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벌판 - 글의 종류

by 이순직

어떤 대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을 나누어 살핀다. ‘무엇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알아보면 대상이 지닌 특성을 전체에서 바라볼 수 있고, 세부 사항을 살펴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분류는 대상을 파악하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동해니 서해니 태평양이니 하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렇게 하여 우리 뜻대로 일정하게 영역과 구획을 나눈다. 그러나 바다는 원래 그렇게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다. 바다는 그냥 바다일 뿐이다. 서해니 태평양이니 하는 낱말은 될 수 있으면 한눈에 바다를 가늠해보려고, 그래서 효과 있고 안전하게 바닷길을 해쳐 나가려고 생각해낸 용어일 뿐이다. 넓고 넓은 바다를 우리 의식 안에서 질서 있게 인식하려고 그어놓은 선(線)이요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다.


글을 해석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글이란 문장이 여럿 모여 일정한 생각의 줄거리가 이룬 것. 우리 사는 곳에 글은 늘 넘쳐나게 많다. 글의 세계 또한 바다처럼 하염없이 넓고 깊다. 그 바다를 헤쳐 나가려 하는데 앞서 전체를 가늠하고 이해해보고자 글의 종류를 나누어 본다.


종류를 나눌 때 기준이 있어야 한다. 글을 예술문과 비예술문(실용문)으로 분류한다. 시와 소설, 희곡 따위가 예술문이다. 두 글은 쓰는 방식과 목적이 다른 차원에 있다.


운율을 생각해 보자. 운율에 따라 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운문과 산문이다. 읽고 쓰는 글은 모두 운문 아니면 산문이다. 운문은 글에 리듬이 배어있는 글이다. 그러나 비예술문에서 운문은 많지 않다. 격언과 속담, 각종 표어 그리고 노랫말과 광고문 정도에서 운율이 쓰이고 있다. 나머지는 산문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에는 운문보다 산문이 훨씬 더 많은 셈.


차이를 정확히 할 필요는 없으나 산문이 운문보다 훨씬 더 많다. 초점을 산문에 맞춰 종류를 나누어 보자. 객관성과 주관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글쓴이가 대상과 주제를 다루면서 객관성에 따르느냐, 주관성에 따르느냐에 따라 네 가지로 산문을 나눈다. 설명문·논문·감상문·예술문(문학)이다.


1. 설명문 - 객관성

2. 논증문 - 주관성+객관성

3. 감상문 - 주관성


예술문은 주관성을 쫓아 쓰는 글이다. 예술문은 허구성을 바탕으로 하기에 비예술문과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예술문을 빼고 운문을 가려내고 나머지 산문을 객관성과 주관성이라는 기준에 따라 설명문과 논증문, 감상문을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읽는 모든 글이 전체에서 어떤 체계로 되어 있는가를 대략이나마 가늠해보려고 세운 기준일 뿐이다. 절대성에 따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읽고 쓰는 모든 글이 이 구분법에 따라 정확하게 갈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쌀은 쌀이고 보리는 보리이듯이 감상문은 감상문이고 설명문은 설명문이며 논문은 논문으로 확연하게 구분되고 그밖에 다른 글은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설명문과 논문, 감상문과 예술문은 여러 글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대표성을 지닌다고 여겨진 특징이요 양식들이다.


1. 설명문

어떤 물건이나 장소·사실·사건·학술이론·작품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현상과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뜻을 풀어내면서 소개하고 알리는 글이 설명문이다. 설명문은 설명을 주요 기술 방식으로 하며 내용을 독자가 잘 알 수 있도록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둔다. 설명문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조리가 정연하면서도 알아듣기 쉽도록 간결하게 써야 한다. 전달 대상과 내용에 관하여 글쓴이가 개인의 감정과 주장·의견들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구청과 동사무소·국민연금관리공단과 선거사무소 따위 국가 기관이나 학교에서 주민과 학부형에게 보내는 고지서와 통지서 그리고 알림장을 비롯한 각종 공문서가 설명문을 대표한다. 제품 사용설명서·관광안내문·신문 기사문(記事文)·실험이나 관찰 등의 보고서들이 가까이 놓여 있는 설명문이다. 여기에 이력서라든지 해설에 중심을 둔 가벼운 서평 따위도 설명문의 범주에 속한다. 각급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재로 쓰는 교과서와 사전 따위는 설명문으로 이루어진 책들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이들과 소통하려면 매일 이러한 글을 꼭 읽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설명문은 다른 어떤 글보다 실생활에 가장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설명문은 물론 객관성을 토대와 목적으로 삼는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성이란 ‘1+1=2’라는 문장처럼 진위가 또렷하여 누구나 인정해야 하는 사실 내용에만 초점을 맞추는 개념은 아니다. 더불어 글쓴이 개인의 취향이나 의견을 집어넣고자 하는 욕구와 자세를 버리고 어떤 사항을 전달하고 이해시키려 하는 태도가 근본이다.


모든 설명문이 늘 100% 객관성에 서 있지는 않다. 글쓴이가 의식하지 못한 채 글 가운데 글쓴이 개인의 기호와 의견이 조금씩 섞여있는 설명문을 가끔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정신과 글도 칼로 베어 둘로 쪼개듯 또렷하게 경계를 나누기 힘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글 전체 내용을 가늠하는 중심이 주관성에 있느냐 객관성에 있느냐이다.

다음 예문들을 살펴보자.


조리방법

1. 끓는 물 550cc(큰 컵으로 3컵) 정도에 면과 스프, 후레이크를 넣고 약 3-4분간 끓이면 삼양라면 특유의 맛으로 조리됩니다.

2. 식성에 따라 김치, 계란, 마늘, 파 등을 넣어 드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조리 시 안전에 유의하세요.

※나트륨(식염) 섭취를 조절하기 위하여 기호에 따라 적정량의 스프를 첨가하여 조리하십시오.

* 유통기한: 전면 또는 후면 표기일까지


대행지역 쓰레기봉투(50L)

- 생활계폐기물 -

1.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전용 봉투에, 재활용품은 품목별로 분리 배출하여 주십시오.

2. 재활용품 및 음식물쓰레기를 이 봉투에 혼합하여 배출할 시 2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합니다.

3.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할 시 1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4. 이 봉투는 성북구 (주)태안환경에서 청소하는 지역에서만 사용하여야 합니다.


①은 라면 조리법과 더불어 식품을 관리하는 데 있어 알아야 할 사항 몇 가지를 공지하고 있다. ②는 가정에서 쓰레기를 내놓으면서 쓰레기봉투를 상용할 때 꼭 지켜야 할 규칙을 지시하고 있다. 모두 생활에 가까이 있는 실용문인 셈이다. 그러나 조각 글을 모아 놓고 있으며 특히 ②는 문장에 숫자를 매겨 도표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흔히 읽는 글 한 편이라고 보기에 조금 무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꼭 필요한 정보만을 독자에게 전한다는 특유의 목적에서 이런 양식이 비롯되었다고 본다. 어떤 이는 세상에 이른바 100% 설명문은 없다고 주장한다. 글은 사람이 쓰는 것이니 어떤 글이고 간에 어느 구석엔가 글쓴이의 생각이 스며들어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두 글은 각각 짧고 또렷하게 객관 사실을 전하는 데에 필요한 사항만을 서술하고 있어 100% 설명문으로 여겨도 틀리지 않다.


예를 들어 ①에서 끝에 ‘소비자의 입맛과 건강을 돌보는 마음으로 제품을 만듭니다’ 따위 문장을 더했다면 말 그대로 100% 설명문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 글은 신문 기사문이다.


적당히 살찐 여성, 우울증 덜 걸린다

한림대 교수팀 밝혀

“발병 위험 정상체중보다 0.7배 줄어”


보통 ‘살집이 넉넉한 사람들은 태평하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적당히 살이 찐 여성들이 우울증에 덜 걸린다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한림대 성심병원 가정의학과 조정진 교수팀이 전국 329개 회사의 20∼60세 직장인 8121명(남성 5231명, 여성 2890명)을 임의 표본 추출해 비만과 우울증과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경도비만(BMI·체질량지수 25∼30) 여성은 정상체중군(BMI 18.5∼24.9)과 비교해 우울증 위험이 0.7배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경도비만 전 단계인 정상체중 및 과체중군(18.5∼24.9)에서는 BMI가 1씩 증가할수록 우울증 위험이 0.93배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과 달리 남성에게서는 BMI와 우울증 간 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BMI는 체중을 신장의 제곱으로 나눈 것이다. ‘아시아 태평양 비만기’에서 BMI 18.5 이하는 저체중, 18.5∼22.9는 정상(표준) 체중, 23.0∼24.9는 과체중, 25.0∼29.9는 경도비만, 30 이상은 고도비만이다. 일반적으로 정상체중과 과체중(18.5∼24.9)이면 건강한 체격으로 본다.


반면 저체중(BMI 18.5 이하)과 고도비만(BMI 30 이상)에서는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울증 위험이 높아졌다. 저체중인 여성은 정상체중 여성에 비해 우울증 위험이 1.42배, 남성은 정상체중 남성에 비해 1.3배 증가했다. 또 고도비만인 여성은 정상체중 여성에 비해 1.47배, 남성은 정상체중 남성에 비해 1.79배 증가했다.


조정진 교수는 “흔히 비만이 정신건강상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고도비만이 아닌 경우 비만이 우울증 위험을 높인다고만 볼 수 없다”며 “한국인의 경우 마른 체형보다는 다소 통통해 보이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체형에 대한 자기 만족도가 높을 수 있고, 성격도 유연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한국어판 ‘역학연구용 우울척도(CES-D)’를 이용한 설문지 조사와 건강진단의 신체측정결과 자료를 분석해 이루어졌다. 조정진 교수는 이 보고서를 지난달 14∼1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16차 유럽 비만학회에서 ‘한국의 직장인에서 비만과 우울의 관련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김현지 기자 (동아일보, 2008. 06. 09)


글쓴이는 기자이다. 많은 사람이 보는 신문에 기사를 쓰는 입장에서 글쓴이는 글에서 두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는 연구 진행 과정이다. 글쓴이는 연구와 발표가 이루어진 과정을 육하원칙에 따라 간략하게 소개했다. 그리고 그보다는 연구 결과를 전하는 데 좀 더 지면을 쓰고 있다. 비만여성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낮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하는데 실험 결과를 여러 측면에서 구체 수치로 나열하면서 서술하여 객관 정보를 또렷하게 전하고 있다.


연구 결과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관계없이 글쓴이(기자)는 조사한 내용을 자신의 취향과 상관없이 서술했다. 이 글 역시 설명문을 대표하는 글이 된다.


다음 예문은 좀 더 폭넓은 주제에 가닿은 설명문이다.


1966년 美‘미란다 원칙’ 판결


에르네스토 미란다는 멕시코계 미국인이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추악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이름은‘인권의 대명사’로 길이 남아 있다.


미란다는 1963년 3월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 시의 한 극장 앞에서 18세 소녀를 유괴해 들판으로 끌고 가 강간했다. 경찰은 당시 21세인 그를 납치 강간 혐의로 체포했다. 경찰서로 붙들려간 그는 피해 소녀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받는다. 2명의 경찰이 그를 조사했다. 변호사는 선임되지 않은 상태였다. 미란다는 무죄를 주장하며 완강하게 버텼다. 하지만 2시간의 경찰 심문 끝에 그는 손을 들고 만다. 범행자백 자술서를 쓰고 서명도 했다.


재판이 시작됐다. 미란다는 갑자기 말을 바꾼다. 무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강요된 자백에 따라 진술서를 억지로 썼다고 주장했다. 재판정은 술렁거렸다. 그러나 법원은 미란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범죄사실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애리조나주 법원은 그에게 ‘최저 20년 최고 3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미란다는 애리조나주 법원에 상고했다. 주대법원의 판결도 마찬가지였다. 애리조나 주대법원은 원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무죄를 주장하는 ‘미국 자유시민연맹’은 연방대법원으로까지 이 사건을 끌고 갔다. 1966년 6월 13일 미연방 대법원은 미란다의 손을 들어주는 극적인 판결을 내린다. 연방대법관 9명 가운데 4명은 미란다의 유죄를 주장했다. 반면 5명은 무죄라는 미란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아도 될 권리(미국 헌법 제5조)와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미국 헌법 제6조)를 침해당했다는 것이다. 이 판결로 그는 석방됐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기본 권리가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말한 것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질문하기 전에 당신은 변호사와 상의할 권리가 있습니다.”


경찰이 피의자를 연행할 때 반드시 알려야 하는 ‘미란다의 원칙’은 이렇게 탄생했다.


피의자의 인권에 대한 중대한 판결을 만들어낸 미란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동거 여인의 증언으로 다시 유죄가 확정돼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72년 가석방됐다가 4년 뒤인 1976년 술집에서 싸움을 하다가 죽었다. (책갈피 속의 오늘, 동아일보, 2008. 06. 13)


이 글은 ‘미란다 원칙’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하고 있다. 서사를 기술 방법으로 하여 내용을 펼치면서 ‘미란다’라는 사람이 저지른 행적을 더듬어 간다. 글쓴이는 범죄인 미란다와 그를 둘러싼 사건의 흐름을 바라보되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가치관이나 선호 또는 취향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객관성에 따른 자세를 지켜 사건의 시작과 끝을 더듬어 갈 뿐이다. 한 인간으로서 미란다에게 가질 수 있는 증오와 연민을 서술하거나 사건이 지니고 있는 역설성(逆說性)에 감탄하거나 또는 법 판결을 따지고 드는 논리 따위를 펼쳤다면 이 글은 설명문이 아니라 감상문이나 논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글쓴이는 객관에서 주관으로 넘어가는 그 경계선을 잘 지켜 사실을 전하는 데에 그쳤다. 이 글은 설명문의 전형이 된다.


설명문은 실생활에 곡 필요한 정보를 전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따위 여러 방면에 걸친 지식을 자세하고 쉽게 알려주어서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 데에 기초가 되는 도움을 준다. 초·중·고 학생이 읽는 교과서와 대학생이 읽는 개론서 따위가 설명문이다.


다음 글은 약간 달리 볼 수가 있다. 설명문인지 아닌지 따져보게 된다.


소개팅에서 재미있게 어필하는 방법

도대체 어떻게?


재미있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작정하고 웃긴 얘기를 하기보다는 상황 자체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그녀가 살짝 웃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녀가 늦게 온다고 문자를 보내면 답문으로 ‘지하철에서 뛰세요.^^’라든지 ‘지하철 밀어 보세요^^’하는 문자를 보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서 길을 걸을 때도 그녀의 키를 재면서 “이야 우리 키는 벌써 커플 키네요. 하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긴장을 완화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상황을 활용하되 능청스럽게

상황을 활용한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그녀와 초밥 집에 갔다면 마늘양념을 그릇에 담아주자. 그녀가 젓가락으로 먹으려고 하면 당신도 젓가락질을 하다가 그녀의 마늘을 뺏어보자. 귀엽게 “그 마늘이 더 맛있어 보여서요. 하하” 하면서 능청맞게 행동한다면 어이없는 행동에 그녀도 웃게 될 것이 분명하다. 돈가스 집에 갔는데 그녀는 치킨 가스 당신은 그냥 돈가스를 시킨다면 “하나 먹어 봐도 될까요?” 하면서 하나를 먹으면서 이야기해보자. “맛있네요. 치킨가스가 더 맛있어요. 바꿔 먹어요. 하하” 하면서 능청맞게 행동해보자.


그녀가 무언가를 집으려고 할 때 당신은 그녀의 손을 잡아보자. “아, 이 손이 왜 거기로 갔지? 나쁜 손 에잇 하하” 하면서 웃어보자. 그녀와 헤어지고 나서 그녀가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 히틀러 식으로 손을 들어 보자. 그녀는 반드시 웃게 될 것이다.


대부분 남자들은 자기가 운동하는 것을 자랑하려고 가슴이나 팔뚝을 만져보게 하는데 그러한 방법보다 “아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요.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진 것 같아요. 한번 만져보세요.” 라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유도해 보자.


음식점에 갔을 때 그녀에게 국이나 그러한 것을 집어주다가 손가락이 들어가면 “양념이 더 되어서 맛있을 거예요. 하하” 하면서 “죄송해요 제가 먹을게요.” 한다면 당신을 귀엽게 볼 것이다.


소개팅에서 너무 주접을 부리거나 말이 많거나 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긴장하거나 말이 없어도 안 된다. 다만 상황에서 재치를 발휘하여 그녀를 몇 번은 웃게 만들어야 더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자, 소개팅에서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면 재미있게 어필해보자.

(문창혁/젝시 라이터)


이 글은 소개팅에서 성공하는 법을 일러주고 있다. 퍽 재미있는, 특이한 소재요 주제다. 자신이 지닌 연애에서 성공하는 법을 차근차근 말하고 있다. 설명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전체 내용이 퍽 주관에 따른 것이고 보기에 따라서 설명한다기보다 주장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글쓴이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과 그에서 얻어낸 남모르는 자신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명문으로 보기에 다소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 서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도 않고 대상을 바라보며 우러나오는 감성을 펼치고 있지도 않다. 그러니 이 글을 설명문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자기주장 글 또는 감상문이라고 해야 할까.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설명문이니 감상문이니 하는 용어를 쓰는 까닭은 넓디넓은 글의 바다를 효과 있게 나누어 봄으로써 글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길을 넓히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글이 설명문인지, 감상문인지 기어이 가려내어 못을 박아야 할 까닭은 없다. 각각 세운 기준에 따라 글의 성격을 제 나름대로 가늠해보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결혼 행사를 알리는 청첩장은 일시와 장소 따위 객관 사실을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몇 월 며칠 어디에서 누가 누구와 결혼식을 올린다는 정보를 전하는 것이 청첩장의 고유 기능이요 목적이다.


그러나 대개 청첩장에는 가벼운 인사말과 더불어 앞으로 어떻게 살겠다는 신랑 신부의 각오 따위가 함께 실려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사랑으로 이제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꾸미려 합니다. 부디 오셔서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따위다. 그렇다면 청첩장은 순수 설명문이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 굳이 설명문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자기소개서를 살펴보아도 그렇다. 자기소개서란 자기가 지닌 환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이제까지 쌓은 경력 따위를 숨기거나 부풀리지 않고 그대로 상대에게 전하는 글이다. 실용문이면서 설명문을 대표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자신의 포부와 감성을 밝히는 것은 물론, 어느 부분에서는 살짝 윤색을 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또 주관이니 객관이니 하면서 따져야 할 필요는 없다.


설명을 목적으로 하면서 설명 행위를 기둥으로 삼되 개인의 뜻과 마음을 거기에 더했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정부 고위 관련자가 발표하는 담화문 따위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눈에 띈다. 이러한 글 또한 융통성 있는 안목으로 그 성격을 가늠하면 그만이다.


2. 논증문(論證文)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 일이든 남의 일이든 개인에 관한 것이든 공동체에 이어진 것이든 수많은 일에 부딪친다. 이때 단순히 옆에서 보고 뒤에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일에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주장하고 나아가 자기주장을 다른 이들이 따르도록 해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 논증문은 세상사를 제 나름대로 판단, 해석한 끝에 얻은 생각을 내세워 말하되, 객관성 어린 근거로써 상대방을 설득하여 동의와 동감을 이끌어내려는 글이다. 그래서 논증문을 이루는 기본 뼈대는 '주장+근거'인데, 이는 다른 글과 또렷이 다른, 논증문의 본질이며 생명이다. 이점에서 논증문은 특히 객관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설명문과 근본에서 다르다.


논증문은 객관으로써 주관을 밝히고자 하는 글로서 첫째, 앞뒤가 딱 들어맞는 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논리가 정연해야 한다. 사실 조리는 모든 글쓰기에서 제대로 세우고 지켜야 할 미덕이고 기본규칙이다. 논증문을 쓸 때, 이점에 더하여 논리성을 더욱 깊이 고려해야 한다. 독자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을 바꾸도록 이끌어가려면 무엇보다 앞뒤가 제대로 맞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장하는 것이 또렷하게 드러나야 한다. 논증문은 글쓴이의 주장을 가장 소중하게 다루는 글이다. 그러므로 글쓴이의 주장 곧 주제를 또렷하게 밝히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셋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이유)가 또한 또렷하게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넷째, 박사학위논문과 같은 학술논문이 아니라면 되도록 쉽고 친근한 문장으로써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논설문과 각종 평론 그리고 각급 학술논문 따위가 다 논증문이다. 논설문은 다시 첫째, 신문 사설이나 시평(時評), 단평과 같이 시사성을 띤 문제를 다루는 글과 둘째, 일반교양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사랑·행복 따위에 걸친 문제와 내용을 다루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사설은 신문을 주요 매체로 한다. 따라서 일반 대중을 독자로 하기에, 주제를 다루는 데에 전문성이 비교적 덜하고, 글쓴이의 주관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일반교양을 다룬 논증문과 각종 평론, 학술 논문은 매우 높은 수준의 학식과 전문성이 뒷받침되어 써진다. 특히 학술논문은 대개 따로 정해진 형식 체계와 규칙이 있어 다른 논증문보다 더욱 엄정한 객관성에 따진다.

먼저 사설 한 편을 예문으로 읽어 보자.


학교 서열화가 부른 불길한 미래의 전조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가 학생의 성적에 따라 차별적으로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성적 우수자에겐 별도의 자율학습 공간을 배정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저녁 배식에서도 일부 차별을 뒀다는 것이다.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서라거나, 학습 분위기 유지 차원이라는 등 학교의 변명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단지 시험성적만으로 학교가 학생을 차별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다.


문제는 이 학교의 사례가 앞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될 학생 인권 파괴를 경고하는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새 정부 들어 각 시·도 교육청은 진단평가라는 이름으로 일제고사를 실시하기 시작했고, 일부에선 학교별 혹은 개인별 성적을 배포했다. 이에 따라 시·도 혹은 전국 단위의 학교 서열화는 시간문제가 됐다. 이에 앞서 서울 등 일부 시·도 교육청은 학교 선택제를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학교와 교사의 책임감을 높이려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낳을 결과는 불 보듯 자명하다. 학교 관리자는 자신의 학교가 상위 서열에 오르도록 교사들을 다그칠 것이고, 교사는 학생들을 들들 볶게 된다. 결국 들볶임의 종착지는 학생이다. 그리고 들볶는 방법 가운데 가장 손쉬운 것이 성적에 따른 차별이다.


학교 서열화를 앞두고 각 학교는 이미 방과 후 학교를 특기 적성 활동에서 교과 학습으로 점차 전환하고 있다. 한 시간이라도 문제풀이 연습을 시켜 학교 전체의 성적을 올리겠다는 취지다. 그나마 조금씩 자리 잡아가던 특기 적성 교육은 이제 다시 설자리를 잃을 게 분명하다. 영전이나 승진은커녕 자칫 무능력자로 낙인찍힐 수 있는 교장․교감에게, 한가로이 아이들 적성을 발굴하고 고민을 상담하며 진로를 모색하도록 ‘지도편달’을 요구하긴 어렵다.


어떤 사람에게나 나름의 잠재력과 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 특정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서열화해서는 안 되며, 학교는 학생들의 자질과 능력을 발굴해 계발하는 게 기본이다. 아이들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게 교육이기 때문이다. 단지 시험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받은 모멸감과 좌절감은 평생 씻기지 않는다. 이렇게 받은 상처는 자존감과 자신감을 훼손시켜,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펼치는 것을 방해한다. 교육이 앞장서 아이들의 날개를 꺾어선 안 된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먼저 학교 서열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

(한겨레신문, 2008. 04. 07)


이 글에서 글쓴이는 학교 서열화를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먼저 학교 서열화를 부추기는 정책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내용은 성적에 따른 급식 차별·일제고사 실시·학교별과 개인별 성적표 배포·방과 후 학교 운영 취지가 변질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현상이 학생의 인권을 파괴하고 결국 제대로 된 교육을 방해한다고 글쓴이는 제 나름대로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진단 자체가 이미 학교 서열화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글쓴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지만 이에 이어서 글쓴이는 좀 더 또렷하고 직접성이 있는 근거를 대고 있다. 그 내용은 누구나 잠재 능력이 있고 학생이 이것을 계발하도록 돕는 것이 바로 교육이며 성적을 구실 삼아 이 잠재력을 꺾으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다친다는 것이다.


이 글은 단락 4개로 되어 있다. 다른 글에 비교해 볼 때 짧은 글이다. 그러나 주장과 근거를 또렷하게 밝히고 있어 논증문의 모범이 된다. 먼저 몇 가지 현상을 보여주면서 이를 진단하고 마지막에 적절한 근거를 들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구성법은 논증문을 쓰는 데에 표본이 되는 양식이다.


신문 사설은 우리 생활 현장 가운데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논증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설이 다 이 글처럼 ‘주장+근거’라는 구조를 알맞게 지니고 있지는 않다. 논설문이라고 해서 논증문이 갖추어야 할 구조에 항상 충실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음 글이 그 예를 보여준다.


저격수로 나선 문화부 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산하 기관장 ‘물갈이 압박’이 점입가경이다. 유 장관은 지난 12일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자리를 지키는 것은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뒤집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문화인을 자처하는 기관장들의 자존심을 뭉개고 수치심을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그러다가 이제 아예 기관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문제가 있으니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15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자리에 연연해한다면 재임 기간 어떤 문제를 야기시켰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 장관이 말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문제란 것이 나라의 문화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사퇴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 이전에 국민 앞에 낱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정도에 지나쳐 법에 저촉될 정도로 심각하다면 수사를 의뢰하여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런 압박에 굴복하여 사퇴한다면 이들 기관장은 국민들에게 문제가 있는 인물로 비쳐질 것이다.


문화부 장관이 왜 산하기관장 교체의 저격수가 되었는지, 그의 입에서 문향(文香)이 아닌 독설이 뿜어 나오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정권교체 후 챙겨줄 사람은 많은데 자리가 없으니 그 자리를 마련하라는 것 아닌가.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당에서 먼저 터뜨리고 청와대에서 이를 뒷받침하고 유 장관이 총대를 멘 셈이다. 유 장관은 또 “(서울)시장이 바뀌자 나도 서울문화재단 대표에서 물러났다”고 했다. 그것이 소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소신을 들이대며 다른 사람을 압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는 ‘문화단체장 밀어내기’는 아직도 우리 문화계가 정치권의 자리나 마련해주는 비루한 처지임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돌격형 문화장관’의 행보가 보기에 민망하다.

(사설/경향신문, 2008. 03. 17)


이 글에서도 ‘주장+근거’로 된 구조를 더듬어 볼 수는 있다. 새로 뽑힌 문화부 장관이 여기저기 독설을 흘리고 다니는 일이 왜 옳지 않은지를 글쓴이는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행보는 개인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며, 문제의 개념을 잘못 휘두르고 있으며 자기 소신 또한 잘못 행사하고 있다고 글쓴이는 말하고 있다. 이어 기관장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공공 차원에서 밝혀야 할 것이며 자기 소신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뒷받침한다.


그러나 결국 글 전체에서 글쓴이는 개인의 행동을 비난하고 꼬집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논증문은 주관을 이루려고 객관을 수단으로 삼는다고 했다. 논증문을 쓸 때에는 나의 생각을 상대가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잠시 나를 버리고 객관에 기대어 지면을 채워야 한다. 그런데 이 글에서 글쓴이는 객관성 어린 근거보다는 주관에 따른 감정 언어를 선택했다. ‘점입가경’이나 ‘들이대고 있다.’, ‘저격수’, ‘총대’, ‘민망하다’, ‘돌격형 문화장관’ 따위 구절들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근거 없는 독설을 퍼트리고 다니는 장관의 행보가 어째서 잘못되었는지 파헤치려면 좀 더 객관성과 논리성을 가지고 비판해야 했다.


이 글은 결국 글쓴이 나름의 편집 의도에 따른 것으로서, 신임 장관이 보인 꼴불견 행태를 꼬집어 주고 싶은 따위 같은 글쓴이의 욕구를 이루었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상 파악과 진단 그리고 그에 다른 감정풀이만이 있고 근거에 다른 주장은 싣지 않았기에 이 글은 논증문은 될 수 없다. 이글이 올바른 논증문이 되려면, 장관과 기관장이 어떤 의미가 있는 자리인지 합리성 어린 기준에 따라 규정한 뒤 이에 따라 신임 장관의 행동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글쓴이는 조목조목 따졌어야 했다.


상대를 바라보고는 있지만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둔 근거까지 대면서 무엇을 주장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여 이렇게 감정을 앞세운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상대를 비방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모범성을 갖춘 논설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개인이 지닌 감상을 터트린 글이라 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 든 예문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논평’이라고 글쓴이 스스로 밝히고는 있지만 ‘주장+근거’라는 틀과 그리 가깝지는 않은 듯하다. 아주 긴 글이라서 살펴보기 편하도록 문단마다 번호를 주었다.


6월의 광장을 딛고 나아가는 2008년 촛불항쟁

김종엽(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1. 사회는 종종 자신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는지 모를 때가 있다. 그래서 사회는 종종 스스로에게 놀란다. 이제는 '촛불문화제'가 아니라 '2008년 촛불항쟁'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이 사건도 그런 것에 속한다. 촛불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역사적 사건의 참여자인 동시에 관찰자인데, 그들은 모두 자신의 소박한 행동이 장엄한 촛불 물결과 동일한 실체라는 사실에 경탄한다.


2. 지난 한 달 동안 거듭해서 스스로를 초월하며 발전해온 2008년 촛불항쟁의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도 정리해 말하자면 현재의 상황은 후진기어를 넣고 역진하는 '불도저'를 시민들이 촛불을 밝혀 막아선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주적 정부 아래서는 민주화가 밥 먹여주냐는 냉소가 흘렀다. 하지만 마치 사장이 구내식당에 납품될 쇠고기를 수의 계약하듯이 미국에 간 대통령이 미국산 쇠고기를 전면 개방했을 때, 시민들은 민주화의 역진이 밥상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게 되었다. 미국산 쇠고기 개방은 더불어 영어 몰입교육에서부터 4·15 교육규제 철폐, '고소영 강부자' 내각, 대운하 추진 같은 선행하던 사건들 그리고 수돗물과 건강보험을 비롯한 각종 민영화 같은 다가올 사건들의 의미 또한 또렷하게 해 주었다. 시민들로서는 적어도 역전 불가능한 지점을 지정해줄 필요를 느꼈고,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스스로 촛불을 들 수밖에 없었다.


3. 생각해보면 87년 체제를 통해서 시민들은 대의제가 작동 불능이나 오작동 상태일 때마다 그리고 87년 민주화의 성과가 무화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직접민주주의적 행동을 개시했다. 1996년 겨울 노동법 파동 때 그랬고, 2000년 총선연대의 활동이 그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가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촛불항쟁은 87년 체제를 통해서 반복되어온 시민의 직접민주주의적 개입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반복을 상회하는 혁신과 변화의 징후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 사태의 추이를 되짚어보자.


4. 4월 17일 한미 쇠고기 협상이 타결되었을 때만 해도 협상의 의미는 불명료했다. 하지만 송기호, 박상표, 우석균 같은 전문가들에 의해서 사회적 계몽이 시작되었다. 축산 포드주의에 기반을 둔 쇠고기 산업의 이윤추구가 얼마나 추악한지, 정부가 얼마나 몽매한 협상을 했는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후 인간광우병을 피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지독한 강박증적인 주의력을 요구하며 궁극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가 속속 드러났다. 그때 이미 쇠고기 문제는 논쟁의 국면을 지났다. 이어진 수많은 TV토론은 이명박 정부를 수호하려고 나선 인물들의 논리가 얼마나 가관인가를 보여주는 구경거리였을 뿐이었으며, 정부 관계자나 그들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몇 년 전 황우석 박사가 갔던 길을 뒤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5. 인상적인 동시에 새로운 현상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계몽의 확산 속도와 조직화의 힘이었다. 지식인과 전문가, 비판적인 언론매체,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그리고 사람들의 손에 들려진 휴대전화와 디지털카메라의 협력 아래 진행된 이런 사회적 계몽은 의학과 국제법과 국제경제학을 넘나들며 관료적 레드 테이프와 보수언론의 담론 조작, 사이비 전문가들의 요설을 남김없이 격파했다. MBC 신경민 앵커의 말처럼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시민 되기가 쉽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 일을 능히 해냈다.


6. 계몽 과정의 양식과 속도만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행동의 차원에서도 새로움은 나타난다. 사실이 하나씩 규명될 때마다 사람들의 분노는 커져갔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행동이 중요하다. 이 행동이라는 핵심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선 여학생들이었다. 정치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있다고 추정된 존재가 정치의 전면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 이전에 쓴 글에서 나는 이들이 지닌 세대론적 함의를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런 세대론적 함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시청 앞 광장에서 보인 모습이다.


7. 그들은 참 스스럼없고 재기 발랄한 표어들을 들고 나섰는데, 그중엔 "미친 소, 너나 먹어"라는 당돌하고도 엄중한 표어도 있었다. 나는 이 표어가 촛불항쟁의 새로움의 한 차원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표어에는 주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는 의미심장하게도 남한 정부 수립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면에서 생채기진 분단국가의 수립이었지만, 어쨌거나 정부 수립은 식민지 아래서 살아온 민중이 국가 시민으로 거듭난 경험이었다. 하지만 뒤이어진 전쟁과 독재정권으로 인해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피해자 심리를 가지게 되었다. 거의 원초적이라고 할 만한 이 피해자 심리가 이들에겐 씻은 듯이 없다. 그들은 진정으로 주인으로서 말하고 있거니와 이것이야말로 촛불항쟁이 보여준 최고의 새로움이다.


8. 그런 의미에서 촛불항쟁을 '국민 MT'라고 부른 역사학자 한홍구는 정곡을 찌른 것 같다. 계속되는 집회 속에서 주인임을 자각할 필요조차 없이 이미 주인으로 발언하는 청소년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주인됨의 몸짓과 언어를 습득하는 동시에 주인이 되어 있음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항쟁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공동체의 멤버십 트레이닝이라 할 수 있다. 한겨레 기획위원 홍세화가 몇 년 전부터 끈기 있게 외쳐온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지금 집회 현장에서 노래로 울려 퍼지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노래는 질적 비약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홍세화의 말은 주장이고 요청이었지만 지금 불리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확증된 사실의 선포이고 주인의 자유로운 읊조림이다. 87년 헌법이 추상적으로 기재한 헌법 제1조가 비로소 사람들의 육체와 목소리에 현존하게 된 것이고, 체제의 지향점이 마침내 자기완성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촛불항쟁이 6·10 항쟁 21주년과 접속한 것은 자신과의 조우인 동시에 나선형의 상승,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9. 너무도 인상적인 이런 주인됨의 양태, 주권자의 모습을 추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살수차를 혼자 막고 서서 "경찰이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면 안 되잖아요."라고 말하는 여고생,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표어를 들고 경찰 앞에 서 있는 한 노인, 불법시위를 운운하는 경찰의 선무방송에 대해 "너희가 불법이다."라고 말하는 시위군중은 실정법을 압도하는 법 정초적 발언, 주권자의 목소리이다.


10. 촛불항쟁에 흐르고 있는 주인됨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항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이 태도가 권위주의적 정부의 폭력에 대한 모든 공포를 깨끗이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전경이 사람들을 체포하면 그것을 '닭장차 투어'쯤으로 여기는 것, 바리케이드 쳐진 전경버스 위에 전경이 보이면 "노래해"를 외치고 물대포에 "온수"를 요청하는 것 뒤에는 전경 대다수가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이해심과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주인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국가의 권위주의적 폭력은 이제 사실적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규범적으로 가능성의 경계 저편으로 내몰린 셈이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선 주부들의 모습, 아이들을 목말 태우고 행진하는 아빠들의 모습은 그 명백한 증거이다. 그들의 태도는 아이의 목숨까지 담보한 위험한 투쟁에 임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공포가 소멸한 광장에서 역사적 순간을 자녀와 함께하려는 이들의 모습이다.


11. 공포가 사라진 곳에서 풍자의 자기표현적 시학이 만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위 현장과 인터넷을 채우고 있는 시민들의 말들은 수사학 사전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만해서 시민 전체의 카피라이터화, 시인화, '진중권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더러는 "명박아 미국에서 얼마 받고 알바하니" 같은 거친 조롱도 있지만, 판소리의 전통에 닿아 있는 멋진 것도 있다. "이름은 명박, 별명은 땅박, 관상은 쥐박 … 생각은 천박, 정신은 띨박, 철학은 척박, 언행은 경박 … 인심은 야박, 의리는 깜박 … 공무원은 타박, 기관장은 압박, 서민은 핍박 … 경제는 쪽박, 전망은 희박 … 운하는 강박, 정치는 도박, 정책은 엇박, 변명은 또박, 구속은 임박, 탄핵은 촉박."


12. 풍자의 시학 속에서 새벽을 넘기곤 하는 집회 현장이 난장의 형태를 띠는 것은 또한 당연하다. 더러는 서고, 더러는 앉고, 더러는 노래하고, 더러는 술 마시고, 더러는 구호를 외친다. 한쪽에서는 중고생 밴드가 사람들과 어울려 크라잉넛의 <말 달리자>를 노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전경버스를 두들기거나 "영차영차" 밀고 있다. 그 안에는 사회적 투쟁에서 흔히 발견되는 심각함 대신 유쾌함이 흐른다. 해방 과정 자체가 해방적이어서 혁명과 축제가 직접적으로 동일시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13. 확실히 전경버스와 시위 대중이 맞닿는 경계면에는 어떤 과잉이 있다. 거기에서는 밧줄도 등장했고 몽둥이도 등장했다. 하지만 이 몽둥이 옆에는 현장 채증을 시도하는 경찰 카메라에 물총을 쏘는 재기 발랄함이 공존하고 있다. 사실 전경버스 몇 대를 끌어낸다고 청와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다. 더러 다혈질인 사람들에게 이런 장면은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전경차를 끌어내려는 사람들은 시골장터의 차력사처럼도 보였다. 그것은 시위에 활력과 초점을 부여하는 이벤트 같은 것이다. 이 말은 밧줄로 전경버스를 끌어내려고 하고 전경버스에 기어오르는 사람들의 행동이 시늉일 뿐이라는 것이 아니다. 전경들을 뚫고 청와대로 가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표현적이지도 않고 몰입을 이끌 수도 없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는 희망과 우려, 분노와 자제의 긴장이 어린다. 그럼에도 두드러지는 것은 시위대의 폭력이 아니라 겁먹은 전경들의 폭력이며, 시위대에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될 때까지 모이자"는 단호한 느긋함이다.


14. "될 때까지 모이자." 이 말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상상(특히 이명박 정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항쟁의 지속성의 원천이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항쟁에 참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두들 내가 안 가면 다른 사람이 갈 것을 믿고 있고, 시간이 있으면 시청 앞에 나가고 있다. 그래서 전경들은 피로에 찌들어갈지언정 릴레이하고 있는 항쟁의 참여자들에게는 피로감이 없다. 그래서 지치지도 지칠 수도 없는 시민들은 긴 시간을 지나 6·10과 만났고, 6·10을 넘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5. 이 항쟁의 공간은 정부와 시민 간의 협상 공간이 아니다. 시민들은 지금 주권자로서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상은 미국 하고만 가능하며 그것도 재협상의 형태로만 가능할 뿐인데도, 여전히 대통령은 국민들의 염장을 지르는 말을 하거나 "자율규제" "인적 쇄신" "유류세 환급" 같은 동문서답을 거듭하고 있다. "땅 파지 말고 귀를 파라"는 표어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도 몰래 대운하 사업을 추진했으며, MB맨들은 언론사를 장악하고 공기업 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국가라는 여물통을 차지하고 관직과 공직이라는 사료에 코를 처박고 있는 30개월 넘은 소들의 꼴이 아닌가? 이런 식으로는 '명박산성'을 세워봐야 촛불이 꺼지기는커녕 더 높은 '시민 산성'이 세워질 뿐이다.


16. 지난 대선을 경유하며 87년 체제와 민주화의 시효 만료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한편에는 민주화가 끝나고 선진화가 시작되었다는 우파적 판본이, 다른 한편에는 87년 체제가 신자유주의적 97년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좌파적 판본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촛불항쟁은 그런 주장들을 기각하고 있다. 87년 체제의 극복과 민주화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으며, 오직 민주화에 뒤이은 감수성의 혁신에 힘입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17. 이렇게 스스로를 초월해가는 촛불항쟁이 어디서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바리케이드 친 전경버스와 컨테이너 박스 뒤에 웅크리고 앉아 시민들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점을 초과해갈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언젠가 이 국민적 원탁이 접히고 일상의 시간이 되돌아올 것이다. 사회는 다시 이해관계의 선을 따라 분열과 갈등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리에 선 모든 이들과 그들을 인터넷 TV 중계로 바라본 이들 모두의 기억들이 존속할 것이며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인터넷 주부 카페가 주도한 조중동에 대한 광고 투쟁 같은 다양한 투쟁 방식들도 남을 것이다. 잘 작동하지 않은 대의제를 개선하려는 작업도 이어질 것이다. 항쟁을 통해 확인된 공공성에 대한 합의도 남을 것이다.


18. 그렇게 일상을 정지시켰던 이 비일상의 시간은 되돌아올 일상의 경계를 재확정할 것이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금을 다시 그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항쟁 이후에 전혀 다른 사회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촛불항쟁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고대 아테네의 민주적 지도자 페리클레스가 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몰자 추도 연설문의 한 구절을 바친다.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에게 놀랄 것입니다. 마치 오늘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놀라워하듯이……."

(창비주간논평, 2008. 06. 11)


한국 정부가 벌인 주요 경제 정책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2008년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촛불집회를 주제로 다루면서 그 의미와 성격을 제 나름대로 살피고 있다. 모두 18개 단락으로 써진 글이다. 먼저 단락을 따라가면서 그 내용을 정리해보자.


1. 촛불집회는 항쟁이라고 불릴 만큼 놀라운 사회변화 현상이다.

2. 촛불집회는 민주주의가 후진하는 현상을 단호하게 거부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으로서 87년 항쟁과 궤를 같이 하지만 그를 웃도는 새로운 징후를 지니고 있다.

4~5. 쇠고기 협상의 허구성을 밝히는 계몽의 속도와 조직화는 새롭고 놀랍다.

6~7. 특히 젊은 세대가 보여준 주인의식은 지난날에 입은 반민주의 상처를 말끔히 씻어낸 것이어서 가장 주목을 끈다.

8. 이 주인의식은 헌법 제1조를 참답게 구현하면서, 6․10 항쟁을 이어가고 또 발전시키고 있다.

9. 이러한 주인의식에 따른 시위 행동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10. 이 주인의식은 권위주의 정부가 저지르는 폭력에 따른 공포심을 없애버렸다.

11~13. 또 시위 현장에는 풍자 시학과 난장의 유쾌함, 재기 발랄하면서도 단호한 느긋함이 엿보인다.

14. 그리고 이러한 양상 밑에는 ‘될 때까지 모인다는’ 지속성이 깃든 참여정신이 깔려 있다.

15. 촛불 집회는 주권자 국민이 명령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16. 87년 상황과 민주 과정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자신의 힘으로써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17~18. 이번 촛불 집회가 모두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여러 투쟁 양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과 미래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위 문단 정리에서 잘 볼 수 있겠지만 이 글은 촛불집회가 어떤 의의와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단 1~3이 전체 차원에서 집회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으며 문단 4~14는 주로 집회 현장에서 보고 들은 시위 행동에 어린 뜻을 헤아리고 있다. 그리고 문단 15~18에서는 정부를 비난하면서 다시 집회의 전체 의미를 미래 상황에 이어 밝히고 있다.


글쓴이는 촛불집회에 대단한 호의를 지니고 있다. 거의 절대에 가까운 지지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마음과 태도는 물론 글 곳곳에 그대로 드러나 있으며, 그래서 이 글은 현상과 진단이 주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 듯하다. 물론 관점에 따라 진단이 곧 주장이요 현상이 그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 글은 객관성 어린 자세와 안목에 따라 현상을 파헤치고 비판 대상을 드러내며 냉정한 근거에 서서 상황을 헤아리고 있지는 않다. ‘논평’이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 글인지 정확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이 글은 논증문은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글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낮게 보면서 굳이 어떤 등급을 매기려는 뜻이 있지는 않다. 그럴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세운 ‘논증문’의 개념을 기준으로 삼아 이 글의 성격을 따져보려는 것뿐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글쓴이는 촛불집회를 대단히 사랑한다. 속속들이 집회를 바라보는 집요한 관찰력과 애정은 이 글이 지니고 있는 남이 흉내 내기 어려운 독특한 개성이면서 장점이다. 세세한 관찰력과 함께 한 애정과 관심은 대상에 순수하게 몰두하는 자세를 낳고 이 몰입이 다시 대상을 찬양하는 수준에서 바라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전경버스를 끌어내려는 사람들이 시골장터의 차력사’처럼 보였다는 진술에서, 글쓴이가 시위대를 좇아 품고 있는 애정의 깊이를 잘 알 수 있으며, 동시에 일방에 기운 자세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방 애정은 상대를 바라보며 드러내는 역시 일방에 기운 적개심과 무게가 같다. 문단 15에 나오는 ‘국가라는 여물통을 차지하고 관직과 공직이라는 사료에 코를 처박고 있는 30개월 넘는 소들의 꼴이 아닌가?’라는 문장에서 글쓴이는 상대를 향한 비판의식을 조금도 거르지 않고 적개심이라는 수준에서 그대로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보인다.


결국 이러한 감격과 적개심은 상황을 귀결하는 결론 부분에서 논점을 조금 흐리고 있다. 문단 18에서 ‘그렇게 일상을 정지시켰던 이 비일상의 시간은 되돌아올 일상의 경계를 재확정할 것이다’고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재확정할 것인지 또렷하지 않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이어 보면 그 뜻을 대강은 알겠지만 애매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또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금을 다시 그을 것이다’고 한 구절도 이와 마찬가지다. 무엇이 불가능하고 무엇이 가능하다는 것인지 또렷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객관성에 따른 냉정한 판단과 주장 그리고 근거를 중심으로 글을 펼치지 않고 몰두와 감격 그리고 감정에 바탕 한 대응에 따라 글을 써내려 온 결과로 여긴다.


다시 밝히지만 이 글이 잘못되었거나 수준이 낮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 책에서 생각해보는 논증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관성은 아주 또렷하지만 그 주관성을 뒷받침할 객관성이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논증문 가운데 우리가 가장 많이 읽는 것이 신문과 잡지에 나는 논설문과 사설이다. 특히 신문은 많은 사람이 보는 공공 매체이다. 따라서 어떤 문제를 다루든 간에 객관성에 서서 의견을 내놓아야 하며 주장을 할 때는 정당하고 적절한 근거로써 반드시 그 주장을 뒷받침해야 한다. 공공장소에서 의견을 발표하려면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여러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본을 어기는 예를 자주 보게 된다. 다음 예문들이 그렇다. 이 글들은 신문에 실려 있지만, 이미 앞에서 읽은 두 예문과 또 다르게 논증문의 구조와 너무 멀다. 처음부터 공공성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글을 쓰고 있는 듯하다.


고대교우회의 빗나간 동문사랑


한국 사회엔 3대‘패밀리’가 있다고 한다.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려대 교우회가 그것이다. 굳이 서양 마피아에나 어울리는 ‘패밀리’ 호칭을 쓰는 이유는 결속력, 목표의식, 실행력이 다른 집단의 추종을 불허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나 한국에서 패밀리의 원조는 티케이(대구·경북)라고 해야 할 것이다. 티케이는 경부축 중심의 개발 과정에서 경제적 부를 쌓았고, 박정희 쿠데타 이래 30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정치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호남향우회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또 결속력이 강하다는 점에서 티케이와 비교된다. 그러나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된 호남인들이 살아남고자, 혹은 최소한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결속이라는 점에선, 지배블록 티케이와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해병전우회도 사실 결속력만 강할 뿐 다른 패밀리와 성격이 다르다. 이들을 움직이는 건 정치·경제적 동인이 아니다. 이들을 묶어주는 건 험한 군 경험뿐이다.


그런 점에서 티케이와 가장 닮은 건 고대교우회다. 다른 대학은 동창회 혹은 동문회라고 하지만 고대는 특별히 교우회라는 이름을 쓴다.‘같은 학교의 우애 있는 친구’라는 뜻이다. 단순한 동문이 아니라 형제급 동문인 것이다. 그러니 결속력은 강할 수밖에. 게다가 고대 출신은 대한민국 3대 학벌을 형성하고 있다. 입법부나 행정부 사법부는 물론 웬만한 회사에도 고대 교우회가 꾸려져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런 막강 권력 인맥이 형제급의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패거리로선 전성기의 티케이가 부럽지 않다.


그럼에도 고대 교우회는 권력을 계속 더 확대하려 한다. 더 많은 명망가를 확충하고, 인적 네트워크를 넓히고 각종 행사를 통해 결속을 도모하고 그 인맥을 통해 교우의 출세를 돕는다. 6개월짜리 최고위 과정만 밟아도 교우로 인정하는 건 그 일환이다. 자연자원 정책과정을 수료했을 뿐인 심형래 씨는 ‘세계로 뻗어가는 자랑스런 심 교우’다.


그런 고대 교우회가 이명박 교우의 당선 이후 ‘승리의 새벽’을 구가하고 있다. 창립 100돌을 맞아 펴낸 교우회 100년 사에 실린 ‘명’비어천가는 압권이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문장은 한 오라기 지성의 흔적마저 지워 버렸다. 광신적 찬양과 선동이 넘치던 그 자리의 주인공은 이 당선인이었다. 패밀리의 일원으로서 그가 느낀 건 자부심일까 두려움일까.

(사설/한겨레신문 2008. 1.8)


이글에서 글쓴이는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몇몇 집단을 거론한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반감을 처음부터 훤하게 드러낸다. ‘패밀리’라는 낱말로써 고대교우회를 일컫는 자세가 그렇고, ‘패거리’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상대를 생각하는 기본 예의는 아예 접어두고 처음부터 막말로 나가보겠다는 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마음은 ‘승리의 새벽을 구가하고 있다’와 ‘명비어천가’ 따위 구절에서 상대 비꼬기로 발전하였고, ‘광신적 찬양과 선동이 넘치던 그 자리’라는 부분에서는 적개심으로 번졌는데 보고 있자니 위태롭기 짝이 없을 정도다.


글쓴이의 주장대로 고대교우회가 한국 사회에 옳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래서 글쓴이가 그 집단을 증오한다면 개인으로서 그 마음을 이해하고 동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 국민이 볼 수도 있는 글을 쓰는 마당에서는 사정과 입장이 퍽 다르다. 이렇게 개인감정을 오물 버리듯 쏟아내는 꼴은 옳지 않다. 이렇게 뜻을 전한다면 대상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막는 것이며 무엇보다 헐뜯기는 헐뜯기를 불러와 같은 꼴을 지닌 글이 확대 재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글이 이 점을 실증한다.



지평선/1월 14일〕마피아 본색

강병태 수석논설위원


마피아는 19세기 중반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 섬의 100여 지역 범죄 집단, 이른바 패밀리들이 만든 느슨한 비밀결사를 일컫는다. 저들끼리는 코사 노스트라(Cosa Nostra)라고 부른다.


‘our thing’또는‘same thing’이란 뜻이라니, 우리 편 또는 같은 편이라는 말인 듯하다. 이들이 널리 알려진 것은 뉴욕을 중심으로 미국 동부 이탈리아 이민사회에 다시 뿌리내린 데 따른 것이다. 마피아 패밀리들은 온갖 범죄 영역뿐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공권력을 제치고 대신하는 노릇까지 한다.


이런 마피아의 본디 특색과 정체, 뭉뚱그려 본색에 관한 온라인 백과 Wikipedia의 풀이가 흥미롭다. 국가권력이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데서 비롯된 사회현상 또는 문화이다.


이때 마피아는 그저 범죄조직이 아니라 갈등과 분쟁의 조정자, 나아가 보호자를 자임하는 의식과 태도를 의미한다. 그 바탕은 과장된 자부심과 명예의식, 심지어 사회적 책임감이다. 공조직을 포함한 특정 집단을 마피아로 부르는 것이 악의만은 아닌 것과 통한다.


낡은 상식을 얘기한 것은‘고대교우회의 마피아 본색’이란 지난주 한겨레신문 사설이 황당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음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해외 동포사회에서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대교우회의 유난한 결속력을 우스개 삼아 마피아에 빗댄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교우회가 펴낸‘100년사’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한껏 칭송하고, 그가 참석한 새해인사 모임이‘요란뻑적’했다고 해서 마치 국가권력 찬탈을 도모한 대역 무도한 집단인양 매도한 것은 우습고도 개탄스럽다. 신문의 기본을 내팽개치고 짓밟은 난동, 난설(亂說)이다.


나는‘원조 패밀리’라는 TK 출신에 고려대를 나왔다. 또 연락장교로 해병 빨간 명찰을 단 적이 있어 애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어느 연분도 한겨레 사설이 떠든 ‘결속력, 목표의식, 실행력’으로 수많은 ‘형제급 동문’의 출세를 돕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


TK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대교우회 등으로 엇갈렸다 다시 만나기를 거듭하는 거대한 사회집단을 협소한 패밀리, 패거리의 틀에 얽어 넣는 것은 도착(倒錯)이고 착란이다.


악에 받친 듯한 말투와 해괴한 논리로 스스로 패거리 본색을 드러낸 것은 무너진 전선을 다시 형성하려는 시도일 수 있겠다. 그러나 전에도 지적했듯, 수구 ‘찌라시’를 욕하다 선동 ‘삐라’로 전락하는 것은 보기 딱하다.

(한국일보)


고대교우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앞의 글을 읽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이 글의 논조 또한 처음부터 공격성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마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이다. 글쓴이는 상대의 ‘황당하고 천박하기 이를 데 없음을 일깨우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노라고 당당히 밝히며 상대의 글이 ‘신문의 기본을 내팽개치고 짓밟은 난동, 난설(亂說)’이라며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TK 호남향우회 해병전우회 고대교우회 등으로 엇갈렸다 다시 만나기를 거듭하는 거대한 사회집단을 협소한 패밀리, 패거리의 틀에 얽어 넣는 것은’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사회 조직과 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이해하는 방식을 따지면서 언뜻 근거에 따른 주장을 펼치는 듯했으나 이어 상대의 언사를 ‘도착(倒錯)이고 착란’이라고 힐난하며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어 결국 상대를 ‘선동 삐라’로 규정하고 말았다.


글쓰기 방식으로서 논증은 민주와 문명에 뿌리를 두었다고 앞에서 말하였다. 논증문을 쓸 때에는 자기주장을 소중하게 여기되 더불어 상대의 인격과 권리 또한 귀하게 여기면서 전체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건강해지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글 두 편은 어떤 흥미를 이끌어내고는 있다. 거칠 것 없이 서로 치고받는 말버릇들이 퍽 희한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그래서 잘못 쓴 논증문의 예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모범이 되는 논설문 한 편을 보자.


삼성 비자금 의혹, 어떻게 규명할 것인가

하승수(제주대 법학부 교수, 변호사)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시작된 삼성 비자금 및 변칙증여를 둘러싼 의혹이 점점 커지고 있다. 어제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이용철 변호사가 삼성 측에서 돈을 받았다가 돌려준 적이 있다는 폭로도 나왔다. 아마 웬만한 국가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민주주의의 위기'임이 선포되었을 것이다.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 그 나라를 규정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그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처음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있은 후,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데에 있다. 폭로 직후에는 검찰도 금융감독원도 꿈쩍하지 않았다. 특검을 하느니 마느니 정치권에서 논란을 벌이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시간이 흘러가면 누구에게 유리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조직적인 불법을 저지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대책을 수립하고 증거를 폐기하기에 충분하다.


지금도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청와대는 뜬금없는 이유를 들어 특별검사제 도입을 막기에 급급한 모양이다. 많은 정치인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검을 들고 나온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다른 속셈이 있거나, 무능하거나, 순진하거나 셋 중 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특검 도입 논의가 결국 좌초된다면, 상대측에 시간만 벌어준 꼴이 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을 보면, 역시 대한민국은 삼성공화국인 것이 분명하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비리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비리의 실체가 드러나기는 쉽지 않다. 진실이 밝혀지려면 최소한 두 가지 장벽을 넘어야 한다. 첫 번째 장벽은 대한민국의 정치인, 관료, 검찰 중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직적으로 반발, 물타기, 로비 등을 통해 실체 규명을 방해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리의 실체가 쉽게 드러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두 번째 장벽은 여론을 왜곡하려는 시도이다. 이미 경제신문들은 경제위기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보수언론들의 물타기뿐만 아니라, 내부고발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부족도 여론이 왜곡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더구나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집단들은 가능한 한 김용철 변호사 개인의 인격이나 사생활 문제로 초점을 돌리려는 여론 왜곡을 끊임없이 시도할 것이다. 이미 그런 움직임들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인 ‘삼성 비자금과 회장 일가의 불법’이라는 핵심은 흐려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누가 어떻게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시민단체를 비롯한 양심적 세력은 어떤 요구를 해야 할 것인가?


우선 검찰에 마지막 기회를 주어야 한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검찰의 신뢰성이 의심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검찰이 수사하게 해야 한다. 지금 검찰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검찰총장 후보자, 대검 중수부장이 의혹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 내부에서도 진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도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서 검찰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흐름이 있을 것으로 본다. 검찰 조직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지금은 어느 정도의 실체 규명 없이는 검찰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 조직이 살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수사의지는 가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적인 판단이기도 하다. 특별검사가 신도 아니고, 특별검사제가 만능도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삼성 일가를 둘러싼 의혹을 조사할 수 있는 인적 역량을 가진 집단은 검찰뿐이다. 따라서 지금은 검찰이 구성한 특별수사본부가 제대로 수사하도록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검찰의 수사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검찰 조직의 상층 수뇌부가 의혹을 받고 있고, 수사가 시작되면 검찰 조직이 외압이나 로비에 노출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특별검사의 도입이 필요해질 수 있다.


문제는 어떤 내용의 특별검사제인가이다. 지금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도로는 삼성 일가를 둘러싼 불법 의혹을 규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청와대에서는 수사기간 200일이 너무 길다고 했다는데, 한심한 이야기이다. 그렇게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불법행위가 자행되었다면, 그리고 철저하게 증거를 은폐해왔다면, 그런 사건을 수사하는 특별검사에게는 수사시한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200일 안에 조직적인 은폐를 뚫고 진실을 밝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비자금 규모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고 로비의 규모도 엄청나다는 것이 김용철 변호사의 주장 아닌가? 따라서 특별검사의 수사기간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수사대상도 제한을 두지 않아야 한다.


지금은 한 국가의 정치·사법·행정체계가 뒤흔들렸고, 최소한의 신뢰조차 무너진 상황이다. 그런데 수사기간에 제한을 두고 대상을 축소하려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는가?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에 대한 비리 의혹(부동산 투기, 직원 해고, 정보 불법이용, 성추문)을 수사하기 위해 특별검사가 5년 동안 수사하도록 허용했다. 이란 콘트라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검사가 무려 7년에 걸쳐 수사를 했다. 그런데 국가의 근간을 뒤흔든 불법 의혹이 제기되는 마당에 수사기간을 제한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리고 특별검사를 추천하는 것도 대법원장이나 대한변호사협회가 아닌 객관적인 주체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를 징계하려는 논의가 있었던 대한변호사협회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추천 주체가 되기 어렵다. 대법원장도 객관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특검을 도입하려면 제대로 도입해야 한다.


이번에 드러난 문제는 삼성 일가의 문제지만, 대한민국의 기득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재벌―관료―정치―언론의 유착에 의해 형성된 기득권 연합의 실체가 이번에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혹을 규명하고 기득권 구조를 감시, 견제, 해체할 힘이 어디로부터 나오는가이다.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하에 광범위한 운동이 전개되지 않으면, 누가 수사하든 끊임없이 수사는 흔들릴 것이고, 진실은 어둠 속에 파묻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번에 제기된 의혹을 규명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삼성공화국이 아닌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따라서 진실이 드러나고 실체가 규명될 때까지 우리 사회의 양심 있는 이들은 용기 있는 작은 행동을 주저하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든 자신이 살아가는 작은 공간에서부터든, 의혹 규명을 요구하는 양심의 목소리가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만이 '양심과 영혼조차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정신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길이다.

(창비주간논평, 2007.11.20)


이 글 역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우리 사회의 뿌리에 닿아 있는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하게 다가오는 시사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주장과 근거가 또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문제를 다루면서 어느 한쪽이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상황을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지니고 있다.


우선 현상을 파악하는 눈길에서 그러한 태도가 나타난다. 글쓴이는 의혹 증폭과 시간 경과, 특검 도입을 막는 정부 태도, 진실을 가로막는 장벽 두 가지(기득권 세력과 언론) 들을 거론하며 매우 다양하게 현상을 더듬어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 파악은 문제제기로 곧 이어지며 그에 따라 글쓴이의 주장이 또한 다양하게 펼쳐지는데 그때마다 그 근거가 매우 또렷하다. 주장과 근거를 묶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살아남으려고 최선을 다 할 것이니 우선 검찰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 둘째, 그러나 검찰 수뇌부를 끝내 믿을 수 없고 외압과 로비를 예상하면 특검제 도입은 꼭 필요하다. 셋째, 다른 나라의 예를 보아도 그렇고 광범위한 수사를 하려면 수사기간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넷째, 결국 삼성 비리는 기득권 세력이 한데 모여 저지른 비리인 만큼 시민이 폭넓게 그리고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고 참여해야 한다.


다루는 주제와 소재에 따라서 글을 쓰는 자세와 구성이 다 다르다. 논증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주장과 근거가 마치 공식처럼 완벽하게 갖추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현상이 곧 근거가 될 수도 있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요 내용이기에 주장만이 전면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논증문의 기본과 뿌리는 틀림없이 주장+근거이다. 현상 파악과 더불어 주장과 근거를 제대로 갖추고 있어 논증문의 모범이 된다고 하겠다.


다음 우리 삶과 관련이 깊은 논증문으로서 학술논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설과 논평이 주로 시사에 얽힌 문제에 관심을 가지다면 학술논문은 그보다는 좀 더 일반성에 따른 문제를 이론의 형태로 정리하여 밝히려 한다. 학술논문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특징을 정리해 본다.


첫째, 학술논문은 길다. 국내외 학술지에는 늘 여러 가지 학술논문이 발표된다. 분야에 따라 다르지만 학술논문은 보통 200자 원고지 70에서 100매쯤 되는 분량으로 집필한다. 학위논문 가운데 석사논문은 200매, 박사논문은 1000매 내외로 집필한다. 이 또한 법으로 정한 것은 아니고 학문의 성격과 갈래에 따라 차이가 있다. 아무튼 소설에 비유하면 석사논문은 중편소설, 박사논문은 장편소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분야와 주제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사실 70매 분량으로 어떤 생각을 펼쳐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원고지 10장을 채우기도 퍽 힘이 드는 능력과 처지를 생각해 볼 때 학자들이 쌓는 실적과 노고는 대단히 넓고 깊게 느껴진다. 특히 장편소설과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 필자들이 소모하는 노고는 마치 마라톤 선수가 42,195킬로미터를 달리면서 내뿜는 에너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원리와 이론을 추구한다. 논문 또한 주장+근거라는 형식을 글의 구조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학문을 추구하는 학자는 개별 사항을 다루면서 그에 국한된 주장과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여러 상황을 꿰뚫어 설명해주거나 그에 공통으로 내재하는 원리를 찾으려 한다. 그러므로 논문에서 주장 즉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할 때, 학자는 제 나름의 이론을 쌓는데 주력한다. 이것이 곧 학술이론이며, 이에 따라 논문은 일반 논설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객관성을 띠게 된다.


셋째, 독창성이 생명이다. 학술논문은 독창성을 생명으로 한다. 해당 연구 분야에서 이미 발표된 이론이나 주장을 되풀이하거나 빌려오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하고 범법으로 여긴다. 앞선 업적을 토대로 하고 참고로 하되 그에 이어지는 새로운 이론과 의견을 내놓아야 학술논문으로서 인정받는다. 이는 학문발전을 북돋워 참다운 진리를 끌어내는 데에 꼭 필요한 불문율이며 상식이다.


넷째, 따라서 학술논문의 세계에는 보수성이 짙게 배어있다. 이 보수성은 전통에 따른 형식을 지키려는 태도에서 특히 두드러져서 논문을 쓰는 학자들은 이에 얽매인다. 서론-본론-결론이라는 구조는 물론 목차·각주·요약문·참고문헌 따위 논문이라면 꼭 갖추어야 할 형식요건들이 있다. 이는 널리 공인된 형식으로서 학자들은 이를 마치 규칙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거의 논문으로 여기지 않는다.


다섯째, 일반인에게 폐쇄되어 있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 학술논문의 세계는 일반인에게 닫혀 있다. 전문성에 따라 써진 학술논문을 일반인은 웬만해서 이해하기 어렵다. 매해 각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논문이 숱하게 쏟아져 나온다. 각종 권위 있는 학회지에는 우수한 논문들이 끊임없이 실린다. 그러나 이러한 노작들은 그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학자들만이 서로 돌려가며 볼 뿐이다. 일반 시민이 한평생을 통틀어 죽을 때까지 학술논문을 한 편이라도 읽어볼 확률은 거의 없다.


이러한 사정은 사실 학술논문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학술논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렇다고 학자들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없다는 폐쇄성이 있다고 해서 학술논문이 결국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비록 현재 일반에게 읽히지는 않지만 학자들이 펼치는, 진리에 이르려는 끝없는 노력은 어느 순간 보편성을 지닌 진리를 얻고, 그것이 일반인의 삶을 크게 진보시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감상문


감상문(感想文)은 말 그대로 사물을 보고 상황을 겪고 난 뒤 지니게 된 느낌과 생각, 달리 말해 감정(感情) 내용을 쓰는 글이다. 그런데 이 감정 내용이라는 낱말은 단순하게 감정에 나타난 좋고 나쁜 기분이나 그에 따른 취향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러한 감정의 움직임은 물론이고 대상이 지닌 가치와 의미를 가볍게 서술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그리고 감상문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어떤 구체 대상을 보고 느낀 점을 말하는 것으로만 여긴다. 예를 들어 책이나 영화·연극·만화·회화와 조각 따위, 여러 가지 미술작품·음악·운동경기·명승지와 여행지 등을 읽고 보고 듣고 난 뒤 마음에 고이는 느낌을 적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 독후감은 우리가 어릴 적에 자주 써본, 말하자면 감상문을 대표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감상문을 아우르는 개념을 이보다 좀 더 넓혀 볼 필요가 있다. 단지 특정 대상만을 좇는 느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보고 듣고 난 뒤에 지니는 감정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감상문이다. 감상문의 뜻을 이렇게 헤아려 본다면 그 영역은 퍽 넓어진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날마다 누리는 생활현장에서 마주치는 온갖 크고 작은 일에 배어드는 감정과 정서,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있는 역사와 풍습, 특히 요즘 일어나는 시사(時事) 문제들에 즈음한 감회들이 다 감상문의 소재와 주제가 된다.


앞서 얘기한 독후감은 말할 것도 없고, 통지서나 결혼 청첩장 등 객관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을 뺀 나머지 편지와 일기·기행문·수필들이 다 감상문에 속한다.


특히 잠깐 ‘수필’이라고 하는 낱말을 생각해 보자. 감상문과 견주어 볼 때 수필은 용어의 뜻도 그렇고 용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감상문과 거의 같아 보인다. 그런데 어떤 이는 감상문을 수필보다 좀 더 위에 있는 개념으로 보고 따라서 수필은 감상문에 속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 반대로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감상문과 수필을 또렷이 나누어 다른 갈래로 보려는 이도 많이 있다. 감상문이기는 하되 생활에서 건져 올리는 평범한 감상문과 다르게 수필은 좀 더 문학적 기교와 향기를 많이 담고 있는 것이라고 이 사람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작품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읽는 수필 가운데에는 아닌 게 아니라 일반 감상문과 또렷이 구별될 만큼 문학성이 짙은 작품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한편 일상을 이루고 있는 생활사를 가벼운 내용과 어조로 다룬 감상문들이 수필(또는 에세이)이라는 이름으로 그보다 더 많이 출판되고 있다. 그러니 수필과 감상문을 또렷하게 나눌 합당한 기준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감상문과 수필은 실질에 있어 같은 개념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다. 수필도 감상문도 다 똑같이 사물을 보고 상황을 겪고 난 뒤 지니게 된 느낌과 생각, 달리 말해 감정(感情) 내용을 쓰는 글이다.


한편 논설문이나 평론 가운데 주장+근거 구조에 따른 논리성은 약하고 대신 가볍게 대상을 다루면서 글쓴이가 지닌 개인 감상을 드러내는 글이 많이 있다. 이 가벼운 것은 지성과 논리를 품고 있으되 주로 사물과 삶에 얽힌 정서에 닿아있다. 어떤 이는 이러한 글까지 모두 감상에 넣고자 한다.


그러나 대상의 의미나 가치를 따져 말하는 구석은 일반 감상문에도 더러 있다. 감상이란 느낌과 판단이 함께 이루어지는 과정이요, 칼로 긋듯 느낌 따로 판단 따로 이렇게 나누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가치판단과 평, 그리고 감상은 한데 이어진 정신활동이요, 실제 모든 글에서 이것들은 함께 드러나고 표현되기 일쑤다. 이렇게 본다면 감상문과 논증문을 가르는 기준이 때로 애매하다. 어떤 글을 보고 그것이 감상문인지 논증문인지 또렷하게 구분하기 힘든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감성의 세계는 그 폭과 깊이가 하염없이 넓고 깊다. 얼마나 많은 개성이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가. 수많은 감상문 가운데에는 일상을 다루어 자잘한 대상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있고 이보다는 좀 더 무겁게 사회 전반의 흐름과 사건에 반응한 것도 있고 또는 인생에서 궁극이 되는 의미 따위를 파고든 글도 있다. 감성에 온전히 기대어 주관성을 골자로 하는 글이 있는가 하면 지성과 논리의 토대 위에서 글쓴이의 감성을 세우는 글도 있다. 여기에 다른 글보다 문학 표현력이 좀 더 많이 배어든 글도 있다.


또다시 강조하지만 중요한 점은 인간이 문자로써 운영하는 모든 글들을 어떤 체계를 세워 가름해보려는 의도와 목적이다. 객관성에 따라 사실을 알리고 정보를 전하려는 설명문과 주관 어린 신념을 객관성 있는 방법으로 추구하는 논설문과 구별하여 주로 삶에 스며있는 정서를 기술하는 글을 감상문이라는 일정 용어로 나누어서 정리하고 이해해 보려고 한다. 역시 글을 이루고 있는 중심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나 살펴 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용어를 쓰도록 해야겠다.


다음에 감상문 몇 편을 예문으로 보인다.


첫째 글은 그 이야깃거리가 생활 주변에 아주 가까이 있기에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이른바 생활 감상문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애저찜(꿩고기·닭고기·두부 등에 파·마늘·후추와 같은 양념을 하여 반쯤 볶은 것을 내장을 뺀 어린 돼지의 뱃속에 넣고 실로 꿰맨 후 푹 찐 보양 음식)


며칠 전 광주까지 갔다가…….

아침에 여관집 마당으로 도야지 새끼가 조막만씩 한 몸이 두 마리 꼴꼴 돌아다니는 것을, 조曺가,

“흥, 남의 회만 건드리는구나!”


하는 소리를 듣고 그럴 성해서 웃었더니 마침 조가 설두(앞장서서 일을 주선함)한 애저찜의 대접을 받았다.

겨우 젖이 떨어졌을까 말까 한 도야지 새끼를 속만 긁어내고 통으로 푹신 고아 육개장 하듯이 펴서 국물을 먹는데,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입을 대기는 비로소 처음이고, 처음이라 그런지 좀 애색(마음이 애처롭고 안타까웠다)했다.


하기야 연계軟鷄찜을 먹는 일을 생각하면 도야지 새끼를 통으로 삶아 먹는다고 별반 애색할 것은 없는 노릇이다.


또, 우리가 일상 흔연히 감식을 하는 계란이며 우유며 어란魚卵 이며 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천하 잔인스런 짓이요, 하필 애저찜만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원숭이를 꽁꽁 묶어 불 달군 가마솥 위에 달아 매놓고는 줄을 누꿔(‘늦추다’의 경기도 사투리) 발바닥을 지지고지지고 한다 치면 요놈이 약이 있는 대로 죄다 머리로 오른다든지? 할 때에 청룡도로 목을 뎅겅 잘라 가지고는 골을 뽑아 지져 먹는다는 원뇌탕猿腦湯이란 것에 비하면 애저찜쯤은 오히려 부처님의 요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건만 역시 처음이라 그랬던지 비위에 잘 받지를 않는데, 아 그러자 아침에 여관집 마당으로, 산 채 꼴꼴거리면서 돌아다니던 도야지 새끼가 눈에 밟혀, 하면서 일변 또 간밤에 애기 기생이 한 놈 불려 와서는 노래를 한답시고 애를 써 쌓는다 시달림을 받는다 하는 게, 문득 애저찜이라는 것을 연상케 하던 일이 생각이 나 하는 통에 고만 비위가 역하여 웬만큼 젓가락을 놓았었다.


맛은 그러나 일종 별미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고, 그 중에도 술안주로는 썩 되었고, 다만 너무 기름진 게 나 같은 체질에는 맞지 않을 성불렀다.


동행 중 최 박사 역시 지방질은 많이 받지 않는 모양, 조금 하다가 말았지만 신 변호사는 근일에야 맛을 들였다면서 고기는 물론 뼈까지 쪼옥쪽 빨아먹고 그 뱉은 뼈가 앞에 수북한 데에 한바탕 놀림거리가 되었다.

아무튼 다시 보장하거니와 술안주로는 천하일품이니, 일찍이 맛보아 보지 못한 문단 주호酒豪는 모름지기 전남全南으로 한바탕 애저찜 원정을 가볼 것이다.

(채만식, 「박문」, 1940. 4.)


‘애저찜’이라는 요리를 앞에 두고서 글쓴이의 마음은 ‘애색하다’. 눈앞에서 종종거리던 새끼돼지들이 떠오른다. ‘원뇌탕’이라는 좀 더 잔인한 요리를 떠올려 억지로 비위를 맞춰볼까 하지만 전날 밤에 보았던 애기기생이 또 생각나 그만 입맛을 잃고 만다. 이 대목이 이 글에서 읽는 이의 마음을 끄는 부분인데 글쓴이가 지니고 있는 동정과 연민이 깃든 애틋한 마음이 돋보인다. 그렇다고 글쓴이가 인정주의를 끝가지 밀고 나가 주제를 무겁게 하지는 않았다. 덤덤하게 요리를 설명하면서 문단 주호에게 한번 맛볼 것을 권하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그밖에 이색 풍물을 엿보는 재미가 좀 있고 원뇌탕과 비교하여 애저찜을 부처님의 요리라고 갖다 붙이는 이야기 솜씨가 웃음을 준다. 그러나 결국 지역 특산 요리를 소개하고 데에서 시작하여 끝나고 있으니 이야기 값이 가볍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가볍다는 것’를 보기에 따라 깊이가 없어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받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감상의 폭과 깊이는 참 넓고 깊다고 했다. 일상이 있기에 삶이 있고 삶은 일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때 일상에서 건져 올리는 생활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 소중한 삶의 몫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 글은 적어도 이와 같은 일상의 울타리는 벗어난 듯하다.


[女談餘談] ‘평평한 세계’ 재미없다

박상숙(미래생활부 기자)


청계천에 물길이 다시 뚫린 덕택에 주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과거 저녁이나 주말이면 공동화 현상을 겪던 이곳에 이제 늘 사람이 북적댄다.


달갑잖은 변화도 있다. 사람이 모이니 각종 상업시설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다국적 커피 체인의 청계천 ‘점령’은 너무하다 싶다. 그 회사의 지점 소개 약도를 보니 청계천 일대의 종로와 광화문에 자리 잡은 매장만 무려 10군데 가까이 된다.


세계화의 폐해 가운데 하나가 각국의 도시들이 개성을 잃고 똑같아진다는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얼마 전 일본 도쿄를 다녀왔다. 6년 만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둔 당시는 첫 방문이라 그랬을지 모르지만 엇비슷해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도쿄의 새로운 명소로 꼽히는 오모테산도에 들렀다. 낯선 곳이 주는 설렘설렘, 흥분은 없었다.


한국에서 뻔질나게 드나들던 커피숍이 거기에 있었고, 서울 거리에서도 익숙한 해외 명품 매장들의 똑같은 간판에 질렸다. 세계가 평평해지면서 마냥 평범해지고 있는 듯하다. 집 떠나온 두려움과 함께 색다른 맛과 멋을 발견할 모험의 기회도 사라졌다.


지난해 서울신문이 베트남에서 주최한 한국영화제에 참석했던 박찬욱 감독에게 하노이의 인상을 물었다.“너무 시끄럽고 복잡하고 약간은 지저분하고, 음…, 그래서 아주 좋네요!”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상기된 얼굴로 호텔을 총총 빠져나가던 모습이 선하다. 그땐 몰랐다. 미숙하고 서투른 도시의 매력을. 세계화의 미명 하에 도시가 온통 똑같은 얼굴을 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지루해지겠는가. 새로운 만남을 갖고 싶은데 영화 ‘매트릭스’에서 복제를 거듭하는 ‘스미스 요원’만 만나게 되는 기분 아닐까.


서울도 대대적인 ‘성형수술’에 들어갔다. 매끈하고 세련된 모습을 갖기 위해 고유의 흔적과 주름살을 몽땅 지우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촛불시위’가 가장 큰 구경거리요, 추억거리가 되지 않으란 법도 없다.

(서울신문, 2008. 06. 08)


여행객이 지니는 진한 정취를 담아내는 기행문은 물론 아니지만 글쓴이는 세계 곳곳 도시를 둘러보고 그 느낌을 적고 있다. 서울과 도쿄 그리고 하노이까지…, 세 도시 모두 고유한 모습을 잃어버렸다고 글쓴이는 전한다. 세계화에 따른 변화가 모든 것을 똑같게 만들어 개성을 잃게 한다고 것이다.


그래서 글쓴이는 ‘낯선 곳이 주는 설렘, 흥분’을 느끼지 못하고 ‘집 떠나온 두려움과 함께 색다른 맛과 멋을 발견할 모험의 기회도 사라졌다’고 하며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고. 그리고 이러한 실망감이 미래에 이어져 세상이 지루해질 수 있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 글쓴이가 기자 신분이니까 취재에 따른 보고서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은 도시 개발에 한마디 정도 던지는 의견 제시라기보다는 그저 글쓴이의 느낌이 이어진 것일 뿐이다.


어떤 대상을 보고 감상문을 쓰고자 한다면, 책이면 책, 공연이면 공연, 여행지면 여행지…,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대상을 알리는 좀 더 자세한 정보와 그 대상을 보게 된 까닭 따위를 함께 적어주어야 한다. 감상문을 쓸 때에도 또한 읽는 이를 생각해야 하고 글쓴이의 감정이 독자에게 좀 더 효과 있고 실감 나게 전해지려면 앞뒤 사정과 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은 그러한 부분에 퍽 소홀했다. 지면이 많이 주어지지 않았거나 취재하던 버릇으로 글을 써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베트남 하노이를 소개하는 부분이 애매하고 엉성하여 본의 아니게 글의 실감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용이 풍부하지는 못하지만 경험+느낌이라는 감상문 구조를 또렷하게 지니고 있기에 이 글은 감상문의 기본 유형으로 기억할 만하다.


다음 글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즈음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주제의 색깔이 좀 진하여 앞에서 본 글과 조금 다른 셈이다.


나의 엉터리 소설 이야기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나는 좀 이상한 버릇을 갖고 있는데, 가끔 전혀 모르는 사람을 보면서 그의 삶에 대해 나름대로 상상한다. 가령 운전할 때나 음식점에서 누구를 기다릴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창밖이나 가까이 있는 사람의 외모나 표정이나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일까, 왜 지금 저기에 있을까, 열심히 상상의 날개를 편다. 조금 독특하게 보인다거나 색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거나 할 때면 내 상상력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발동한다.


어렸을 때 셜록 홈스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다. 아마도 그때 이런 버릇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창작에 대한 내 호기심일 수 있다. 유학 시절 꽤 유명한 소설가에게서 소설 작법을 수강했는데 소설의 소재를 찾는 방법 중 하나로, 길에서 재미있는 사연을 가진 듯 보이는 사람을 하루 종일 따라다니라고 했다.


행동, 말투, 그가 만나는 사람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면 저녁때쯤 소설 한 권을 쓸 만한 충분한 자료가 생긴다는 말이다.


소설 쓰는 일은 오래전에 포기했지만, 난 아직도 사람을 보면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상상하는 버릇을 그대로 갖고 있다. 얼마 전 인터넷에는 ‘하수구에서 검거된 절도범’이라는 기사가 떠돌았다. 벌거벗은 초로의 남자가 하수구 안에서 하반신이 물에 잠긴 채 겁에 질린 얼굴로 있는 사진과 함께였다.


57세의 남자가 서울 노원구 중계동 어느 병원에서 여자의 핸드백을 빼앗은 뒤, 사람들이 옷을 잡아당기자 옷을 다 벗어던진 채 알몸으로 하수관으로 도망쳤고, 그 안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차가운 구정물 속에 무려 5시간 동안 있다가 ‘하수관 검사 로봇’까지 동원한 경찰에 붙잡혔다는 기사였다. 체포될 때 남자는 심각한 저체온증으로 몸을 심하게 떨면서도 훔친 핸드백을 움켜쥐고 반항했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초범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 말리는 내 상상력이 발동했다.


“그 남자는 한때는 꽤 잘 나가는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했지만 외환위기 때 파산하고 집도 공장도 모두 잃었다. 그의 인생은 눈 깜짝할 새 파멸로 치달았다. 자연스럽게 친구도 친척도 멀어지고 이젠 노모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지하 셋방에서 산다. 이전에 그는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을러서, 약지 못해서, 허황된 꿈을 꾸기 때문에 가난하게 살뿐, 열심히 노력하면 가난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깔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신용불량자가 된 건 벌써 오래전, 올해는 경기가 너무 나빠 노점을 해도 하루 5000원 벌이가 힘들었고 전세금이 너무 올라 그나마 살던 곳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는 암 선고를 받았다. 항암치료 한 번 받을 때마다 30만 원이 든다. 도합 16번을 받아야 하는 항암치료를 네 번 받고 중단한 상태였다.


오늘 아침 아내는 더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꼭 한 번만이라도 항암치료를 더 받게 하고 싶었다. 아내가 다니던 병원에서 서성이는데 어떤 여자의 핸드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있을 돈, 그 돈이면 한 번쯤 더 항암치료를 받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간 그 백을 낚아챘다. 사람들이 옷을 잡자 엉겁결에 옷을 벗고 뛰었고, 당황한 나머지 하수구로 뛰어들었다. 깜깜한 하수구 속에서 길을 잃고 그는 지옥을 경험했다. 혹독한 추위, 인간으로서의 비애, 죽음보다 더 괴로운 공포. 경찰이 그를 찾았을 때 그는 거의 실신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것은 핸드백과 그 안의 돈뿐.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그는 핸드백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생계형 절도가 외환위기 때 13만 건이었는데 지금은 19만 건이라고 한다. 지난번 울산에서는 냉장고 위의 당근 두 개를 훔치다가 붙잡힌 남자가 있었다. 특별사면이다 뭐다 하여 큰 죄를 지은 부자가 활보하는 세상에 핸드백 훔치고 하수구로 도망갔다 잡힌 도둑이 자꾸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단지 사실무근 엉터리 소설뿐인데….

(동아일보, 2007년 2월 12일)


이 글에서 글쓴이는 ‘57세의 남자’를 응시하고 있다. 그 남자가 저지른 행동은 조금은 어이없고 황당하다. 그런데 글쓴이는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뒤쫓아 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기 상상력을 좇아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 있지도 않은 보지도 않은 ‘57세 남자’의 딱하고 딱한 처지를 눈앞에서 본 듯이 그려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허구다. 지어낸 이야기다. 그러나 허황되지 않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일이 있음직하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생계형 범죄’라는 시사용어도 있듯이 실제로 지금 우리 사회에는 벼랑 끝에 내몰린 나머지 범죄에 빠지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비록 꾸며낸 것이지만 동감을 충분히 불러오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지어낸 이야기이니 엉터리라고 우리는 글쓴이에게 대들 수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에서 글쓴이는 자신의 상상벽을 거두어들인다. 그 대신 ‘생계형 절도가 외환위기 때 13만 건이었는데 지금은 19만 건’이라는 객관 자료로써 사실을 밝힌다. ‘울산에서는 냉장고 위의 당근 두 개를 훔치다가 붙잡힌 남자가 있었다’는 기사문을 전하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특별사면이다 뭐다 하여 큰 죄를 지은 부자가 활보하는 세상에 핸드백 훔치고 하수구로 도망갔다 잡힌 도둑’을 들춰내면서 사회 비판 시각을 은연중에 그러나 아주 강하고 도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자료의 수치를 좀 더 넓고 구체성 있게 밝히고 이러한 현상이 왜 잘못되었는지 그 원인을 진단하고 그에 맞는 대안을 내놓으며 주장+근거의 구조에 맞춰 썼다면 이 글은 논증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만한 주제요 소재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선택한 것은 자신의 상상벽과 더불어 남자를 하염없이 염려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사시나무 가지 떨리듯 떠는 남자의 손을 그려내고 자신과 독자의 동정심에 다가가려 했다.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사회에 얽혀있는 문제를 자신의 마음으로 비추어내고 있다. 글쓴이는 사태를 객관 차원에서 파헤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지닌 염려와 슬픈 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논증문이 아니고 감상문이다.


아래 글은 이제까지 본 글 가운데 주제의 폭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인생 전체에 걸친 문제를 가지고 자기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발 밑의 행복

학생 글


행복이란 사전적 의미로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복의 의미를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행복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줄 것입니다.


나는 가끔 예쁜 옷과 명품 가방과 구두, 반짝이는 액세서리 등등 원하는 것은 모든 가질 수 있는 화려한 재벌

집안의 딸, 가난하지만 활기차게 살아가다 백마 탄 왕자를 만나게 되는 드라마 속의 발랄한 여 주인공, 예쁜 얼굴과 날씬한 몸매에 지성까지 겸비하여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연예인의 모습 등에 나를 겹쳐 보곤 합니다.


이때 나는 나도 모르게 행복을 느끼지만 이러한 행복은 비눗방울처럼 너무나도 쉽게 사라집니다. 상상의 나라에서 현실로 돌아온 나는 현실과의 괴리로 나 자신을 탓하고 불행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행복의 잣대를 남에게 맞추는 순간 불행은 시작됩니다. 행복을 생각해 보면서 그동안 이런 욕심에 가려 있어 잊어가던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친한 친구들과의 진솔한 만남, 맛있는 음식을 먹기 직전, 용돈 받는 날,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날, 뜻밖의 휴강, 예쁜 학용품을 살 때, 따뜻한 옛 추억을 생각할 때 등등… 이 순간은 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콧노래가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커서 눈에 잘 띄는 행복과 작아서 자세히 보지 않고는 볼 수 없는 행복 말입니다. 두 가지 행복의 차이는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있습니다. 커다란 행복은 모두가 누리기에는 부족하지만, 작은 행복은 우리가 가까운 곳을 눈여겨본다면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돈과 명예와 지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 물질 충족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시선을 앞으로만 고정시킵니다.


하지만 행복은 자기 발밑에 있다고 합니다. 비록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들지만 작은 행복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고, 이 시대에서 느끼는 불행을 이 행복이 위로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행복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떤 다른 느낌을 발견합니다. 이 작은 행복이 바로 내게 용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자신감 없이 살아오던 나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또 하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마음을 줍니다.


행복은 각자에게 조금씩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만족에 그 초점이 있다는 점은 같습니다. 작은 행복이지만 만족할 줄 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글은 행복론이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어떤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진정 잘 사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작은 것에 만족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글쓴이는 가지고 있다. 외부에 눈을 맞추면 불행이 시작된다고 하며 내 주위에 있는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는 이렇듯 자기 경험을 논리로 삼아 펼쳐낸 주장이 소중하게 맺혀 있다.


그러나 ‘내 발 밑에 있는 행복’을 눈여겨보며 현재에 만족하려고 애쓰고 있는 글쓴이를 우리는 좀 더 눈여겨보게 된다. 작은 행복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고 생활 용기가 몇 백배 충만해진 글쓴이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감상문은 논증문과 다르게 글쓴이의 개성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결국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니 글쓴이의 성격과 취향, 생활자세 심지어 영혼의 움직임까지 그대로 드러난다. 설명문은 글쓴이 밖에 있는 외부 사물과 그에 따르는 정보와 지식을 알려준다. 논설문은 일정한 사건과 상황을 따지는 글쓴이의 논리 사고를 주로 보여준다. 그러나 감상문에는 글쓴이의 삶과 인성(人性)이 직접 드러난다.


이 글에는 행복이라는 영원 보편 주제에 진지하게 부딪친 글쓴이의 소박한 마음과 삶이 잘 드러나 있다. 행복이 결국 내 발밑에 있다는 결론은 가볍지만 진솔한 비유로서 이 글에 나타나 있는 서술 태도가 논증문에 비해 퍽 다르다는 점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다음 글은 서정성이 넘치면서 글 솜씨가 퍽 뛰어나다는 느낌을 준다.


오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苦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 위에 써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자연은 늘 사람이 고향처럼 찾아드는 곳이요, 그래서 깊은 정서가 배어드는 대상이다. 자연에 깃들고 자연과 함께 할 때, 사람의 마음은 안식을 얻는다고 한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개별 대상이 아니라 5월이라는 시점에 교감하고 있다. 5월에서 젊음과 밝음과 순결함을 느낀다.


이러한 느낌을 펼쳐내면서 글쓴이는 보통 글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표현 능력을 보여준다. 시(詩)를 쓰듯이 연과 행을 꾸미는 문단 운용이 그렇고, 비록 짧은 글이지만 지난날과 현재를 대비하여 5월을 부각시키고 있는 구성은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5월이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고,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라고 빗대었다. 이 비유는 글쓴이만이 지닌 남다른 표현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개성이 한껏 드러난 표현이고 5월을 떠올릴 때 우리 모두 동감할 수 있는 적절한 구절이다. 이러한 표현력은 이 글이 좀 더 감동 있게 읽히게 하는 부분이면서 이 글의 가치를 한층 높여 준다. 이렇듯 잘 가꾸어진 구성과 표현력 대문에 이 글을 여러 감상문과 구별하여 수필이라고 부르고 싶은 욕구를 가질지도 모르겠다.


4. 예술문


글이란 대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글을 종류를 가름하며 먼저 비예술문과 예술문(문학)으로 나누었다. 그 가운데 비예술문은 글에 운율이 배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운문과 산문으로 나누고 산문에서 설명문·논증문·감상문을 살펴보았다. 운율을 기준으로 삼아 운문과 산문으로 나누어 보았다.


똑같은 기준을 들어 예술문도 운문과 산문으로 나누어 보자. 시(詩)는 운문이고 소설·희곡·수필들은 산문이

다. 여기에서는 시면 시 소설이면 소설을 따로따로 살피지 않는다. 이 책은 글쓰기 일반론이다. 시나 소설을 자세히 살피는 일은 문학이론서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예술문이 지니고 있는 큰 특성만을 새겨보고자 한다.


비예술문과 예술문을 비교해보면 에술문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좀 더 잘 살펴볼 수 있다. 예술문과 비예술문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점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은 언어와 문자를 수단으로 삼는 정도의 차이다. 글은 근본에 있어 문자를 수단으로 삼는다. 또 그에 앞서 말 자체가 이미 어떤 수단이다. 모든 말은 실제 사물이나 행동을 실제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호로써 대신(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술문은 비예술문보다 한층 더 말을 이용하고, 좀 더 적극성을 띠면서 수단으로 삼는다. 달리 얘기하면, 말을 한 번 더 수단으로 삼는다.


말은 공동체가 만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낱말은 구성원이 공인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뜻은 대개 사전에 적혀 있는데, 이 뜻을 일차 의미라고 하자. 비예술문은 낱말이 가지고 있는 이 일차 의미 온전히 기댄다. 예를 들어, 비예술문 특히 설명문과 논증문에서 '진달래’라는 낱말을 쓴다고 하자. 이때 '진달래'라는 낱말은 어떤 사물을 전달하고 드러내려고 하는데, 사전에 적혀 있는 대로, ‘진달래과의 낙엽 활엽 관목’으로서 ‘산이나 들에 흔히 나는데, 높이는 1~2m. 잎은 길고 둥글며 어긋맞게 나고, 봄에 잎보다 먼저 연분홍 꽃이 깔때기 모양으로 피는’ 바로 그 식물을 가리킨다.


그런데 만약 이 낱말을 쓰면서 '그녀의 웃는 모습은 진달래 같다'라고 했다고 하자. 이는 '진달래’라는 낱말을 실용과 다른 차원에서 쓴 것이다. 즉 말을 다시 한번 더 수단으로 삼은 예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지닌 참뜻은 낱말 뜻 그대로 '그녀가 진달래'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매우 예쁘다' 또는 ‘그녀는 매우 청순하다’ 정도로 헤아려진다.


이처럼 예술문은 공식 의미에서 한발 더 나아가 말을 수단으로 삼는다. 이것이 비예술문과 근본에서 다른 예술문의 기본 특성이다. 이 문장에 쓴 말 사용법을 흔히 비유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비유법뿐만 아니라 무릇 작가나 시인은 국어문법 체계에 따라 일반인이 지니고 있는 언어 사용습관에서 벗어나려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물론 좀 더 효과 어린 표현을 좇는 데서 생기는 결과이다.


예술문이 비예술문과 다른 두 번째 특성은 예술문이 의미 전달의 차원 넘어 새로운 세계와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데에 있다. 언어를 써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고 어떤 상황을 꾸며내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엮어내는 행위는 한층 적극성을 띤 특성이다. 예술문은 말로써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세계, 독자성 있는 고유 공간을 만든다.


예로서 시 한 편 읽어 보자.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이 쓴 ‘진달래꽃’이다. 다들 알다시피 소월의 작품은 한글만 알면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 그리고 보는 이의 인생 경험에 따라 그 깊이가 하염없이 더해갈 수 있겠지만 내용은 우리 모두에게 퍽 익은 것이다.


‘시적 화자’라는 말이 있다. 퍽 어렵게 들린다. 시 안에서 말하는 사람을 이르는 것 같다. 소설 이야기로 치면 주인공인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낱말을 왜 쓰는가? 이 질문에 답을 다는 것이 지금 급하지 다. 다만 이 시를 지은 글쓴이는 김소월이지만 시 공간에서는 말하는 이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시인 김소월 자신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보면 시적 화자가 보이는 깊은 시름과 한, 그러한 심정을 토로하는 역설 어린 자세는 김소월 자신이 토해내는 정서와 감정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가 만들어낸 고유 공간 안에서 사는 한 여인(추정)의 마음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시 작품은 글쓴이의 사상이나 감정을 바탕으로 삼되, 그것을 직접 밝히지 않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드러낸다. 하기는 예술이 원래 설명을 마다하고 직접 보여주는 인간 행위이다.


소설 작품을 예로 들어 다시 생각해 보면 이점은 좀 더 쉽게 알 수 있다. 홍길동이나 흥부도 '홍길동전'과 '흥부전'을 지어낸 작가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한 별개 존재들이다. '홍길동전'과 '흥부전'은 누군가 말로써 지어놓은 것이지만 세상에 나온 뒤에는 이제 그들을 떠나 독자가 소유하는 개별 존재로서 놓여 있다.


그러니까, 소설 ‘흥부전’은 이제 하나의 ‘가상세계’로서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책장을 열고 가상세계로 들어가서 흥부를 만나고 놀부를 만나고 그들이 엮어내는 기묘한 이야기를 즐기면 된다.


우리가 '이명박이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고 하면 말이 지닌 공식 의미에 따라 객관 어린 의미를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행위가 된다. 이것은 말이 지닌 고유하고 보편 되는 기능에 따른 결과이며 현상이다. 예술문은 이에서 더 나아가 말을 수단으로 삼아 새로운 의미 세계를 지어내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문의 본질이자 특징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는 단순하게 어떤 개념이나 관념을 이해하고 인식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시인이 지어놓은 또 다른 세계에 잠시 마음을 담그는 것이다.


설명문이나 논증문을 쓸 때 글쓴이는 자기가 본 것과 그에 따른 생각을 직접 적는다. 그러나 예술문의 작가는 자기가 보고 깨달은 인생문제를 그대로 쓰지 않는다. 그 내용을 좀 더 효과 있게 전할 매개체, 즉 인물·배경·상황·사건 따위를 만들어내어 그 속에 녹인다. 글이 읽는 이에게 갈 때까지 과정 하나를 더 치러 내는 것이다. 과정을 치러 내고 작품을 내려면 그만큼 더 많은 노력과 힘이 든다.


문학은 삶을 설명하거나 논증하려 하지 않고 삶을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이점이 예술문과 비예술문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이다. 예술문을 일러 그냥 '쓴다고' 하기보다는 '창조한다'고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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