잎갈나무 숲 6

by 이순직

6


지금 집에 들어가도 딱히 할 일이 없다. 언니는 마스크 팩을 하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있을 것이고 엄마아빠는 가게 일에 한창 바쁠 때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아빠 없는 집에서 언니와 둘이 지냈다. 저녁밥 때 엄마가 돌아왔다. 한 시간쯤 있다가 가게로 갔다. 밤이 깊어지면 도깨비가 초인종을 누를까 싶어 무섭다고 투덜거렸다. 거실도 무서워 방에서 언니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껴안기 일쑤였다. 언니가 먼저 잠들면 까치발로 창턱에 아래턱을 괴고 어두워진 구석에 도깨비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살피기도 했다. 어둠 속은 항상 무서웠다.


“민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미안해서. 다녀올게.”


“별일이야. 둘이 만나니.”


오늘따라 민수가 이상했다. 대놓고 비아냥거리거나 은근슬쩍 돌려차지도 않았다. 연애할 남자와 결혼할 남자가 따로 있다는 말은 방대를 견제하는 녀석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타인을 평가하는 사람은 못난이다. 자신의 초라함과 무능력과 비열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자충수였다. 고백을 앞뒤로 해서 방대가 다른 사람이라는 관점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녀석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비난을 퍼붓는 짓도 현명한 태도는 아니었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용기는 높이 사줘야 하지 않을까. 태어나보니 혜산인데 뭘 어쩔 수 있을까. 그곳에 길들여졌을 뿐이다. 어린 나이여도 생존본능은 있으니까.


“어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할머니를 닮는가 봐.”


“살아계셔?”


“너 말이야. 할머니 같은 말을 하는 희라 할머니.”


“그만 웃겨. 자꾸 할머니 할머니 하면 비꼬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으나 비위를 맞추려는 안간힘이 눈에 빤히 보였다. 가만 보면 모난 데 없고 딱히 꼬집을 구석이 있는 못된 성깔도 아니어서 밉상은 아니었다. 민수를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졸업을 일 년 앞둔 겨울이었다. 수강하던 과목이 종강한 뒤여서 무슨 이유로 학교에 갔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동아리 때문일 수도 있고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기 위해서일 수도 있었다.


밤사이 눈이 내려 학교 진입로는 빙판길이었다. 조심스럽게 걷는다며 온 신경을 발바닥에 모으고 한 발짝씩 내디뎠다. 얼마 못 가서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뒷굽이 살짝 높은 구두 때문이었다. 앞서 걷던 학우들이 쾅 소리에 놀라 뒤돌아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꼬리뼈의 통증보다 부끄러움이 앞서 황급히 고개 숙이고 머리카락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그날따라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뒤늦게 속바지가 보일까 싶어 서둘러 치마 밑자락을 잡아 내렸다. 재빨리 일어나 넘어지지 않은 척 몇 걸음 걸었다가 또 미끄러졌다.


꼬리뼈는 중상이었다. 일어나기 위해 엉거주춤 엎드리자 손 하나가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괜찮아요? 아파요? 씨익 웃는 얼굴이 위로인지 비웃음인 알 수 없었다. 다치지 않았어요? 눈을 맞추니 웃음기는 사라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기까지 손잡아 드릴 게요. 넘어지면 안 되니까요. 그가 덥석 손을 잡았다. 생판 모르는 남자와 잡은 손이 어색하고 부끄러워 빼내려고 하자 그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눈을 치워 통로가 만들어진 곳까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가 민수였다. 그 뒤로 도서관 열람실에서 우연히 마주치다가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친해지기 시작했다.


“미안. 인제까지 다녀와서인지 출출하네. 어디 가서 저녁 먹을까?”


“순댓국이 좋아. 가자.”


“동숭동 단골집으로 갈까? 지하철 타면 금방인데.”


첫 만남에서 망가진 모습을 몽땅 보여줘서 내숭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여우짓도 적당히 해야 남녀 사이로 발전할 수 있는데 기회조차 없던 셈이었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때 전기가 찌릿찌릿 왔다면, 얼굴과 몸짓이 단번에 가슴에 꽂혀 심장이 벌렁벌렁 날뛰었다면 친구 사이로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마주쳤을 때도 부끄러움보다 아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먼저 들었다. 민수 역시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학우로 나를 대했다.


정치와 법? 머리 아프다. 밥 먹으러 가자. 등 뒤로 몰래 다가와 어깨너머로 내 앞에 놓인 책 제목을 보더니 민수는 기겁했다. 비교 정치론을 보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 뛰어든 여전사로 여겼다. 열람실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쯤 지났을 무렵 햇볕 아래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저 애야. 무용학과라 몸매가 끝내주지? 엊그제 미팅했는데 마음에 들더라. 이 시간에 꼭 저길 지나가. 무용 수업이 있나 봐. 민수는 눈을 떼지 못하고 무용이 걸어가는 작은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너무 말랐어. 불쌍하게 보이잖아?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민수는 대뜸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 뚱뚱한 무용수를 본 적이 있어? 말 같은 소리를 해라. 핀잔하면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아이구, 무서워라, 무용하고 잘해봐라. 나는 빈정거렸다.


내 앞에서 여자 얘기를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 사귀지도 않는 지나가는 무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질투심은커녕 오히려 비아냥거림이 신경 쓰이는지 그 뒤로 무용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민수와 무용의 관계가 발전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여름 방학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단단히 화난 얼굴로 투덜거렸다. 무용이 미팅하는 걸 봤다며 씩씩거렸다. 어이없었다. 무용이 애인인 것처럼 화를 내니 기가 찼다. 남자들은 못 말렸다.


“다음 모임에 나올 거야?”


“왜? 나오지 않으려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대와 어울리기가 찝찝해. 험악한 일에 엮일지도 모르고 녀석을 안다고 해도 일부분이잖아? 구글링해 보니까 경찰이 한 달마다 전화한다는데? 적응 잘하는지 애로사항이 없는지 확인한다고 하지만 감시하는 거잖아? 경찰에서 우리를 파악하고 있을지도 몰라.”


“무서워?”


“찝찝하다고 했잖아?”


“친구잖아?”


“친구라고 해도 만나는 내내 정체를 숨겼잖아?”


나도 민수처럼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앞에서 온전히 발가벗는 고백이 쉽지 않음에도 기꺼이 했다는 점에서 방대를 믿었다. 게다가 녀석을 내게 데리고 온 사람이 민수였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식의 인식은 사람을 한없이 가볍게 만들었다. 귀 얇은 줏대 없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이가 또 있을까. 시류에 맞춰 그때그때 태도가 돌변하면 됨됨이가 한없이 추락해 누구도 옆에 남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려도 남 탓을 할 터였다. 민수가 그런 사람으로 변해가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야비하고 비열한 민수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방대의 첫인상은 훌륭했다. 민수보다 한 뼘 조금 더 큰 키에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떡 벌어진 어깨며 짙은 눈썹이 마음에 쏙 들었다. 말수도 적어 귀찮지 않아 옆에 있기만 해도 듬직했다. 슬라브족의 피가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다큐멘터리에서 역사학자가 했던 말인데 러시아 내전 때 볼셰비키의 적군에게 패배한 멘셰비키 백군 중 일부가 함경도로 집단 이주했다는 것이다.


“방대만 있으면 허전해. 셋에서 하나 빠지면 재미도 없고.”


“고민 중이야.”


민수는 뜸 들이다가 내 표정을 슬쩍슬쩍 살피면서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가벼운 의심이 빠르게 지레짐작의 단계로 넘어갔다. 모임에서 방대를 빼려고 돌려차기 하는 걸까? 에둘러 말하는 이유는 뭘까? 방대와 나를 떼어놓으려는 속셈이 뭘까? 방대가 불미스러운 일을 도모하다가 들통 나서 이런저런 죄명으로 내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서? 민수가 그런 예측을 한다면 망상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는 방대는 낯선 사람에게 낯가림하는 순수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내였다. 고백을 통해 결별당할 수 있음에도 당당하게 탈북을 털어놓는 용기도 있었다. 불미스러운 일을 하려고 했다면 고백할 이유가 없었다. 방대가 말하지 않았으면 지금까지 그 무엇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대도 나와 마찬가지로 나이 먹으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평범한 날들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유년을 보냈고 교육과정을 계단 밟듯이 차곡차곡 올라온 뒤 사회로 나왔을 거라고 믿을 터였다. 녀석은 우리와 다른 유소년 시절을 보냈을 뿐이었다. 녀석을 배척할 이유가 없었다. 맹세코 방대의 잘생김이 빛난다고 해서 호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었다.


“쪼잔하게 굴지 말고 나와.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데 직장 스트레스를 날려버려야지.”


“만나면 학창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을 느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던 때로 말이야.”


“방대 입에서 개마고원이라는 말이 나올 때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어. 한때 금강산은 말 많이 했지만.”


“나도 그랬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더라. 으쓱해지고.”


“방대도 우리 땅에서 살았던 거야.”


“기분이 이상해지네. 갈 수 없는 곳이라서 그런가?”


민수는 본 적 없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왼쪽 눈은 찌푸려져 뺨까지 일그러지면서도 오른쪽 눈은 동그랗게 뜨면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혜산에 애증을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표정이었다. 체제는 싫지만 땅은 가지고 싶은 이율배반적인 태도였다. 혜산의 경험은 방대의 몫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까마득한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높고 깊은 감정을 가져보는 걸까.


“가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도 민수는 감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이성을 짓누르는 수천 년의 거대한 감정이 민수의 온몸을 휘감고 있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다른 속셈에 빠져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개인적인 이익에 예민했다. 거리에 어둠이 포개져 쌓여 있었다. 불빛들이 그사이를 스며들어 출렁거렸다. 사람들은 먹이 사냥을 끝내고 서두르거나 느긋하게 집으로 향했다.


피곤함에 절어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걷는 민수를 보냈다. 버스를 기다렸다. 어렸을 때 까치발로 내다보던 창밖 어둠 속 도깨비가 무서웠는데 지금도 어린 누군가 아파트 창문에 턱을 괴고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피해 숨어있는 도깨비를 찾고 있을까. 고개 갸웃거리며 물음표를 만들고 있을까. 도깨비가 아니라 사악한 욕망이 꿈틀거리는 건 나이를 먹어서 알았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서자 언니가 대뜸 물었다.


“방대는 나오지 않았지?”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해?”


언니는 소파에서 윗몸을 벌떡 일으키며 불안한 눈빛으로 매섭게 나를 쏘아보았다. 금방이라도 험한 말을 내뱉을 것처럼 입술을 씰룩거렸다. 언니에게 방대는 외국인보다 더한 이방인이었다. 지독하게 가난하면서도 허풍으로 겁박하는 무뢰한이었다. 동네 양아치도 지구대를 피해 다니는데 겁대가리 없이 경찰서 앞에서 너 죽고 나 살자며 생난리 피우는 꼴통이었다. 그런 골칫거리를 만나고 다닌다니 당연히 뜯어말려야 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언니의 강한 악센트에 서슬이 시퍼렇게 돋아나 팔뚝에 소름 돋을 정도였다.


“민수뿐이었어. 사촌 동생 면회 가자고 했는데 거절했어. 미안해서 잠깐 얼굴 보고 온 거야.”


“무슨 면회?”


“군인이거든. 강원도 인제에 있다는데 거기까지 갈 생각 하니까 엄두가 나지 않더라고. 그런데 모임도 나가지 말라고 하겠네?”


“셋이 만날 때도 방대는 조심해. 방대와 단둘이 만나면 아빠한테 고자질한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다.”


언니는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정확히 가리켰다. 생떼 쓰는 아이 앞에서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엄마처럼 언니의 표정은 근엄했다. 친구처럼 지내지만 언니는 반쯤 엄마였다. 엄마아빠가 가게에 있는 동안 내 옆에는 언제나 언니가 있었다. 언니와 손잡으면 집으로 가는 건널목이나 좁은 골목길도 무섭지 않았다.


아무리 혼나도 초등학교 무렵은 물론이고 대학 때도 언니에게 대드는 짓은 꿈조차 꾸지 않았다. 직장 생활하면서 비로소 가볍게 티격태격할 뿐이었다. 그래도 열에 열 모두 졌다. 보호하려는 습관이 차츰 사라지는 듯했으나 파혼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내게 사소한 변화가 있어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동생에게 본보기가 되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요즘 들어 유독 심했다. 그 연장선에 방대를 바라보는 편견이 놓여 있었다.


“또 말하지만, 방대는 절대 안 돼.”


언니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 다시 경고했다. 언니를 충분히 이해했다. 방대의 과거를 공유하는 일은 내 몫이라고 해도 가족의 몫으로까지 확장하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친구로서 방대와 남편으로서 방대는 다른 존재였다. 운명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친구 사이로 지낼 것이다.


“언니가 너무 앞서 나가는 거야. 친구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다행이고. 마음이 변하면 안 돼. 약속해.”


언니는 어린 시절처럼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언니의 통제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만큼 손가락 약속은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일 일은 알 수 없지만 손가락을 내밀었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여러 번 흔든 다음에야 언니는 활짝 웃었다. 가족을 배반하는 운명 같은 사랑은 없기를 바라며 웃었다. 인제에 가자는 민수의 제안을 거절했듯이 딱 그 거리만큼 방대와의 거리도 유지하자고 다짐했다. 아픈 구석 없는 몸이기에 어느 순간 눈이 멀어 언니를 곤란하게 만들지도 모르나 미리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기에 어떤 말과 행동을 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아랫도리가 후끈 달아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홍시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몸뚱이 곳곳에서 끈적끈적한 욕정이 꽃처럼 삽시간에 피어올랐다. 아랫도리가 촉촉해졌다. 몸뚱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춘기 무렵은 몸이 요구하는 것들에 쩔쩔매면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햇살 부드러운 늦봄 저녁이었다. 야간자습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며칠 전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형태가 교문 근처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불량스럽게 짝다리 짚고서 윗몸을 건들건들 흔들었다.


“언제 오나 싶었어.”


형태의 코밑에 솜털이 듬성듬성했다.


“여기서 뭐 해?”


“널 기다렸어.”


“왜?”


약속도 없이 나타난 형태가 수상했다.


“할 얘기가 있어. 공원에 가자.”


짙은 어둠이 하늘 가득 퍼져 있었다. 공원 후미진 벤치에 앉아 형태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형태는 눈길을 피하며 두 팔 힘껏 앞뒤로 내저으며 걷는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아무래도 내가 널.”


녀석은 말을 끊고 한숨을 몰아쉬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보여준, 학교 성적으로 계급이 정해지는 세상에서 거칠 것이 없다는 자신만만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아무리 영악하게 굴어도 장애물은 항상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중간에 끊어?”


“머릿속에서 네가 떠나지 않아. 미치겠어.”


형태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개팅하면서 자랑스럽게 풀어놓은 거만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살짝 안쓰러웠다.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쳐 오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마음은 너덜너덜해지고 뿔뿔이 흩어져 형태는 어쩔 줄 몰라했다. 몸이 만들어내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세상을 잃은 것처럼 헛헛함에 빠져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는 질풍노도의 시기여서 확실한 위험신호였다.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공원 끝에서 한층 짙은 땅거미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널 사랑하나 봐.”


형태는 느닷없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순식간이었다. 쿵쾅거리는 형태의 심장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뿌리쳐야 할지 받아줘야 할지 판단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형태의 혀가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이제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근거림이 마구 요동쳤다. 찌릿찌릿함이 신경을 타고 출렁거렸다. 판단 기능을 잃어버린 머릿속에서 수많은 콩나물 음표가 춤추었다.


“학생! 뭐 하는 짓이야!”


두 팔을 앞뒤로 힘껏 휘저으며 경보를 하던 아주머니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형태는 한 발 뒤로 물러서더니 후다닥 공원 밖으로 뛰어갔다.


“괜찮아, 학생? 소리를 질러야지. 어서 집으로 들어가.”


아주머니는 형태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못된 놈! 썩을 놈!”


몇 마디 내뱉고 아주머니는 다시 경보에 열중했다. 몸이 악기였구나. 그래서 아주머니도 저렇게 조율하는구나. 나는 땅거미를 피해 불빛 속에서 걸었다. 집으로 향했다. 하나둘씩 간판들이 반짝이고 차들은 서둘러 달려갔다. 그날 이후 형태를 만났는지 기억에 없었다. 이목구비마저 흐릿해 거리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혀의 움직임은 지금도 또렷했다. 입술을 비집고 불쑥 들어와 입안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던 혀의 연주 실력은 서툴고 거칠었다. 완전히 초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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