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벌판 - 글을 짜고 펼치는 방법

by 이순직

1. 구조와 구성


세상 만물은 모두 자기에게 맞는 짜임새와 꼴을 가지고 있다. 물고기는 머리에 몸통이 이어져 있으며 거기에 꼬리가 달려 있다. 달리 말하면 반드시 머리가 있고 몸통이 없으면 안 되며 꼬리를 빼면 뭔가 어색하다. 이 셋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제대로 된 꼴을 이루지 못하며 적어도 우리의 의식과 눈에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물고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동물도 머리-몸통-다리(꼬리)라는 짜임새를 지니고 있다. 식물도 그렇다. 식물은 꽃-줄기-뿌리라는 짜임새가 있다.


그리고 물고기면 물고기 기린이면 기린 따위, 같은 종 안에서도 물고기 한 마리 기린 한 마리가 지니고 있는 겉모습은 또 다 다르다. 사람도 누구든 머리-몸통-다리라는 짜임새 가지고 있지만 저마다 꼴이 다르다. 어떤 이는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지만 어떤 이는 머리가 작고 몸통은 짧은데 다리는 아주 길다. 그에 앞서 누구나 다 알 듯이 여성과 남성의 꼴이 아주 다르다.


이렇게 볼 때 머리-몸통- 다리(머리)라는 짜임새는 만물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를 구조라고 하자. 동물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자면 모든 개체는 똑같이 이러한 구조를 타고 난다. 그러나 구조를 이루는 요소인 머리나 몸통, 다리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에 따라 실제 꼴은 또 다 다르다. 여기서 이 ‘어떻게 되어 있나’를 구성이라고 하다.


정신의 산물인 글도 이와 마찬가지다. 일정한 구조와 구성을 지니고 있다. 글은 생각을 글자에 실어 펼쳐낸 결과로써 생각이 흐르는 길이고 그 집합체이다. 문장을 쓸 때 우리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낱말을 늘어놓아서 생각을 표현한다. 글을 쓸 때에도 전체에서 아무 원칙과 규제 없이 쓰기 시작하고 써 내려가지 않는다. 글쓴이는 스스로 글을 쓰는 의도와 목적을 밝혀 글을 쓰기 시작하고 어떤 관계성에 기대어 앞뒤 문장과 단락 사이를 잇고 그 결과에 따라 끝을 맺는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는 가운데 글의 짜임새와 꼴을 이루어 간다.


우리가 읽고 쓰는 모든 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구조는 처음-중간-끝(서론-본론-결론)이라는 틀이다. 이는 동물이 지닌 머리-몸통-다리 구조와 퍽 비슷한데 이 구조를 갖추지 않은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끔 기-승-전-결로 변용되기도 하는 이 체계는 ‘시작을 알리고 알맹이를 전하고 끝을 맺는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먼저 얘기를 시작하겠다는 신호를 보내 독자의 주의를 끌어와야 한다. 그리고 정작 하고자 하는 말, 중간(본론)은 꼭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알맹이를 다 말했다고 해서 그대로 끝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끌어온 생각을 정리하여 요약·강조하거나 알맹이에서 맺히는 명제를 내놓아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다 있어야 글이 제대로 된 모양을 이룬다.


이렇게 볼 때 구조는 글을 지탱하는 가장 밑바닥에 놓여있는 바탕이며 뼈대이다. 여기에 각 단계를 어떤 순서로 배열하며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하고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 따위를 조정하고 결정하는 것이 구성이다. 글의 본질이 되는 뼈대는 구조이고 실제 글을 펼치면서 살과 피를 붙여 글을 완성하는 원리는 구성이다.


다음으로 처음-중간-끝만큼 글의 본질에 닿아 있는 구조를 하나 더 생각해 보자. 모든 글은 결국 우리가 어떤 사물과 현상을 보고 듣고 한 뒤, 달리 말해 세상사를 경험(체험)하고 난 뒤 그에 따른 인식·주장·의견·감상을 적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이루는 또 하나의 본질 구조로서 경험(현상)+반응(인식·주장·의견·감상)이라는 틀을 세운다. 어떤 경험인지가 글의 주제이고 이 경험을 어떤 측면에서 처리하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글의 종류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반응 내용 가운데 어떤 부분을 어떻게 늘어놓느냐가 글의 구성을 이루어낼 것이다.


처음-중간-끝과 경험(현상)+반응(인식·주장·의견·감상)을 글의 구조로 여기고 여기에서는 논증문과 감상문에 나타나는 구성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논증문을 쓸 때 생각할 수 있는 구성이 있다. 논증문에서 글쓴이는 삶·죽음·사랑과 같은 인간 보편 조건, 정치 경제 현상에 따른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 남의 의견과 주장, 여러 현상 따위를 겪은 뒤 그를 비판하고 어떤 주장을 펼친다. 비판이란 객관성에 바탕하여 대상의 가치와 진위를 따지는 모든 정신활동과 그 결과를 이른다. 그래서 논증문의 주요 구성요소는 현상·진단·주장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이유) 들이다.


현상은 구체성 있는 사건이 될 수도 있고 일반인이 모두 알고 있는 상식이 될 수도 있다. 진단은 원인 파악·의미부여·평가 따위로 나타난다. 근거는 말 그대로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서 주장이 설득력을 갖도록 한다. 주제와 이어진 사례와 실화·일화, 글쓴이 자신의 경험, 권위 있는 사람의 명언 따위를 근거 자료로 삼을 수 있다. 주장을 이루는 내용은 대개 이전과 다른 삶의 자세나 의견과 새로운 목표·대안 정책 들로 이루어진다.


글쓴이는 이와 같은 요소를 제 나름대로 고르고 묶어 실제 글을 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몇 가지 기본 유형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다.


① 현상+주장+근거

② 현상+진단+주장+근거

③ 현상+진단+주장+근거+대안

이제 예문 몇 편을 보자.


예문 ①

얼빠진 경찰, 본분으로 돌아가라


안양 초등학생 유괴 살인 사건의 충격이 생생한데 또 가슴 철렁할 일이 벌어졌다. 경기도 일산의 아파트 단지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생이 흉기를 든 괴한에게 마구 맞아 납치당하기 직전에 이웃의 도움으로 간신히 구조됐다. 분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경찰의 대응이다.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증거까지 있는 납치 사건인데도 신고를 받은 경찰은 단순 폭행사건으로 처리했다. 초동수사는커녕 사흘이 지나서야 본격 수사에 나서고 언론에 알리지 말라며 사건 축소에 급급했으니, 추가 범행을 조장한 셈이 된다.


사건이 벌어진 날은 공교롭게 어청수 경찰청장이 ‘어린이 납치·성폭행 종합 치안대책’을 발표한 날이다. 말만 번드레한 경찰의 실상을 보는 듯하다. 일선 경찰만 탓할 일도 아니다. 뒤늦게 부산을 떤 이번 사건과 달리, 비슷한 때 열린 등록금 인상 반대 집회에는 미리부터 경찰의 온갖 간섭이 있었고, 당일엔 집회 참가자의 갑절 가까운 경찰력이 동원됐다. 지휘부의 관심이 온통 시국치안에 쏠렸으니, 민생치안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따지자면 경찰을 그런 방향으로 이끈 이가 ‘법질서’를 강조한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런 그가 이제 와 경찰을 꾸짖고 있으니 어색하기 그지없다.


사실, ‘법질서’의 핵심은 시위·파업을 때려잡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밤거리를 마음 놓고 다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경찰의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 시국치안 부서보다는 수사와 민생 분야에 인사와 처우 혜택을 주고 격려하는 게 당장 할 일이다. 이번 사건의 책임자를 엄히 문책하는 등 상벌을 분명히 하고, 축소·왜곡이 없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일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경찰이 본분인 민생치안에 열중하도록, 괜한 일에 이들을 동원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대통령부터 그리 해야 한다.

(사설/한겨레신문, 2008. 03. 31)


초등학생 유괴미수 사건이라는 현상을 다루면서 그 원인과 대책을 말한 이 글에서 글쓴이는 감정이 섞인 낱말을 거침없이 쓴다. 경찰이 얼빠졌다고 하며 경찰이 내놓은 대책이란 말만 번드레하고 대통령의 말은 어색하기 그지없다고 한다. 사설치고는 개인감정이 너무 짙게 배어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비판의 강도가 높다. 정부와 경찰을 겨눈 비판이 그만큼 날카롭고 단호한 것이다.


첫 문단은 현상을 보고한다. 사건 요약이다. 둘째 단락에서는 이 사건을 진단하고 있다. 정부와 경찰이 민생 치란에 제대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현상을 일으킨 원인을 지적한 셈이다. 셋째 단락에서는 대통령부터 민생치안에 힘을 쏟아야 하고 그에 따라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는 법질서의 핵심이 시위나 파업을 때려잡는 것이 아니라 밤거리 민생치안에 있다는 생각이다.


이 글은 내용에서 경험(현상)+반응의 구조로, 형식은 처음-중간-끝이라는 구조로 되어 있고 실제 현상→진단(원인파악)→근거→주장이라는 순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다.


다른 글에 비해 짧지만 논증문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그 기본을 보여준다. 다음 글은 이보다 좀 길고 복잡한 구성에 다르다. 살펴보기 편하도록 각 문단에 번호를 주고 한 칸을 띄어 놓았다.


예문②

대북 식량지원이 급하다


김영희

1. 백발의 교수는/하루같이 교단에서/출석부를 펼쳤다/부르튼 입술로/학생들을 호명했다/대답이 없을 때마다/자신의 가슴에 구멍 뚫린 듯/굶어도 배워야 한다고/애타게 호소하던 백발의 교수/그러던 교수가/오늘은 제자리를 비웠다/인격의 높이/지성의 높이/스승의 높이로/학생들이 쳐다보던 교탁 위엔/고인의 초상화만 있었다….


2. ‘출석부’라는 제목의 이 시는 탈북시인 장진성(36)이 지난 16일 북한 인권단체인 ‘좋은 벗들’(이사장 법륜 스님)이 주관한 새터민 기자회견에서 낭독한 것이다. 기자회견은 정부에 20만 t의 대북 긴급 식량지원을 호소하는 자리였다. 남한 사회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된다 안 된다로 발칵 뒤집힌 지금 북한 사회에서는 옥수수죽 한 사발을 못 먹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 ‘좋은 벗들’이 추적한 아사의 진행 과정은 지옥으로 가는 계단 같다. 쌀밥→옥수수+쌀밥→옥수수밥 세 끼→옥수수밥 두 끼→옥수수죽→풀죽→묵지가루죽→벼 뿌리 말려서 간 죽→소나무껍질 죽. 북한은 지난 5월 묵지가루죽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좋은 벗들’의 판단이다. 옥수수껍질로 만드는 묵지가루죽에서 벼 뿌리 죽으로 넘어가면서 소화불량과 장파열, 배변 불량과 영양고갈로 아사자가 생기기 시작한다.


3. 한때 좋아졌다던 북한의 식량 사정이 왜 이렇게 나빠졌는가. 2006년 7월과 2007년 8월 북한의 곡창지대인 황해남북도와 평안남도를 홍수가 휩쓴 것이 국내적인 원인이다. 국제식량가격이 2~3배로 급등하고, 중국이 올 초부터 올림픽 준비와 국제식량가격 급등에 대한 대응으로 식량 수출을 통제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이 끊긴 것이 국제적인 원인이다.


4. 실제로 아사자가 나고 있는가.‘좋은 벗들’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황해남북도에서만 하루에 한 이(里)·동(洞)에서 2~3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이것이 전국 4500개 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


5. ‘좋은 벗들’의 정보는 믿을 만한가. 농촌지역의 시장·보건·의료·학교·농사·교통 같은 민중정보에서는 정부보다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정치·군사·전략에 관련된 정보에는 강하지만 민중정보에서는 관심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지금 재앙 수준의 식량난을 맞은 것이 사실인 이상 한 이·동의 아사자가 1명인가 2명인가 3명인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반의 반의 반으로 줄여서 계산해도 하루에 북한 전역에서 세 자릿수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


6. 역시 법륜 스님이 운영하는 JTS(Join Together Society)는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는 민간단체다. JTS는 이것저것 정치적 조건 달지 말고 20만 t의 식량을 긴급 지원하라고 정부에 촉구한다. 20만 t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2개월치 식량인 60만 t의 3분의 1인데 비핵화의 진전 상황과 북·미, 북·일 관계 개선의 속도로 봐서 그걸로 두 달만 버티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지원이 들어가 1990년대 같은 참혹한 기아는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7. 북한 주민들이 옥수수죽·풀죽 한 그릇을 못 먹어 죽어가는데 북한 당국이 먼저 요청해야 지원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한가하고 비인도적이다. 북한 인권을 말들 하지만 생존권에 앞선 인권은 없다. 정부의 대북정책은 안갯속처럼 희미하다. 그나마 한국판 네오콘(신보수파)이 아닌가 의심되는 사람들이 미국의 부시 정부가 2006년 말까지 6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대북지원을 핵문제와 남북대화에 연계하는 정책을 선호한다. 6·15 공동선언과 10·4 합의를 없었던 걸로 하려는 언행, 얻는 것 없이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한다.


8. 그러면서 통미봉남(通美封南)을 걱정한다. 굶어 죽는 동족을 살리는 최소한의 인도적 식량지원은 한 생명이라도 더 꺼지기 전에 정치적 조건 없이 서둘러 실행에 옮겨야 하지 않는가.


9. 핵문제의 진전에 따라 미국도 내년 6월까지 북한에 50만 t의 식량을 지원하기로 하고 7월까지는 통밀과 옥수수를 합쳐 6만여 t을 보낸다. 북한 당국의 남한 비방과 버티기 전략은 개탄스럽고 기아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10. 그러나 죽어가는 동족을 살리는 식량지원만은 정민(政民) 분리로 가야 한다. 신앙심 깊은 대통령과 통일부 장관은 신약성서 로마서(12:20)의 예수님 말씀을 다시 읽고 북한 긴급 지원에 결단을 내릴 것을 기대한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중앙일보, 2008. 06. 20.)


1단락은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이 시의 내용은 식량난 때문에 벌어진 북한의 비극을 일깨운다. 그러므로 북한에 무조건 급히 식량을 주어야 한다는, 이 글에서 글쓴이가 주제로서 펼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이다. 그러니까 주장에 뒷받침하는 근거로써 머리말을 삼은 것이다.


2단락은 본론이 시작되는 부분으로서 북한 주민이 겪는 실태를 보고하는데 실상을 구체성에 기대어 자세히 파헤치고 있다. 현상 1이다.


3단락은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를 따진다. 국내 원인과 국외 원인으로 나누어 지적한다. 현상의 원인을 대고 있는 셈이니 진단 1이다.


4~5단락은 알에서 이제가지 얘기한 현실이 믿을 만한가를 따지고 있지만, 그러는 가운데 아사자가 점점 늘어나는 현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현상 2라고 하자.


6단락에서 비로소 주장을 펼친다. 정치적 조건을 달지 말고 북한에 급히 식량 20t을 무조건 지원하라고 한다. 이 식량으로써 북한은 국제 사회의 지원이 시작될 때까지 버티면서 참혹한 기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주장과 근거를 함께 대고 있는 셈이다. 7단락에서는 정부의 태도가 비인도적인 것이라고 지적하며, 신보수파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역사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평한다. 현상 4와 진단 2이다. 8문단에서 다시 주장을 펼친다. 정치적 조건 없이 식량 지원을 하라는 주장을 거듭 확인한다. 주장 2이다.


9문단에서는 남한 정부가 아니라 북한 당국을 비난하고 있다. 미국이 식량을 지원하는 마당에 북한은 남한 비방과 버티기 전략을 쓰고 있는데, 이는 개탄스럽다고 한다. 현상 5와 진단 3이다. 마지막 10단락에는 자기주장을 좀 더 강화하고자 하는 글쓴이의 마음이 잘 드러내면서 결론을 삼고 있다. 식량지원과 정치를 따로 생각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며, 대통령과 통일부 장관이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한다. 주장 3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1문단에 나온 시와 더불어 이 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인데 논리와 이성에 대고 따지기보다는 심정에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정리하여 보았듯이 이 글은‘근거 1→현상 1→진단(원인) 1→현상 2→현상 3→주장 1과 근거 2→주장 2와 근거 3→현상 4와 진단 3→주장 3과 근거 4→현상 5와 진단 4→주장 4와 근거 5’라는 구성으로 쓰였다.


첫 문단에서 시작품을 인용하여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았다. 이는 조금 색다른 발상이다. 생존권 확보에 따른 식량 지원이라는 주제 내용 자체가 매우 절실한 문제이기에 좀 더 호소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가려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구성을 꾸몄다고 생각한다. 전체로 볼 때 현상과 진단 그리고 주장과 근거가 조금 어수선하게 배열된 듯도 하다. 그러나 생각의 단위와 차원을 자주 바꿔 주니 논지를 펼쳐나가는 데에 긴장감을 이어가고 탄력을 유지할 수 있는 듯하다. 이러한 구성은 이 글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꼴이라고 보면 좋겠다.

이렇게 글의 내용과 글쓴이의 의도, 취향에 따라 현상과 진단, 근거와 주장을 적절히 배치하여 글 한 편은 써진다.


감상문은 논증문과 조금 다른 구성 양식으로써 글을 펼쳐진다. 논리성을 좇아 계단을 밟아가듯이 논지를 전개하기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생각을 이어간다. 모든 글이 결국 읽는 이를 생각하고 써지지만 감상문의 경우 개인이 지닌 느낌을 말하고자 하면서 논증문에 비교해 볼 때 좀 더 주관에 기운다. 그러기에 자신의 느낌이 흐르는 대로 글을 쓰게 된다.


예를 들어 기행문은 대체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보고 들은 것을 배열하는 구성으로 써진다. 이때 구성의 원리는 다름이 아니라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을 따라가면서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또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저곳에서 이곳까지의 경험 내용을 쓰는 것이다. 산 하나를 보았으니 이제 강을 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때문에 결국 바다를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글쓴이의 눈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산으로 가고 그곳에서 계곡을 지나고 바위를 보며 산바람을 호흡하면 된다.


기행문뿐만 아니라 생활에서 느끼는 애환이나 추억 따위를 쓰려고 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다. 생각이 이끌어 가는 대로 그때그때 일어나는 상념에 따라 진솔하게 글을 늘어놓으면 그만이다. 이 이끌어 가는 대로가 바로 구성 원리가 된다. 물론 이러한 글에서도 물론 전체를 가다듬는 조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어릴 적 어머니의 품을 떠올리고 조금 자라서 어머니의 속을 썩이던 회한에 잠기고 지금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는 있으되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가 불현듯 친구 얘기나 정치 얘기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 예문을 읽고 구성 원리를 더듬어 보자.


예문 3

東海

백석(1912-?)


동해(東海)여, 오늘 밤은 이렇게 무더워 나는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닙네.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거리를 거닐면 어데서 닉닉한 비릿한 짠물 내음새 풍겨오는데, 동해여 아마 이것은 그대의 바윗등에 모래장변에 날미역이 한불 널린 탓인가 본데 미역 널린 곳엔 방게가 어성기는가, 도요가 씨앙씨앙 우는가, 안마을 처녀가 누구를 기다리고 섰는가, 또 나와 같이 이 밤이 무더워서 소주에 취한 사람이 기웃들이 누웠는가. 분명히 이것은 날미역의 내음새인데 오늘 낮 물기가 쳐서 물가에 미역이 많이 떠들어온 것이겠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날미역 내음새 맡으면 동해여, 나는 그대의 조개가 되고 싶읍네. 어려서는 꽃조개가, 자라서는 명주조개가, 늙어서는 강애지조개가. 기운이 나면 혀를 빼어물고 물 속 십리를 단숨에 날고 싶읍네. 달이 밝은 밤엔 해정한 모래장변에 달바라기를 하고 싶읍네. 궂은 비 부슬거리는 저녁엔 물위에 떠서 애원성이나 부르고, 그리고 햇살이 간지럽게 따뜻한 아침엔 이남박 같은 물바닥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놀고 싶읍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정말 조개가 되고 싶은 것은 잔잔한 물밑 부드러운 세모래 속에 누워서 나를 쑤시러 오는 어여쁜 처녀들의 발뒤꿈치나 쓰다듬고 손길이나 붙잡고 놀고 싶은 것입네.


동해여!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조개가 되고 싶어 하는 심사를 알 친구란 꼭 하나 있는데, 이는 밤이면 그대의 작은 섬―사람 없는 섬이나 또 어느 외진 바위판에 떼로 몰려 올라서는 눕고 앉았고 모두들 세상 이야기를 하고 지껄이고 잠이 들고 하는 물개들입네. 물에 살아도 숨은 물 밖에 대고 쉬는 양반이고 죽을 때엔 물 밑에 가라앉아 바윗돌을 붙들고 절개 있게 죽는 선비이고 또 때로는 갈매기를 따르며 노는 활량인데 나는 이 친구가 좋아서 칠월이 오기 바쁘게 그대한테로 가야 하겠읍네.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친구를 생각하기는 그대의 언제나 자랑하는 털게에 청포채를 무친 맛나는 안주 탓인데, 나는 정말이지 그대도 잘 아는 함경도 함흥 만세교 다리 밑에 님이 오는 털게 맛에 헤가우손이를 치고 사는 사람입네. 하기야 또 내가 친하기로야 가재미가 빠질겝네. 회국수에 들어 일미이고 식혜에 들어 절미지. 하기야 또 버들개 봉구이가 좀 좋은가. 횃대 생선 된장지짐이는 어떻고 명태골국, 해삼탕, 도미회, 은어젖이 다 그대 자랑감이지. 그리고 한 가지 그대나 나밖에 모를 것이지만 공미리는 아랫주둥이가 길고 꽁치는 윗주둥이가 길지.


이것은 크게 할 말 아니지만 산뜻한 청삿자리 위에서 전복회를 놓고 함소주 잔을 거듭하는 맛은 신선 아니면 모를 일이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전복에 해삼을 생각하면 또 생각나는 것이 있읍네. 칠팔월이면 으레히 오는 노랑 바탕에 까만 등을 단 제주(濟州) 배 말입네. 제주 배만 오면 그대네 물가엔 말이 많아지지. 제주 배 아즈맹이 몸집이 절구통 같다는 둥, 제주 배 아뱅인 조밥에 소금만 먹는다는 둥, 제주 배 아즈맹이 언제 어느 모롱고지 이슥한 바위 뒤에서 혼자 해삼을 따다가 무슨 일이 있었다는 둥……, 참 말이 많지.


제주 배 들면 그대네 마을이 반갑고 제주 배 나면 서운하지. 아이들은 제주 배를 물가를 돌아 따르고 나귀는 산등성이에서 눈을 들어 따르지. 이번 칠월 그대한테로 가선 제주 배에 올라 제주 색시하고 살렵네. 내가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제주 색시를 생각해도 미역 내음새에 내 마음이 가는 곳이 있읍네. 조개껍질이 나이금을 먹는 물살에 낱낱이 키가 자라는 처녀 하나가 나를 무척 생각하는 일과 그대 가까이 송진 내음새 나는 집에 아내를 잃고 슬피 사는 사람 하나가 있는 것과 그리고 영어를 잘 하는 총명한 사년생 금(琴)이가 그대네 홍원군 홍원면 동상리에 난 것도 생각하는 것입네.

(동아일보 1938. 6.7)


이 글은 ‘취중 회상’이라는 내용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지금 글쓴이는 적당히 술에 취하여 어느 거리를 거닐고 있다. 그러다가 고향 생각에 빠져든다. 현재에서 과거의 추억 세계로 스며든 것이다. 글쓴이는 동해 바닷가로 간다. 바닷가에는 바다 냄새가 물씬하다. 그곳에서 먼저 조개를 만지고 물개와 재회한다. 그다음 여러 음식을 맛본다. 마지막으로 제주배 아즈망·처녀·홀아비·소년…, 여러 사람을 떠올리면서 그리움에 젖는다.


이 글 역시 근본에서는 경험+느낌이라는 내용 구조와 처음-중간-끝의 형식 구조에 따라 써졌다. 그 바탕 위에서 글쓴이의 마음에 떠오르는 사물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 거리에서 바닷가로→조개→물개→음식→사람이라는 차례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난다. 여기에서 조개와 물개, 음식들을 차례를 바꿔 늘어놓아도 글의 내용이 크게 바뀌거나 나빠지지 않는다. 물론 각각 글의 꼴이 달라 누군가에게는 어느 것이 좀 더 낫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논증문을 쓸 때처럼 논리에 맞춰 조리를 꼭 따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감상문을 구성하는 원리이다.


그런데 이렇듯 한 지점에 머문 느낌을 쓰는 글과 달리, 줄거리가 있는 사건을 둘러싼 느낌과 생각을 쓰는 글은 또 다르다. 다른 시각으로 살펴야 할 부분이 있다. 사건을 글로써 다시 꾸미려 한다면 먼저 전체 사건 일지에서 꼭 필요한 부분을 가려내는 선택이 있어야 하고 선택한 부분들을 늘어놓는 구성 원리가 있어야 한다. 소설문학에서는 이 원리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는 수가 많다.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감상문에서는 그저 시간이 흐르는 순서에 따르는 게 보통이다.


아래 예문에서 글쓴이는 시간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자.


예문 4

빈자의 행복

류시화


차루는 허풍쟁이였다. 걸핏하면 허풍을 떨었다. 그리고 말끝마다 “노 프라블럼!”을 외쳤다.


차루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 그는 내가 묵고 있는 남인도 마드라스의 호텔 앞에서 아침마다 릭샤(바퀴 셋 달린 택시)를 받쳐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내가 호텔 문을 나서면 차루는 운전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도 다른 릭샤꾼들을 제치고 재빨리 달려왔다. 그리고는 날 모시고 다니려고 이른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었다고 허풍을 떨었다.


처음 차루의 릭샤를 탔을 때 연신 기침을 해대는 것이 안 돼 보여 약 사 먹으라고 차비를 더 얹어준 적이 있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날부터 차루는 아예 나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기로 작정한 듯 어딜 가나 따라다녔다.

나는 약간 창피했다. 오리 궁둥이를 한 못생긴 차루가 아무데서나 “주인님, 주인님!” 하며 아는 체를 하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나를 보기만 하면 차루는 목에 걸었던 지저분한 수건으로 릭샤 뒷좌석의 먼지를 털면서 어서 타라는 시늉을 했다. 근처 우체국에 가는 길이며,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라고 설명해도 차루는 막무가내였다. 그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써(아무 문제없어요, 선생님)!”

날마다 비싼 릭샤를 타고 다닐 만큼 돈이 많지 않다고 말하면 그는 또 엉덩이까지 흔들며 외쳤다.

“노 프라블럼, 써!”


돈 같은 건 문제가 아니니 어서 타라는 것이었다. 차루는 정말로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가진 거라곤 홑바지밖에 없으면서도 언제나 밝고 익살맞았다. 또 인도인 특유의 그 끈질감이란!

마침내 하는 수 없이 내가 릭샤에 올라타면 차루는 차창에 매단 고무나팔을 푸웅푸웅 울려대며 인파 가득한 거리로 내달렸다. 앞에서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나타나면 노인이든 예쁜 처녀든 차루에게 된통 욕을 얻어먹어야만 했다.


한 번은 시내에 있는 나라다 사바 음악 회관에 가던 중에 서류가방을 든 관리가 길을 비키지 않자, 차루는 또다시 푸웅푸웅 경적을 울리며 욕을 한 바가지 퍼부었다. 천한 릭샤 운전사에게 욕을 먹은 고급 관리는 잔뜩 화가 났다. 그는 막을 새도 없이 차루의 왼쪽 뺨을 후려쳤다. 바라보고 있던 나까지도 눈에서 불꽃이 튈 만큼 험악한 손찌검이었다.


차루는 천민이었다. 신분차별 관습이 깊이 뿌리 박힌 인도 사회에서 차루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래서 관리의 뺨을 맞받아 칠 수도 없었다. 차루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기만 했다. 관리는 그것도 모자라 또 한 대 후려칠 기세였다.


마냥 구경만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릭샤에서 뛰어내려 관리를 가로막고 힘껏 떠다밀었다. 외국인이 떠다밀자 뚱뚱한 관리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엉겁결에 소똥 위로 자빠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인도인이 몰려들었다.


그대로 있다간 사태가 불리했다. 나는 릭샤에 올라타며 차루에게 소리쳤다.

“찰로, 찰로!”

‘찰로’는 빨리 내빼자는 뜻이다. 차루는 푸웅푸웅 고무나팔을 울리면서 바람처럼 릭샤를 내몰았다. 음악 회관에 도착해서 보니 차루는 뺨에 벌겋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걱정이 된 내가 괜찮으냐고 묻자 차루는 목소리도 낭랑하게 외쳤다.

“노 프라블럼, 써!”


음악 회관에 앉아서 인도의 대표적인 현악기 시타르 연주를 듣고 있는데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루가 마음에 걸렸다. 욕을 한 건 잘못이지만 뺨을 때리다니. 차루는 몇 살이나 됐을까? 결혼은 했을까? 가족은 있을까? 차루에 대한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더욱 친근하게 굴 게 틀림없었다. 아마 이젠 친동생처럼 따라다니려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연주회가 끝나서 나가보니 차루는 운전석에 앉아서 모든 걸 잊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루에게, 저녁에 공항에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차루는 깜짝 놀라며 오늘 떠나느냐고 했다. 그런 게 아니라 내 친구들이 오늘 밤 인도에 도착할 예정이어서 마중을 나가야 한다고 설명하자 차루는 명랑하게 소리쳤다.


“당신의 친구라면 곧 내 친구인데 당연히 나가야죠. 노 프라블럼!”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차루는 공항 주차장에 릭샤를 세워둘 수 없었다. 그곳은 다른 릭샤꾼들의 세력권이었던 것이다. 잘못하다간 또 얻어맞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루는 그런 설명도 없이, 공항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길가 숲에다 릭샤를 숨겨 놓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루는 나를 공항에 내려준 뒤 곧장 사라지더니 그 먼 거리에 릭샤를 감춰두고 맨발로 뛰어왔다.


비행기가 도착했으나 친구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카레 냄새 풍기는 구름떼 같은 인도인들 틈에서 목을 빼고 서 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차루는 그동안 다른 릭샤꾼들의 눈을 피해 대합실 밖 기둥 옆에 숨어 있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빼꼼히 눈만 내놓고서 유리창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고개를 빼고 쳐다보니 차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나는 서둘러 대합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차루는 바닥에 넘어져 있고 입술에선 피가 흐르고 있었다.


차루 주위로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또 누구한테 얻어맞을 걸까. 나는 황급히 차루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차루는 기둥에 기대서 졸다가 앞으로 자빠지는 바람에 입술을 깬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나에게, 차루는 얼굴을 가렸던 수건으로 상처를 닦으며 소리쳤다.

“노 프라블럼, 써!”


마침내 내 친구들이 나타났다. 번개처럼 뛰어가 릭샤를 가져온 차루는 내 친구들을 얼싸안으며, 나의 둘도 없는 인도인 친구 행세를 하는 것이었다. 입술이 쿤타킨테처럼 부르튼 채로. 내가 어쩌다가 이런 괴상한 인도 친구를 사귀게 됐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차루에게 내 일행과 함께 남쪽 도시로 여행을 떠나려 하니 버스표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인도는 버스표나 기차표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예약을 해두는 것이 안전했다. 차루는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다. 버스표 살 돈을 주겠다고 해도 그만한 돈쯤은 자기가 갖고 있으니, 표를 사 온 다음에 달라고 했다. 나중에 심부름 값까지 쳐서 두둑이 받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러나 저녁때까지 호텔로 버스표를 갖고 오기로 한 차루는 밤 열두 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이른 아침에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웃돈을 얹어주고서야 겨우 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근처 도시에 있는 스리 오로빈도 명상센터에 다녀온 이튿날, 나는 거리에서 차루와 마주쳤다. 차루는 릭샤에서 뛰어내리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나는 화가 나서 버스표에 대해 따져 물었다. 차루는 놀라는 시늉을 하며 또 허풍을 떨었다.


“아아, 맞아요. 버스표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만 길이 막혀서 늦고 말았지 뭡니까!”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무슨 길이 막혔느냐고 따지자 차루는 얼른 고백했다.

“아아, 맞아요, 사실은 깜빡 잊고 말았어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런 친구를 믿고 버스표 예약을 맡긴 내 자신이 한심했다. 내가 화를 내며 앞으로 걸어가자 차루는 뒤따라오며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그렇다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차루가 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왜 화를 내시는 거죠? 잘 다녀왔으면 그걸로 노 프라블럼 아닌가요? 이미 지나간 일인데 그런 것 때문에 화를 낸다면 어리석은 일 아닌가요?”

이제는 그놈의 ‘노 프라블럼’ 소리도 지겨웠다. 나는 냉정하게 차루를 밀쳐냈다. 그 순간 차루가 또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의 업이에요.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정해져 있는 일인 걸 내가 어쩌란 말인가요. 어쨌든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여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차루는 한낱 릭샤 운전사가 아니었다. 인생의 문제를 초월한 성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인도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에서 어느덧 깨달음을 얻은 힌두 명상가로 변신해 있었다.

희랍의 철학자 제논이 상인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그의 집에는 특별한 노예가 한 명 있었다. 어느 날 제논이 화가 나서 노예의 뺨을 때리자 노예는 평온한 목소리로 제논에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 순간에 주인님에게 뺨을 맞도록 되어 있었고, 주인님은 또 제 뺨을 때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두 사람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충실히 제 역할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제논은 훗날 스토아학파의 대철학자가 되었는데, 인도인으로 짐작되는 이 노예에게 영향을 받은 듯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에 흔들림 없는 현실 수용’이 그의 주된 사상이었다.

한편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당신에게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

세네카든, 제논의 노예든, 또는 차루든, 이들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의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삶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넌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차루는 어디서 그런 현실 수용의 지혜를 배웠을까. 여러 명상센터를 수시로 드나들면서도 내가 얻어 갖지 못한 그것을 그는 어떻게 체득했을까. 나로선 불가해한 일이었다.

마드리스를 떠나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차루를 만났다. 작별 인사도 할 겸, 그 동안 타고 다닌 릭샤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차루는 또 손을 흔들며 허풍을 떨었다.


“돈은 주고 싶은 대로 주세요. 전 아무 문제없습니다.”

내가 일부러 정색을 하면서, 그럼 1루피(30원)만 줘도 되겠느냐고 묻자 차루는 외쳤다.

“노 프라블럼!”

그러면서 차루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1루피만 줘서 내가 행복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미 자기의 친구이니까, 자기한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내 행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만의 행복이 아니라 돈을 준 내 자신이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달라고 했다.


영리한 차루, 얄미운 차루, 못난 차루…. 마드라스를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차루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생을 살면서도 “노 프라블럼!”을 외치며, 푸웅푸웅 고무나팔을 울리며 세상 속으로 달려가는 차루! 많은 걸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집착과 소유를 벗어던지지 못하는 내게 그는 잊지 못할 훌륭한 스승이었다.


여행을 하다가 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에게서 얻은 교훈을 글쓴이는 글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그 사람과 함께 겪은 사건 몇 개를 뼈대로 한다. 글쓴이가 만난 인도인은 그 성격이 퍽 이상하다. 늘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 때문에 어설프기 짝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글쓴이도 처음에는 무척 많은 반감을 가진다. 그러나 나중에 그러한 행동 뒤에 숨겨진 참뜻을 알고 나서 그를 새롭게 바라보고 다시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보나 허풍장이가 아니라 참다운 현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글은 어떤 대상을 새롭게 알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정리해서 말하면 ‘반감과 갈등 해소를 통한 재인식’이라는 내용 구조를 이 글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내용을 실제 종이에 옮겨 놓을 때, 글쓴이는 시간의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겪은 일을 펼쳐놓는 구성을 따르고 있다. ①첫 만남→②음악 학원→③공항→④버스표→⑤재회→⑥헤어짐이라는 흐름은 일어난 순서를 따라 사건을 이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구성법은 단순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으나 인물 또는 대상을 일정한 초점에 담아 또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순차구성(順次構成)이라고 하는데 감상문에서 퍽 자주 쓰인다.


이 점을 다른 장르와 비교해 보자. 고전소설 춘향전을 예를 들어 보자. 다 알다시피, 춘향전의 이야기 구조는 ‘열녀위기극복기’라고 할 수 있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하고 위기를 맞이하여 끝내 수절을 지켜낸다는 이야기 내용을 뼈대로 삼고 있다. 만약 주인공 춘향이 끝내 수절을 지키지 못하고 이몽룡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면 이 작품은 사랑의 좌절을 담은 비극 어린 구조로 된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춘향전은 절대 위기 상황이 한순간에 역전되는 반전(反轉)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처음부터 신분을 밝히고 변학도를 단죄하고 춘향이가 처한 위기상황을 풀어냈다면 긴장감과 극적 묘미는 거의 제로 상태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몽룡이 자신의 성공을 숨기고 거지 행세를 하여 위기 상황을 극도로 고조시킨 뒤 이를 다시 해소하였다. 이는 막판 뒤집기로서 흔히 말하는 반전 구조에 따른 기법이고 효과이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극적 긴장과 흥미를 최대로 끌어올림으로써 춘향전은 만고에 전해질 고전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 춘향전은 실제 ① (이도령과 춘향의) 만남 ② 이별 ③ 변학도의 등장 ④ 춘향의 위기 ⑤ 이몽령 등장 ⑥ 결말이라는 차례를 밟아 이야기가 시작되며 전개되고 끝난다. 우리가 흔히 읽어온 춘향전은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즉, ①→②→③→④→⑤→⑥(춘향과 몽룡의 만남→이별→변학도 출현에 다른 위기→절정(몽룡 등장)→결말로서 순차 구성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③→①→②→④→⑤→⑥로, 또는 ④→①→③→⑤→②→⑥ 등으로 배열하여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예를 자세히 살펴보자. 이 구성법에 따르면 작품의 첫 장면은 감옥 안에서 칼을 쓰고 앉아 시름에 잠긴 춘향이의 모습이 될 것이다. 다음 춘향의 회고에 따라 옥에 갇히기까지 춘향이 겪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리고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변학도와 갈등을 겪는 장면이 이어지고 그 다음 이몽룡이 나타나 위기를 깨고 끝을 맺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여기에서 예를 들어 옥에 갇힌 춘향의 모습을 기점으로 하여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교차시키면 또 다른 구성의 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단위들을 적절하게 뒤섞어 배열하면 여러 가지 구성 방식을 꾸밀 수 있는데 그때마다 글은 각각 다른 맛을 지닐 것이다.


어떤 사건을 소재와 주제로 하여 감상문을 쓸 때, 글쓴이의 솜씨와 취향에 따라 구성을 여러 가지로 꾸며볼 수 있다. 그러나 감상문은 대개 짧다. 그리고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에 따른 느낌이 좀 더 중요하고 그 느낌을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사건 자체를 펼치는 데 그렇게 큰 공을 들이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색다른 맛을 주려고 또는 주제를 좀 더 강하게 돋을새김 하려고 시간의 앞뒤를 마음껏 뒤바꾸어볼 만하다. 창의성으로 이어지는 발상이 될 수 있다. 일기나 편지와 같이 개인성이 우세한 글을 쓸 때에도 논증문에 비교해 볼 때 구성에 있어 좀 더 자유롭고 개성 어린 방법을 운용할 수 있다.


2. 문단


음절이 모여서 낱말이 되고 낱말이 모여 문장을 이룬다. 이 문장이 여러 개 모여 글을 이루는데 글은 문단 몇 개로 짜여진다. 문단은 글의 꼴을 빚어내는 기본단위로서 구조와 구성이라는 큰 틀 안에서 글을 실제로 펼쳐내는 역할을 한다. 또 문단은 생각에 적절한 매듭을 지어주는 구실도 하는데 이로써 글쓴이는 생각의 호흡을 가다듬고 글을 체계 있게 펼쳐낼 수 있게 된다. 이런 효과는 결국 글쓴이의 의도와 주장을 읽는 이가가 편안하고 또렷하게 읽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문단은 실제 글을 쓰는 데에 꼭 필요한 개념이므로 글을 쓰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적절하고 효과 있게 문단을 꾸려가야 한다.


문단 하나는 흔히 그 자체로 완결된 형식, 즉 소주제문+뒷받침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문단 하나에 주제문(소주제문)은 대개 하나만 써진다. 여기서 소주제문은 물론 글 전체의 주제에 맞춰져야 하는 것이고 그 뜻이 또렷하고 뒷받침 문장을 감싸 안아야 한다. 또 문단과 문단 사이에는 글의 주제에 따라 함께 움직이고 서로 응대하는 통일성과 유기성이 있어야 한다.


소주제문과 뒷받침 문장은 소주제문→뒷받침 문장이나, 반대로 뒷받침 문장→소주제문 또는 뒷받침 문장→소주제문→뒷받침 문장 따위의 형식으로 엮인다. 그런데 모든 글에서 소주제문+뒷받침 문장이라는 문단 구조가 반드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주제문을 강조하려고 주제문 하나를 문단 하나로 처리하기도 한다.

논문·평론·사설 따위 논증문을 쓸 때에는 주장과 논리를 우선으로 하기에 주제문+뒷받침문장이라는 문단 구조를 되도록 준수하며 문단과 문단 사이의 필연과 유기성을 최대한 좇는다. 그러나 감상문에서는 글쓴이 개인의 감성에 좀더 치중하므로 이 구조를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되거니와 문단 사이의 이음새 또한 꼭 논리성으로 엮이지 않아도 된다.


다음 글을 읽고 문단을 어떻게 이끌어갔는지 눈여겨보자.


예문 5

‘그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오명철


1. 서울의 한 여교수는 얼마 전 고교 2학년인 자신의 아들에게 걸려온 휴대전화를 무심코 받았다가 깜짝 놀랐다. 발신자가 ‘마누라’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조심스럽게 아들에게 물었더니 “여자 친구가 입력해 놓은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도 좀 지나치지 않으냐?”고 했더니 아들은 “그보다 더 심한 표현도 있다.”고 했다.


2. 여학생들의 애정 공세는 유치원,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교사들의 전언이다. 과거에는 늑대 같은 사내 녀석들로부터 딸아이를 지켜내야 했으나 요즘은 반대로 여학생들의 적극적 애정 공세로부터 아들을 지켜내야 하게 됐다.


3. 실제로 상급학교 진학 철만 되면 아들을 둔 부모는 여학생과 경쟁을 하지 않는 남자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고, 딸을 둔 부모는 만만한 남학생이 많은 남녀 공학에 진학하기를 바란다고 한다. 대학의 수석 졸업생은 대부분 여학생 차지다. 언론사에도 여성의 진출이 괄목할 만큼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학업 운동 리더십 등 모든 면에서 남자를 능가하는 여성을 의미하는 ‘알파 걸(Alpha Girl)’이라는 용어가 부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4. 이런 현상이 10년 이상 진행되다 보니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대단히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역시 한국에서의 괄목할 만한 여성 파워 현상이다. 특히 여성이 자녀 양육과 교육 및 자산관리에 있어서 이처럼 절대적인 권한을 휘두르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얘기다.


5.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법시험 여성 합격자는 1996년 36명(7.2%)에서 2006년에는 375명(37.7%)으로 10년간 크게 증가했다. 행정고시 여성 합격자도 1996년 19명(9.9%), 2006년 104명(44.6%), 2007년 123명(49%)으로 늘었다. 외무고시 여성 합격자는 1996년 4명(9.8%), 2005년 10명(52.6%)으로 증가한 데 이어 2007년에는 무려 67.7%로 급등했다. 국내 대기업 3곳 중 한 곳은 대졸 신입사원 선발에서 여성들이 남성들을 압도해 ‘남성 할당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다. 반면 아내 대신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고 있는 ‘전업 주부(主夫)’가 3년 새 42.5%나 늘어 15만 명에 이른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1세기에는‘여성 우위’를 넘어 사실상 ‘여성 독주’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6. 미국 언론은 종전에는 유능한 아내 때문에 위축을 느끼는 사내를 ‘작은 남편(Small Husband)’,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한 아내를 둔 남자는 ‘트로피 남편(Trophy Husband)’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는 성공한 아내를 둔 소수의 남편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뿐이다. 그러나 얼마 전 등장한 ‘베타 남(Beta Male)’이라는 용어는 좀 더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현대 남성상을 보여준다. 돈 잘 벌고 똑똑하지만 자기보다 우수한 여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알파 남’과는 달리, 수입과 학력이 떨어지지만 성공한 아내를 기꺼이 이해해 주는 남성이라는 의미다. ‘남녀 간 전쟁(Sex War)’에서 남성이 항복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던 조연이나 내조 역할을 남성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7.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하는 한국 주부들의 유행어가 있다. ‘잘난 아들은 나라에 바치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에게 보내고, 못난 아들은 내가 돌본다.’는 말이다. 바치고, 보내고, 돌보는 주체가 여성인 점에 주목하라. 한국 가정의 주도권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갔음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경영학계의 3대 스승으로 꼽히는 톰 피터스는 아예 “경제성장 원동력은 중국이나 인도 인터넷이 아니라 바로 여성”이라고까지 말한다. 어느덧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는 한국 주부가 열 명 중 한 명에 불과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동아일보, 2008. 1.31.)


여성시대가 왔다는 사실을 깊이 알아야 한다고 글쓴이는 주장한다. 읽는 이들은 정신 좀 똑바로 차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은 일과 조사한 자료 따위 갖가지 증거를 펼쳐놓고 거듭거듭 되새기는데 조금은 심하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잔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1문단에서 여성이 적극성을 보이는 사례를 든다. 현상 서술이다. ‘서울의 한 여교수는~깜짝 놀랐다.’가 소주제문이고, 그 까닭을 밝힌 문장이 뒷받침문장이다. 2문단은 개인 경험이 좀 더 폭넓은 현상으로 이어지면서 이에 따른 진단을 내리고 있다. 교사들의 전언을 바탕으로 여학생의 적극 어린 애정공세에 남학생을 보호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고 진단한다. 3문단은 이러한 현상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현상으로 이미 굳어졌다고 한다. ‘알파 걸(Alpha Girl)’이라는 용어가 부담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가 소주제문이고 갖가지 사례가 뒷받침 문장을 이루고 있다.


4문단에서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의 입을 빌어 현상과 진단을 내린다.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들이 대단히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역시 한국에서의 괄목할 만한 여성 파워 현상이다.’가 주제문인데 한국에서는 여성의 힘이 크게 늘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여성이 지닌 권한이 퍽 크다고 하는 다음 문장이 뒷받침 문장이다. 5문단에서는 ‘여성 우위’가 아니라 이제 ‘여성 독주 시대’가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21세기에는‘여성 우위’를 넘어 사실상 ‘여성 독주’ 시대가 도래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가 소주제문이다. 나머지 문장이 모두 뒷받침 문장이다. 앞 문단에 나온 뒷받침 문장은 모두 글쓴이 개인이 보고 들은 것들에서 가져왔다. 그러나 이 문단에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보고서’라는 객관성 있는 자료로써 뒷받침 문장을 꾸미고 있다. 주장과 논지를 튼튼하게 하려고 객관성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6문단에서는 이야깃거리를 나라밖에서 가져왔다. 처음에 글쓴이는 자기 일상에서 보고 들은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이제 이야기 범위가 점점 넓어진 셈이다. 이 문단의 논지는 남녀의 성역할마저 이제는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남녀 간 전쟁(Sex War)’에서 남성이 항복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여성의 몫이었던 조연이나 내조 역할을 남성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온다.’가 소주제문이다.


결론 단락에서는 앞에 늘어놓은 진단과 주장을 한마디로 모았다. 우리 시대는 아들 남성 중심체제에서 벗어났으니 이 점을 제대로 새기라고 못을 박듯이 주장하고 있다. ‘한국 가정의 주도권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넘어갔음이 단적으로 드러난다.’가 주제문이다. 세태를 반영하는 격언 한 말씀과 이름이 잘 알려진 학자의 말을 빌려 주제문의 앞뒤에서 뒷받침 문장을 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남아선호 사상에서 벗어났다고 진단하며 끝을 맺는다.


이 글에서 각 문단은 긴밀하게 엮여 있다. 생활 가까운 곳에 있는 현상에서 시작하여 갈수록 일반 사회 현상에 주목하면서 객관성을 확보하려고 통계자료를 빌려왔으며 국외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말하기까지 했다. 문단이 꼬리를 물고 나가듯 이어지면서 점점 이야기의 폭을 넓히고 주장의 객관성을 두텁게 쌓아간 셈이다. 그리고 각 문단은 모두 소주제문+뒷받침 문장 구조로 되어 있되 글쓴이가 지닌 뜻에 따라 뒷받침 문장은 하나에서 다섯 개까지 여러 개로 되어 있다.


이 글과 견주어 보면 아래 글은 문단 운용에서 좀 더 자유분방하다.


예문 6

행복

마광수


행복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30년도 채 살아 보지 않은 나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1. 행복이 무엇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2 죽을 때까지 인간은 행복의 의미를 캐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석가나 예수나 공자나 다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믿는다. 예수나 석가도 행복은 이러이러한 것일 것 같다고 가정한 데 지나지 않는다고.


그들은 행복을 너무 정신적인 의미에만 국한시켰다. 도덕과 양심을 너무나 중요시했다. 그러나 현재로서의 나의 행복관은 그렇지 않다. 행복은 다분히 ‘육체적이고 관능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완전히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행복의 기준을 너무나 거창한 데다 두면 안 된다. 많은 종교가 행복의 기준을 내세적인 데 두고 있다. 그래서 현세적인 행복을 무조건 멸시하는 데서 우리 인간의 많은 불행이 비롯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서양 중세기의 암흑시대를 생각해 보자. 완전히 금욕적인 생활만을 강요하고 인간을 신의 노예로 전락시킨 결과로, 얼마나 많은 비극이 초래되었던가.

그런 점에서 나는 다분히 쾌락주의적인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단순한 데서 온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다음의 기분이나, 목욕을 하고 난 다음에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지는 것, 이런 것들이 다 행복이다


특히, 가장 큰 행복은 ‘관능적인’ 데서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달콤한 입맞춤을 주고받을 때, 그리고 뜨거운 포옹을 나눌 때, 우리는 황홀한 행복감을 경험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가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참으로 옳은 판단이었던 것 같다.


나는 예수가 말한 사랑이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인 사랑이라느니, 아가페적 사랑이라느니 하며, 형이상학적 사랑만을 가치 있는 사랑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예수가 말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사랑이었다. 우리가 관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로 죄가 아니다. 그것을 얼마나 건전한 것으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간은 확실히 비극적인 존재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생, 노, 병, 사의 고통이 언제나 우리들을 괴롭힌다. 그렇게 비극적이고 허무한 인생을 우리들이 악착같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사랑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랑은 궁극적인 행복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이유에 불과하다. 우리들은 사랑을 조금씩 조금씩 연소시켜 가면서 그날그날을 겨우겨우 지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특히 육체적인 사랑 애로스적인 사랑을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된다. 관능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랑만이 가장 인간적인 사랑이요 솔직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도덕적인 사랑, 플라토닉한 사랑 등이 가치 있는 사랑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사랑’은 아예 없는 것이므로 그것에 대해 헛된 미련을 품는다면 우리들의 행복은 불가능해진다.


흔히들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돈이나 출세, 명예 따위의 것들도 사랑이 충족될 때 저절로 곁들여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출세하겠다고 이를 갈면서 아부를 해대고, 돈을 벌려고 버둥거려 봐야 소용없다. 4.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그저 사랑에만 몰두하라! 그러면 자질구레한 행복의 조건들은 저절로 충족되어진다. 사랑은 진실로 행복한 삶을 위한 묘약 중의 묘약이다.


‘육체를 바탕에 둔 정신’, ‘관능적인 사랑의 체질화’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에 우리는 조금씩 행복을 느껴 볼 수 있을 것이다. (1980.2)


이 글은 사랑을 논하고 있다.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데에서 찾아야 한다며 관능이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니 육체에 따른 행복을 얻도록 노력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 논증문인 듯하다. 사랑의 방법을 다지면서 글쓴이 나름대로 근거와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장4를 보면 자기 생각을 끝내 객관성 있게 풀어내기보다는 심정을 좇아 펼친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들추어내면서 내린 판단도 감성에 기대어 있다. 특히 예수님이 하신 사랑이 어디까지나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은 신빙성도 설득력도 아주 약하다. 따라서 이러한 판단을 근거로 삼아 관능을 옹호하는 태도는 논리성에 따른 것이 아니다. 문득문득 이치를 따지는 지성이 빛나기도 하지만 이 글은 감상문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래서인지 이 글에서는 문단이 짧고 자주 바뀌는 점이 우선 눈에 띈다. 생각을 이끌어 가는 호흡이 짧은 것이다. 감상문이 지닌 일반 특성이다. 예를 들어 문장1,2,3은 문단 하나로 묶어놓을 수 있다. 내용상 2가 소주제문이고 1과 3이 뒷받침 문장이 된다. 그러나 글쓴이는 논증문의 질서에 따라 글을 쓰지 않았다. 그저 자기 내키는 대로 썼다.


감상문에 비해 논증문은 독자의 반응을 좀 더 미리 생각한다. 자기 의지나 의견을 꼭 관철시키고자 하므로, 좀 더 질서 있게 글을 펼쳐 그 뜻이 잘 전해지도록 하려 한다. 그러니 논리의 계단을 따라간다. 각 계단, 달리 말해 문단 하나하나를 쓸 때 한 문단은 앞뒤 문단을 지탱하거나 이어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문단은 소주제문+뒷받침 문장이라는 구조로써 그 틀을 단단하게 다진다.


감상문을 슬 때에도 글쓴이는 물론 읽는 이를 생각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기를 찾고 자기를 확인하는 데에 좀 더 많이 치중한다. 그러므로 자기 호흡에 맞추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문단 씀씀이가 논증문보다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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