끼몰이하느라 달음박질하던 나도 그랬으니까.
“오빠. 얼굴 보기 힘들어서 어떡해. 바쁘더라도 꼭 오지 그랬어?”
지아는 여명학교에서 만났다. 고향이 강원도 이천이었다. 이모가 혜산에서 살았다고 했다. 부모와 함께였다고 해도 어린 나이에 이천에서 압록강까지 걸었다고 하니 악바리였다. 내내 산길을 걸었다는 허풍이 섞여 있어도 이천에서 혜산까지는 어른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먼 거리였다. 엄마 친정 일가족과 함께 강을 건넜다고 했다. 장춘에서 삼 년을 숨어 살았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일이 생겨서. 잘 지냈어? 별일 없고?”
“나는 단순해서 눈물 흘리면서 씩씩하잖아? 생각 많은 오빠가 걱정이지.”
“무슨 일이 있구나?”
지아의 얼굴에서 찰나에 사라지는 슬픔을 보았다. 나 역시 화장실 거울에서 숱하게 보았던 익숙한 표정이었다. 나처럼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했나. 하여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불안했다. 배타적인 태도에 둘러싸이면 주눅 드는 것은 당연하고 어쩌다가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짜증이라도 내면 몇 곱절 더해 화풀이당하거나 노골적으로 손가락질당할 터인데 제아무리 악바리라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서울 사람들 속에서 외딴섬으로 사는 일은 고통이었다. 솜털 같은 정서적 교감조차 없이 외톨이로 지내다 보면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나 친구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이웃 사람들을 향한 불만과 앙심의 칼날만 갈 것이고 급기야 불행한 끝을 피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직장에서 쫓겨나 넉 달 뒤 임대아파트 거실에서 고독사한 향우회 총무를 알고 있었다. 뻐드렁니를 한껏 드러내며 사람 좋은 호탕한 웃음을 자주 내지르던 총무는 고향 산천이 자꾸 눈에 밟힌다고 했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와 혈혈단신이었다. 전기와 수도는 끊겼으며 냉장고는 텅텅 비었고 머리맡에는 소주병만 열댓 개였다. 혜산으로 똘똘 뭉친 향우회여도 총무는 쉽게 잊혔다. 향우회 지도부는 총무의 죽음을 개인적인 일로 몰아갔지만 직책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뒷말이 떠돌았다. 총무의 선택은 향우회를 배신하는 짓이었다.
<회장은 전체 회원을 위하여, 전체 회원은 회장을 위하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짓뭉갰다. 의도한 죽음이었다. 총무의 고독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했다. 살기 위해서 날마다 죽도록 일하는 사회에 스스로 왔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등 뒤에 남겨 놓은 혈육과 이웃들과 조상들이 뿌리내린 땅에 대한 죄책감. 그 땅에 살면서 겪었던 희로애락을 밤마다 꿈꾸는 나 홀로의 현실. 가까스로 혜산을 벗어났지만 다시 돌아와 버린 이념 조직의 총무라는 아이러니. 바람이 불어와 지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날 스토킹하는 것 같아. 신경 쓰이고 무서워.”
지아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열불이 났다. 고향을 떠나왔다고 함부로 취급당하는 익숙한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지아를 괴롭히니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업신여김을 당하면 참고 견디겠지만 여동생으로 여기는 지아가 무서워하니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서울 여자도 걸핏하면 일방적으로 당하는데 이천에서 걸어와 압록강을 건너왔다고 만만하게 보는 모양이었다. 어느 땅에서 살든 여자는 여자였다. 지아는 얼마나 서러웠을까. 생각하니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누구야? 어떤 놈이야?”
“저기 온다. 오빤 못 들은 척해.”
지아가 빠르게 말했다. 그녀가 고개 돌려 가리킨 쪽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향우회 사람들이 몰려 있는 천막 아래에서 한 사내가 걸어왔다. 향우회 사람? 이러면 얘기가 달라졌다. 지아의 당황하는 표정과 걸어오는 사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사내의 얼굴을 보자 황당했다. 명규였다. 동상 청소를 함께하면서 얼굴을 익혔고 무엇보다 원호의 단짝이었다. 익숙함과 분노가 뒤섞여 마음이 뒤숭숭했다.
“반갑다. 방대야. 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정말 왔네?”
명규는 히죽히죽 웃었다. 녀석의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 피어났다. 민수를 만날 때와 달리 경계심이 가슴에 가득 차서 떨떠름했다. 원호의 단짝이라 데면데면하게 지냈고 벌써 십여 년 전이었다. 앞에 선 명규를 내내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다. 다만 어떻게 혼쭐 내줘야 하나, 궁리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고향에서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여자를 함부로 대하다간 경찰서에 붙잡혀 간다는 협박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스토킹은 애당초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내다움이 여자에 대한 배려가 아니고 오로지 직진과 박력이라고 믿는 혜산의 분위기에 젖어 있을 터였다. 남자는 하늘이라는 믿음이 강해 여자보다 남자가 서울 생활에 적응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녀석이 혹시라도 수애 소식을 알까 싶어 조심스러웠다.
“언제 왔어?”
“하나원 나온 지 두 달 됐으니까. 앞으로 너한테 많이 배워야겠다.”
“원호는?”
“그 새끼 두들겨 맞아 뒈졌어.”
뜻밖이었다. 보안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나름대로 권력 냄새를 놀라울 정도로 잘 맡았는데 이해할 수 없었다. 원호의 셈 빠르고 영악하고 능글맞은 수완이라면 외통수로 몰리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누구를 상대하든 항상 약점을 쥐고 있었다. 보안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겁하고 야비하지만 원호의 생존방식이었다. 녀석이 여러 이웃을 보안서에 고자질한 짓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웃은 철저한 수색을 통해 밀수가 들통 나서 밤사이에 식구들 모두 사라졌다. 교화소로 끌려갔을 거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왜?”
“수애를 두어 달 데리고 놀다가 되놈한테 팔아버렸어. 소문이 쫙 나서 보안서로 끌려갔지. 총알도 아깝다고.”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 단짝인데 원호의 비참한 죽음을 생판 모르는 사람을 얘기하듯 하니 놀라웠다. 보나 마나 수애를 팔아넘길 때도 한통속이었다.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었다. 믿어도 될까. 원호의 죽음이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안쓰러워한다거나 혹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어야 하지 않나. 못된 짓을 일삼더니 당연한 결과라는 식으로 말해야 하지 않나. 재빨리 태세를 바꾸는 처세술에 슬픈 헛웃음이 나왔다.
강을 건너서 능선 중간쯤의 나무 기둥에 숨어있을 때 보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골짜기 안쪽 마을로 걸어가는 젊은 여자의 축 처진 어깨와 검은 절망이 뚝뚝 떨어지는 느린 걸음걸이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기회가 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숨이 가까스로 붙어 있을 때까지 패주고 싶었다. 남을 눈물 흘리게 하면 어떻게 피눈물로 되돌아오는지 철저하게 깨우쳐 줘야 했다. 서울은 혜산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지아를 괴롭혔지?”
대놓고 말하자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눈길을 피했다.
“아니, 그냥, 뭐, 어쩌다가.”
녀석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손바닥을 맞대 비벼가며 슬쩍슬쩍 눈치를 살폈다. 나는 당장 잡아먹을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원호에 대한 분노도 담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살이 오르긴 했으나 혜산에서 보았을 때처럼 여전히 맷집 없는 말라깽이였다. 한 주먹이면 비명조차 어설프게 내지르면서 나가떨어질 터였다. 권력에 기가 막히게 달라붙어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놈에게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없는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주먹을 불끈 쥐자 녀석은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살폈다. 어깨를 움찔거리자 화들짝 놀랐다.
“널 감시했던 건 어쩔 수 없었어. 미안해.”
녀석은 느닷없이 무너져 내려 무릎을 꿇었다. 나는 입을 반쯤 벌리고 어이없는 엷은 웃음만 지었다. 명규였구나. 집 근처에 숨어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눈빛이. 장마당 여기저기 싸돌아다닐 때 등 뒤로 느꼈던 불길함이 녀석이었구나.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호가 나와 필수에게 시켰어.”
“필수는 누구야?”
“내 친군데 넌 몰라.”
집을 감시하던 낯선 얼굴이 필수였구나. 너럭바위 뒤에 숨어있을 때 길에서 들려오던 인기척이 필수와 명규였다. 수애의 집을 플래시 불빛으로 샅샅이 핥던 놈들도 원호 일당일 터였다. 수애를 차지하려고 원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싫증 나서 수애를 되놈에게 팔아?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불끈 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향우회고 나발이고 한바탕 매타작해야 했다. 지아가 슬그머니 내 주먹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내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흥분에 씩씩거리던 숨소리를 짧게 끊어가며 낮추었다. 명규는 바짝 겁나서 어깨를 한껏 웅크렸다. 고개 숙여 내 눈길을 피했다. 지아가 없다면 한바탕 싸웠을 것이다.
“이제 가봐. 다신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를 억지로 보내고 나서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녀석의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도 진정해야 했다. 평정심을 잃으면 녀석에게 언제 주먹을 뻗을지 몰랐다. 향우회에 퍼질 소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해코지하진 않았어.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훔쳐보는 게 더 끔찍한 거야.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두 번 다시 지아를 스토킹 하지 말라고 할 참인데 명규는 뜻밖의 말을 했다.
“보안원이 그렇게 하라고 했어. 너무 멀리도 가까이도 있어서 안 되고 감시하는 걸 눈치채지 않게 하라고.”
“거짓말 아니지?”
“원호를 때려죽인 보안원은 무서운 사람이야. 분명해. 보안원이 두 집 살림한 걸 원호가 불어버리면 당연히 보안서에서 쫓겨나고 당원증도 빼앗길 테니까. 수애를 되놈에게 팔았다는 소문이 퍼지니까 이때다 싶어 꼬리를 자른 거지. 생각해 보면 강을 건너는 것도 인신매매도 원호가 혼자서 할 수 없어. 줄이 없잖아. 아는 대방도 없고. 보안원이 뒤에서 꾸민 수작이야.”
명규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보안원은 그토록 잔인하고도 남았다. 분노보다 슬픔이 애잔하게 밀려왔다. 운동장 위의 짙푸른 하늘에 흰 구름 몇 개가 마음 둘 곳 없는 나그네처럼 떠다녔다. 잎사귀 사이를 비집고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따가웠다. 왁자지껄 함성이 천막 쪽에서 들려왔다. 지아의 요구를 흘려듣지 않고 향우회에 온 것을 후회했다. 몰라도 좋을 소식들이 마음을 거칠게 후벼 팠다.
“원호가 끌려갔다는 얘길 듣자마자 바로 튀었어. 나는 살아야 하잖아. 경비대 초소장한테 백 달러 더 얹어주고 겨우 강을 건넜어. 요즘은 인민폐도 안 받아.”
빈집털이는 당연하고 장마당 장사꾼을 괴롭히는 못된 짓을 일삼으며 달러를 모았을 것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달러면 더 싸게 살 수 있었다. 인민공화국 원화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위안화로 거래하는 편이었다. 믿을 것이라곤 달러뿐이라 조상 모시듯 하는 흐름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아직 얼떨떨해. 어떻게 살지 무얼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네가 도와주면 좋겠는데.”
어이없었다. 나를 꼼짝달싹 못 하게 옭아맬 궁리에 몰두해 호시탐탐 감시하던 놈이 도와달라고? 두꺼운 낯짝이어도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미운 정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뻔뻔하다 못해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린 멍청이 행세를 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정착금 받은 것 그대로 있어. 네가 써도 돼. 도와주면.”
“싫어.”
단칼에 잘랐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녀석을 향한 복수심이 치솟아 애당초 불가능했다. 꼴도 보기 싫었다. 향우회도 정나미 떨어졌다.
“앞으로 지아 근처에도 가지 마. 경고야.”
“알았어. 그런데 정말 안 될까? 사람들 말로는 네가 우리 중에서 적응 잘했다고 하는데 부탁해. 자취한다고 들었어. 난 임대아파트에 살아. 같이 있어도 돼.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좋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들어와도 좋아.”
녀석은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싫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는데도 떨어지지 않아 무슨 꿍꿍이가 있나. 의심이 들었다. 속셈이 무엇이든 앞으로 만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대꾸가 없어 녀석은 조르기라도 하려는 듯 졸졸 뒤따라왔다. 벼룩도 낯짝이 있어야지 같이 살자는 말을 대놓고 하니 놀라웠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두꺼운 마음이 소름 끼쳤다. 같이 지내다 보면 닮아갔다. 꿈에 나타날까 싶어 몸서리쳤다.
많은 사람이 정오를 훌쩍 넘겨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이마와 겨드랑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줄다리기하고 있었다. 지도부가 미쳤어. 혜산에선 배 꺼진다며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을 사람들이 영차영차 고함까지 내지르는 풍경이 낯설었다. 가만히 보니 줄지어 서너 개 붙여놓은 탁자 위에 여러 상품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자본주의가 춤추게 했다.
“내 말 꼭 기억해 줘.”
앞뒤 분간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짜증이 확 올라왔다.
“알았어. 아까 말했지? 지아 근처는 얼씬 말라는 거.”
거절당했지만 반쯤 넘어온 거라고 여겨 녀석은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도 듣지 않고 응원석에 앉아 있는 지아에게 걸어갔다. 강 건너 넘어온 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잘 살 것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토대보다 능력이 우선이라 살림살이도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농장원이던 이는 어찌어찌해서 깊은 산골로 들어가 양봉을 하고 중소기업이긴 하나 반듯한 사무직 일자리를 잡은 청년이 있는가 하면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서 일하거나 여기저기 공사판을 떠도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은 예술단 활동을 하거나 안보 강사로 대부분 프리랜서였다. 몇몇은 음식 장사를 하는데 형편이 나아졌다는 소문은 없었다.
뿔뿔이 흩어져 살다가 향우회에 오면 이상하게 토대와 경력이 중요했다. 지도부의 다른 사람은 볼 것도 없이 회장이 혜산시 책임비서였다. 그럴 수 있겠다 싶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해가 갈수록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회원이 전국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말을 했는지 하룻밤이면 귀에 들어왔다. 찌라시 수준이 아니라 상당히 정확했다. 고자질이라는 묵은 습관이 걱정과 염려라는 꼬리표를 달고 돌아다녔다. 향우회는 작은 혜산이었다.
“뭐라고 그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어. 앞으로 눈에 띄지도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
“근데 또 나타나면 어떡해?”
“묵사발을 만들어버려야지.”
“아까 듣다 보니까, 고향에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야?”
“그래서 안심해도 돼.”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우회 행사는 줄다리기가 마지막이었다. 경기에서 이긴 개인과 팀에게 상품을 전달하고 회장의 격려사가 있었다. 어디를 봐도 책임비서인 배불뚝이 회장이 헛기침을 연거푸 했다. 몸에 밴 거드름이 눈에 거슬렸다. 명령하고 지시하는 사람은 북에서 남으로 건너와도 지시하고 명령했다. 사소한 자유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평등하지 않았다. 회장보다 똑똑하고 잘 살아도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불만이나 못마땅한 투덜거림조차 단박에 회장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면 여지없이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다. 생활총화였다. 한때 몸에 붙어 익숙한 상황을 모두 신기하게도 거부감 없이 적응했다.
“에, 그러니까 수고들 하셨습니다. 사느라 바쁘신 와중에도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석해 주셔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넘어온 연도와 관계없이 서로서로 도움을 주시고 받으시고 하는 따뜻한 모습들이어서 새삼스레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방법이 없습니다. 강냉이밥이라도 끼니를 거르지 않으면 잘 사는 축에 속하는 현실이 안타까워 밤잠을 설칩니다. 고향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분노해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럴 거라고 믿습니다. 배신자 소리를 듣지 않고 떳떳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북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으면 과감하게 규탄하고 무찔러야 합니다. 단 하루도 북에서 생활해 보지 않는 얼뜨기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남에서 살 자격조차 없습니다. 세끼 밥 먹을 자격도 없습니다. 우리가 분연히 일어나서 실력 행사해야 합니다. 에, 그러니까, 말이 길어졌습니다만 다음 시위에도 적극 참여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치 시위에 나서 달라는 요구였다. 거름 전투를 독려하는 모양새와 조금도 다름없었다. 선동하고 저주하는 재주를 여기서도 써먹는 현실에 마음이 착잡했다. 제국주의를 일당백으로 쳐부수자는 맹랑한 구호에서 제국주의를 빼고 종북 세력을 끼워 맞춘 수준이었다. 사석에서 곧잘 빨갱이들이 너무 많다고 투덜거리며 대단한 자유 투사로 우쭐거렸다. 사고의 틀은 바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뀌지도 않았다. 자신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남아 살아갈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고향 사람들을 만나 낯선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서러움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어 좋지만 문제는 토대를 중요시하는 익숙한 환경을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향우회에 나오지 않은 이유였다.
“에, 그러니까 우리를 받아주었으니 보답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시위에 꼭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북쪽에 동조하는 세력은 빨갱입니다. 남조선에 너무 많습니다. 북에서 살 때 얼마나 많이 당했습니까? 지긋지긋하지 않습니까? 곳곳에서 삐라를 보내지 말라며 반대하는 놈들을 솎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선봉대가 되어서 척결해야 합니다. 앞으로 자유 청년단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갈 계획입니다. 에,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하겠습니다. 다음 향우회에도 많이들 참석해 주길 바랍니다.”
혜산시 책임비서가 할 말은 아니었다. 역겨워 토악질이 날 정도였다. 비위가 상했다. 사람들은 손뼉 치며 와아 함성까지 내질렀다. 지아를 비롯한 젊은 애들 몇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옆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도 회장의 생뚱맞은 말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아의 손을 붙잡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운동장 가장자리로 갔다. 플라타너스 아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람이 불어와 햇살들이 잘게 흩어졌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다.”
선교사 브로커였다. 벌떡 일어나 허리 깊이 숙여 인사했다. 못 보던 사이 브로커는 중년 고개를 넘고 있었다. 대륙을 종단하는 길고 지루한 길 위에서 맞닥뜨린 위험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브로커의 말은 생명줄이었다. 숨도 쉬지 말라고 하면 정말 숨죽이고 고개를 처박았다. 안가에서 며칠 지내는 사이 열 명이 넘었다. 걸어서 이동할 때는 두세 명씩 짝을 지었다. 조선족인 척 허리 펴고 걸어도 영양실조에 피부 때깔부터 달라 단박에 표시 났다. 주눅 들어 입 꾹 다물고 주위를 살피는 불안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붙잡히지 말고 꼭 살아서 와야 한다. 브로커 말을 잘 듣고. 공항으로 가는 어머니와 헤어질 때 눈물이 났다.
“어머닌 잘 계셔?”
“그럼요. 아저씬 어떠세요?”
“나야 뭐, 잘 살지. 대장암이 심해 조금 불편하지만.”
“네?”
“놀랄 일이 아니야. 수술하고 관리 잘하면 명대로 산다고 하니까. 어머닌 서울?”
“매포에 계세요. 단양에요.”
“그래서 요즘 통 향우회에 못 오는구나. 서울보다 차라리 낫지. 나도 어디 한적한 곳을 알아보는 중이야. 세상과 너무 얽혀서 지쳤어.”
“하시던 일은 그만두었겠네요?”
“예전 같지 않아. 강 건너는 일에 비용도 많이 올랐고. 공안들도 눈에 불을 켜고 다녀. 언론이 탈북 루트를 너무 노출해서 만주 촌구석에 숨어있는 사람들이 많아. 북송당한 사람도 엄청나다더군. 아무튼 잘 살아. 방대는 운이 좋은 편이야. 다음에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어.”
“좋은 일 하셨어요.”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네.”
“수술 잘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브로커는 흐뭇하게 나를 쳐다보곤 운동장 가장자리를 느릿느릿 걸어 교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주변의 위험을 살피는 예리한 눈빛은 이미 잃었고 빠른 상황 판단력 또한 무뎌졌지만 아픔은 여전히 품고 있었다. 심양에서 모녀를 잃은 뼈아픈 실수를 원죄처럼 여겼다. 브로커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날따라 여행객들로 너무 복작거렸다. 서너 명씩 짝을 지어 대합실에 들어섰는데 모녀가 앞사람과 너무 멀리 떨어져 버려 당황해 허겁지겁 고함을 내질렀다. 하필이면 그때 공안의 눈에 띄었다. 모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조선족은 거민신분증이 있고 중국말도 할 수 있었다. 멀찌감치 숨어서 공안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모녀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칫하다간 열댓 명 모조리 붙잡힐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었다. 북송당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는 제대군인 출신 불법체류자 여자의 경험담을 들은 터라 악몽이 언제 눈앞에 나타날지 몰라 모두 불안에 떨었다. 보위부 집결소에서 발가벗겨져 뜀뛰기 하는 것은 기본이고 자궁 안으로 손을 넣어 인민폐나 달러가 있는지 수색당하며 남자 보위부원 앞에서 대변을 보고 스스로 똥을 파헤쳐 귀금속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온갖 고문을 당하며 무엇보다 남쪽으로 가려했다는 의도를 숨겨야 했고 들통나면 가차 없이 전거리 교화소로 끌려갔다.
“일자리 구하기 어려워 서울로 가려고 하는데 오빠가 도와줄 거지?”
“춘천이 어때서?”
“소비도시잖아?”
“내가 도울 일이 뭐가 있으려나? 없을 거야.”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지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적잖이 거북했다. 처음 만났을 때 철없는 말괄량이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 눈빛이 농염해지는 숙녀로 컸다. 아이가 자라 부모가 된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닿았다. 부모는 당연하고 혜산에 산다는 이모들과 외삼촌을 비롯한 일가족이 모두 내려온 터여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혈연적 결핍이 없었다. 탈출 과정의 고통은 점점 흐릿해지고 어린 나이여서 마음에 담아둘 것도 많지 않았다. 길에서 마주쳤다면 어딜 보아도 남쪽 여자였다.
그러나 마음 안쪽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숨어있다. 육 개월이나 춘천 남자를 사귀고서 춘천이 아니라 강원도 이천 출신이라고 털어놓자 경기도 이천이라며 비웃었다고. 강원도에도 이천이 있다며 지도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얼굴색이 변하더니 점점 심각해졌다고 했다. 고향에서도 사람대접을 못 받았는데 여기서도? 너무 속상해 오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목소리마저 축축했다. 함경도 억양이 강한 작은 이모와 함께 만난 뒤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해서 데이트할 때마다 업신여겼다고 했다. 여자 취급은 물론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했다.
엄청난 피 흘림으로 쟁취한 민주와 자유를 공짜로 즐길 자격이 있냐고 다그치는 거야. 무슨 이바지했냐고 몰아세우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해? 탈북자들끼리 똘똘 뭉쳐서 쓸데없는 짓만 골라서 한다는 거야. 그러다가 느닷없이 헤어지자는 거야. 우리들이 뭘 어떻게 했다고 비겁하게 몰아세우는 거야? 숨죽이며 평범하게 살잖아? 지아는 급기야 분노했다. 아직도 향우회가 작은 혜산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지도부가 자유 청년단을 만들어 여기저기에서 마구잡이로 설치겠다는 속셈을 이해하지 못했다. 막연히 고향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라고 여겼다. 이곳 사람들의 일상을 조금씩 흔들어 갈등을 일으키려는 음흉한 수작을 인식하지 못했다. 희라와 민수가 나를 이념 세력으로 바라볼까, 걱정이 앞섰다.
“정말 꼴불견이야. 왜 그런 말을 하나 알아봤더니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삼촌이 유월인가 칠월에 항쟁하다가 행방불명이 됐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잖아?”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겠지.”
“탈북자에 신경 쓰는 사람이 더 많아. 응원하기도 하고.”
“그럴까? 정말?”
지아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몸이 본능적으로 움찔거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리둥절했다. 희라에게 떳떳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밀려왔다. 지아의 행동보다 내 마음의 움직임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나 자신도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심장의 두근거림을 희라를 만날 때마다 가졌었나. 단순히 친구가 아니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월례 모임에 참석한 게 아니었다. 희라는 내 마음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지아 때문에 몸이 꼿꼿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가 코밑을 간지럽혔다. 여동생이라고 여겼는데 여자 냄새였다. 희라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빠, 갑자기 왜 그래?”
“뭐가?”
“표정이 굳어졌잖아?”
“아니야. 이제 끝났나 보다. 다들 가는 분위긴데?”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고 어깨를 움직이자 지아가 먼저 일어섰다. 햇살은 따갑고 마음은 뒤숭숭했다. 민수는 내 마음을 짚어내고 지난번에 그토록 혹독하게 몰아 붙었던 걸까. 민수와 희라는 짝꿍이라 해도 좋을 만큼 사이가 좋았는데 요즘 들어 서로 서먹서먹해졌다. 내가 둘 사이를 헤집어 놓은 탓이었다. 민수에게 희라가 유일한 여자일지도 몰랐다. 버스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순간이지만 지아를 여자로 보았던 것이 희라에게 미안했다. 원룸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희라 생각을 했다. 창문 밖이 어둑어둑해져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지아가 어깨가 아니라 달려와 온몸을 가슴팍에 안기더라도 마음은 흔들려선 안 된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마음이 아주 잠시 곁눈질한 것이라고 되뇌었다.
“춘천에 한번 놀러 와, 오빠. 공기 좋고 아담하고 예쁜 도시야.”
지아가 헤어지면서 부탁하듯이 말해도 한 귀로 흘렸다. 이모가 일하는 막국수 식당에 꼭 데리고 가고 싶다며 연거푸 강조했다. 간절한 표정이 부담스러웠다. 향우회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닦달에 못 이겨 춘천에 가더라도 지아를 또 여자로 볼까, 걱정이 앞섰다. 여자가 필요한 나이여도 그녀는 아니었다. 여명학교에 다니던 적응 초창기를 함께 보낸 사이여서 자질구레한 우여곡절도 많고 티격태격도 많이 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여동생이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지아 이모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라 간간이 소식을 물어보기도 했다. 창밖이 어두워져 곳곳에서 마구 빛나는 숱한 불빛들을 바라보면서도 희라에게 미안했다. 그림을 스스로 망치려고 하다니,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