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빤히 보는 앞에서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행패는 참을 수 있었다. 기껏해야 팔짱이니까. 그런데 친척들에게 인사를 한다?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입안으로 들어간 음식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맹물 씹는 기분이었다.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뷔페식당 밖으로 나가 집으로 가버릴 수 있지만 침울한 기분을 달랠 수 없고 쪼잔하다는 핀잔만 들을 터였다. 방대와 결혼하면 불행해질 거라는 충고를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 언니도 문제지만 아무리 콩깍지가 씌었다고 해도 희라의 선택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나? 아무리 곰곰이 따지고 손꼽아 헤아려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 그녀의 불행을 막지 못한 자책감마저 들었다. 희라가 불행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힘이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불행을 행복으로 물꼬를 바꿀 수 있다면 그녀 옆에 서 있어야 했다. 열불 나서 마음이 불안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속임수를 쓸 필요가 있다.
결혼할 날을 잡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녀라면 돌싱도 좋았다. 완고한 아버지를 설득하는 부담이 있으나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엄마까지 반대해도 문제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흔하다. 자식이 행복하다는데 팔 걷어붙이며 반대할 거냐? 희라가 아니면 어떤 여자와도 결혼은 없다. 일평생! 손자나 손녀를 볼 생각은 꿈속에서도 꿈꾸지 마시라. 밖으로 나돌며 삐뚤어질 테다. 황소고집을 내밀고 버틸 작정이었다. 단단히 작정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해?”
희라와 방대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내 선택을 똑똑히 봤지? 그녀의 눈빛이 내게 물었다.
“식탁마다 돌아다니면서 인사하니까 배불러?”
나는 비아냥거렸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싫었다. 방대에게 항복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판단이다. 일상에 숨어있는 복병은 수없이 많다. 예상조차 하지 못한 곳에서 불쑥 느닷없이 튀어나왔다. 방대나 희라에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계획은 언제나 계획을 무너뜨리는 함정을 숨기고 있다. 방대의 잘생김에 혼이 빼앗겨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지만 허구한 날 눈앞에서 얼쩡거리면 잘생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옆에 끼고 거리 걷기에 좋을지 몰라도 집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미리 먹었어. 많이 먹어. 방대야, 친구들한테 잠깐 가보자.”
희라는 다시 방대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누굴 식충이로 아나? 자제력을 잃고 순간적으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뜨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희라는 이미 등 돌려 친구들의 식탁으로 걸어갔다. 친구들 앞에 방대를 앉혀놓고 수다 떨기 시작했다. 그녀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언니가 신랑과 함께 식탁을 돌며 고마움을 표시할 때도 친구들의 주목을 받은 쪽은 방대였다.
“민수 씨도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와줘서 고맙습니다.”
나는 신랑의 인사말에 고개를 까닥거렸다. 언니와 신랑은 빠르게 다음 식탁으로 갔고 맛도 느끼지 못하는 음식을 입안으로 구겨 넣으면서 울화통을 식히기 위해 씩씩거렸다. 포만감이 차오를 때까지 희라와 방대는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찬밥 신세에 꿰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었다. 싱글로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잘 사는지 두고 보겠어. 앙심이 돋았다. 사람들이 거의 식당을 빠져나간 뒤에도 희라와 방대가 있는 친구들의 식탁은 변화가 없었다. 신상품 품평회라도 하는 거야? 방대를 앉혀놓고. 어이가 없었다. 비참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라야. 언니 결혼 축하한다. 난 가봐야 하는데.”
“벌써?”
“사람들이 다 갔어. 둘러봐.”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네. 얘들아, 다음에 또 보자.”
희라는 친구들과 인사하면서도 나를 친구들에게 소개하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 가자. 지난주에 만나지 못했으니 내가 쏠게.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어. 뒤처리를 마저 하고 갈 테니까 전화 줘. 어디에 있는지.”
희라는 뒤늦게 식사하는 부모님의 구석진 식탁으로 걸어갔다. 지켜보던 방대가 빠른 걸음으로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가 걸음을 맞추었다. 나는 한발 늦어 어쩔까 엉거주춤 망설였다. 그 사이 녀석은 부모님께 넙죽 인사했다. 나는 부모님을 보지 못한 척 서둘러 눈길 돌려 식당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인생 최악의 날이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모두에게 희라의 친구라기보다 방대의 친구로 여겨지고 말았다. 그림자였다.
자괴감이 들었다. 급기야 식장에 괜히 왔다는 후회마저 들어 기분은 더욱 참담했다. 약삭빠른 방대가 미웠다. 얼굴에 철판 깔고 친인척에게 인사하는 방대의 옆에 서서 나도 애인입니다, 인사할 수 없었다. 분명 미친 짓이다. 그러나 모임을 통해서 애인 노릇을 하지 않았나. 방대와 함께였으니 자격은 있지 않나. 돌아보면 방대의 고백 이후로 조금씩 희라와 엇박자가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방대에 대한 이념적 공격을 듣기 매우 거북한 엄청난 잘못으로 낙인찍었는지도 몰랐다. 후회한들 소용없었다.
“누가 누군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큰아빠에 외삼촌이며 숙모와 이모는 여전히 헷갈려.”
“나라 구하는 큰일을 하셨네.”
“삐딱하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네가 나라면 어떡할 건데?”
“섭섭했구나?”
“겨우 그 정도겠어?”
“신사협정을 맺었잖아? 깨끗이 승복하기로.”
방대의 물음에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용히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니 신사협정을 지키라는 압박이었다. 꼼짝없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희라가 방대를 친인척들에게 인사까지 시킨 마당에 그녀의 마음을 돌릴 방법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그녀가 스스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돌싱이라도 상관없다. 지금은 가능성 없는 예비 선수지만 여차하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믿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여전히 가까운 친구라는 자리는 중요했다. 선택하지 않아 미안함까지 느끼게 한다면 금상첨화였다. 미안함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
“축하해. 언니가 결혼식을 했으니 언제 한대? 희라는?”
확실히 뒤로 물러섰다고 말했다. 방대는 비로소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비굴하게 보였다. 마음보다 얼굴로 거둔 승리였다. 이념적 공격은 실수라고 해도 앞뒤 막힌 이념 아래에서 살았던 방대의 사고방식과 습관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간다고 해도 밑바닥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인 동생이 있는 등 복병과 함정이 득실거리는 가족사 속에 있었다. 방대와 희라가 부부로서 단단한 믿음을 쌓아 간다고 해도 언제까지 외부 충격을 견뎌낼지 장담할 수 없었다. 거대한 방파제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졌다. 요행을 바라는 치졸한 바람이라 생각을 숨겨야 하지만 달리 기댈 언덕이 없었다.
“모르겠어. 한 달일지 석 달일지. 준비할 것들이 많잖아? 언니 결혼을 준비하면서 예행연습을 했다고 하지만.”
“결혼이 작은 일은 아니지. 기둥뿌리도 뽑아야 하고. 평생 한 번 하는 거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사소한 것도 신경 쓰이겠지.”
“말이 어째 좀 이상하다. 한 번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니? 미련이 남았어?”
“리마인드 웨딩을 몰라?”
“리마인, 뭐?”
“부부 사이가 서걱거릴 때 신혼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결혼식을 하는 거지. 하객들 없이 웨딩사진을 찍는 거야. 식구끼리. 단출하게.”
“그런 것도 있어?”
“서울에 없는 게 뭐가 있겠어? 혜산과 달라.”
방대는 눈살을 찌푸렸다. 말하지 않아도 될 혜산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승자로서 충분히 귀에 거슬릴 터인데 녀석은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툼이 무의미하다고 여기는지 무시했다. 속을 긁어봤자 소용없다는 확실한 의사 표시였다. 쩝쩝. 입맛을 다셨다. 희라가 왔다. 언니의 결혼식이어서 보통 때와 다르게 공들여 화장한 그녀는 더욱 예뻤다.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방대 옆에 앉았다.
“앞으로 모임은 못 하게 될 것 같아.”
“왜?”
방대가 의아하다는 몸짓으로 고개 돌려 희라를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그녀의 행보였다. 둘이 만나기에도 시간이 빠듯한데 나까지 끼워 넣어 분위기를 망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졸지에 찬밥 신세로 내몰렸다. 패배를 인정한 마당에 무슨 말로도 투덜거릴 수 없었다. 나는 희라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방대는 못내 아쉽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친구로 붙잡아둘 수 없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셋이 만나다가 나만 따로 만나는 일도 어색할 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 대화가 없을 터였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겉돌아 서로 말이 어긋나기 마련이고 기껏해야 여자 얘기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 터인데 희라를 얘기하기도 어색하고 딴 여자는 결혼을 앞둔 방대가 꺼릴 것이 분명했다.
“모임은 소임을 다했으니 해체하는 거네.”
나는 희라의 속내를 빤히 보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모임의 결성을 주도했으니 해체도 그녀가 하는 것이 맞지만 몸에 익은 월례 행사가 없어지니 섭섭했다. 그녀의 말처럼 불필요한 모임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고집부릴 수 없었다. 게다가 셋이 만날 때마다 보릿자루 신세를 몸으로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러울 터였다. 친구로서 옆에 서 있겠다고 아무리 다짐해도.
“당분간 말이야.”
“그럼 그렇지. 그런데 왜?”
방대는 희라를 보며 물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했다.
“결혼 준비해야지. 아빠도 이참에 날 치워버릴 모양이야.”
“정식으로 인사도 하지 않았잖아?”
“절차는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너희가 결혼하고 나서 모이자는 거네?”
“한동안 바쁠 테니까. 매포에 가서 인사도 해야 하니까.”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급하게 먹으면 체한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희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미적거릴 이유가 없잖아? 세상에 제정신으로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 바쁘게 살다가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유부남 유부녀가 되어 있는 거지. 혼자여도 둘이어도 시간은 눈 깜짝하지 않잖아?”
틀린 말도 아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밀려오는 걱정이나 우려를 뒤로할 수 있었다. 결심했음에도 이것저것에 잣대를 들이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골칫거리가 덮쳐왔다. 다만 결혼 뒤에 감당할 수 있느냐 없느냐 차이였다. 지금은 문제지만 나중에 골칫거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반대로 지금은 불거지지 않지만 나중에 결혼생활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앞날은 지금을 기준으로 예상할 수 없었다. 방대가 고백했을 때 이념적 성향을 문제 삼은 것이 결정적인 실수인 것처럼. 잘생김이 이념을 이겨버린 것처럼.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니까 너희가 상의해서 잘하겠지. 미리 축하해.”
“날은 잡지 않았지만 빨라도 두 달 정도 생각하고 있어. 올 거지?”
“당연히 와야지. 친한 친군데.”
“연차 내지 않도록 해주면.”
“그동안 아껴둔 걸 몽땅 써야 할 걸.”
방대가 음흉하게 지그시 웃었다.
“왜? 너희가 결혼하는데 피 같은 연차까지 쓸 일이야?”
“신혼여행도 같이 가야지.”
희라는 방대의 말에 눈을 흘겼다. 마땅찮은 표정도 지었다. 방대는 이내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둘이 그동안 얼마나 데이트했는지 알 수 없지만 녀석은 그녀에게 꽉 잡혀 있었다. 평화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녀석도 약삭빠르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혜산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농담도 지나치네. 내가 신혼여행까지 따라가면서 뒤치다꺼리해야겠냐? 자기 똥은 알아서 스스로 치워.”
“그런가?”
“당연하지.”
“집들이 때 파티면 되지 신혼여행을 데리고 가냐?”
희라는 방대를 핀잔했다. 아쉬운 얼굴빛이 여전히 남은 방대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대가 무슨 꿍꿍이로 나를 데리고 가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끝까지 승자로서 뽐내고 으스대고 싶은 걸까. 마당쇠로 데리고 다니고 싶은 걸까. 내가 신나서 냉큼 따라나설 줄 알았을까.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설마 희라를 공유하자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불경한 의도를 엿보이기만 해도 그녀는 가차 없이 단박에 방대를 차버릴 것이다.
“그거면 만족해. 친구로서.”
“그날 꼭 와. 오늘 왔던 친구들도 초대할 거니까 맘에 드는 애가 있을 거야.”
“잘됐네. 자연스럽게 만나면 좋아. 연애의 시작이 될 거고.”
방대는 승자의 배려처럼 말했다. 오늘 보았던 희라의 친구들은 모조리 도토리 키 재기였다. 느낌이나 떨림이 오는 여자가 없었다. 예쁜 여자는 자기보다 못생긴 여자들하고만 친구를 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귀신도 놀랄 일이었다. 자신만 더 빼어나게 돋보이려는 얇은 수작일까. 아니면 코드가 맞다 보니 우연히 못생긴 여자일까. 시답잖은 의문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딱히 신경 쓸 일도 없었다. 시간은 나와 상관없이 흘러가고 제멋대로 흘러가든 말뚝에 매여 꼼짝 못 하든 관심 없었다. 내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파도였다. 오늘까지만 처절하게 상실감을 맛보고 내일부터는 희망의 싹을 틔워야 했다. 하늘이 무너졌다고 믿을 만큼 바보도 아니고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마음이 아플까.
최전선 철책에서 경계 근무로 군복무를 마친 뒤 복학하자 숱하게 미팅하며 홀라당 시간을 까먹은 뒤에야 무얼 먹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학점은 형편없고 졸업한 선배들을 봐도 대기업은 꽁무니도 따라갈 수 없었다. 입사지원서를 내도 서류전형에서 떨어질 판이었다. 중소기업도 만만하지 않았다. 군 생활하면서 멈춰버린 머리는 화석보다 단단했다. 한 달 내내 온갖 궁리를 했지만 떠오르는 살길은 없었다. 잘하는 것도 없고 자랑할 재주도 없었다.
부사관으로 재입대할까 고민하다가 9급 공무원을 준비하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종강하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밤사이 함박눈이 자주 쏟아졌다. 첫날은 열람실에 앉아 있기조차 힘들었다.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주위 여자들에게 눈길이 자꾸 갔고 숨소리조차 숨죽이는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다.
보름쯤 지나 비로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늦은 아침에 버스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 오르막 진입로를 걸어 올라갔다. 아침이 훌쩍 지난 시간인데도 도서관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생각 없이 걷다가 서너 걸음 앞서 걷는 여자의 뒤태가 괜찮다며 사심 없이 감상하며 걸었다. 쾅, 소리와 함께 여자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보기 좋게 넘어졌다. 황급히 일어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었다. 잠시 뒤 또 넘어졌다. 미니스커트 뒤태를 감상한 답례라는 생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여자는 창피한 모양인지 두 손으로 얼굴부터 감싸다가 서둘러 짧은 치마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계속 앉아 있을 건가요?”
여자는 어서 잡으라고 까닥거리는 내 손을 말없이 잡고 일어섰다. 생각보다 예쁘장한 얼굴에 심장이 놀라 쿵쾅거렸지만 여자보다 먹고 살 방편을 마련하는 것이 먼저이기에 덤덤한 표정을 일부러 지었다. 여자도 도서관으로 갔다. 한 걸음 뒤에서 걸어가며 슬쩍슬쩍 엉덩이를 훔쳐보았다. 거기에서 멈춰야 했다. 먹거리를 위한 직업과 결혼을 위한 여자 중에서 우선순위는 분명했다. 여자가 있다고 해도 백수면 결혼은 사라졌다. 이름을 알게 되고 열람실 동지로서 전우애를 쌓으면서도 스스로 정한 선을 넘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자보다 취업이 먼저였다. 오직 그것만이 살 길이었다. 열람실 밖에서 만날 때도 이 잣대는 항상 지켰다. 열람실 밖에서 자리를 미리 맡아줄 수 있다고 제안하는 녀석을 만난 뒤에도 희라를 여자로 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항상 취업을 의식하며 짝사랑을 키웠다. 돌아보면 그때, 앞서 걷던 희라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지 않았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피식 웃고 지나쳐야 했다. 그랬더라면 방대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방대는 희라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넘어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잡는 순간이 지독하게 외로운 지금을 낳았다. 여느 아침과 다름없이 동 사무소로 출근하는 시간은 물론이고 온갖 잡무를 처리하는 근무 중에도 우울과 자학이 깊어졌다. 말수는 급격히 줄어들고 표정은 굳어져 딱딱했다. 여러 미팅에서 서너 명 여자를 만났지만 헤어질 때는 무덤덤했다. 짧게는 두 달, 길게는 육 개월쯤 만나면서 탐색전과 고지전을 통해 서로를 알아갔고 숨겨둔 속살도 탐닉했다. 영영 헤어져도 마음 아프거나 밥맛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희라가 방대의 여자라는 현실 앞에서 돌싱이 되라고 저주를 퍼붓는 지지리 못난 놈이 되어버렸다. 극심한 무기력으로 한 달을 보냈다. 방대가 만나자는 전화를 몇 번 했지만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신혼여행을 함께 가자는 둥 설레발치면서 친구로 남겨두려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했다. 솔직히 빨갱이 친구는 달갑지 않았다. 짝사랑까지 빼앗은 놈이다. 신사협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단번에 인연을 끊을 수 없어도 시간을 두고 연락이 뜸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짝사랑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을 것이다. 격렬하게 몸을 달구던 욕망도 눈앞을 깜깜하게 만드는 간절함도 지나고 나면 휴지처럼 버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할 말이 있다니까. 전화론 안 되고.”
방대는 꼭 만나야만 한다며 절실함마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승자로서 패자 앞에서 뻐기는 짓을 또 하려고? 그 치욕을 다시 맛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피곤해. 하루 종일 민원인한테 시달렸어. 사람 상대하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는 것쯤은 알 것 아니야?”
버럭 짜증을 냈다.
“알아. 하지만 꼭 만났으면 해.”
“알았어.”
고작해야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고 자랑을 늘어놓겠지. 친구로 붙잡고 싶은데 달랑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는 것은 너무 성의 없는 짓이라 여길 테니. 약속 장소로 가면서 방대가 펼쳐놓을 얘기를 어떻게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에 마음은 묵직한 바위에 단단히 묶여 있는 듯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다잡았다.
“생각을 많이 해봤어.”
방대는 골똘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결혼을 앞둔 신랑의 얼굴이 아니었다. 파혼이라도 선언하나, 싶을 정도였다. 복잡한 집안 사정 때문에 희라와 결혼은 무리이고 지나친 욕심이라고 털어놔도 늦었다. 그녀가 물건도 아닌 데다 언니의 피로연에서 식탁마다 찾아가며 애인으로 소개한 터여서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었다. 언니가 파혼한 경험이 있어 부모님이 받을 충격은 상상조차 끔찍했다.
“뭘 생각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혼을 생각하고 있다면 뜯어말려야 했다. 차라리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설득할 참이었다. 돌싱이 현실로 다가왔으니 손뼉 치고 기뻐할 마음은 숨겨두었다.
“매포에서 올라온 뒤로 줄곧 혼자 살아서 둘이 살면 부딪칠 일도 있지만.”
녀석은 말을 끊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지간히 깊이 생각한 모양인지 쉽게 다음 말을 내놓지 못했다. 허공을 쳐다보다가 탁자 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이 있다고 확신했어. 탈북자의 개인적인 분노나 적개심은 혼란과 분란만 일으켜. 적대적 공생만 강화할 뿐이야.”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파혼 선언은 엄청난 기대치를 담은 단순한 추측에 불과했다. 실망했다. 예상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뜬금없이 적대적 공생이라니? 그게 결혼과 무슨 상관있나? 시쳇말로 희라와 결혼하니 통일 부부가 어쩌고저쩌고 설레발치려는 속 보이는 얘기를 늘어놓으려고 밑밥을 깔아두려는 걸까. 그것도 유복자의 아들인 내 앞에서. 눈 쌓인 능선을 오르내리면서 철책 너머가 우리 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적대적 공생을 강화하는 탈북자들의 노력을 방해하고 막을 작정이야. 향우회에 나가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향우회에 나가든 말든 관심 밖이다. 적대적 공생 어쩌고 떠드는 것 자체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식지 않았다는 뜻이다. 녀석의 탈북 고백을 듣자 퍼부었던 이념적 공격을 귓등으로 들었을 거라는 짐작에 허탈했다.
“평화적 공생을 오랫동안 하면 자연스럽게 신뢰를 쌓을 수 있을 것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을까 생각해. 희라와 내가 그랬듯이. 결국 결혼하잖아?”
고작 이런 시답잖은 얘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나? 말로 못 할 짓이 뭐가 있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녀석이 의도했든 어쨌든 자랑질이다. 어이없었다. 제까짓 놈이 무슨 힘이 있어서 풍선으로 달러를 보내거나 강화도에서 해류를 이용해 페트병에 쌀을 담아 보내는 향우회의 무모한 짓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지 한심했다. 적대적 공생에 기생하는 세력이 향우회뿐인 줄 아는 모양이다. 그밖에 얼마나 많은 세력이 있던가. 기득권 대부분이 기생 세력이지 않은가. 가깝게는 희라에게서 방대를 떼어놓으려는 나도 그중의 하나다.
“결혼을 평화적 공생으로 연결하는구나. 기발하게 신기하네.”
나는 비아냥거렸다. 평화적 공생은 전쟁과 약탈이 없었다면 가능할지 모르나 물 건너갔다. 꿈꾸는 건 자유지만 입 밖으로 뱉어내면 손가락질 받을 해괴한 발상이었다. 때린 놈은 발 뻗고 잠들 수 있지만 흠씬 두들겨 맞은 놈은 어떤가. 더구나 멀쩡하게 있다가 짝사랑을 빼앗겼으니 눈 뜨고 잠잘 판이었다.
“친구로 남아 줄 거지?”
“생각 중이야.”
“신사협정을 맺었잖아?”
“그건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거야. 탈북을 고백했잖아?”
“고민 많이 했어. 털어놓고 시작하고 싶었어. 다행히 희라가 받아줬고.”
“나는 고려 사항도 아니었구나.”
“그래서 말하잖아? 너와 다툼 없이 공생했으면 좋겠어. 친구로.”
“살다 보면 악연도 천천히 잊히는 거겠지. 아주 까먹진 않겠지만.”
나는 차갑게 말했다. 녀석은 친구로 남아달라는 항복을 받겠다는 투였다. 염치라도 있으면 이렇게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고 손해 보더라도 친구를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도 아니었다. 눈앞에 있으니 자신과 별다르지 않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착각이었다. 자신과 엇비슷하게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잇속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장에 올 거지? 다음 달 세 번째 주 일요일이야.”
“글쎄. 그때 봐가면서.”
“꼭 왔으면 해. 사회를 봐줬으면 하는데.”
“곤란해. 참석도 그때 봐서 여유가 있으면.”
방대는 듣고 싶은 말을 하지 않는 내가 야속한지 섭섭한 표정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친구 관계는 조금씩 어긋났다. 결혼 후에 모임을 다시 하자고 해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틈은 점점 벌어질 것이고 여자를 약탈당한 나는 오랫동안 상처를 가슴에 새겨둘 터였다. 방대의 잘생김에 홀라당 넘어간 그녀가 돌싱으로 다가와도 받아줄 마음이 이제는 추호도 없었다. 야유하고 잘못된 선택을 꾸짖고 매정하게 등을 돌릴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돌아온다는 추측은 망상일지도 몰랐다. 오히려 탈북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평화적 공생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건 말건 나와 상관없었다. 방대든 희라든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처받을 일이었다. 할 말이 더 있다는 듯 미적거리다가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에서 친구 관계가 끊어졌다는 방대의 절망을 읽었다.
“잘 가라.”
“집들이 땐 올 거지?”
“그때 봐서.”
방대는 끝내 빈손이지만 승자임을 확인했다. 표정은 씁쓸해도 발걸음은 씩씩했다. 녀석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해가 느릿느릿 서산 꼭대기에 걸리고 일찌감치 떨어진 은행나무 낙엽들은 잔바람에도 쫓겨 길바닥 구석으로 내몰려 투덜거렸다. 얼마나 깨를 볶으면서 잘 사는지 두고 보자. 느닷없이 오기가 치밀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