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진짜 설사일 거야.”
방대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꾀병이야. 하루 이틀 만나?”
“진짜일 수 있잖아?”
“절대! 너랑 팔짱을 끼니까 배 아팠던 거지.”
다시금 느끼지만 꾀병을 눈치채지 못하고 받아주니 방대는 착했다. 팍팍한 직장생활에 시달리다가 토요일마다 꼬박꼬박 매포에 내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젊은 사내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마보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소한 염려는 있으나 충분히 이해했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혜산에 있었을 거라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끼다니! 누가 당연함에 고마움을 갖던가.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비난할 수 없었다.
“깜짝 놀랐어. 민수가 빤히 보는데 잔인하잖아?”
“관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어. 어중간하면 뒤탈이 있을지도 몰라.”
“나중에 말로 하면 되잖아?”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확실해. 미련의 싹을 단번에 잘라버려야지. 전화한다거나 잘 보이려고 안간힘 쓰는 짓도 시간 낭비라고 깨닫게 해야지. 정신이 확 들었을 거야.”
“결단력이 있어 좋긴 한데 민수를 배려하면 더 좋았을 거야.”
“그건 네 생각이고.”
“민수 입장에선 함께 한 시간도 있고 추억도 있을 텐데.”
“미련의 싹을 잘라버려야 뒤탈이 없어. 친구 이상은 아니라는 확실한 신호가 필요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놀랄 정도이니 민수는 오죽하겠어?”
“끝난 일이야.”
민수 문제로 방대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하찮은 일로 다투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나를 두고 민수와 달리기 경주하듯 서로 앞서가려고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붓는 것을 곧잘 보았다. 승부는 났고 패자는 깨끗이 승복해야 한다. 방대가 단순히 승자의 여유에서 민수를 걱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둘도 없는 친구이니 마음 씀씀이가 남다를 수 있었다. 워낙 착하니까 친구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남자에게 친구 없는 삶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홀로 건너는 무모한 짓들로 가득 찬 하루들이다. 더구나 방대는 은밀한 과거를 민수와 나눈 사이였다. 방대의 사정을 고려해서 야멸차게 치고 나가야 했다. 빙판길에 엎어져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할 때 선뜻 손을 내밀어준 녀석이지만 고마움을 내내 마음에 담아 둘 필요는 없었다. 벌써 몇 년 전이고 그동안 만나면서 말동무도 해주고 미모로 마음도 설레게 해주었다. 빚은 없었다. 흑백의 세상을 천연색으로 만들어 주었으니 민수가 고마워해야 했다.
“중국인 동생이 있다며?”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움츠리며 이어 말했다.
“몸집이 작은 남자가 민수지? 지난번에 우이암에 같이 갔었잖아.”
“걔가 얘기했어?”
“고민을 엄청나게 한 모양이더라. 중국인 동생이라니, 놀라워.”
“슬픈 일이야. 어머니가 서울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중국에서 낳았데.”
“방대도 중국인이겠네?”
“아니야. 혜산에서 태어났으니까.”
“형제가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고 국적이 틀려? 말이 되지 않잖아?”
“씨 다른 형제니까.”
언니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버지가 다르다는 거네? 방대를 낳고 재혼해서 동생을 낳았다는 거네.”
“엄밀하게 말해서 재혼이 아니라 매매혼이야.”
“요즘 세상에 매매혼이 있어?”
“중국에선 흔해. 차이리라고 신랑이 신부 쪽에 돈을 줘. 방대의 어머니는 매매혼이기도 하지만 돈을 브로커가 받았으니 팔려갔다고 할 수 있어.”
“팔려가? 사람인데?”
언니는 충격을 받아 놀라움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어진 입을 닫지 못했다. 믿을 수 없어 고개 저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이주하려 했는데 중간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한마디 말도 없이 팔았다는 거네?”
“정확해.”
언니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방대의 흠집을 찾는지 혹은 카사노바를 떠올려 가까스로 아문 상처를 들춰내는지 불안한 눈빛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불쌍해. 남자가 항상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데 왜 여자가 피해를 봐? 너무 불공평해.”
언니는 분노와 서글픔이 뒤섞인 표정으로 바뀌었다.
“옛날보다 조금도 나아진 게 없어. 공녀가 고향에 돌아오면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 죽으라고 이구동성으로 압박했잖아? 오랑캐의 씨를 낳았다고. 위안부는 어때? 숨어 살거나 현지에 머물 수밖에 없었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똑같아. 손가락질하고 욕하고. 지들이 뭔데? 불알 달린 게 대단한 벼슬인 줄 아나!”
“방대가 무슨 죄가 있어? 얼마나 많은 방대와 중국인 동생이 우리 역사 속에 있는 걸 생각해 보면 마음이 아파. 숱한 방대들의 어머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옛날과 달라져야 해. 달라야 하고.”
나는 흥분하면서도 찬찬히 말했다. 언니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어서 들어가.”
놀이터의 땅거미들이 조금씩 짙어졌다. 방대의 입김이 뺨에 닿았다. 가벼운 뽀뽀였다. 방대는 포옹을 풀고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불 꺼진 어두운 거실 통유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언니는 데이트 중인가 봐?”
“어린애가 아니니까.”
“민수는 다음 모임에 나올까? 상처받았을 거야.”
“별걱정을 다 하네. 무슨 남자가 새가슴이야? 착한 것도 병이야. 매몰차야 할 때 피하지 말아야 해.”
“알았어. 어서 들어가.”
“오늘도 매포에 갈 거야?”
“가야지.”
“잘 다녀와. 전화하고.”
아파트 동 출입구에서 뒤돌아보았다. 방대는 놀이터 그네 옆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어서 가라고 손을 크게 휘저었다. 어떤 때는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거실에서 내려다볼 때까지 놀이터에 서 있기도 했다. 지금 매포로 간다고 해도 밤늦게 도착할 것이다. 형편이 넉넉지 않던 학생 때는 동네 한 바퀴를 둘러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원룸을 구석구석 청소한다고. 쓸고 닦고 정리 정돈 하고 다시 쓸고 닦고를 무한반복 했다고. 혼자 있지 않다는 표식을 해두어야 마음이 편해졌다고. 어머니가 집 안을 늘 깨끗하게 청소하기에 깨끗한 원룸을 보면 어머니가 있는 것 같다고. 그 외로움과 쓸쓸함이 느껴졌다.
나는 와락 방대 위로 올라갔다. 모텔의 취침등도 숨죽였다. 방대의 아랫배에 엉덩이를 올려놓고 얼굴을 내려다보자 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귓불과 뺨과 눈두덩과 목덜미와 가슴팍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방대는 말없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방대의 외로움과 아픔도 내 것이라고 믿었다. 혜산에서 서울까지 두렵고 무서운 긴 여정을 묵묵히 해냈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목숨이 늦가을 나뭇잎처럼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을 대하듯 몸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핥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방대의 몸도 내 몸도 서서히 뜨거워졌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몸속으로 들어오는 방대를 따뜻하게 부드럽게 맞이했다. 절정에 닿자 이념도 온갖 논리도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또렷하게 보였다. 취침등은 횃불처럼 타올랐다.
언니의 데이트는 길어졌다. 거실 통유리 밖은 칠흑이고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들처럼 건너편 동의 창문들이 드문드문 반짝였다. 소파에 앉아 고요한 거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한차례 격정이 지나가고 모텔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이 시간 세상엔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있을 뿐 나머지는 모조리 하찮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파랑갱이냐 빨갱이냐, 손가락질하며 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는 짓거리는 더없이 치졸하고 옹졸했다. 방대는 옆으로 누워 젖가슴을 쓰다듬었고 나는 방대의 사타구니를 어루만졌다. 모텔 좁은 창문 밖의 밤은 차츰 이슥해졌다. 현관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는 피곤하지만 즐거운 여운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이었다.
“어쩐 일이야? 빨리 왔네?”
“매포에 내려가는 걸 알았거든.”
“벌써 챙기는 거야?”
“언니도 그러잖아? 오늘은 어땠어?”
“집에 가자고 하더라. 인사시키고 싶은 거 같아.”
“잘됐네. 다녀왔어?”
“아니. 갑작스러워서. 마음에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가자니까 당황했어.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나 어째야 한다나. 투덜거리더라.”
“말은 맞네. 뜸을 너무 들이면 고두밥이 돼. 밥알이 딱딱해져. 돌처럼.”
“다음 주에 가기로 했어. 닦달하지 말고 네 연애나 신경 써.”
“언니 따라서 어련히 할까 봐? 걱정 붙들어 매셔.”
“피곤해. 씻고 잘 거니까 엄마아빠는 네가 담당해라.”
언니가 피곤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연인이 가는 곳은 하나뿐이다. 화장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모텔 화장실에도 들려왔다. 샤워하고 나온 나는 침대 모퉁이에 걸터앉아 머리를 말렸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에 모텔 방 구석구석을 살폈다. 넓은 침대와 작은 화장대, 탁자 하나와 그 위에 칫솔과 콘돔이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을 때마다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두 번이나 뒹굴어도 꼭지는 단단했다. 화장실 문이 열리고 벌거숭이 방대가 나왔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닦고 내 옆에 앉았다. 싱그러운 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늦지 않았어? 방대가 물었다. 아니. 나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통째로 감싸면서 말했다. 방대는 옷 입을 생각이 없는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있다가 벌렁 누웠다. 나는 옆으로 고개 돌려 방대의 몸뚱이를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찬찬히 훑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넓은 가슴팍과 짙은 눈썹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사타구니 사이의 거뭇거뭇한 그것은 풀 죽어 고개 숙이고 있었다. 좀 더 쉬었다가 갈까? 내가 물었다. 늦지 않았으면. 방대는 낮게 대답했다. 어느 쪽에서 봐도 조각이야. 냉큼 방대를 올라타고서 말했다. 방대는 빙그레 웃었다. 손을 뻗어 젖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이념도 논리도 필요 없었다. 나는 쓰러지듯 방대의 몸을 덮쳤다. 사타구니를 주물럭거리자 방대는 내 귓바퀴를 핥았다. 시간은 멈춰 섰고 말은 필요 없었다. 도어락 버튼 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얘네들 말은 참 안 듣네. 피곤할 텐데 자라고 했잖아?”
“언니는 자요.”
“너도 자라고. 집 못 찾을까 걱정이야? 치매는 멀었어.”
“걱정되잖아요. 잠 잘 수 없는데 어떻게 자요?”
“극성이다.”
엄마는 화장실로 들어가 씻고 아빠는 소파에 앉았다.
“오늘 뉴스는 뭐냐?”
“언니 애인이 집에 가자고 했나 봐요.”
“박 서방이? 보기보다 똘똘한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싶으니까 그럴 만도 하네. 때가 되기도 했고.”
“저번에 우리 집에 왔으니까 당연히 저쪽 집에도 가야죠. 오늘 안 갔데요.”
“왜?”
“다음 주에 가기로 했데요.”
“그렇군. 너도 어서 자라. 난 엄마랑 침대에서 할 일이 있어.”
아빠는 빠르게 오른쪽 눈을 감았다 떴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불 켜지 않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민수가 떠올랐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도 굳건하게 대처하겠다는 결연한 표정은 가면이었다. 가면 안쪽으로 난감과 당혹감이 꿈틀거렸을 터였다. 그래서 배탈이라며 엄살을 떨었다. 창문 밖에서 어둠이 염탐꾼처럼 서성거렸다.
모텔 창문 밖에서도 서성거렸다. 형광등 불빛 아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격렬한 춤사위를 끝낸 벌거숭이 둘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기진맥진한 방대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웠다.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부산한 바람에 나뭇잎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새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두려움 없이 쏟아지는 햇살들은 온몸에 와 닿았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무화과는 탐스러웠다. 풀숲 속에서 사악한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똬리를 틀고 있어도 방대와 함께하는 세상이 열렸으니 상관없었다.
언니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간다고 했지? 그러는 편이 좋을 거 같아. 녀석의 물음에 대꾸하고서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으니 방대는 일어나지 못하고 앉았다. 고개 숙여 물끄러미 나와 눈을 맞추었다. 녀석의 눈망울은 크고 맑았다. 손바닥으로 허리와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짓궂게 손가락 끝으로 배꼽을 눌러보다가 젖꼭지를 툭툭 건드렸다. 아무래도 언니보다 빠른 게 좋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녀석의 부드러운 손길에 몸이 뜨거워질까 싶어 일어났다. 주섬주섬 팬티부터 차례로 입고 방을 나와 모텔 주차장으로 줄지어 들어오는 차를 피해 골목으로 내려섰다. 창문 밖보다 짙은 땅거미가 깔려 있었다. 방대와 팔짱 끼고 걸음 맞춰 씩씩하게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아라고 해요. 오빠와 가깝게 지내는 여자예요.”
그녀는 <여자>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단발머리에 분홍색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데다 얼굴도 동글동글해서 귀여웠다. 여명학교에 다닐 때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지아가 춘천에서 놀러 온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불쾌했다. 방대 말에 따르면 오빠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에 포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춘천에서 매포까지 먼 거리임에도 곧잘 다녀간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아 앞에서 방대를 차지한 승자임을 확실히 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딱히 꼬집을 수 없는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청첩장을 보내면 될 일인데도 굳이 결혼 전에 만나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혼자 만나면 되잖아? 놀러 온다니 재미있게 놀아줘. 언니가 날을 잡아서 정신이 없었다. 신혼집을 보러 다니고 이것저것 혼수 목록을 만들어야 했다. 아니야. 네가 있어야 해. 지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은 믿지 않아. 입 아프게 아무리 말해도 꼼짝하지 않아. 막무가내야. 매포에 와서 어머니 옆구리까지 찔렀어. 옆구리를 찌르다니? 무슨 말이야? 며느리로 어떠냐고 들이댔다는 거지.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말해. 말로 될 것 같으면 너한테 이러겠냐? 알았어. 이따가 봐. 전화를 끊고서도 황당함은 여전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고방식이기에 막무가내로 쳐들어온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탈북한 여자는 생활력이 강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로 앞뒤 상황을 깡그리 무시하는지 놀라웠다. 어이가 없었다.
“오빠가 향우회도 나오지 않아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사실 오빠는 향우회를 싫어해요. 고향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지아는 눈싸움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뭐라도 약점을 잡아내 다그치겠다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방대를 바라볼 때는 눈웃음까지 지었다.
“싫어한다기보다 꺼림칙하지. 시뻘건 사람들이 모여 작당하는 짓도 마음에 들지 않고.”
“고향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작당한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 달러도 보내잖아? 페트병에 쌀도 넣어 보내고. 마이크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하소연하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지아는 단호했다. 말 섞기가 껄끄러웠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민수의 말이 떠올랐다. 돌아가지 못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하는 고통도 짐작할 수 있지만 고향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신념에 갇히면 평범한 삶을 꾸려갈 수 없었다. 달러나 쌀을 보내는 행동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영웅화하는 짓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았다. 삐뚤어진 신념을 더욱 강화하기 때문이었다.
“향우회에서 명규를 만나도 귀찮게 치근대지 않지?”
“한동안 뜸하다가 얼마 전에 춘천으로 이사 왔어. 향우회 일 때문에 만나자고 해서 만났는데 아직도 날 보는 눈빛이 징그러워. 끈적끈적해서 질색이야.”
“얍삽한 놈이니까 조심해.”
“무슨 말이야?”
“이기적이고 약삭빠르고. 말은 번지르르한데 하는 짓이 보안원과 닮은꼴이야.”
“향우회 춘천 지부장이야. 연락처를 가지고 있더라고.”
“탈북민을 괴롭힐 거야.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향우회 일로 괴롭힌다고 하는 건 좀 맞지 않은 말 같아.”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암튼 조심해라.”
둘 사이에 끼어들어 한마디 할 작은 틈조차 없었다. 이제까지 알고 지내왔던 방대와 다른 낯선 느낌이 들었다. 속사정을 서로 빤히 들여다보는 경험을 나누어 가져야 할 수 하는 말들이었다. 방대가 명규를 혐오하는 이유를 굳이 알 필요도 없고 향우회가 무슨 일을 계획하던 관심 밖이었다. 민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조목조목 짚어 가며 따지거나 반론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지아에게 내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일이기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책임비서는 여전히 바쁘지?”
“요즘은 캐나다인지 영국인지 그쪽 인권 단체에 줄이 닿아서 기부를 받나 봐. 자금이 필요하잖아? 국내에서도 받지만 많을수록 좋잖아.”
“향우회에 자꾸 들락거리면 경계인으로 사는 거야. 한쪽 발을 여전히 고향에 걸치고 사는 걸 꼴이니까. 바라던 삶을 살 수 없다고. 다신 나가지 마.”
“나는 다르게 생각해. 어디에 가서 누굴 만나더라도 당당하게 얘기해. 강원도 이천 출신이라고. 창피한 게 아니잖아. 여기 사람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서 고향과 연대 의식이 없어. 태어나고 자란 땅을 아무렇게나 여겨. 그래선 안 돼. 핍박받는 고향 사람들을 생각하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
방대는 안타깝다는 표정과 함께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열 사람이 모이면 열 개의 우주가 보인다고 하더니 영락없었다. 탈북자로 사는 국민이니 경계인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방대의 말처럼 평범한 주민이 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고향을 버리지 못해서가 아닐까. 버리기는커녕 붙잡고 매달려 징징거릴수록 보통 사람에게 욕먹는 탈북자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과연 버릴 수 있을까. 태어나 자라면서 몸에 붙은 말버릇과 습관과 입맛과 사고방식이 고향의 것인데 이주해 왔다고 버려질 것들이 아니었다. 방대는 지아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 어쩌면 방대도 말과 다르게 미처 버리지 못한 조각들이 있지 않을까.
“향우회에 가지 않는 이유가 경계인으로 살기 싫어서야. 두 발로 어정쩡하게 이쪽저쪽 나누어 딛고 있으면 죽도 밥도 아니야. 고향을 배신하고서도 배신하지 않았다고 발버둥 치는 짓들이잖아? 끼리끼리 모여 풍선을 날리고 마이크가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헐뜯잖아?”
“오빠는 이상해. 그게 우리 정체성이야. 역할이라고.”
“아니야. 네가 딛고 선 땅이 정체성이야. 고향은 너무 먼 곳에 있어. 돌아갈 수 없으니까 이 땅에 적응해서 이곳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지. 끼리끼리 모이면 답이 없어.”
분위기가 말다툼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난감했다. 방대도 지아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치도 물러섬이 없이 당장이라도 부딪치겠다는 자세였다. 사이좋게 지내는 사이라더니 황당했다.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지아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내가 자리에 있는 줄 모르고 왔다가 눈앞에 앉아 있으니 심보가 단단히 꼬여 행패를 부리는 것일까. 차라리 오래전부터 방대를 점찍어 놓아서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내게 악다구니를 퍼붓거나 생떼 쓰는 편이 솔직했다.
방대가 없다면 그러고도 남을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앉아 있기가 거북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는 이유가 내 탓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둘 사이에 팽팽하게 긴장한 침묵이 흘렀다. 방대는 하릴없이 창밖을 내다보았고 지아는 고개 숙여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길어지는 침묵이 나를 짓눌렀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어색한 분위를 바꾸고 싶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언니, 예뻐요.”
지아는 한동안 고개 숙이고 있다가 느닷없이 말했다. 깜짝 놀랐다. 쳐다보는 눈빛도 조금 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고마워요.”
지아는 민수와 달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쪽을 선택했다. 방대를 따라다니며 속으로 수없이 아파한 마음을 헤아려보니 안쓰러웠다. 세상에 남자는 방대만 있지 않다고 다독거리는 위로가 비아냥거리는 말로 들릴 터였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담아 두었던 남자를 떠나보내면 고통스러울 텐데 부채질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힘든 시간을 견디고 나면 좋은 남자가 나타날 터였다. 결혼 준비에 정신없는 언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