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냉찜질로 부기는 조금 가라앉지만 걷기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걸을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아빠가 알려준 한의원에서 벌침을 맞고 나서 차츰 좋아졌다. 사흘째 날 마지막 침을 맞은 뒤에 걸음은 자연스러워졌다. 언니가 내내 옆에서 도와주었다.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니?”
언니는 더 이상 민수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경제적 능력은 도토리 키 재기라 볼 것도 없고 기본에 초점을 맞추라고 강조했다. 잘생김도 고려할 수 있지만 튼튼한 몸뚱이가 먼저라고 했다. 결혼해 몸뚱이를 섞어가면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고. 첫 만남에서 눈에 불꽃이 튀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떨림이 발바닥까지 닿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덤덤해진다며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고 했다.
첫 만남의 느낌에 집착해서 운명이라 판단하면 지독한 오류라고 못 박았다. 보이는 몸뚱이만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중요하니 이제부터 찬찬히 살펴 장단점을 발견하면 비로소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잔소리를 들으면서 언니의 실패가 밑거름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한 번의 성공은 수많은 실패 위에 세워졌다.
“이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살펴봐. 방대라고 했지? 뒤돌아볼 때마다 웃더라. 믿음직했어.”
앞장서서 걸으며 언니는 자주 뒤돌아보았다. 내리막길이 험한 곳마다 멈춰 서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방대의 발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대의 등에 업혀 비탈길을 내려올 때마다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민수와 교대해도 될 터인데 녀석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사실 민수보다 녀석의 등이 편했다. 떡하니 벌어진 어깨여서 넓기도 하고 땀 냄새도 좋았다. 어릴 때 동물원에 가서 아빠 등에 업혀 어깨 너머로 원숭이나 하마, 사자와 호랑이를 보면서도 무섭지 않았다. 그와 엇비슷한 안정감을 느낀 것은 동물원 이후 처음이었다.
“듀얼 데이트 하는 천벌 받을 짓거리는 그만둬라.”
“왜?”
“기집애야. 양다리는 둘 다 갖겠다는 건데 욕심이 아니라 불법이야. 중혼은 있을 수 없어. 현행범 체포야.”
언니는 윽박질렀다. 언니의 과장 때문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모임이 조금씩 불편했다. 방대의 고백 이후였다. 남녀가 돈독한 친구로 발전한 사례라고 자신할 정도로 차곡차곡 우정을 쌓고 있는데 느닷없이 방대가 탈북을 탈탈 털어놓아 무척 당황했다. 본능적으로 친구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동안 보아왔던 방대의 어떤 모습에서도 공허한 이념에 빠져 과격한 행동을 할 것이라는 추측은 불가능했다. 민수와 다름없는 평범한 남자였다. 느닷없는 고백은 민수와 방대의 마음속을 조금씩 천천히 더 자세하게 알아가려던 내 시간표보다 빨랐다. 빠른 건 그뿐이 아니었다. 언니는 엄마아빠의 닦달에 못 이겨 맞선을 몇 번 보았는데 한 명을 콕 집어 연애 중이었다. 등산하던 날도 데이트가 있었는데 남자가 흔쾌히 양보해서 언니를 놓아주었다. 언니는 돌다리도 두들기면서 두 번 실수는 없다며 애교까지 연습했다.
“농담도 살벌하게 하네.”
“정신 차려. 이 기집애야.”
소심한 투덜거림에 언니는 버럭 화를 냈다. 맞선 본 남자와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알 수 없으나 언니는 내가 느낄 수 있는 빈자리를 염려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 노릇을 했으니 당연했다. 옆에서 이것저것 사소한 것들도 챙겨주는 언니가 없다면 마음 한쪽이 떨어져나가 허전하겠지만 금방 적응할 것이다.
“나야. 발목은 어때? 괜찮아졌어?”
민수가 전화했다. 목소리에서 걱정과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습관적으로 반가움이 앞섰으나 목소리에 티를 내지 않았다. 언니의 충고에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미안함 때문이었다. 내가 조심하지 않아 발생한 일 때문에 언니의 눈총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내 마음에서도 살짝 멀어져서 슬그머니 서먹서먹해졌다. 양손의 떡을 동시에 먹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잘됐네. 다음 달 모임에 오는 거지?”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거 같아. 집안일이 있을지도 몰라.”
“어떤?”
“그런 게 있어.”
“무슨 일인데?”
“그런 일이 있으니까 그때 가서 모임에 나갈지 말지 알려줄게.”
눈치 빠른 민수가 전화기 목소리에서 조금은 차가워진 내 마음을 알아차릴까 은근히 걱정스러웠다. 내가 놓지도 않았는데 민수가 먼저 끈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내가 방대를 선택하면 민수는 순순히 물러나 결혼을 축하할 것이다. 사귀지도 않는 무용을 얘기하며 내가 강짜 부릴지 어쩔지 떠보는 소심함에 짜증이 났었다. 나에게 들이대려면 확실하게 행동해야 하는데도 미적거리며 슬쩍슬쩍 눈치만 살피는 우유부단에 질려버렸다. 학교 진입로 빙판길에서 무슨 용기로 내게 손을 뻗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같은 남자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박력도 없고 물에 물 탄 듯한 성향이 강해 남자라기보다 친구로 적당했다.
“그때 전화 줘.”
민수는 끝까지 씩씩하게 말했다. 조금 서먹해진 내 마음을 눈치챘으면서도 끝까지 모른 척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나 저마다 장단점이 있는데 나와 민수는 잘 맞물려 단점이 장점으로 바뀌는 상황도 있었다. 나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열람실에서 자리 잡기가 어려웠다. 정오를 얼마 남겨두고 열람실에 들어가면 대부분 그냥 나와야 했다. 민수를 만난 뒤로 자리 걱정을 하지 않았다. 입이 짧아 민수에게 덜어줘서 음식을 남겼다는 미안함에서 벗어났다. 연극을 좋아하나 낯선 장소와 사람을 가리는 편이라 소극장은 큰맘 먹어야 하는데 민수 덕을 두어 번 봤다. 무엇보다 민수가 아니었다면 방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민수가 전화했다고 하더라. 괜찮다고 들었는데 어때?”
한 시간쯤 지나 방대가 전화했다.
“고마워. 산 아래까지 데려다줘서.”
“당연한 일인데 뭐가? 괜찮아졌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걱정하지 마.”
“알았어.”
방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무뚝뚝함이 그대로 스며든 목소리였다. 다정다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섭섭한 느낌이 들어 무슨 감정인가 의아했다. 한 시간쯤 등에 업혀 있던 영향일까.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다. 뒤늦게 콩닥거리는 심장이 주책이었다. 방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위아래로 들썩거렸고 젖꼭지가 녀석의 등에 부딪치면서 부풀어 올랐다. 일정한 속도로 올라갔다가 내려가면서 마찰은 기묘한 흥분을 만들어냈다. 녀석의 거친 숨소리도 한몫했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팔뚝도 안정감을 더했다. 녀석의 귓바퀴에 가는 입김과 숨소리를 뱉어내면서 세상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살아볼 만했다.
아빠의 등에서 세상을 구경했다면 방대의 등에서 후회 없이 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때의 기분을 되살리니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사타구니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촉촉해진 아랫도리를 어르고 난 뒤 거실로 나오니 언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지막 맞선을 본 다음날부터 언니의 귀가는 항상 나보다 늦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언니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렸다.
“어디 갔다 왔어?”
“맛있는 거 먹고 왔지. 퇴근하고 돌아다닐 시간이 없잖아?”
“뭘 먹었는데? 칼 들고 포크 들고?”
“아니.”
“숟가락과 젓가락이야?”
“틀렸어.”
“맛있는 거 먹었다며?”
“이쑤시개.”
“분식? 이 아저씨 너무 하네. 데이트 몇 번 했다고 분식집에 데리고 가? 예의가 없잖아? 언니, 다시 생각해라. 화딱지도 나지 않아?”
“내가 가자고 했어.”
“왜?”
“자기 돈도 내 돈이라고 했지. 엄청나게 좋아하더라.”
“오, 괜찮은 수작인데?”
언니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고 동시에 경제권을 갖겠다는 선언이었다. 남자는 단순해서 경제권까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지만 말이 씨가 되어 무럭무럭 자라 튼실한 열매를 맺을 터였다. 경제권까지 떠올렸다면 언니가 만만찮은 여자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고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면 연애 때부터 가정경제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사실이 뜻하는 바를 짐작했을 것이다.
손끝 야무진 살림꾼으로서 언니였다.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살림도 잘한다면 놓치는 놈이 바보라는 것쯤은 충분히 확신할 것이다. 한두 가지 절차만 남은 셈이라 예상보다 빨리 언니의 결혼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돌발변수가 없다면. 카사노바가 언니 앞에 나타난다면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앞장서서 언니를 지켜야 했다. 몸과 마음을 가져가더니 행복한 결혼식까지 망치려 든다면 용서할 수 없었다. 언니가 아내에게 남편의 바람을 폭로했을 때 그 집은 완전히 폭탄을 맞았다. 헤어지자는 거친 말도 아내와 오갔던 카사노바였다. 그 뒤로 이혼했는지 어찌어찌 봉합했는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프러포즈는 아직이야?”
“겨우 두 달 보름짼데?”
“초고속으로 해도 좋잖아? 시간도 돈이야.”
“신호를 보냈잖아. 반응이 있겠지.”
“프러포즈 받으면 모텔로 가서 신체검사해. 그리곤 날 잡으면 되지.”
“동생이 언니에게 조언하는 구나.”
“당사자가 아니잖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상견례까지 얼굴 못 봐?”
“보고 싶어?”
“당연하지.”
“기회를 만들어볼게. 먼저 잘 테니까 엄마아빠를 부탁해.”
언니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입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늘어지며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뿌듯해졌다. 언니를 대신해 엄마아빠에게 수다를 늘어놓을 수 있었다. 언니의 파혼으로 아빠의 울화통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예전을 생각하면 시간이 무심하게 빠르다는 느낌이었다. 아픔도 참고 견디다 보니 기쁜 날도 왔다. 사는 일이 이처럼 변화무쌍한지 미처 몰랐다. 어제와 오늘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여기더라도 나쁜 일이 조금씩 쌓여 산을 이루고 동시에 기쁜 일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쪽에 더 많은 눈길을 주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 났다.
하필 우이암에 거의 도착해서 발목을 겹질린 일도 나쁘게 보느냐 좋게 보느냐에 따라 산의 모습은 다르게 보일 터였다. 푸름이 울창한 숲을 이룬 세상이냐. 불로 검게 타버린 숲의 세상이냐. 선택할 수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베란다 통유리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너편 아파트 동의 창문은 겨우 열댓 개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 가족에게도 슬픔과 기쁨이, 절망과 희망이, 죽음과 탄생이 뒤섞여 꿈틀대는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
내 어린 시절처럼 언니가 살뜰히 동생을 보살피는 따스한 손길이, 가족의 안녕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아빠의 고단한 노동이, 바람난 남편을 독기 품은 눈빛으로 쏘아보는 아내의 매서운 눈초리가 있다. 백일도 채 되지 않은 갓난아이의 칭얼거리는 잠투정이, 시간은 흐르는 물보다 빠르다며 헛헛한 마음으로 밖을 내다보는 어르신의 헛헛한 눈빛이, 층간소음에 짜증을 폭발 직전까지 밀어 올린 불평쟁이의 분노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온전한 정착을 바라는 탈북자의 불안과 설렘이 한 뿌리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도 있을 터였다. 반짝이는 불빛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우리는 모두 하늘 아래 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말하고 싶었다. 돌부리에 차여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행동을 잊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도어락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은 자라니까 꼭 한 명은 기다리네.”
엄마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으면서 핀잔했다.
“이 맛에 집에 올 때마다 들뜨잖아? 밥은 먹었고?”
아빠도 웃으면서 물었다. 엄마와 아빠는 화장실에서 씻고 방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소파에 앉았다. 얼굴엔 하루의 노동을 무사히 끝낸 안도감과 피곤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언니의 데이트가 피곤을 덜어줄 것이라 믿었다. 보통보다 빠른 속도로 진도가 나가고 있으며 남자도 언니에게 콩깍지가 씌었으며 언니도 남자를 좋아한다고 고자질했다. 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점점 늦어져 내 귀가가 빨랐으며 저녁도 남자와 먹고 온다고 일러바쳤다. 특별한 변수가 없다면 남은 절차는 두 개뿐이라고 브리핑했다.
“변수라니?”
아빠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카사노바.”
“그 개자식이 아직도 주변에서 얼쩡거려? 이놈을 당장!”
“아니야, 아빠. 만약에 설레발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야. 언니와 줄 끊어졌다니까. 이혼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직장에서 잘리지 않았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지 않았으나 아내한테 버림받았다면 해코지할 수도 있다는 거지.”
“가정이구나. 카사노바 실력이니 새살림을 차렸을지도 모르지. 남자 관점에서 보면 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아빠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안도의 빛이 또렷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아. 설령 정착하더라도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지. 남자의 속성이야. 쉼 없이 떠돌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머물던 곳을 찾을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대단히 드물지.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
“당신도 혹시 탈출을?”
엄마가 장난스럽게 눈을 치켜뜨고 아빠를 쏘아보았다.
“어이, 무슨 소릴! 난 떠돌아다니기엔 너무 낡았어. 젊을 때도 하지 않은 짓을 할까?”
“늦바람이 무섭다는데 누가 알아요?”
엄마는 싱글싱글 웃으면서 반격했다.
“에이 참, 하루 종일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꿈이라도 꿨으면 좋겠다.”
“조심해요! 꿈속에도 쫓아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아이고, 마님. 단단히 알겠습니다.”
오늘도 아빠는 엄마한테 두 손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엄마아빠는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손을 잡았다. 어제와 같은 풍경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너도 어서 자라. 피곤하잖니?”
“네, 엄마.”
잠시 후 안방에서 엄마아빠의 낮은 코골이 이중창이 시작됐다. 신기하게도 화음이 맞았다. 아빠가 서너 번 묵직한 소리를 내고 잠시 쉬면 엄마가 높은음자리에서 낮은음자리로 옮겨가며 부드럽고 낮게 끼어들었다. 그러다가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다가 엄마의 콧소리를 시작으로 아빠의 코골이로 이어졌다. 베란다 앞에 섰다. 건너편 아파트 동의 창문 불빛은 아까보다 확 줄어 서너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구나.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도 도전할 기회는 반드시 올 거예요. 내일 일은 내일 해요. 밤은 누구에게나 포근한 잠을 선물하니까요. 반짝이는 창문 불빛을 향해 마음으로 속삭였다.
“그냥 전화해 봤어.”
퇴근 시간이 가까웠다. 방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 숨어 있는 간절함이 귓바퀴에 닿아 꼼지락거렸다. 어떤 연극을 볼 계획이냐. 발목은 여전히 괜찮으냐. 당연한 물음조차 없었다. 등으로 느꼈던 나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침묵을 만들어냈다. 언제나 충동을 이끄는 것은 감정이고 이성은 볼품없이 뒤늦게 논리를 얼기설기 맞추었다.
“왜? 만나고 싶어?”
방대가 고개를 끄덕이는지 어쩌는지 보이지 않지만 대꾸도 없었다. 오직 묵직한 침묵만이 들려왔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한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일이 벌어졌나 싶었다. 그러나 조언할 만큼 나누어 가진 사생활이 많지 않아 그럴 가능성도 크지 않았다. 서울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것. 규모가 소박한 종합병원의 재무회계 부서에서 일한다는 것. 매포에 본가가 있다는 것. 사연 많은 탈북자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녀석의 넓은 등짝은 빼고. 연극을 보고 말했지만 기억에 남는 말은 없었다. 소극장에서 어떤 때는 게슴츠레 눈 뜨고 반쯤 졸음에 빠진 적도 있었다.
“알았어. 만나자.”
“고마워.”
방대는 그제야 대꾸했다. 데이트도 이런 식으로 신청하나. 어이없었다. 여러 직원을 상대하는 재무회계 부서의 직원이 소심할 리는 없고 의사든 간호사든 상대할 때 논리가 금방 바닥나지 않을 터여서 말수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독 내 앞에서 새침데기처럼 얌전을 떨고 있으니 짚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예전부터 잠깐씩 짐작했으나 의식으로 확실히 떠오른 것은 발목을 다친 이후였다. 녀석이 흑심을 품고 있구나. 약속 장소에 도착해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방대가 단박에 눈으로 들어왔다. 학생 때나 동숭동 모임에서도 볼 수 없는 직장인 방대의 모습에 심장이 살짝 꿍꽝거렸다. 마주 앉자 내가 알던 잘생김을 훌쩍 뛰어넘는 후광까지 있는 것 같아 눈부실 정도였다. 할 말을 잊고 잠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언니가 사귀었던 카사노바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듬직하기까지 했다.
“저녁은?”
“퇴근하고 바로 왔잖아?”
나는 알면서 물어보냐는 뜻으로 눈을 살짝 흘겼다. 언니처럼 네 돈이 내 돈이라고 말할 뻔했다. 녀석의 등에 업혀 산에서 내려온 경험 때문인지 다른 때와 달리 가깝고 친근했다. 발목을 겹질린 게 단순한 실수나 우연일까 싶었다. 급기야 보이지 않는 손이 발목을 잡아 돌멩이를 비스듬하게 밟게 하지 않았나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마시고 나가자.”
셋이 만날 때는 늘 수동적인 태도였던 방대가 적극적이었다. 낯설고 신선했다. 배가 고프기 시작한 것도 이유지만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따지듯 몰아세우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민수와 너를 잠시나마 간 보고 있었다고 털어놓는 것도 때를 놓쳤다. 거리의 햇살은 조금씩 기울어졌다. 여느 때처럼 사람들은 서둘러 걸음을 걸었고 차들은 바쁘게 달려갔다. 지하철 출입구를 지나 발길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갔다. 직장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국밥집에 들어갔다. 방대는 의자에 앉기 전에 웃옷을 벗어 등받이에 걸쳐놓았다. 앞치마를 내게 건네고 다른 하나를 앞에 걸쳤다. 유난히 깔끔해서 유별나다는 민수의 투덜거림이 불현듯 떠올랐다.
“단벌이라.”
방대는 멋쩍게 웃었다. 다른 직장도 아니고 종합병원의 재무회계 부서인데 외모나 차림새에서부터 트집 잡히면 하루가 통째로 꼬일 수 있었다. 나도 직장인이라 당연히 정장을 신경 써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여러 벌이 있었다. 허기를 채우는 사이사이 방대는 발목 얘기를 꺼냈고 나는 벌침을 말했다. 오래전부터 침을 이용한 치료법이 있었는데 닥쳐보니 알았다는 내용이다. 세상에 분명 존재하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숱한 사실과 진실이 있으나 저마다 제 앞가림에 바빠 놓치고 있다는 속뜻을 담았다. 비겁한 이는 공동체의 이익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기득권 때문에 외면한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었다.
방대와 그 정도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미심쩍었다. 지적 능력을 의심한다기보다 적응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짐작이다. 겨우 십여 년째다. 민수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깊이 있는 논쟁으로 들어가 분단 세력의 맹점을 파고들어 반박하지 못했다. 분단에 기생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삶을 훼방하고 사람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지 말하지 못했다. 방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순대국밥은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