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에 대하여

by 이순직

가을 오후. 높은 구름,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는 들판을 산책하는 일은 쓸쓸하다. 앙상하게 밑동 뼈마디만 남은 벼들이 누워 있는 논바닥은 더욱 쓸쓸하다. 살아감이 허락되지 않은 풀들이며 꽃들이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면 상해나 천진(天津)쯤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꼬리가 쓸쓸하다. 산책하며 불러 보는 ‘아리랑’은 또 얼마나 쓸쓸한가.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관계. 쓸쓸하다. 우리는 관계로 무엇을 남길 수 있던가. 뼈마디까지 서늘하게 관계 깊이 해도 저마다 혼자 흐르는 섬이란 걸 깨달으면 얼마나 어깨 움츠리던가. 존재를 생각하는 시간은 쓸쓸하다. 죽음이 꼬리표처럼 붙어 있기 때문. 혼자 남은 나도 쓸쓸하다. 부양할 식구가 없지만 부양해야 할 헛된 욕망이 나를 쓸쓸하게 한다. 욕망을 이겨내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가. 쓸쓸함은 고독이 아니다. 외로움도 아니다. 삶을 관조하는 시간이다. 살아 있음을 즐기는 시간이다. 생명의 뿌리에 가닿는 인식을 만끽하는 시간이다. 쓸쓸함은 언제까지나 계속될 거다. 늘 새것이므로. (1994.11.5)


- 어진내 시절 햇살 반쯤 기울어지면 읽던 책 내팽개치고 산책하곤 했다. 연수구 선학동이 막 개발되던 때라 아주 아파트 담벼락만 벗어나면 논과 밭이 살맛 나게 햇살 받고 있었다. 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 손가락 사이로 흩어진 시간. 내 안에 켜켜이 쌓인 시간. 몇몇은 배반해야 하는 시간.

(2020.10.14.)


- 나도 못 하는 얘기가 있어. 수락산 그가 말했다. 쓸쓸함은 무심코 지나는 길바닥에만 있으랴. 나는 고개 끄덕였다. 글 쓴다니까 언제든 술 고프면 약속 잡자고. 나는 고개 끄덕였다. 사는 게 뭐 그렇지. 수락산 그가 혼잣말. 나는 고개 끄덕였다. 밤은 깊었고 헤어졌다. (2021.5.14.)


- 가을 추위가 조금 물러났나. 바람 잦아든 아침. 수락산 그도 보지 못한 지 한 달쯤? 독후감 듣고 싶지만 선뜻 발길 잡을 수 없다. 한 걸음에 달려가 빚 받아내듯 당당할 수도 없는 노릇. 장욱진이나 김용덕이나 이충환도 꺼내놓지 않는 독후감. 카톡으로 <산문산책, 길>과 <연극, 사람이 지나간다>를 찍어 보내오면서도. 사실 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연히 아내도 읽지 않았다. 첫째와 둘째는 말할 나위도 없고. 객혈하듯 글을 토해내고 나면 헛헛해진다. 쓸쓸해진다. 주위를 둘러본다. 아침이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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