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놈! 기어코 가랑이 찢어지는 꼴을 당하겠다는 거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서울에 무임승차한 주제에 감 내놔라 배 내놔라 떠들어? 서울을 위해 피 흘리기는커녕 눈물 한 방울조차 흘리지 않고서 자유를 만끽하고 풍요를 누리면서 삐라를 날려? 패악질도 유분수지 서울의 일상을 어떻게 깨부술까 궁리하면서 연천이나 강화도를 줄기차게 찾아다니지 않는가.
인권이 있네 없네, 하며 떠나온 고향을 세 치 혀로 팔면서 알량한 잇속을 채우기에 바쁘지 않은가. 버스 정류장도 지나쳐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제까짓 놈이 뭔데?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데다 탈북자인 주제에. 공동체에 관한 염려라곤 손톱만큼도 없이 풍선 날리기에 열중하며 잇속 챙기기에 바쁜 탈북자들의 얄팍한 속셈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도 방대를 어찌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분노가 자괴감으로 서서히 바뀌자 걸음은 눈에 띌 정도로 느려졌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양쪽 팔은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마지막 카드가 있으나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방대의 고백이 끝나자 수애가 예쁘냐고 물었던 희라였다. 그녀에게 중국인 시동생은 폭탄이라고 충고해도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쓸데없는 간섭이라며 타박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언니는 다를 것이다. 언니에게 방대가 탈북자라고 얘기했다 하더라도 복잡한 가족사는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언니는 당사자가 아니어서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터였다. 그녀가 방대에게 매달려도 언니를 비롯한 가족이 마뜩잖아 하면 마음을 고쳐먹을 것이다. 가족에게 축복받는 결혼이 되고 싶을 터이니. 다행히 지난번 등산으로 언니와 얼굴을 익혀 신뢰감은 쌓았다. 사랑이 식고 나면 평범한 가족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할 거라는 짐작을 언니는 충분히 할 것이다. 걸음이 씩씩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거리였다. 생소함에 당황했다. 멀찌감치 지하철 출입구가 보였다. 정교한 시나리오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희라가 무슨 일 때문에 모임에 오지 않았는지 알 수 없으나 전화 걸어 귀찮게 할 순 없었다.
“안녕하세요?”
빵을 바구니에 담는 언니 옆으로 다가서서 우연이라 놀란 몸짓과 표정으로 인사했다.
언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밝게 웃었다.
“여기서 보네요. 신기하네요.”
“이 빵집이 맛집으로 유명하잖습니까? 단골입니다.”
“아, 그래요?”
모아둔 연차를 쓰며 언니의 동선을 추적했다. 출근 시간을 확인하고 직장에 도착해 이윽고 퇴근 후 남자와 데이트하는 장소까지 뒤를 밟았다. 그들의 데이트는 단순했다.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죽치고 있다가 아파트까지 함께 가서 놀이터 의자에 앉아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헤어질 무렵이 되면 둘이 깊은 포옹을 했다.
어떤 때는 키스도 했는데 보기에 민망했다. 가장 곤혹스러운 장소는 영화관이었다. 애정 영화인데 따분했다. 영화보다 그들의 뒤통수를 감시하기에 바빴다. 영화관 복도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미려 해도 사내가 홀로 멜로 장르를 보러 다닌다며 이상한 놈으로 취급당할까 싶어 포기했다. 너무 피곤해 잠이 들어 그들을 놓친 적도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 주위를 살폈지만 출구로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
“동네 빵집인데 맛집인 줄 몰랐어요.”
언니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여동생 입맛에 딱 맞습니다. 그러면 맛집이죠.”
“그렇기도 하네요. 단골인데 그동안 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까요?”
언니는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다. 길게 끌고 갈수록 들통나기 쉬웠다.
“그러게요?”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허둥지둥 빵을 바구니에 담았다. 먼저 계산대 근처로 갔다. 괜히 빵들을 건성건성 눈으로 훑어보면서 언니를 기다렸다.
“오빠가 여동생한테 빵을 사주는 게 보기 좋아요.”
“그냥 삽니다. 혹시 시간이 있을까요?”
“희라가 주말에도 바쁘고 평일엔 나보다 늦게 들어오는 데 있을지 물어봐야겠네요. 모임에서 만나는 걸로 아는데요.”
“언니께서 시간이 있나 해서요.”
“네? 나요?”
언니는 의외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딴맘은 없고요, 간곡하게 드릴 말이 있어서요.”
“간곡하게요?”
“희라와 관련해서요.”
“우리 희라가 왜요?”
“희라한테는 비밀로 하고 만나주시면 좋겠는데요. 아주 중요한 얘깁니다.”
“그래요? 토요일 오후에 저쪽 사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죠.”
언니는 동생과 관련된 얘기인 데다 친구로 알고 있어 의외로 쉽게 날을 잡았다. 약속을 받아냈으니 미적거릴 필요가 없었다.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빵집으로 뒤쫓아 왔다는 의심을 뒤늦게라도 받을 수 있었다. 미행하는데 언니가 무심코 뒤돌아보는 순간들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돌아보는 횟수가 차츰 늘었다. 나는 걷는 방향을 틀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언니가 찜찜한 뒤통수에 내내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미행하는 동안 긴장감에 심장이 쫀득쫀득했다.
“알겠습니다. 그때 뵙죠.”
“잘 가요. 여동생한테 빵 잘 전해주고요.”
서둘러 빵집을 나왔다. 언니가 빵집을 나오기 전에 내가 보이지 않아야 했다. 때마침 버스가 도착해 뛰어가 탔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언니가 빵집을 나와 두리번거렸다. 기회를 마련한 셈이었다. 문제는 계획에 따라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 정교한 시나리오가 필요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 그녀를 방대에게 고스란히 바칠 수 없었다. 충분히 충고했고 어떤 경악할 상황이 벌어질지 예상도 넉넉하게 설명했다. 내 책임은 없었다.
“먹어라, 빵.”
여동생에게 빵 봉지를 건넸다.
“미쳤어? 안 하던 짓을 다 하네.”
“고맙다고 해야지 미쳤다니? 고약한 말버릇 좀 고쳐라.”
“짠돌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해?”
여동생은 싱글싱글 웃으며 봉지에서 빵을 꺼냈다. 시나리오의 가장 불리한 설정은 언니가 희라와 유사한 성향이라는 것이다. 전쟁은 아득한 옛일이고 체제경쟁은 오래전에 끝났으니 굳이 비판적인 시선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 그런 관점은 평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나태함으로 이어지고 위협은 항상 있지 않느냐는 반론을 펼칠 수 있다.
온갖 미사일과 방사포탄이 느닷없이 눈앞에 닥쳐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산산이 부숴버리는지 골백번 얘기할 수 있다. 게다가 구석에 몰린 생쥐가 무섭게 돌변해 고양이를 물어버리는 호전적인 태도를 알지 않느냐. 그런 잠재적 성향을 탈북해서도 버리지 못하고 방향을 바꿔 북쪽을 향해 전단지 날리는 등의 도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느냐. 논리를 펼칠 수 있다.
더하여 탈북자 시어머니와 중국인 시동생과 마주쳐야 하는데 희라는 어찌어찌 감당한다고 해도 언니는 어쩔 것인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친인척들은? 총체적 난국이다. 푸짐하게 늘어놓을 수 있다. 방대가 우이암에서 죽을둥살둥 희라를 업고 내려온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겉만 번지르르할 뿐 알맹이는 형편없어서 그런 것이다. 어릴 때 만들어진 사고방식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 죽을 때까지 간다. 사사건건 그녀와 부딪칠 것이다. 희라의 하소연을 들을 때마다 뒤늦게 내 충고를 떠올릴 것이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레퍼토리는 푸짐했다. 자신감이 솟아났다.
“그래서요?”
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무덤덤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당황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일어날 일들에 대해 어쩌면 이토록 무감각한지 놀랄 정도였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 있다는 막연한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무관심할 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희라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겁니다.”
“민수 씨가 왜 이런 말들을 하는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추하게 보여요.”
“네?”
변명이 필요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타올랐다. 희라가 뒷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턱대고 저지르는 타입이라고 해도 언니는 중심을 잡아주어야 하지 않나. 앞뒤 생각 없이 살아가면 도대체 어쩔 거냐. 호통이라도 쳐야 하지 않느냐고 언니에게 말해야 하나.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다시 풀어나가야 할지 암담했다. 하얗게 덧칠해진 머릿속은 까맣게 바뀌었다. 대화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부분은 항상 전체의 일부가 아니에요. 아웃사이더는 어느 사회에나 있어요. 민수 씨가 말한 우려가 현실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희라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살면서 누구나 예외적인 경우를 맞닥뜨리잖아요. 가족이 감당할 몫이 분명히 있겠지요. 하지만 누구보다 희라의 몫이 커요. 희라가 이겨낸다고 하면 가족은 믿어줘야 하지 않나요? 자식 이기는 부모 봤어요?”
언니는 단호하기까지 했다. 괜한 허튼짓을 했다는 후회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언니를 반드시 설득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휩싸였다.
“눈앞에 있는 불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거잖아요? 제정신이 아니고서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희라는 새로운 길이라고 여길지도요. 그래서 가겠다는 거겠죠.”
“네?”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 언니가 야멸차다 못해 뻔뻔스러웠다. 동생의 일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고 덤덤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동생이 탈북자를 데리고 오면 젖 먹던 힘까지 뽑아내 악다구니를 쏟아낼 터인데 확실히 낯선 반응이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어요. 인정하는 게 기본이 아닌가요?”
되치기를 당했다. 나만 고자질쟁이에 더해 이간질하는 놈이 되어버렸다. 비참함이 몰려왔다.
“친구로서 걱정스럽다는 건 인정할게요. 하지만 지나치면 참견이 되니까 조심해야겠죠?”
“네?”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지켜봐요. 민수 씨도요. 요즘 둘이 데이트하는 모양인데 희라는 행복해 해요. 희라는 민수 씨가 말한 내용을 알고 있어요. 결혼하면 스릴이 있겠죠. 나와 달리 강심장이니까 이겨낼 거예요. 내가 길길이 날뛰면 역효과만 있을 거고.”
언니는 덤덤하게 말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분명히 드러냈다. 충고가 불편한지 아니면 방대의 가족사가 염려스러운 것인지 아리송했다. 귀가 얇아 내 얘기에 홀라당 넘어가 쥐 잡듯이 희라를 몰아세우는 것도 언니로서 쉽지 않았다. 내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다 쏟아내면서 방대를 욕해도 이상할 터였다. 언니가 흥분까지 한다면 쇼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천박하게 보이고 신뢰감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생각보다 노련하게 나를 대하는 언니의 태도에 놀랐다.
“중국인 시동생이라 마음에 걸리네요.”
“네?”
“말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변수가 될 것 같네요. 원망을 품고 있으니.”
“저도 그게 가장 걱정스럽습니다.”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서로를 알아가는 데이트라 결혼까지 갈지 알 수 없고요. 결혼 전에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되겠지요. 희라도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가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언니는 도리어 나를 안심시키려고 말해서 헛수고하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충고이지만 참견에 가깝게 받아들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충고하는데 되레 위로받는 엉뚱한 상황이 되었다. 뭔가 얻은 것도 같지만 막상 손을 내려다보면 맨손이었다. 허탈감이 밀려왔다.
“얘기도 다 했으니 이만 갈까요?”
언니가 먼저 일어섰다. 엉거주춤 일어나 카페를 나왔다. 카페 앞에서 헤어지자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나. 후회가 밀려왔다. 빈손을 탁탁 털면서 언니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쳤는지 걱정했다. 고자질쟁이에 말전주꾼으로 낙인을 찍었을까. 마땅히 해야 할 충고를 아낌없이 한 친구로 기억할까. 희라를 일방적으로 사랑해서 선 넘는 무모한 참견을 스스럼없이 하는 이기주의자로 볼까. 골똘히 더듬었다. 언니의 속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속 시원한 말조차 듣지 못하고 집으로 가자니 찜찜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으면 예상해서 경고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빤히 알고 있으면서 친구로서 왜 입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은 피할 수 있다. 친구로 남아 여전히 희라의 주변에 있다면. 바람은 어제와 다름없이 무심하게 은행나무 가로수 잎사귀를 흔들고 나보다 앞서 걸어갔다. 늦여름인데도 따가운 햇살에 짜증이 났다. 돌아보면 방대가 나타난 순간부터 되는 일이 없었다.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할 수 있는 일이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언니를 만나 어찌어찌 얘기했지만 희라의 아버지를 만날 용기는 없었다.
오직 희라의 선택만 남았다. 언니는 충고를 동생에게 말할 것이고 모임에서 반응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기다리는 일이 전부였다. 출근해 일거리를 들고 있어도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방대와 테이트 한다고 했다. 피 말리는 시간이 지나고 일찌감치 동숭동으로 향했다. 늘 만나던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마음에 가득 쌓인 불안과 근심을 덜어내고 흔들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입술도 요리조리 움직여 얼굴 근육을 풀었다.
모임 하루 전에 전화가 없으면 참석하는 것으로 약속한 터라 최대한 느긋하게 마음먹었다. 취업하기 위해 최종면접을 기다리는 것처럼 긴장과 떨림이 쌍으로 요동쳤다. 이런 상태로 희라를 기다려보기는 처음이었다. 방대가 나타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졸업 후에도 관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취업하고 나서 고백하고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하다가 때가 되면 결혼할 계획이었다. 불과 두어 달 남짓 후에 방대가 끼어드는 바람에 계획은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방대의 잘생김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거지도 잘생기면 비럭질이 쉽다고 했다.
“일찍 왔나 보네.”
희라였다. 옆에 방대가 서 있었다. 둘이 함께 도착하는 경우는 없었다. 중간에 만나 함께 온 걸까. 이른 아침에 만나 박물관 데이트하고 난 뒤에 왔을지도 몰랐다. 의혹은 거침없이 가지를 뻗어 추측에 힘을 보탰다. 방대의 의식 밑바닥부터 역사를 다시 세우기 위한 박물관 데이트는 그녀의 치밀한 계획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편견 위에 덧씌워진 역사는 스스로 구부러지고 뒤틀릴 터였다. 광화문에 앉아 있는 동상은 거리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다는 인식 위에 한글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광주와 공수여단이, 응원봉과 녹두장군도 넘지 못한 남태령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같이 왔어?”
“그렇게 됐어. 신경 쓰지 마.”
희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뜻으로 손을 휘졌고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무심코 넘겨도 될 물음에 몸짓까지 덧붙이는 것으로 보아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 굳이 박물관이 아니어도 함께 있었다. 둘이 데이트한다는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희라가 창가 자리에 앉자 방대는 의자까지 끌어당겨 자연스럽게 그녀 옆에 앉았다. 상실감이 눈앞에 있었다. 눈망울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마음이 헛헛해지면서 입안이 바짝바짝 탔다. 씁쓸했다. 내색할 수 없었다. 방대에게 패배했다고 드러내 놓고 인정하는 꼴이었다. 스스로 무너질 수 없었다.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도 있지.”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 마.”
희라의 물음을 무시하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오가는 버스와 거리의 사람들이 낯설었다. 동숭동에서 많이 보이는 젊은 커플들이 오늘따라 유독 눈꼴시렷다. 좋아 죽겠는지 옆에 찰싹 달려 붙어 몸뚱이가 두 개인지 하나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물고 빨고 핥으면서 얼마나 지랄발광했을까. 희라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방대가 슬며시 오른손을 뻗어 가다듬었다. 내가 빤히 보는 앞에서. 그녀는 싫지 않다는 표정으로 짧게 방대를 흘겨보았다. 방대는 나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씨익 지었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것들이! 속에서 묵직한 덩어리가 쑤욱 올라왔다.
저 정도면 모텔은 열댓 번 들락거렸을 것이다. 몸뚱이 구석구석을 탐색해 성능이나 기능장애를 검증했을 터였다.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욕망을 혓바닥이나 손가락으로 혹은 엉덩이로 모조리 쏟아내고 난 뒤에도 미련이 남아 아쉬워했을 것이다. 추측을 거기까지 밀어 올리자 견디기 힘들었다. 언니가 희라에게 충고를 했을 터인데 태도 변화가 없으니 이상했다. 얘기하지 않았거나 흔한 장애물에 지나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확인하기 위해 은근슬쩍 옆구리를 찔렀다.
“언니는 잘 계셔?”
“데이트하기 바빠. 오로지 직진이야. 예비 형부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예비 형부? 그 정도로 진도가 나갔어?”
“지난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한 것도 형부가 집에 온다기에 자리를 비울 수 없어서. 언니가 마음에 들어 하니까 무조건 찬성이지.”
희라가 방대를 보는 눈빛은 따뜻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언니는 내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자신의 연애에 빠져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부모님과 상의하면서 방향을 정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직접 얘기하면 분탕질하는 속 좁은 놈으로 찍혀 판을 뒤집어엎을 기회 자체를 잃어버릴 수 있었다. 방대가 스스로 말할 가능성도 없었다. 중국인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지만 곧 입국한다는 것을 털어놓아 희라가 혼란에 빠지게 하지 않을 터였다. 결혼식 전까지 숨겨두었다가 식장에 나타나면 희라도 어쩔 수 없을 거라는 계산은 충분히 했을 것이다.
예상과 달리 중국인 동생은 폭탄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 영향이 있겠지만 희라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슴 안 응어리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에게 향한 것이고 어머니는 기꺼이 감당하겠다고 다짐하기에 품 안에 두려고 할 것이다. 어머니는 방대에게 향할 수 있는 중국인 동생의 모든 위험을 막을 터였다.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추론해야 했다. 분명한 것은 바람 잘 날이 없는 시댁이다. 어머니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방대가 희라를 위해 본가와 왕래를 끊지는 않을 터였다.
“축하할 일이네.”
“힘든 때를 이겨낸 보람이야.”
“꽃길만 남은 거네. 예비 동서를 만나고 싶네.”
방대의 활짝 웃는 얼굴이 밉상이고 싫지 않은 눈빛을 쏘아붙이는 희라도 예쁘지 않았다. 예비 동서? 김칫국도 적당히 마셔야지, 배탈이 무섭게 찾아와. 속으로 구시렁거리는 짓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내일 일은 아무도 몰랐다. 언니가 연애의 달콤함에 빠져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해도 언제까지 입 닫고 모른 체 할 수 없을 터이고 부모와 상의했다면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빠를수록 좋지만 결혼식 뒤에도 희라와 갈등은 멈추지 않을 게 분명했다. 가족과 연결된 문제였다. 최악이지만 그때도 희라 옆에 서 있을 터였다.
“이걸 보면 좋겠어.”
희라는 공연 브로슈어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몇몇 문장과 낯익은 배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봐도 코믹 풍의 로맨틱 연극이었다. 가벼움 속에 얼마나 재치 있게 무거움을 담아내는지 알 수 없지만 흥미가 당기지 않았다.
“재밌다고 하더라. 연인이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을 쟁취한다는 내용이야. 멈출 수 없는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대. 맘껏 웃다가 눈물이 찔끔 난다니까 이걸로 정하자.”
“찬성에 한 표!”
방대가 대뜸 고개까지 끄덕이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한다? 부모를 굴복시키고 결혼한 경우는 흔하지만 삐걱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위태로워서 그 끝은 파국이었다.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잔혹한 현실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는 연극일 것이다.
“다수결이니까 결정된 거네.”
희라가 나를 쳐다보았다. 연극을 통해서 예방주사를 맞겠다는 완강한 의지가 눈에서 반짝거렸다.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때도 있지만 공연 정보를 인터넷에서 찾거나 수소문해서 관람을 주장했다. 결정권은 언제나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 방대의 고백 이전이면 기꺼이 동의하고 선뜻 따라나섰을 터이지만 판이 기우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이상 내키지 않았다.
“양쪽 집안에서 반대하는 이유가 정반대야. 한쪽은 웃음이 불온하다고 믿는데 다른 쪽은 건강의 선물이라고 믿는 집안이야. 재미난 장면이 많대.”
“이 정도면 스포일러야. 인제 그만.”
방대가 희라와 눈을 맞추면서 싱긋 웃었다. 내가 보라는 의도적인 웃음이었다. 운동장은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졌으니 포기하라는 메시지였다. 불쾌했다.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도 패배를 인정하는 짓이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앞서 일어난 둘은 바로 내 코앞에서 팔짱을 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카페를 빠져나와 거리를 걸을 때도 팔짱을 풀지 않았다. 형편없이 망가진 기분으로 연극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핑계가 필요했다. 가는 신음을 내고 허리 굽혀 천천히 주저앉으며 배를 움켜쥐었다. 희라와 방대가 뒤돌아보다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왜 그래?”
“배 아파?”
“아침에 먹은 게 아까부터 속이 좋지 않더니 배탈인 모양이야.”
나는 괄약근에 힘을 주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설사야?”
“나올 것 같아?”
“너희 둘이 그냥 가라. 설사인데 연극은 보긴 어려울 것 같아.”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설사라잖아? 화장실이 먼저지.”
“근처 화장실에서 해결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가라. 시간도 거의 됐잖아?”
“정말 괜찮은 거지?”
“어서 가. 내가 빠져도 상관없잖아.”
희라와 방대를 보내고 일부러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뒤돌아볼까 싶은 노파심이 있었다. 건널목을 건너 소극장이 있는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금씩 어기적거렸다. 사람들 발걸음은 부산스러웠고 조금씩 기울어지는 햇살은 한층 느슨해졌다. 기분은 너덜너덜하고 의지와 달리 희라와 마음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지랄! 세상이 폭삭 무너져도 원망하지 않겠어! 나는 급격하게 침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