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는 육체적 불구와 정신적 불구로① 분류할 수 있다. 육체적 불구는 몸의 외부에 결함이 있거나 기능을 상실한 경우를 뜻한다. 정신적 불구는② 신체적·사회적·교육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결합해서 불완전한 정신상태에 이르는 경우를 가리킨다.
전후소설에 나타나는 정신지체의 불구는 전쟁체험이 직접적인 원인인데 동일한 정신적 불구라 하더라도 육체적 불구를 동반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으며 정신적 불구는 육체적 불구와 일정한 인과관계를 맺는다. 육체적 불구는 전쟁이라는 시대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정신적 불구자는 예외 없이 자기지향성을 상실하거나 혹은 매우 약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
즉 상황판단이 왜곡될 수밖에 없어 비정상적인 삶의 양상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인물의 불구는 왜곡된 전후현실의 불구성을 제시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손창섭의 경우 1950년대 현실의 황폐화 등 객관적인 현실의 탐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③ 평가나 절실한 자기의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끝내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④ 관점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공허한 존재상·자조적 위악·운명의 조작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허수아비적 행태 등의 패배주의 사상은 전쟁과 전쟁직후의 사회도덕적 공황과 내면적 파탄이란 세기말적 징후와 아주 잘 영합하여 우리 전후문학의 핵심적인 모티프를 제공한다는⑤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요소는 인물의 불구에 있다. 왜냐하면 소설은 궁극적으로 인물의 이야기인데 이야기는 인물이 놓인 상황이나 성격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1950년대 소설에서 육체적 불구는 대부분 전쟁을 원인으로 한다. 또한 육체적 불구에 뒤따르는 정신적 불구에 주목한다. 그러나 육체적 불구를 동반하지 않는 정신적 불구도 없지 않아 있어 전쟁의 정신적·심리적 충격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인물들은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회 속에서 정상적으로 생활을 해 나가지 못하고 부류하는 인간상으로 偏在해 있다. 불구적 인간상들은 전후의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무기력하고 폐쇄적인 삶의 자세 때문에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잉여적 인간의 존재로 머무른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객관적인 상황분석에 필요한 정신적 판단능력의 결핍으로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정신지체적 내면세계를 제시하는 손창섭의 「血書」가 있다.
둘째, 식민지 체험과 전쟁체험의 연속을 부자불구로 설정한 하근찬의 「受難二代」가 있다.
셋째, 아버지의 육체적 불구를 통해 전쟁의 피해의식을 다룬 하근찬의 「흰 종이수염」이 있다.
넷째, 상이군인의 육체적 불구와 정신적 불구의 상관성을 제시하는 이범선의 「자살 당한 개」가 있다.
다섯째, 정신적 지체자를 잉여인간의 개념으로 형상화한 손창섭의 「剩餘人間」이 있다.
여섯째, 전후현실을 인물의 불구성을 통해 형상화하는 손창섭의 「肉體醜」가 있다.
이외에도 서기원의 「戀歌」, 손창섭의 「生活的」과 「死緣記」, 김성한의 「彷徨」, 추식의 「人間除隊」, 이호철의 「破裂口」, 송병수의 「掌印」, 유주현의 「허구의 종말」, 정인영의 「나갈 길 없는 지평」 등이 있다.
「血書」에서는 감정과 행동의 통제가 어렵고 상황분석에 따르는 판단능력의 결핍이 원인으로 작용하여 대인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정신지체적 내면 세계를 읽을 수 있다. 정신지체가 사회적·문화적·심리적 요인이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전후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준석은 군속으로 전방에 있다가 다리 하나를 잃어 까닭 모를 모멸과 일종의 반항적 태도를 가진다. 구체적인 전흔인 육체적 불구가 정신지체로 이어지는 상관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상은 그르고 자신만이 옳다는 억지 주장을 펴는 것도 심리적․정신적 소외감에 빠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창애와 동침한 뒤 그녀의 임신을 놓고 벌이는 달수와의 논쟁에서 비논리적인 주장의 극단적인 형태를 읽을 수 있다.
“이 자식아. 창애의 배가 불렀건 꺼졌건, 그게 나하구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창애의 배는, 어디까지나 창애의 배지, 내 배는 아니다. 창애 배가 부른 게 어째서 내 죄란 말야.”⑥
자신은 아무 죄도 없으니 창애는 당연히 규홍과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결국 준석의 궤변은 달수를 병역기피자와 국적으로 몰아붙여 “자원 입대한다”는 혈서를 쓰도록 강요한다. 손가락이 절단되자 달수는 기절하고 준석은 한쪽 다리 대신 사용하는 지팡이로 언 땅을 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損壞感情의 과잉된 투사현상이⑦ 엿보이는 이러한 결말은⑧ 정신적 불구로서 정신지체가 대인관계의 단절로 의미 지어진다. 자아와 타인․자아와 세계 사이의 괴리감을 증폭하는 주된 원인으로 전쟁에서 비롯한 육체적 정신적 불구의 상관성이 놓인다.
「受難二代」는 연속하는 식민지 체험과 전쟁체험을 父子不具라는 독특한 설정으로 형상화한다. 징용으로 끌려가 팔 하나를 잃은 아버지 뒤로 다리 하나를 잃은 아들의 모습은 식민시대와 한국전쟁의 공통적인 수난을 제시한다. 상처를 준 역사의 의미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점은 충분히 심정적인 요소로⑨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결말은 지나친 순응주의에⑩ 앞서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읽을 수 있다.
만도는 아랫배에 힘을 주며 끙 하고 일어났다. 아랫도리가 약간 후들거렸으나 걸어갈 만은 했다. 외나무다리 위로 조심조심 발을 내디디며 만도는 속으로, 이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벌써 이게 무슨 꼴이고. 세상을 잘못 만나서 진수 니 신세도 참 똥이다 똥. 이런 소리를 주워섬겼고, 아버지의 등에 업힌 진수는 곧장 미안스러운 얼굴을 하며,
“나꺼정 이렇게 되다니 아부지도 참 복도 더렵게 없지.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더라면 나았을 낀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⑪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대를 이어 연속하는 불구는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의 전형적 형상화이며 민족사의 불행의 상징이다. 개인에게는 지속적인 상처임에도 결핍하지 않는 육체의 부분을 나누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결말은 역사의 상처를 감싸안는 적극적인 행동이면서 동시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형상화한다. 이와 같이 父子不具를 통하여 한국전쟁은 식민 시대의 고통에 연이은 비극으로 규정지으며 구체적인 상처의 포용을 통하여 비극의 극복과정을 다루고 있다.
「흰 종이수염」은 전쟁의 가장 확실한 상처가 육체의 불구라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불구가 한 개인의 육체에 한정하지 않는 사실을 동길을 통해 형상화한다. 노무자로 나갔던 아버지가 돌아오자 “넉 달째 밀린 사친회비”보다 더 동길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또래의 놀림이다. “외팔뚝이 새끼”라는 야유와 조롱 앞에 “팔뚝 하나를 나라에 바쳤다”는 아버지의 쓸쓸한 자위는 동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길은 외팔로 목수 일을 할 수 없어 극장 광고판을 앞뒤로 걸쳐 매고 다니는 아버지를 하교 길에 만난다. 줄곧 아버지를 흉내내면서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창식이가 나무꼬챙이로 종이수염을 확인하고 비웃자 동길은 여지없이 덮쳐 깔고 앉아 마구 주먹질을 한다. 조롱하는 친구에 대한 응징행위는 아버지의 불구상태와 가족의 악화로 대리되는 전쟁의 파괴에 대한 소년의 인지요, 반발의 의미를 지닌다.⑫ 동길의 내면은 상처받은 것이다. 광고판을 걸쳐 매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외팔이 아버지의 우스꽝스러운 행동과 동길의 아픈 내면이 만나는 결말은 간접적인 전쟁체험으로써 성장소설적인 측면을 지닌다.
「자살 당한 개」는 동일시를 이용해 상이군인의 내면세계를 형상화한다. 동일시란 타인의 감정이나 태도 혹은 행위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취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정신분석학의 용어이다.⑬ 영철은 상이군인으로 다리 하나를 잃은 불구이다. 그가 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동일한 불구를 가졌기 때문이다. 영철은 비가 오는데 밖에 나갔다가 시궁창에 빠진 꼴로 집안으로 절름거리며 돌아온 죤에게서 자신의 불구를 연상한다. 자신 역시 불구이기 때문에 사랑을 가질 수 없다는 판단을 하는데 이는 육체적 불구가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결정적인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육체적 불구가 정신적 불구로 전이되는 것이다. 불구자이기 때문에 사랑을 가질 수 없다는 영철의 비정상적인 사고는 난을 다른 남자와 결혼하도록 방관한다. 또한 결말에서 영철은 노랑 개가 시꺼먼 개에게 가도록 방관하는 죤의 목을 조른다. 이때 죤에게 하는 영철의 말은 자신에게 하는 자기 비하의 독백이다. 즉 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뛰어올라 봐야 안 된다는 걸 안단 말이지, 응. 그렇지? 그렇지. 뛰어 본 다음에 오는 그 절망감이 무서운 거지. 절망보다는 꿈이라도 품고 있자는 거지. 못했다기보다는 시시해서 안했노라고 자기 자신을 속여 보자는 수작이지. 이 비겁한 자식아. 이 비꼬인 자식아. 이 병신, 능청스러운 개자식아!⑭
죽은 죤을 앞에 두고 식구들이 죽은 자신을 가운데 놓고 둘러서서 보일 표정들을 연상하는 부분 역시 동일시의 효과를 가져온다. 이처럼 다리 하나가 없는 불구라는 공통점으로 해서 영철의 비유적 존재로 죤이 설정되었다. 상이군인으로써 자아와 타인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잉여적 인간으로 전후사회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정신적 불구자라는 점에서 영철은 순수성을 상실한 무기력한 존재이다. 즉 상이군인을 통해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수동적이며 패배적인 삶을 형상화하고 있다.
「肉體醜」는 “성혜 애호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암울한 이야기로 서로 다른 차원에 서 있는 인물들이 있다. 첫째가 애호원의 원장이며 서목사인데 불구자를 경제수단으로 이용하여 부의 축적을 도모하는, 목사임에도 다분히 세속적인 인물이다. 다음으로 간호 책임자이자 서목사의 외사촌 동생이며 “마리아 여사”로 불리는 김귀임과 미국인 선교사가 있다. 마리아는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으며 애호원에 수용된 불구자들을 진심으로 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깊은 신뢰와 호의와 친근감으로 자신을 따르게 한다.⑮
미국인 선교사는 불구자들을 정상인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대하여 구경꾼의 눈으로 보지도 않으며 또한 불구자들의 심리를 꿰뚫어 교회 안을 어둡게 한 뒤에 설교를 한다. 다음 층위에 놓이는 인물들은 손창섭 특유의 작중인물들로 마리아의 딸인 만실을 포함하여 애호원의 불구자들이다. 갓난애 때 뇌염을 앓아 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만실의 몸집은 열 여덟의 훌륭한 처녀지만 지능 정도는 불과 두세 살 짜리 갓난애에 지나지 않아 불구자의 삶의 조건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불구자들은 육체적 기형을 정신적인 기형으로까지 끌고 가는데 뒷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하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신에 대하여 자신의 불구를 원망하거나 스스로 원통해하는 것이다.
두 개의 사건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하나는 만실의 임신이며 다른 하나는 불구자들과 서목사의 갈등이다. 만실의 임신은 평소 존경하는 마리아의 딸인 동시에 불구자들의 채울 수 없는 성적 욕구를 심정적으로나마 충족할 수 있는 공동의 애인이란 점에서 그들에게 충격을 준다.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젊은 축들을 고문하기로 하지만 그 중에 한 놈이 미리 종적을 감추어버린다.
“제 이동 일 호실에 있던 한쪽 팔다리가 동강난 놈이다.” 만실의 사건은 몇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지만 성적 결핍에서 충족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폭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즉 성욕의 충족이 아니라 만실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측면에 초점을 두면 겁탈은 그들 사이의 묵계를 파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만실의 임신은 성욕의 해소나 핏줄의 재생산보다는 불문율의 파괴로 보아야 하며 그런 측면에서 젊은 축들을 고문하기로 하는 합의를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만실의 임신은 더 큰 불행을 예고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환자들과 서목사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하는데 전세가 불리해져 예의 갈등은 더욱 날카로워진다. 이미 불구자들을 내팽개치고 가족들만 데리고 피난간 일이 있어 그들은 목사를 믿지 못해 집으로 몰려간다. 다행히 마리아의 돈독한 신앙심에 이끌려 발길을 돌리지만 다음날 새벽 목사의 집은 불탄다.
이튿날 새벽녘께였다. 갑자기 애호원 내에서 하늘을 그스를 듯이 치솟는 불길이 있었다. 원장네 집이었다. 아래층 둘레를 휘감은 악마의 혓바닥 같은 불길이 이층을 햝아 올라가고 있었다. 그 주위를 얼씬거리는 사람의 그림자가 여남은 명이나 그 불빛에 환히 비치어 보이었다. 그것은 한결같이 추하게 파괴된 육체들이었다.⑯
서목사를 믿지 못하여 불을 지르지만 집 안에 있는 이는 목사나 그의 부인이 아니라 마리아와 만실이다. 뒤늦게 불을 끄려하지만 역부족이다. 마리아와 만실의 죽음은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의인은 애당초 없으며 오직 서목사처럼 약삭빠른 세속적인 인간만이 번영을 누릴 것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다분히 부정적인 세계이다. 이와 같이 육체적 불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부정적인 인물들을 다루는 것은 전후현실의 불구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剩餘人間」에서 천봉우는 자학적이거나 피학적 성향 모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전쟁의 상처에서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고자 하는 일체의 노력을 포기하고 나아가 자신의 삶조차 방임하는 실체 없는 그림자로 그려진다.
봉우의 유일한 행동은 퇴근이면 어김없이 간호원 미스 홍의 집 가까운 골목까지 뒤따라간다던가 휴일이면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따위인데 이를 “인숙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이상의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미스 홍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는 점에서 실체 없는 그림자라는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중학시절에는 그토록 재기발발하고 야심가였던 그가 일단 현실 사회에 몸을 잠그고 부대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차츰 무슨 일에나 시들해지기 시작하더니 전란 통에 양친과 형제를 잃고 난 다음부터는 영 딴 사람처럼 인간 만사에 흥미를 잃은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⑰
수면부족이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현저해졌을 뿐이라든가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 무슨 일에나 시들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봉우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다.
결말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읽을 수 없는 숨은 공간에 있는 채익준의 아내가 병들어 죽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서만기가 쓰고 있는 건물과 의료 시설 일체는 이미 팔린 상태이고 아내에게조차 큰소리를 칠 수 없는 실의의 인간 천봉우의 성격이 사건과 맞물려 변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이며 어떻게든 만기에게 병원을 개업하도록 도움을 주고 싶은 간호원 홍인숙의 바람조차 결말에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다.
다만 비극의 당사자인 채익준의 귀가 장면이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있는 봉우와 현실적인 가난에 따른 고통의 도전을 받은 서만기를 한 자리에 모으고 있는데 소설의 시작부분에서도 세 사람이 만나긴 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이다.
거의 황혼 무렵이 되어서 산에서 돌아온 일행이 익준네 집 골목 어귀에서 차를 내렸을 때였다. 저쪽에서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이리로 걸어오는 허줄한 사내가 있었다. 아이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아, 아버지다!”
소릴 질렀다. 그러자 익준은 멈칫 걸음을 멈추었고 이쪽에서들도 일제히 그리로 시선을 보냈다. 익준은 머리에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한 손에는 아이들 고무신 코숭이가 비죽이 내보이는 종이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향하고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석상(石像)처럼 전연 인간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⑱
비록 결말을 이끌어 내는 사건이 숨은 인물의 죽음이지만 비극의 초점은 당연히 채익준으로 모아지며 뒤이어 성격과 전쟁이 만든 정신적 상처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은 봉우와 풍족하지는 않은 생활이나마 꾸려나갈 생계의 수단을 잃게 된 서만기도⑲ 비극의 풍경에 더해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을 하는 이들이 전쟁이나 가난 등으로 비극의 늪으로 떠밀리는데 이들을 남아도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인간모멸이다. 예의 모멸감을 극대화하는 것은 다음에서 읽을 수 있다.
“아이구, 차라리 쓸모 없는 저 따위나 잡아가지 않구, 염라대왕두 망발이시지!”
익준의 장모는 사위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대고 인제야 눈물을 질금거리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제일 반가와했다. 일곱 살 먹은 끝엣놈은,
“아부지!”
하고, 부르며 쫓아가서 매어달렸다.
“아부지, 나, 새 옷 입구, 자동차 타구 산에 갔다 왔다!”
어린 것이 자랑스레 상복을 쳐들어 보여도 익준은 장승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⑳
장모를 통해 드러나듯 필요한 인간은 죽은 아내이지 채익준은 아니며 어린 아들이 상복과 묘소에 다녀온 것을 자랑하는 데에서는 모멸감 자체를 너머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짙은 비애감을 던진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한 손에 고무신 꾸러미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익준에게 아내의 죽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나 정작 사실로 확인되고 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어린 아들의 철없는 자랑이 채익준을 비롯한 만기나 봉우에게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비애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인물들의 삶의 조건들이 조금도 좋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말은 그들이 운명처럼 그 조건들을 등에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봉우나 익준, 만기도 익준의 아내처럼 자신의 삶의 조건들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니다가 행복한 죽음과 거리가 먼 죽음을 맞으리라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전후사회에서 전쟁체험은 불구로 대표되는 피해의식을 가져오며 피해의식은 왜곡된 내면세계를 형성하도록 하는 절대적 원인으로 제시된다. 불구자의 현실은 상이군인의 경우와 민간인의 경우로 살펴볼 수 있다.
육체적 불구와 정신적 불구는 밀접한 상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적 불구가 정신적 불구로 전이되는 일반적인 형상화 단계를 보인다. 상이군인의 경우 불구를 사회적·민족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개인의 차원에서 다루는데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여지며 불구가 개인의 삶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제시한다.
정신적 불구는 자아지향성의 상실에 따른 정신지체의 현상을 띤다. 아버지의 육체적 불구가 아들의 정신적 상처로 남는 경우 간접적인 전쟁체험의 성장소설적 성격을 갖는다. 특히 불구적 인물은 비정산적인 전후현실의 불구성을 비정상적으로 형상화하는 탁월한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즉 불구적 인물을 통하여 왜곡되고 비정상적인 사회상의 불구성을 제시하는 문학적 역할을 하는데 일반적으로 육체적 불구가 사회적 소외감과 열등감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불구로 전이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① 이태영, 특수아동의 심리, 대구대학교 출판부, 1983. 161쪽.
정신적 불구는 언어능력·통찰능력·판단능력 등의 知的인 遲滯를 가져오며 이로 말미암아 사회적·심리적·정신적 소외감과 열등감을 가지며 사회적 행동의 不適應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개인의 행동이나 감정의 통제가 어렵다. 또한 일정한 정신적 능력을 요구하는 관념이나 개념의 수용이 느리며 분석력·비판력·결정력이 부족하여 自己指向(self-direction)을 갖기 어렵다.
② 이태영․김정권, 정신박약아지도, 설영출판사, 1982, 115쪽.
정신적 불구가 포함하는 증세는 정신박약·지적 열악·정신지체 등이 있다. 정신박약은 생물학적 요인이 원인으로 작용하며 정신지체는 문화적·사회적·심리적 요인이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용어이다. 지적 열악은 정신지체와 정신박약을 포함하는 통합적 용어이다
③ 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예하, 1994. 331쪽.
④ 천이두, 한국현대소설론, 형설출판사, 1974. 221∼222쪽.
⑤ 김병익 외, 현실의 도형과 검증, 현대한국문학의 이론, 믿음사, 1982. 340쪽.
⑥ 손창섭, 혈서, 「현대문학」, 1955, 1.
⑦ 이재선, 앞의 책, 111쪽.
⑧ 손창섭의 소설들이 전통적이며 규범적인 소설 문법에 충실하지 않고(김상태, 언어와 문학세계, 이우출판사, 1989. 154쪽 참고) 그만의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였는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결말에 있다.(김윤식·정호웅, 한국소설사, 예하, 1994. 331쪽)
일반적으로 소설의 결말은 갈등 및 위기의 해소라든가 혹은 문제의 해결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인물이 놓인 상황의 지속이라는 의미로 결말을 처리하였다. 이것을 좀더 세밀히 살펴보면 사건의 매듭이 내적 갈등이든 외적 갈등이든 첨예하게 대립하는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인물에 의하거나 에피소드에 가까운 우발적 행동을 결말로 설정하였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열린 결말은 불확실한 세계에 대한 문학적 대응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처음과 끝이 맞물리는 원형구조가 대표적인 형식이다. 그러나 손창섭에게 세계는 불변하며 그러한 세계 속에 담겨진 존재로 무의미한 삶을 꾸려나가는 인간들 역시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열린 결말로(김정자, 소설의 구조, 현대소설론, 평민사, 1994. 76쪽 참고) 나타난다.
⑨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1945∼1990, 민음사, 1997. 164쪽.
⑩ 임규찬, 전후 상황과 사회적 재편기의 문학, 한국현대대표소설선 9, 창작과 비평사, 1996. 427∼430 쪽 참고.
⑪ 하근찬, 수난이대, 「한국일보」, 1957, 1, 1.
⑫ 이재선, 앞의 책, 93쪽.
⑬ 서봉연 외, 발달심리학, 중앙적성출판사, 1996. 359쪽 참고.
⑭ 이범선 외, 자살 당한 개, 전후정예작가신작15인집, 육민사, 1963.
⑮ 마리아를 통하여 손창섭의 모성에의 친밀성을 다시금 읽을 수 있다. 즉 남성보다는 여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소설의 인물들을 남성 대 여성으로 구별할 경우 남성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여성은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여성에의 친밀성은 부성결핍 콤플렉스의 한 면이다.
「미해결의 장」의 경우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는 인물은 어머니이며 문선생네는 광순, 장선생네는 아내이다. 「유실몽」에서는 누이와 춘자 등이며 비록 비윤리적인 직업을 통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경제적 주체로서 여성은 거의 모든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외가 있다면 「잉여인간」의 서만기뿐인데, 그를 제외하면 봉수 처나 채익준의 처 역시 생계를 꾸려나가는 경제적 주체로 설정되어 있다.
⑯ 손창섭, 육체추, 「사상계」, 1961.
⑰ 손창섭, 잉여인간, 「사상계」, 1958, 9.
⑱ 손창섭, 앞의 책.
⑲ 이동하, 손창섭 소설의 세 단계, 한국현대소설사연구 - 白史 전광용박사 정년퇴임기념논총, 민음사, 1984. 443쪽 참고.
“서만기의 <참여>는 가족의 부양이라는 선에 국한되어 있으며 소설의 끝 부분에서 비쳐지는 <희망> ― 간호원 홍인숙의 제안에 의한 ―도, 냉혹하게 말하자면, 센티멘털리즘의 소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에, 우리는 그가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 못한 인간이다라고 밖엔 말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김현의 부정적 평가가 태어나게 된다.” 이어 이동하는 「잉여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 그의 작가적 재능은 주로 자신의 체험을 소설의 형태로 재구성하는 데에서 발휘되고 있는데, 서만기는 위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손창섭 일류의 개성이 맥을 쓰지 못하며 작가로서의 상상력도 깊이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엉거주춤해 버리고 만다.”
⑳ 손창섭,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