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현장의 서술양태

1950년대의 소설을 중심으로

by 이순직

1) 장면 겹치기(overlap)를 통한 휴머니즘 - 송병수의 「人間信賴」


이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진 서술양상은 장면 겹치기이다. 장면 겹치기는 하나의 장면 위에 또 하나의 장면을 포개어 놓는 것을 말하는데 사건 흐름의 시간적 순서에서 벗어나 시점이 시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한다는 측면에서 소급제시인 시간변조기법과 유사하다.① 장면 겹치기와 소급제시의 차이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겹치기는 현재 사건의 진행을 도와주는 반면 소급제시는 현재 사건의 흐름을 방해한다. 즉 현재 사건의 진행을 중단하고 과거 사건을 삽입하는 것이 소급제시라면 겹치기는 현재 사건이 중단되지 않고 연상작용을 통한 과거와 현재의 대비효과를 위해 사용된다. 둘째, 소급제시는 현재의 결과를 가져온 원인의 제시로써 일정한 양의 과거시간을 제시하는 속성을 가지지만 겹치기는 매개체에 의한 연상작용을 통해 비교적 짧은 과거 시간을 제시한다.


첫 번째 겹치기는 고량주에 취해 퍼붓는 총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적 고지의 벙커를 향해 달려가는 부분이다.


앞으로 가야만 했다. 앞에 쓰러진 무리를 밟고 넘어 자꾸자꾸 기어올라가며 그럴 때마다 거기를 옛날 고향에서의 죽마 경주장으로 착각하곤 했다. 쌍십절(雙十節)이나 중추절(仲秋節)이면 의례 장원(壯元)을 도맡았던 췌유였다. 그러한 자기로 자꾸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죽음이 두렵다고 뒤돌아 갈 수 없는 상황이다. 돌아서면 군관들과 별동대원이 따발총을 휘두르기 때문에 어차피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무기는 방망이 수류탄뿐이다. 이미 앞서 가던 많은 동료들이 시체가 되어 뒹구는 위를 기어올라가면서 언제 총알이 가슴에 박힐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췌유는 좋았던 고향시절을 떠올린다. “달린다”는 행동을 매개로 전쟁터에서 죽마 경주장을 연상한다.


그러나 연상 내용은 현실과 정반대이다. 가장 절박한 순간에 가장 행복한 순간을 대비시켜 놓음으로써 전쟁의 잔혹성이 부각되고 있다. 즉 서로 다른 성질의 내용을 병치함으로써 급박한 순간을 효과적으로 돋보이게 한다.


두 번째는 미군에 포로로 잡혀 허기에 짓눌리다가 과자를 얻어먹으면서 연상하는 부분이다.


중추절이면 주인집 퇴상이나마 멋대로 골라서 배불릴 수 있었다. 췌유가 가장 좋아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달짝지근하고 새콤한 중추병(仲秋餠)이었다.


고량주를 마시기 전에 점심으로 콩깻묵을 먹은 뒤로 하루 내내 굶었으니 허기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털보가 건네준 과자 하나가 매개가 되어 맛있는 것만 골라 배불리 먹던 과거를 연상한다. 음식을 매개체로 상반되는 현재와 과거의 상황을 나란히 겹쳐놓음으로써 대비효과를 획득한다.


세 번째는 은딱지와 검둥이를 차례로 업고 가면서 도련님을 연상하는 부분이다.


총부리 앞이 아니라도 그 지경이라면 은딱지를 업고 갈 사람은 마땅히 자기라고 췌유는 여겼다. 지난날 주인 도련님을 업고 하룻밤 꼬박이 걸은 적이 있었다.


지난날 밤이 새도록 주인 도련님을 업어다 주었듯이 덤으로 살아 온 자기 목숨이 다하는 데까지 검둥이가 바라는 곳으로 어디다 업아 주리라…


췌유 자신도 비행기의 폭격으로 부상당해 비틀대며 걸으면서도 은딱지와 검둥이를 업고 간다. “업고 간다”는 행동이 매개가 되어 주인집 도련님을 연상한다. 아군도 아닌 적군을 업고 적진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이타적 희생은 은딱지와 검둥이를 도련님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겹치기의 연상작용을 통해 동일시 현상이 일어난다. 이러한 동일시가 얻는 효과는 이타적 휴머니스트로서 췌유의 부각이다.


첫 번째와 두 번재의 겹치기는 상반되는 상황을 병치함으로써 전쟁의 여러 국면 중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잔혹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진다면 세 번째의 겹치기는 동일시 효과를 가져와 휴머니스트로서 췌유의 면모를 유감없이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겹치기는 연상작용을 빌어 잔혹성의 고발과 휴머니즘의 고양이라는 이야기의 의미를 매우 적절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하여 다음을 알 수 있다. 즉 인물의 연상작용을 통한 겹치기를 이용해 서로 상반되는 내용의 장면을 연이어 배치하여 대비효과를 얻으면서 동시에 인물의 휴머니즘적 사고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2) 의식의 중심을 통한 극한상황 - 오상원의 「猶豫」


이 작품은 6․25를 다룬 최초의 전쟁문학으로 보지만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렬하게 풍기며 긴박한 템포의 비정적 문체가 전쟁의 비정성을 재현하고 있다는⑥ 평가는 상당 부분 수정된다. 여기에서 엿보이는 전쟁묘사의 특징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렬하게 투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일체의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탈색되어 있다는 점에서 구해진다.


소대장과 적군 장교와의 관계가 붙잡힌 자와 붙잡은 자․죽는 자와 죽이는 자의 대립으로 짜여져 있어 어떠한 이념적 대립도 없다.⑦ 따라서 죽는 자와 죽이는 자의 대립관계 속에서 죽음의 극한상황에 내몰린 소대장의 의식을 통하여 실존인식에 접근할 수 있다.


소대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의식의 중심(center of consciousness)은⑧ 극한상황을 매우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한 시간 후면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손과 발이 돌덩어리처럼 차다. 허옇게 흙벽마다 서리가 앉은 깊은 움 속, 서너 길 높이에 통나무로 막은 문틈 사이로 차가이 하늘이 엿보인다.⑨


인용문은 포로로 잡혀 움막 속에서 정신을 차린 소대장의 의식에 떠오른 내면이다. 사상 전향과 목숨을 맞바꾸자는 제의를 받고 죽음을 선택한 직후의 심리가 “차다”라는 형용사를 통해 나타난다. 특히 “하늘이 차가이 엿보인다”는 한계상황을 맞닥뜨린 내면을 시각과 촉각을 동원하여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객관성보다는 주관의 절대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특히 자신의 죽음을 상상하는 부분은 온전히 의식의 중심 아래에 놓인다.


나는 빨가벗은 채 추위에 살이 빨가니 얼어서 흰 둑길을 걸어간다. 수발의 총성, 나는 그대로 털썩 눈 위에 쓰러진다. 이윽고 붉은 피가 하이얀 눈을 호젓이 물들여 간다. 그 순간 모든 것은 끝나는 것이다. 놈들은 멋적게 총을 다시 거꾸로 둘러메고 본대로 돌아들 간다. 발의 눈을 털고 추위에 손을 비벼 가며 방안으로 들어갈 테지. 몇 분 후면 그들은 화롯불에 손을 녹이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담배들을 말아 피고 기지개를 할 것이다.


미래시간을 사전제시하는 인용문에서 엿보이는 의식의 중심 서술은 의식 속에서 죽음을 기정 사실화함으로써 복선의 효과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실존적 인식에 닿을 수 있는 역할도 하고 있다. 서술자와 초점화자가 일치하는 서술상황에서 한계상황이 실존조명의 계기로써 작용할 수 있도록 의식의 중심을 차용하였다.


서술자와 초점화자가 일치하지 않는 삼인칭이 이야기의 중개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반면 서술자와 초점화자가 일치하는 서술상황은 중개성(mediacy)을⑪ 훨씬 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 「유예」의 분석에서 의식의 중심이 한계상황을 맞닥뜨린 내면을 드러내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이야기-시간과 담론-시간의 순서가 동일한 것을 標準的 繼起性이라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서 歷史記述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이야기-시간과 담론-시간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어 심미적 완성도나 강렬성(intensity)을 위해 표준적 계기성의 반대 개념에 속하는 時間變調的 繼起性을 이용한다.


시간변조는 소급제시와 사전제시로 나눌 수 있다. 遡及提示는 현재 사건의 진행 중에 과거의 사건이 끼여들어 현재 사건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서사기법을 말하고 事前提示는 현재 사건의 진행 중에 뒤이어 일어날 사건을 앞질러 제시하는 기법을 말한다.


② 송병수, 인간신뢰, 「사상계」, 1959, 12.


③ 송병수, 인간신뢰, 「사상계」, 1959, 12.


④ 송병수, 인간신뢰, 「사상계」, 1959, 12.


⑤ 송병수, 인간신뢰, 「사상계」, 1959, 12.


⑥ 이광훈, 폐허 위의 인간회복, 한국현대문학전집 33, 삼성출판사, 1981. 430쪽.


⑦ 이동하, 앞의 책, 153쪽 참고.


이동하는 「유예」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엿보이는 부분이 한 곳이라고 한다. 바로 다음 구절이다. “왜 동무는 법과를 선택했었소? 어렸을 때부터 동무는 출신 계급적인 인습 관념에 젖어 있었소. 그것을 버리시오.” 이러한 상식적 수준의 대사가 공허한 장식에 불과하며 진정한 이념적 고뇌와 전혀 관계없다고 주장한다.


⑧ 한용환, 앞의 책, 330∼331쪽 참고.


이 작품은 현대소설의 서술 특징인 의식의 중심을 부분적으로 채용한 작품이다. 의식의 중심은 이야기의 서술을 한 인물의 지배 아래 두는 서사기법 혹은 그 의식의 주체를 가리킨다. 말씨와 말의 습관 등 담론상의 특징들도 의식 주체에 속한다. 작가나 작가를 대리한 서술자가 권위 있는 정보를 가지고 독자들을 압도하는 전통적인 서사기법과 달리, 의식의 중심 기법을 채용한 작품의 서술자는 평범한 인간과 같기 때문에 그의 정보는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불안과 초조감 때문에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의식의 주체에게는 절대적인 성격을 가진다.


⑨ 오상원, 유예, 「한국일보」, 1955, 1, 1.


⑩ 오상원, 유예, 「한국일보」, 1955, 1, 1.


⑪ F. K. Stanzal, 김정신 옮김, 소설의 이론, 탑출판사, 1994. 18∼29쪽 참고.


중개성(mediacy)은 어떤 뉴스가 전달될 때나 어떤 사실이 보고될 때 중개자의 목소리를 통한 소격효과의 현상을 가리킨다. 중개성은 서술체(narration)를 구분 짓는 장르적 특성으로 이야기를 아는 사람(knower)과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sayer) 즉 초점화자와 서술자를 구분하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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