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벌판 - 왜 글을 쓰나

by 이순직

글쓰기는 실습과목이다. 글을 잘 쓰려면 이론을 익히는 것보다 실제 글 한 편을 쓰는 데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론과 실전이 서로 다른 분야가 아니고 쓰기 능력을 기르는 데에 이론이 전혀 쓰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에 앞서 필요한 기본 자질로서 이론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론만 공부한다면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글쓰기를 마음에 두고 이론을 다져나가야 그 이론이 글쓰기 실전에 이어질 수 있다. 이론을 익혀 글쓰기에 필요한 요소를 깊이 새기고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가려내는 안목을 기르는 가운데, 자기에게 알맞은 글쓰기 방향을 스스로 정해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영감이나 본능 또는 버릇에만 기대지 않는다. 먼저 그 일을 왜 하는가, 그것이 우리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의의와 목적을 마음에 또렷하게 세워야 앞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왜 하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본다.


1. 사람과 말


사람은 말을 하면서 산다. 이 사실은 사람이 다른 동물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드러내는 데 톡톡히 한몫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말을 구실로 내세워 사람이 뛰어난 종(種)이라 믿어 왔다. 예를 들어 꿀벌이나 돌고래, 원숭이 따위 몇몇 동물도 어떤 방법으로써 자기들끼리 뜻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구조가 간단하고 한계가 분명하여 사람의 말에 감히 견주지 못한다. 말을 주고받는 능력은 사람이 지닌, 사람을 다른 동물과 아주 또렷하게 구별해주는 자질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말을 하나? 또는 해야만 하는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천 년 동안 오직 그 자리만을 지켜온 바위, 늘 푸른 소나무를 보자. 그토록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보고 들은 것도 많을 텐데 그래서 수많은 사연과 생각이 안에 깃들어 있을 것인데…, 그저 침묵할 뿐이다. 사람은 이들처럼 말없이 우아하게 침묵하며 살지 못한다. 도저히 입을 다물지 못하는지라 늘 말하고 떠들고 노래 부른다. 왜일까? 그 까닭은 두 가지가 아닐까.


2. 표현 욕구 때문


「삼국유사 권 2」에 신라 48대 왕인 경문대왕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일부를 옮겨 보았다.


(上略)

왕은 즉위한 후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장 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道林寺, 옛날 입도림(入道林) 가에 있었다) 대숲 가운데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는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왕은 그것을 싫어하여 대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는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임금님 귀는 길다.”

(下略)


이야기 속에서 복두장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 자기가 모시고 있는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신기한 일이다. 흔히 하는 말로 충격적인 사건이다. 옆집에 사는 누가 사팔뜨기니 짝발이라는 따위, 그냥 한 번 웃어넘길 수 있는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다. 복두장은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자기가 본 그 희한하기 짝이 없는 왕의 우스꽝스러운 꼴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신나게 웃고 떠들고 싶다. 그러나 상대는 왕이다.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최고 권력자다. 때에 따라서 복두장의 목숨 따위야 아주 쉽게 거두어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복두장은 마음 놓고 나팔 불고 다닐 수 없다. 그랬다가는 곧바로 목이 달아나기 십상이다.


내친김에 상상의 나래를 좀 더 넓게 펴보자. 복두장은 속이 편할 리 없다.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이 입이 근질거리지만 감히 입술을 뗄 수 없다. 심각하게 말해서 생명 보존 욕구와 표현 욕구가 날카롭게 부딪히고 있다. 생명을 이어가려는 욕구와 자기가 본 것을 마음껏 펼쳐내고 싶은 욕구는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의 본성과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래서 눌러두거나 해쳐서는 안 되는 본능적인 욕망들이다.


이 두 기둥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충돌하고 있다. 그러니 복두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입을 다물자니 말하고 싶은 욕구가 목에 치밀고 말하자니 목숨이 위태롭다. 그의 처지는 이토록 딱하기 그지없다. 바보·멍청이, 사람 구실 못하는 놈팡이라는 손가락질받는 치욕을 견디며 살아갈 것인가, 어머니를 죽임으로써 복수를 완성할 것인가. 햄릿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우리는 넉넉히 동감할 수 있다.


그런데 복두장은 비밀을 묵묵히 무덤으로 가져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동네 한복판에서 대놓고 떠들지도 못했다. 역시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대신 아무도 없는 대숲에서 실컷 소리를 질러 그동안 눌러두었던 욕구를 마음껏 폭로했다. 누가 이긴 것일까? 생명을 보존하려고 한 복두장인가, 거침없이 표현 욕구를 펼치고자 한 복두장인가. 생명 욕구가 판정승한 듯하다. 아니면 무승부쯤으로 해두자. 어쨌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표현 욕구는 생명 보존 욕구, 달리 말해 목숨에 버금가는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고 이 설화는 말하고 있다.


임금이 대를 모두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고 하지만 복두장의 말, 자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비록 음절 몇 개가 떨어져 나갔지만 그 뜻은 전과 다름없이 살아 있다. 표현 욕구가 사람에게 얼마나 치열한지 거듭 힘주어 말하고 있다.


복두장은 우리 자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는 사람이다. 신화에 나오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다만 그가 겪은 일이 좀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할까. 어쨌든 사람은 실제 쓰이는 물건이 아니어도 아무 이해관계가 없어도 보고 듣고 겪은 일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는 마음에 가득하다. 대상을 파헤쳐보려는 욕구와 더불어 그 결과물을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는 늘 넘쳐난다. 이러한 표현 욕구는 곧 자유이며 생명이다. 이것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본능적인 조건을 잃는 것이다. 사람은 갇혀서는 살 수 없다. 자유가 없으면 죽은 목숨과 같다. 말을 못 하게 하는 것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과 한 치 다르지 않다. 이 욕구를 누르거나 없애면 생명력 또한 사라진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은 말을 한다, 자유를 마음대로 누려 생명을 한껏 펼치려고. 곧 말은 자유와 생명이며 인격의 바탕을 이룬다. 이것이 사람이 말을 하는 첫 번째 까닭이다.


3. 모여 살기 때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기원전 서양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기원전 주장이요 명제다. 그러나 세월이 제아무리 많이 지나도 명제에 담긴 뜻의 설득력과 정당성은 좀처럼 변하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오늘을 살아가면서 순간순간마다 구석구석에서 새롭게 되새겨진다. 그저 평범한 주장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의미가 지닌 파장은 여러 가지다. 영원한 금언(金言) 같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려 한다. 행복해지려고 산다. 행복해지려고 늘 무엇인가를 쫓는다.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사랑이든 사람마다 목표는 다르지만. 아무튼 무엇을 얻고 이루려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여기서 말하는 여러 가지 무엇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데에서 비로소 생겨난다. 돈도 그렇고 명예와 권력은 물론 사랑도 마찬가지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난다는 말이 있지만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자리에서 싹트고 의미를 이루고 끝을 맺는다. 저 홀로 산다고 하자, 무인도에 갇힌 그 누구처럼. 돈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아예 그 뜻조차 생겨날 수 없지 않을까. 사람은 갈데없이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고 말들을 한다.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과 부딪치며 살아가게끔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기는 있다. 산속에 은거하는 수도자와 타고난 독신주의자, 세상을 떠도는 데 좀 더 많은 몫을 두고 사는 김삿갓 같은 분들이 그렇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는 대개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관계를 이루며 그 속에서 울고 웃는다. 어느 단체에든 속해서 친구와 적을 만나고 어떤 것이든 사업을 꾸미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여행을 가고 싸우고 사기당하고…, 대한민국 땅에서 미래를 설계하고 꿈꾸고 추진해나가며 인간 존재에 얽힌 뜻과 목적을 밝혀 나간다.


바로 이러한 <모여 있어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존재성 때문에 우리는 말을 한다. 오늘도 끊임없이 그리고 변함없이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살려고 행복하려고. 사회 속에서 사람답게 살려고 우리는 말을 한다.


4. 말과 생각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는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수많은 의사소통체계를 지니고 산다. 예를 들면 봉화(烽火), 등대 불빛, 수화, 모르스 부호 같은 여러 통신수단들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일정한 목적에 따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의사전달체계다. 이렇듯 미리 짜진 약속에 따라 인간을 묶는 도구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고 실용성 높은 체계가 바로 말(소리와 문자)이다. 말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잠깐 쓰는 수단이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 입에 붙어 있으면서 우리의 일상을 이끄는 도구이다.


우리는 이 말을 아주 오랫동안 써 왔고 큰 탈이 없으면 앞으로도 하염없이 즐겨 쓸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공짜로 쓸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사실 거의 불가능할 테지만 과거를 더듬어 보자. 말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학습 기간을 따로 정해 놓거나 수업료를 낸 기억이 있는가? 결코 없다. 뿐만 아니라 말은 다른 기술보다 배우기가 퍽 쉬웠던 것 같다. 말이야말로 누구나 쉽게 배워서 부담 없이 쓰는 생활도구이다.


그런데 이렇듯 편리하고 경제성 넘치는 도구가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언제인가부터 자연과학에 한껏 매달리기 시작한 사람은 이제 생명의 정체를 거의 손아귀에 쥔 듯하다. 곧 직접 생명을 만들어낼 기세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말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캐어낼 재주는 없다. 타임머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면 모를까, 말의 기원을 실제에 근거하여 밝혀 세울 능력은 현재 우리에게 쥐꼬리만큼도 없다. 이것은 과장되지 않은 그리고 틀림없고 정확한 과학 현실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는 마치 운명처럼 말에 기대어 살고 있다. 말이 없어도 물론 살아남을 수는 있다. 먹고 자고 입고 사랑 아닌 생식 행위로 어떻게든 무리 없이 얼마간은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찬란한 문명이 주는 여러 혜택을 더 이상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 정신(의식)을 드러내고 나아가 인간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데에 말은 절대로 필요하다. 가슴과 머리에 머무르고 있는 한, 의식은 사회 동물이 지닌 의식 내용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 말에 실렸을 때 우리의 마음, 의식, 정신은 비로소 나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어떤 의사소통 내용으로 또렷한 가치를 지닌다. 물론 예외는 있다. 악성 베토벤은 인생의 말년에 오로지 음(音)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드러냈다고 한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일상을 열심히 누리면서 우리말을 빌려 우리 정신을 존재하게 한다. 이는 또 하나 또렷한 현실이요 사실이다.


국어학자들은 주장한다. 우리말을 올바르게 가다듬자고. 영어 세상으로 가는 길목에서 고리타분한 신념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생각은 삶의 토대를 아름답게 가꾸자는 뜻과 같다. 우리의 정신, 나아가 삶 자체를 잘 가다듬자는 뜻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 우리가 한국말과 한글을 가지고 삶과 일상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주장이 현실에 바탕을 둔 신념이라는 사실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5. 말과 글


말은 음성을 본질로 한다. 말이 먼저다. 말이 훨씬 먼저 생기고 글자는 나중에 생겼다. 음성으로써 의사전달을 하다가 어느 순간 한계를 깨닫고 글자를 만들어 글을 이용하게 되었다. 말로써 지니고 있지 못할 생각과 느낌을 오래 잘 간직하고자 글자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글자는 말을 잘 드러나게 하려고 만들어낸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글은 말을 담아내는 수단에 머물러 있지 않다. 오히려 글과 글쓰기를 목적으로 말이 필요 없는 경우가 왕왕 있다. 삶의 광장이 복잡해지고 문화 수준이 높아진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겠지만 오래전부터 삶을 이루는 주요 의식 내용은 대부분 글로써 보존·전달된다. 특히 소설과 시 같은 이른바 문학에서 이러한 버릇이 더욱 두드러진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말을 하지 않는다. 문학 원론에서 따져볼 때, 그들은 오직 글로써 삶을 말한다.


말이 글이 되면서 시간과 공간을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고 문명이 찬란하게 피어나고 눈부시게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너무 잘 알고 있으니 자세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6. 글쓰기 효용 1 : 글은 사람을 잇는 핏줄


크고 작은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보라. 어디든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인문·사회·과학에 걸친 여러 교양 도서, 시집과 소설집, 수필집 따위 문학작품과 잡지, 학생이 보는 교과서와 참고서, 사전, 취미생활서 따위가 즐비하다. 열 손가락만 가지고는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일평생을 바친다 해도 산더미를 결코 다 읽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책들은 모두 글자로 되어 있다. 사람이 쓴 글이다. 더러 사진이나 그림이 끼어 있지만 책은 사람이 쓴 글로 엮는다. 비록 겨우 몇 천 년 전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글을 쓰기 시작한 다음부터 얼마나 많은 글과 책이 세상에 나왔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지금 눈앞에 펼쳐진 서고가 그다지 커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가난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글은 도서관이나 서점에만 놓여 있지 않다. 어디를 가나 늘 사람 곁에 펼쳐져 있다. 생활이 이루어지는 곳… 집·학교·시장·관공서, 거리마다 글이 있다. 간판·푯말·광고지 따위가 거리에 넘쳐나고 신문과 여러 고지서, 광고 안내문 따위 실용 효과에 따른 갖가지 문서가 생활 터전 곳곳에 놓여 있다. 끊임없이 사람 사이로 흘러 다닌다.


또 글은 늘 쏟아져 나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은 수 없이 많은 글을 쓰고 글은 곧바로 인쇄되어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과 단체, 단체와 단체를 이어주며 사회를 하나로 엮어내는 일을 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여러 매체가 나타나서 인쇄가 하는 일을 대신하기도 한다지만 아직 글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에 가깝다. 글이 없으면 사회에서 우리가 꾸려 나가는 일상은 당장 큰 어려움에 부딪힐 것이 뻔하다.


도로와 통신을 일컬어 국토를 살아 숨 쉬게 하는 핏줄과 신경이라고 한다. 글이야말로 생활을 끌어가는 핏줄이자 신경이다. 글이 있어 사람과 사람은 무리 없이 의사를 주고받을 수 있다.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기에 삶과 사회를 이루고 있는 관계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간다. 글이 있어 사회의 모양을 제대로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이쯤 얘기했으면 왜 글을 쓰는지 까닭을 거의 밝힌 셈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수많은 글을 우리는 다 읽지 않거니와 그럴 수도 없다. 필요에 따라 가려 읽으면 그만이다. 어떤 글은 한정된 계층에 속한 사람만이 읽는다. 글을 쓰는 행위를 보아도 사정은 비슷하다. 보통 사람들은 글을 잘 쓰지 않는다. 왜?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으면 퍽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익이 따르거나 남다른 취향이 있지 않으면 일반인이 시간을 내서 글을 쓸 까닭도 없고 여유도 없다.


7. 글쓰기 효용 2 : 글쓰기는 나를 밝히는 일


그렇지만 역시 말과 글, 말하기와 글쓰기는 우리 삶 우리 생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한 사람이 글을 써서 얻는 이익을 헤아려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글쓰기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또렷하게 확인하고 그에 다른 즐거움을 누리는 행위이다.


먼저 말과 정신이 맺고 있는 상관성을 눈여겨보자. 그러나 전문성에 기운 특별한 학술 안목에서 살피는 것은 아니다. 지금 눈여겨볼 대목은 아주 소박한 국면, 일상에서 겪는 경험에 신경을 기울여 보려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가끔 여러 사람 앞에서 지니고 있는 생각을 말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꼭 필요한 내용을 조리 있게 그리고 또렷하게 상대에게 말하는 것은 참 어렵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다. 여러 사람이 보고 있으니 어색하고 부끄러워 그럴 테지만…, 했던 말을 또 하고 앞뒤 내용이 틀어지고 불현듯 생각지 않았던 말이 엉겁결에 튀어나오기도 한다. 우리 가운데 열에 여섯, 일곱은 이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자리에서이든 간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름대로 애써 잘 말하고 나면 마음과 의식(정신)은 한층 또렷해진다. 내가 지닌 생각이 가지런히 정리되고 조리가 서며 굳은 체계를 지니게 된다. 이것이 말하기가 지닌 미덕이고 효용이다. 발표와 토론이 학습효과를 높이고 인간 정신을 잘 가다듬어 준다는 주장은 교육학에서도 밝히고 있는 기초이론이며 널리 알려져 있는 상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기로써 생각을 한 번 잘 다듬어냈다. 그 생각에 좀 더 또렷한 틀을 지어주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다. 생각을 특히 여러 사람 앞에서 또박또박 조리 있게 그리고 호소력 있게 펼쳐내기는 퍽 힘들다고 했다. 이제 그 내용을 다시 효과 어린 문장에 담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대개 글쓰기는 말하기보다 한층 더 어렵고 힘들다. 물 흐르듯 말을 잘하는 사람도 그 생각을 글로 쓰라고 하면 한 줄 제대로 쓰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고역을 끝내 잘 이루어냈을 때, 생각은 이제 말하기 때와 견주어 한층 더 밝아진다.


달리 말해서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두 가지 과정을 지나면서 의식 내용은 갈수록 세련되고 확고해지는 것이다. 견고한 글자 속에 알차게 자리 잡은 나의 생각을 바라볼 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글쓰기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또렷한 형식(글자)을 빌어 밝혀 드러내는 일이다. 글로써 삶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지금의 나를 먼저 바로 세워야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곧 자아를 갈고닦는 과정이고 수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교육하는 마당에서 글쓰기는 가장 밑바탕이 되는 과목이다.


8. 학교교육과 글쓰기


따라서 학교에서 글쓰기는 모든 교과목의 바탕이 되는 기초 과정이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글쓰기 교육(의사소통교육)을 기초과목으로서 운영한다. 삶에 따른 모든 경험과 그에서 우러나는 진리 내용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밝히는 곳이 바로 대학이다. 내용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글에 담겨 발표되고 널리 퍼지며 보존된다. 글쓰기는 삶의 근원이 되는 인간 활동이고 특히 대학에서 뜻한 바 교육목표를 실제로 이루어내려고 할 때 전공이 무엇이든 간에 학생이 꼭 갖추어야 할 바탕 능력이며 궁극 자질이다.


9. 글쓰기 목적 : 진실한 삶을 찾아


글쓰기는 사람이 지닌, 피할 수 없는 표현 욕구에 따라 시작한다. 그다음 자기를 확인하는 과정에 따른다. 자기 확인은 글쓰기가 지닌 고유 기능이며 본질에 뿌리를 둔 목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 밖에도 글 쓰는 행위에는 제 나름의 목적이 있다.


글쓰기가 좇아야 할 목표의 중심에는 '진실'이 있다. 글쓰기는 물론 자기를 찾아내고 밝히는 일이다. 그러나 이 일이 지닌 의미와 효용은 '나 자신'이라는 개인 울타리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글은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나누어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글을 쓰면서 글쓴이는 읽는 이를 생각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써서 나를 밝히는 일이 우선 중요하다면 내가 겪은 삶의 과정에서 길어 올린 진실한 생각과 느낌 그리고 감동을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글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글로써 우리는 참된 마음과 참된 삶을 이루는 길을 서로에게 보여주고 결국 세상을 바로 세우는 데에 한몫해야 한다. 이것이 글을 쓰는 사람이 궁극에서 좇아야 할 목표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돈을 벌려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잠깐 즐기는 쾌락에 매달려서 문장을 꾸미거나 어느 특정한 목적 아랫사람을 몰아가려는 뜻 따위를 가지고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남의 이야기를 자기 것인 양 둘러대는 글쓰기를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참되고 올바르게 말하고 쓰면서 참되고 올바른 자기를 또렷이 세우고 할 수만 있다면 참됨과 올바름을 널리 퍼트려야 한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글쓰기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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