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희라가 수애라면 얼마나 좋을까. 국밥집을 나와 거리를 걸으면서 느닷없이 떠올랐다. 희라를 처음 보는 순간 딱히 어디라고 꼬집을 수 없으나 수애와 엇비슷한 인상이었다. 열람실에서 거리를 두고 앉았지만 잠시 쉬러 밖으로 나갈 때도 민수와 함께 움직였다. 열람실 밖 로비에서 둘이 앉아 속닥속닥 얘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녀석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그녀에게 다가서고 싶지만 녀석이 항상 옆에 있었다. 속앓이는 열람실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길었다.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갈굼을 당한다거나.”
희라가 무심코 하는 말처럼 가볍게 툭 건넸지만 따뜻함을 느꼈다. 민수와 셋이 있을 때 느껴보지 못한 따뜻한 마음이었다. 잎갈나무 숲에서 수애와 나누었던 사랑의 몸짓이 떠올랐다. 사타구니가 묵직해지고 심장이 뜨거워졌다.
“눈치껏 잘하고 있어. 이것저것 공부도 하니까 재밌기도 하고.”
“다행이네.”
“비서실은 힘들지 않아?”
“할만 해. 어디 갈 거야?”
왜 만나자고 한 거야? 묻는 말이었다. 희라를 만나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충동을 아무리 뒤적거려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급격하게 쏠린 욕구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모두 퇴근하고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집으로 혹은 어딘가로 부지런히 걷는 사람들을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문 열고 들어가면 무거운 침묵이 쌓여 있는 오피스텔 원룸이 슬그머니 무섭고 매포는 너무 멀었다. 민수가 모임에 희라가 오지 않을 수 있다고 전화했을 때 마음 한쪽이 서슴없이 무너졌다. 그 자리에 쓸쓸한 바람이 거칠게 불어닥쳤고 무너져 부서진 마음의 조각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황량했다. 수애는 갈 수 없는 먼 땅에 있었다.
“둘이 걷고 싶어.”
“걸어?”
희라는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나를 건너다보며 피식 웃었다. 반드시 이유가 있어 만나고 필요가 있어 걷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 말조차 쓸쓸한 마음을 건네주지 못했다. 느릿느릿 보폭을 맞춰 조금씩 어두워지는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희라는 옆에서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해 줄 수 있다고 여기는지 걷기에 열중했다. 거리 풍경은 확실히 달랐지만 혜산의 무채색 거리를 수애와 걷는 착각에 잠시 빠졌다. 돌아보면 쿵쾅거리던 설렘이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차올라 혜산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여겼다.
“사진 찍을까? 인생네컷.”
희라가 가리킨 가게는 커다란 통유리 밖으로 불빛을 거리로 쏟아냈다. 또래라고 하기엔 너무 젊은 몇몇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사진을 보며 소리 내어 유쾌하게 웃었다. 그들을 보자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타인의 웃음을 받아 웃음으로 되돌려 주던 적이 없었다. 고향에서는 물론이고 서울에 와서도 좀처럼 웃지 못했다. 웃음의 색깔은 저마다 달랐다. 얼굴이 웃는 것과 마음이 웃는 것은 엄청나게 달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여러 소품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냉큼 토끼 머리띠를 집어 들었다.
“어때? 이쁘지?”
희라는 나를 보며 씽긋 웃었다. 보조개가 피어났다. 웃음을 되돌려 주었다. 부스에 들어가 포즈를 잡았다. 무뚝뚝한 나와 달리 그녀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어깨에 기댔고 급기야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놀라는 틈도 없이 다음 동작으로 바뀌었다. 얼떨떨했다. 그녀가 마음을 여는 걸까. 자신감이 생기고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사진을 들고 부스 밖으로 나왔다. 희라는 사진을 보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첫 사진은 무뚝뚝한 내 얼굴에 비해 그녀는 밝게 웃으며 머리를 어깨에 기댄 자세였다. 다음은 뺨에 뽀뽀하는 사진이고 다음은 놀란 내 표정과 꾸짖는 그녀의 얼굴. 마지막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과 해맑게 웃는 그녀가 있었다.
그제야 희라 앞에서 수애를 떠올린 실수를 깨달았다. 미안했다. 돌아갈 수 없는 땅과 시간에 매달려 지금을 망칠 수 없었다. 희라가 뺨에 뽀뽀한 것은 산에서 업고 내려온 고마움 이상의 몸짓이었다. 민수가 알면 질투심 정도가 아니라 무슨 트집을 잡든 욕지거리를 쏟아냈을 것이다. 신사협정을 맺어도 끓어오르는 순간적인 격한 감정을 가라앉히기 어려울 터였다. 기울어진 중심추를 어떻게 해서든 자신 쪽으로 되돌리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어떤 계략을 꾸밀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은 누구에게나 계략이 아니라 부드러운 몸짓에서 싹터서 몸짓으로 무럭무럭 스스로 커지고 깊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겹겹이 쌓인 원룸으로 희라와 함께 들어가는 모습을 떠올렸다. 어둠이 빛에 쫓겨 삽시간에 물러나 흔적 없이 사라지듯 원룸의 침묵도 마찬가지라고 상상했다. 내 좁은 침대에 누운 희라를 떠올렸다. 아랫도리가 후끈 달아올랐다.
“들어가야 해.”
“너무 늦었지?”
“언니보다 일찍 들어가야지.”
“왜?”
“데이트를 들키고 싶지 않거든.”
희라가 테이트라고 생각하니 고마웠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버스를 타고 그녀의 동네까지 갔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팔짱을 꼈고 아파트 입구까지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이 밝았다. 몇몇 사람들이 지나쳤고 어둠은 한층 짙어졌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놀이터 의자에 앉았다.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처럼 뭔가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기 10층이야.”
희라가 손가락으로 맞은편 아파트를 가리켰다. 어두운 창문은 서너 개뿐이었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스위치를 누르면 거실은 눈부시게 되살아날 터였다. 그 불빛 아래에서 하루를 정리하고 인생네컷 사진을 들여다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으면 했다. 사진은 민수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의자에서 일어나 걷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귀여웠다. 보조개가 살짝 패였다. 와락 끌어안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내 입술을 받아들였다. 시간이 멈추고 사방이 밝아졌다. 오래전에 잎갈나무 숲에서 바쁘게 피어났던 황홀함이 되살아나 펄럭였다.
“어서 들어가.”
“조심해서 가.”
나는 그녀가 아파트로 들어갈 때까지 제 자리에 서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달아오른 아랫도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어두운 거실 통유리 창에 불이 켜질 때까지 제 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거실이 형광등 불빛에 환하게 밝아졌고 베란다로 나온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보안등 아래에서 나도 손을 흔들었다. 천천히 아파트 단지를 걸어 나오는데 어둠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생애 처음이라고 믿었다.
“못 온다네.”
민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신경질적으로 쑤셔 넣었다. 얼굴에서 아쉬움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첫 키스를 한 뒤로 퇴근 후 매일 만났다. 민수에게 말하지 않았다. 녀석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보다 결별 선언을 할까, 걱정이었다. 신사협정을 맺었지만 스스로 승자임을 굳게 믿고 있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나를 선택했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모임에서 희라와 내가 친밀한 대화를 나눈다거나 손을 만지거나 거리를 걸을 때 팔짱 낀다면 마지못해 인정할 터였다. 희라 앞에서 절교 선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당분간 연락을 받지 않고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지금보다 훨씬 멀어진 마음의 거리를 가질 터였다.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기는 기분은 하늘이 부서져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았다. 벌건 대낮도 어두컴컴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빨갛고 싱그러운 장미꽃과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불그스름한 노을도 꼴 보기 싫을 것이다.
발 딛는 곳마다 질퍽한 개흙이고 사람들은 패배자라며 손가락질하고 조롱한다고 여길 터였다. 그처럼 위태로운 터널을 무사히 통과해야 세상과 사람들은 바뀌지 않고 자신이 변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한층 가라앉고 차가워진 감정을 골똘히 응시하면서 모임에 참석할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것이다.
“연극은 때려치우고 합의 보자.”
“무슨?”
“모임에서 빠져라. 희라를 위해서.”
“내가 왜?”
“탈북자잖아? 희라를 감당할 수 있어? 없어! 날마다 생활총화를 할 텐데 희라가 견딜 수 있을 거 같아?”
민수가 훅 치고 들어왔다. 결혼한다면, 가정을 달고 어이없는 상상을 펼쳐놓았다.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유복자의 아들이기에 공동체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편적인 혐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나에게 향한 말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탈북을 고백하자 삐딱하게 나오면서 트집 잡기 시작했다.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말을 섞으면 자존감에 상처만 입을 뿐이었다.
“동생이 있잖아? 씨가 다르다고 핏줄 버리고 희라를 선택하는 짓은 비겁해.”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듣기만 했다.
“비겁한 정도 아니야. 욕먹어도 마땅해. 농민공이라며? 스물 넘은 동생이, 버림받았다는 응어리를 속에 꽉꽉 채운 동생이 고분고분할까? 폭탄이야. 희라 옆에 폭탄을 두려고?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데? 터져도 또 터질 텐데? 비겁한 짓이야.”
백두산도 한순간에 서울로 옮기는 말 따위로 못할 게 뭐가 있을까? 가정에 상상력을 더해 충고를 넘어 씨알도 먹히지 않는 협박으로 치달았다. 어이없다기보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 발악하는 수준이었다. 튼튼한 콘크리트나 거대한 흙더미로 막아도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가득 차면 댐 위로 넘쳤다. 민수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간도 길이 막혀 고이면 차곡차곡 쌓이다가 마침내 흘러넘쳤다.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머리가 달려 있잖아? 탈북자 시어머니에 중국인 시동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에 사고방식이나 문화도 다른 외국인이잖아? 지푸라기를 한아름 안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꼴이야. 그러고도 희라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위선이야. 자기 좋다고 여자를 불행에 빠뜨리는 짓은 비겁한 이기주의자나 한다고.”
신바람 나서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떠벌리는 민수를 덤덤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은 민수 등 뒤의 벽에 붙은 연극 포스터를 보았다. 춤추는 어릿광대. 연극 제목이었다.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들의 정보를 카페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포스터들은 물론이고 공연 브로슈어도 있었다. 무엇을 볼 것인가. 카페에서 가끔 결정하기도 했다. 내가 살았던 세상과 너무나 동떨어진 연극들을 보면서 이질감도 느끼지만 민수와 희라가 살아온 세상을 이해하려 했다.
예전에 보았던 첫사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농성장에서 두꺼운 노동법전을 들고 분신자살하는 철이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캐릭터였다. 힘들면 위로와 위안을 아낌없이 주는 순이가 옆에 있어도 자살하는 결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악독한 불의에 맞서더라도 살아서 해야지 죽으면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자신을 죽여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말이 맞지? 그렇지?”
민수는 제 말에 취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충고는 진부하고 고루하며 허접했다. 내 길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고 희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참견해도 제 입만 아플 뿐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라.”
“희라도 너처럼 말할까? 과연?”
민수는 마지막 카드를 쥐고 있다며 자신만만한 목소리였지만 얼굴은 조금씩 울상으로 바뀌었다. 눈썹이 일그러지고 눈을 갸름하게 뜨고 눈동자를 불안스레 굴렸다. 민수의 예언을 얼마나 진지하게 귀에 담을지 모르지만 희라의 삶은 그녀가 선택한다. 어느 쪽이든 나는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 딱, 여기까지라며 뒤돌아선다면 빈손으로 허공을 휘젓는 허튼짓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친구와 여자를 함께 잃는 것이다. 그들의 결혼식장에 들어갈 용기조차 내지 못하고 원룸에 처박혀 어머니를 탓할 터였다. 수애가 있는 땅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며. 원망해도 입 밖으로 소리칠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두 번 태어났다. 취업에 성공해 서울로 올라온 뒤로 주말마다 내려가는 일은 한 번도 빼먹지 않았다. 모임이 있는 날도 밤늦게 매포에 가는 이유였다.
“짝이 있어야 하지 않겠니?”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밥때 챙기는 것도 걱정이다.”
“잘 찾아 먹어요.”
“혼자 지내는 것도 익숙해지면 병이 된다. 지아가 사흘 있다가 갔는데 너는 어떠니?”
“뭐가요?”
“네 짝이었으면 해.”
“네?”
만날 때는 물론이고 무의식 깊이 지아를 여동생으로 여기고 있어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왕웨이가 오기 전에 날이라도 잡았으면 해.”
“왕웨이요?”
“동생 말이다.”
어머니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짐작했다. 어머니는 동생을 온전히 보듬고 싶어 했다. 도시에서 밑바닥 생활하는 동생이 측은하고 애틋할 터였다.
“지아는 강원도 사람이라 모진 구석이 없고 속을 터놓지 않아도 알만한 사이잖아? 내가 속 끓일 필요 없고 너도 그렇고.”
어머니는 닦달했다. 필요하면 탈북을 밝히면서도 탈북자라는 굴레를 벗으려 안간힘 쓰는 나는 당연히 마뜩잖았다. 탈북을 고리로 지아와 묶인다면 이 땅에서 온전한 국민으로 살기 어려웠다. 왼발을 여전히 고향에 두고 어정쩡하게 오른발로 살아야 하는 경계인으로 굳어질 터였다. 공감대를 만들고 의기투합하는 사람들의 폭도 좁아질 터였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혜산에 사는 꼴이다.
“천천히 생각해 보죠.”
“생각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한테 딱 맞는 짝인데.”
“생각해 봐야죠. 결혼이 이웃집 친구한테 놀러 가는 일도 아닌데요.”
어머니는 섭섭한 표정이면서도 안도하는 낯빛이 역력했다. 마당으로 나와 매포 읍내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애도 저 별빛을 보고 있을까. 어머니처럼 깡촌으로 팔려가서 중국인 아이를 낳고 살고 있을까. 삼시세끼 굶지는 않겠지만 개마고원 잎갈나무 숲을 기억할까. 추억일까. 상처로 남았을까. 목사님이 집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평상에 앉아 바라보았다.
“지아가 어떠냐고 묻더라고요. 어머니가.”
목사님이 마당에 들어서자 말했다. 보타산 골짜기에서 산바람이 불어왔다. 목사님은 내 옆에 앉아 매포 읍내를 내려다보았다.
“알아서 하라고 놓아두자고 했는데도 얘기한 모양이구나.”
목사님은 안타까운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몇 달 전부터 네 속을 읽고 있었어. 네가 조금씩 변하는 모습을 보고 여자가 생겼다고 말하더구나. 우리가 평범한 가족은 아니잖아? 어머니는 평범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겠지.”
목사님은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평범함이 아니라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거겠지. 목사님이 잘못 짚었다. 왕웨이 문제로 바쁜 목사님이 선택하는 최고의 단어가 평범함이었다. 어미와 자식이 함께 사는 지극히 당연한 평범함조차 없으니.
“알 수 없지. 하지만 이간질은 좋아하지 않을 거야. 치사한 짓이니까.”
“진심 어린 충고라고 생각하는데?”
“남들도 나와 같다고 여기는 것만큼 지독한 어리석음은 없어.”
“전쟁의 상처는 희라도 가지고 있어. 누구든 있어. 뼛속까지 깊숙이.”
화가 치밀어 오르기보다 어이없었다. 얼마나 삐딱하게 꿍꿍이를 밀고 나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찌질하고 추접할 정도로 자신을 내다 버린 민수의 마음속에 희라가 들어차 있었다. 위험한 욕망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민수의 욕망보다 더 절절하고 이기적이다. 희라와 살 섞고 살면서 반쪽 국민을 벗어나려는 수작을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구나 어떤 행동을 할 때 그에 맞는 이유와 필요가 있기 마련이라 민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찾아낼 수 없었다. 민수는 말 그대로 희라를 좋아하고 사랑하는지도 몰랐다. 얼굴과 몸매를 사랑하는지 가끔 어떤 생각에 잠겨 먼 산을 바라보는 쓸쓸한 표정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으나 나와 엇비슷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희라 속에 웅크리고 있는 생각 덩어리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않고 민수는 나이를 먹을수록 비어가는 마음을 채우고 싶은지도 몰랐다. 경쟁이었다. 승자와 패자가 있을 뿐이었다. 신사협정은 기분에 따라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설령 뒤늦게 휴지통에서 꺼내 반듯하게 펴서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더라도.
“나는 없는 거 같아? 매포는 외할아버지의 고향이었어.”
물러설 수 없었다.
“겨우 열댓 살에 짐꾼으로 끌려갔어.”
민수는 등받이 깊이 어깨를 집어넣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향을 잃은 시선은 카페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훑어보았다. 유복자의 아들이라는 가족사를 꺼내 들고 천하의 보검처럼 휘두르는 꼴을 참을 수 없었다. 어디에 살든 우리는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손가락질하며 따지는 짓거리가 의미 없었다. 피비린내에 숨 막히는 전쟁 중에 피어난 작고 연약한 민들레일 뿐이었다. 민들레 씨앗이 바람을 타고 넓게 퍼져 뿌리 내리고 이윽고 순이와 철이를 어머니와 아버지로 둔 자식이었다.
“야근하고 퇴근하는 길에 너희를 봤어. 순식간이라 정확하지 않지만 차창 밖으로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니야. 다른 사람일 수도 있어. 버스는 빠르게 지나쳤으니까. 아니라고 말해줘.”
민수는 풀이 꺾여 애원했다. 모임에서 만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따로 만나 데이트한다는 사실을 알면 민수는 충격을 받을 터였다. 예상보다 빠르게 서로를 알아가는 속도에 적잖이 놀랄 것이다. 왕웨이의 입국이 기정사실로 굳어지는 상황에서 희라의 반응을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조심스러워야 했다.
“잘못 본 거겠지. 마음에 담아 두면 비슷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라고 믿잖아?”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그렇지.”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순식간이어서 얼굴이 아니라 느낌을 본 것이니까. 희라를 만나서 확인할 작정이지만 아니길. 아니어야 하고.”
민수는 스스로 위로했다. 녀석의 퇴근 경로를 알 수 없으나 거리를 걷는 나와 희라를 볼 가능성은 없었다. 비슷한 연인을 보고서 지레짐작했다면 거의 신경과민에 빠진 정도이고 심하면 불안이 깊어져 일상을 거침없이 파괴할 터였다. 마음을 혹독하게 괴롭히는 수준이었다. 희라가 왕웨이를 작은 걸림돌 정도로 여기고 사랑을 선택한다면 민수가 감당할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친구에서 애인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찾으려 할 터이고 나를 지목할 것이다. 감정은 이성과 달리 한번 시동이 걸리면 쓰나미처럼 온갖 것들을 휩쓸어버렸다. 논리나 합리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는데 친구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희라가 만나자고 하면 피해줘. 부탁이야. 어차피 둘 다 상처를 입잖아?”
“왜 상처받는다고 생각해?”
“당연하잖아? 이때까지 충고했잖아? 안 들었던 거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민수는 자신이 만든 세상에 희라를 가두어 놓았다. 비굴하고 애처로웠다. 소심한 성격이 극단으로 치달아 자해라도 하겠다는 협박이다. 한편으로 사랑 앞에서 비굴함이나 애처로움은 얼마든지 뒤집어쓴다는 용기도 대단했다. 현실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일 터인데 녀석의 세계관은 확실히 삐딱했다.
“사람마다 입장이 있어. 그리고 서로 달라. 사랑은 대화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야. 강요는 더구나 할 수 없어.”
“여태껏 충고가 아니라 강요했다고?”
“아니라고 할 수 없지.”
“방대야, 까놓고 얘기해서 네가 누구 때문에 희라를 만났는데? 빤히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뒤통수 칠 수 있어? 양심이 없는 거냐?”
“양심과 상관없는 일이야.”
“뻔뻔하구나.”
“공정하게 경쟁하자고 신사협정을 맺은 걸 잊었어? 협박과 강요로 나온다면 곤란하지.”
“이젠 희라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수밖에 없어. 뒷감당은 해야 할 거야.”
“좋을 대로 해라.”
희라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으나 부딪쳐보기로 했다. 설득하려 안간힘을 쓰겠지만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녀가 민수를 선택한다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충격이 상당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피 같은 젊은 시절 한 뭉텅이가 싹둑 잘려 나가도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쫓겨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느닷없이 수애가 떠올랐다. 여전히 왼발은 혜산을 딛고 서 있구나. 관중들이 모두 떠난 드넓은 운동장에 홀로 남겨져서 소나기를 뒤집어쓴 심정이었다. 민수가 조금씩 일그러지는 내 표정을 골똘히 살폈다.
“슬슬 걱정되나 보지? 잘 생각해 봐라. 이것저것 곱씹어가며. 그만 간다.”
민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구로 걸어갔다. 출입구 옆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안에서 순이가 나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꼭 가야 해? 수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수만큼 위태롭구나. 나는 창밖으로 정류장에 멈춰 선 버스 지붕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입안에 씁쓸함이 가득 고여 출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