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벌판 - 쓰기

by 이순직

이제 글 한 편을 쓰려한다. 아직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좋은 글을 써보려 한다. 이제까지 글쓰기에 필요한 기초 이론을 살펴보았는데, 마지막으로 아래에 이야기해놓은 사항들을 눈여겨보기 바란다.

1. 글을 쓰기에 앞서


① 첫째, 글쓰기 과정 점검

글쓰기에 앞서 글쓰기 과정을 제대로 밟았는지 점검해 보자. 글을 쓰려고 마음 먹었다면 주제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글을 쓸까, 감상문을 쓸 것이냐 논증문을 쓸 것이냐를 결정한다. 물론 글을 쓰려고 마음먹는 순간 글의 종류도 함께 결정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다음 글의 분량을 정하고 좀 더 세심하게는 어조와 문체를 가늠한다. 설명문이나 논증문을 쓸 때에는 감상문과 다르게 자료를 조사하고 점검하여 그 가운데 글쓰기에 필요한 부분을 가려서 정리해 두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결정된 뒤에는 글의 개요를 써본다. 개요는 설계도이므로 좀 더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짜면 짤수록 글 쓰는 데에 도움이 된다. 개요를 만들면서 머리말과 본론 그리고 마무리를 어떻게 배열하며 각각 문단을 몇 개로 하고 각 문단의 분량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 따위까지 또렷하게 정하여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차분하게 개요를 들여다보면서 전체 내용을 다시 한번 다져본다.


설계도를 끝냈으므로 사전 준비는 제대로 된 셈이다.


② 마음 모으기(정신 집중)

다음은 글을 쓰는 정신 자세에 관한 도움말을 건네고자 한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을 할 때에는 순수하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효율이 있고 뜻한 것을 제대로 이루어낼 수 있다. 글 쓸 때에도 이와 마찬가지다. 경험 하나를 이야기해볼까 한다.


대학교 일 학년 일 학기 때다. 기초공통으로 문장론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월요일 1교시, 그러니까 아침 9시에 시작해서 세 시간을 이어 가는 수업이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글 쓰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강론을 하셨다. 그러나 내용은 문장을 쓰는 법이나 문단을 나누는 요령이라든지 하는 실제 기술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마음의 창을 닫아야지요. 먼저 창을 닫고 외부세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말과 함께 교수는 정말 창문을 닫고 있다는 듯 두 팔을 당신의 가슴 높이까지 올리신 뒤 창문을 닫고 여미는 시늉까지 하셨다.


“잠시나마 외부 세계와 완전히 떨어져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차분하게 바라보아야 하겠지요.”

결국 정신을 모으라는 말씀인데 내용만 따지고 보면 그다지 복잡한 얘기도 아니며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당신의 몸짓에 어린 실감에다, 이제 정말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게 된 사람의 눈빛을 직접 보여준 덕분이었을까. 그날 교수의 말은 보통이 훨씬 넘는 동감, 아니 감동으로 다가왔다.


‘바깥과 단절된 나만의 사유 공간.’ 말은 쉽다. 그러나 실제로 정신을 모아 순수한 자기 집중 상태로 빠져들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그 필요성을 알기도 쉽지 않거니와 말로 설명한다고 해서 누구나 곧바로 알아챌 것도 아니다. 그래서 교수는 말 대신에 동작과 눈빛을 우리들에게 쏘아주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이 지닌 힘을 가장 높이 이끌어가려면 마땅히 정신집중을 해야 한다. 글쓰기를 할 때에도 이와 같다. 글쓰기는 자기 정신을 다듬는 일이므로 정신집중은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글의 개요가 잡히면 책상 앞에 앉아 이제 한 점 잡념도 없이 한 칸 한 칸 원고지를 메워나가는 데에 모든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 자세야말로 글쓰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③ 진실하게 쓰기

모름지기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진실하게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고 아끼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든 진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그러니까 글도 진실하게 써야 한다. 앞에서 강조한 적이 있지만 다시 한 번 더 새겨보아야겠다.


초등학교 때 글쓰기 시간이 되면 선생님께서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학년 때에도, 2학년 때에도, 3~4학년 때에도, 그리고 4~6학년 때에도…, 그러니까 결국 6년을 다 털어 선생님은 늘 이렇게 말했다.

“진실하게 써라.”


진실하게 쓰라! 이 말을 두 갈래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첫째,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겪은 일과 그로부터 생긴 생각을 쓰라는 것이다. 남에게 얼핏 들은 덕에 머릿속에 어렴풋이 잡혀있을 뿐인 일이나 어떤 책이나 신문에서 읽은 사건, 갑자기 생각이 나서 꾸민 이야기 따위를 가지고 글 쓰면 실감이 떨어진다. 거짓은 어딘가에서 꼬리가 드러나는 법이다. 꾸며 쓴 글은 은연중에 허점이 드러나서 허술하거나 추한 느낌을 준다. 자기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은 경험과 생각을 소재와 주제로 삼아 글을 써야 한다.


둘째, 글을 꾸미지 말라. 뭔가 있어 보이려고 그럴 듯하게 보이려고 멋있는 낱말과 문장을 일부러 골라 쓰려고 하지 말라는 것. 자신이 훌륭하다고 느끼는 어떤 작가나 문인을 무작정 따라가며 흉내를 내는 일에 골몰해서도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써야 체험 내용과 글이 알맞게 어울리고 듣기도 보기도 좋다.


그렇다고 멋있는 말을 아예 생각하지도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좀더 효과 있게 좀더 매끄럽게 좀더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탓할 수 없다. 다만 그 멋있는 말이 진실한 글쓰기에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한다. 굳이 일부러 겉치레로 꾸며 내놓지는 말라는 것이다.

글은, 어른이나 어린이나 진실하게 써야 한다.

④ 독창성 생각하기

자기 생각을 무리 없이 펼쳐내는 힘이 어느 정도 생겼다면, 그때에는 ‘나만의 글쓰기’를 생각해야 한다. 주제와 내용은 물론 문장과 어조, 구조와 구성에서 자기만이 지니고 있는 개성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길을 찾아보는 일은 보람이 있다. 물론 억지로 꾸며내라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외면을 치장하려고 짐짓 꾸미면 진실성을 잃는다.


글을 쓰는 요령은 결국 글쓴이가 저마다 지니고 있는 손끝에서 나온다. 글쓰기 솜씨가 꽤 무르익었다고 느끼면 자기 생각을 좀더 효과 있게 드러낸다는 뜻에서 이전에 썼던 글과 다른 꼴을 꾸며볼 만하다.


예를 들어 머리말→본문→마무리로 쓰던 글을 본문→머리말→마무리로 순서를 바꿔 쓰면서 새로운 구성을 꾸며볼 수 있다. 또 흔히 ‘-다.’로 끝나는 문장 쓰기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끝맺음체(종결어미)를 써보면 어떨까. 남들이 잘 보지 않고 놓친 곳을 눈여겨 본 내용을 주제로 좇아 나만 쓸 수 있는 글을 모색할 수 있다.

⑤ 누구에게 말하나

누구에게 말하는가? 이 물음을 진지하게 새겨보아야 한다. 자기가 쓴 글을 읽어줄 사람, 독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글을 쓸 때 누가 읽을 것인가를 대개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내가 내 생각을 보는 일이 글쓰기라고 한다면 독자는 나 자신이다. 이렇다면 글 쓰면서 남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학술논문을 보면 정해진 대상이라기보다 해당 분야에 속해있는 거의 모든 사람을 독자로 한다. 읽는 이를 따로 생각하지 않고 통례에 따라 글 쓰기 때문이다.


무릇 모든 글에서 읽는 이의 범위를 정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사실 모든 글은 읽는 이를 앞에 두고 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글 쓸 때 읽는 이를 생각해야 또렷해야 개성어린 글을 쓸 수 있다. 물론 상대방이 내릴 평가를 너무 의식하여 글뜻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읽는 이를 존중하는 수준에서 그 의식상태를 배려하고 반응 따위를 미리 새겨두면 좀더 생기 넘치고 호소력이 있는 글을 쓸 수 있다.


지금 누구를 겨냥해서, 누구를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나? 그 울타리를 둘러보는 일은 퍽 유익하다.


2. 문장을 쓸 때 주의해야 할 점


① 문법에 맞게 쓰자

글은 개성을 드러낸다. 남과 다른, 글쓴이 자신만이 지닌 어떤 자질을 보여준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그래서 한국어로 말하고 한글로 쓴다. 우리 개성이 드러나는 방법, 그 뿌리는 우리말과 글이다. 그래서 먼저 한글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똑바로 쓸 수 있어야 한다. 문법에 맞게 글을 써야 한다.


문법(文法) 말 그대로 글의 법이다. 글을 쓰는 데에 지켜야 할 규칙이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학자가 다듬어 온 체계다. 여러 사람이 오래 연구하고 고민한 끝에, 그렇게 써야 가장 알맞고 아름답다고 하면서 내놓은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사람으로서 이 체계를 잘 알고 이에 맞춰 글을 써야 한다.


말과 글은 삶을 이루는 기본요소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초자질이다. 이는 맨 앞 장에서 이미 주장한 내용이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보면 글쓰기 교육에 매우 소홀하다. 입주 위주로 교육을 펼치다 보니 글쓰기 같은 인성교육은 늘 뒷전으로 밀려난다. 올바른 문장 쓰기를 이끄는 교육도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점수를 따려고 몇몇 사항을 외워 익히기는 한다. 그러나 차분하게 직접 글을 쓰면서 우리 문법을 손끝에 익히는 기회를 학생들은 제대로 갖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갓 대학에 들어온 1학년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시켜 보면 문법에 관하여 거의 초등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과 학생이든 이과 학생이든 예체능계 학생이든 다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글의 빛과 향기, 나의 세계를 만들고 가꾸기에 앞서 문법에 맞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하겠다. 이것은 정확한 문장을 쓰는 문제이기도 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어 문법을 익히는 일은 개성 어린 글을 쓰는 밑바탕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먼저 눈을 돌려야 한다.


다음에 학생이 쓴 글을 예로 보인다. 여기에서 국어문법에 관한 사항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몇 개 예를 보면서 문법을 지켜서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다져보고자 한다.


예문 1)

사람은 무엇인가 잃어야만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후회한다. 언제나 풍족할 ①것 만 같은 자원을 마구 사용하고 버린 끝에 생긴 지구의 환경문제와 같다. ②건강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건강할 것 같지만 절대 영원하지 않다. 또 장애가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즉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행복을 못 느낀다. 다리가 불편해 져야만 비로소 ③걸을 때 의 행복을 알고 ④뛸 때 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①, ③, ④에는 낱말과 조사를 붙여 쓴다는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다. 매우 기본 사항이기에 모르고 쓴 것이 아니라 실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같은 구조를 지닌 어절에서 세 번이나 실수를 하고 있다. 머릿속에서는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실제 몸에 익숙해 있지 않으면 오류와 혼동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실수는 실제 학생이 쓴 글에서 자주 보인다.


‘마찬가지다’는 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고 비교 대상과 함께 써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다’가 적절하다.


고친 글)

사람은 무엇인가 잃어야만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후회한다. 언제나 풍족할 것 만 같던 자원을 마구 사용하고 버린 끝에 생긴 현재 지구의 환경문제를 건강에 빗대여도 이와 마찬가지다. 언제나 건강할 것 같지만 절대 영원하지 않다. 또 장애가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행복을 못 느낀다. 다리가 불편해져야만 비로소 걸을 때의 행복을 알고 뛸 때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걷고 뛰는 데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예문 2)

이제는 모두 대학생이 되어서 가끔씩 만나서 소주 한잔씩 채우고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렇게 ①술 한잔씩 마시면서 이야기 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를 때가 많다. ②이러한 순간순간이 나는 참 행복하다.

또 조금만 생각해보면 ③이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친구들과 만나는 것뿐만이 아니다. 또 하나 ④내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바로 건강하기 때문이다.


①은 비문은 아니지만 목적격 조사 ‘-을’을 빼고 말하듯이 썼다. 읽기에 퍽 껄끄럽다. 그래서 문법에 맞게 조사를 붙였다. ②에서도 조사 ‘-이’는 어울리지 않는다. ‘순간’이 시간개념을 지닌 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과 장소를 나타내는 조사 ‘-에’를 서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③의 ‘순간’은 ‘것’과 제대로 호응하지 않는다. ‘것’을 시간 개념을 지닌 낱말로 바꾸어야 한다. 또 ④에서 ‘느낄 때는’에 ‘때문이다’라는 서술어는 전혀 호응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다음에 고쳐보았다.


고친 글)

이제는 모두 대학생이 되어서 가끔씩 만나 소주 한잔씩 채우고 고등학교 때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술을 한잔씩 마시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를 때가 많다. 이러한 순간순간에 나는 참다운 행복을 느낀다.

또 조금만 생각해보면, 친구들과 만나는 때에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나는 건강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건강하기에 행복을 느낀다.)


예문3)

남태평양의 ①섬나라 바누아투라라는 나라는 영국 신 경제제단이 발표한 행복지수 일 위로 경제규모가 ②이백 삼십 삼 개국 중 이백 구 위인 가난한 나라이다. ③반드시 행복지수가 높다고 행복한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④자신의 생활의 만족하는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기에 우리들의 흔하게 말하는 ‘행복’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스위스는 경제규모가 ⑤십 팔 위인 나라이나 세계보건기구에서 발표한 남녀 세계 각국 자살률에 ⑥십 육 위의 순위에 올라와 있다.


①에는 문장 전체에서 낱말 ‘나라’가 세 번 쓰이고 있다. 지루한 느낌이 있으니 문장을 둘로 나누면서 하나 정도는 줄여야겠다. ②, ⑤, ⑥은 띄어쓰기에 오류가 보인다. ③에서 ‘반드시’는 그것이 수식하는 말 ‘행복한’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의미 파악에 힘이 든다. 가까이 붙여 놓아야 한다. ④는 조사 ‘-의’를 남용한 문장이다. 알맞은 조사를 가지고 문장을 다시 써야 한다.


고친 글)

남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라는 영국 신 경제제단이 발표한 행복지수 일 위(1위)에 오른 나라이다. 그러나 경제규모는 이백삼십 개국(230개국) 가운데 이백구 위(209위)로서 매우 가난하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정도를 수치로 나타낸 것이기에 우리들이 흔하게 말하는 ‘행복한 삶’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스위스는 경제규모가 십팔 위(18위)지만 세계보건기구에서 발표한 남녀 자살률에서 세계 십육 위(16위)에 올라 있다.


한편 인터넷에서 누리꾼이 각종 게시판에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올리는 것은 이제 일반 문화로 굳어진 듯하다. 그런데 게시판에 오르는 글 가운데는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이 너무 많다. 이것은 우리 국민 전체가 우리말을 정확하게 쓰는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점을 말한다. 또 보기에 따라서는 아예 문법을 무시하거나 그 필요성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어찌 되었든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예문 4)

왜 다른사람들의 주장과 권리는 무시하는것인지?

다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촛불을 이용하는것으로 밖에 안보이는것은 나만인가?

명분을 내새우면서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여 대중을 선동하는것으로 밖에 안보인다.

집단행동에 무력하게 넘어가고 집단행동이면 다 되는줄아는 사람들....그러면서도 자신들 주장의 정확한 근거,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하는것인지...

민주주의는 방종이 아니고 무책임이 민주주의는 아니듯 제발 자제하고 위법행위는 처벌하고 위정자의 처벌은 선거와 법으로 해야하는데.


이 글은 비록 자신의 생각을 짧고 자유롭게 쓴 것이지만 문단을 나누지 않아 혼란스럽고 글을 쓰는 데에 기본이 되는 띄어쓰기도 지키지 않고 썼다. 다시 말하지만 전체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글쓴이 개인 차원에서도 이러한 글쓰기 자세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말을 정확하게 말하고 읽고 쓰는 능력을 기른 바탕 위에서 우리는 좀더 자유롭고 참다운 우리 생각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친 글)

왜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권리는 무시하는 것인지? 다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촛불을 이용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는 것은 나뿐인가? 명분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여 대중을 선동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집단행동에 무력하게 넘어가고 집단행동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들…그러면서도 자신들 주장의 정확한 근거, 자료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인지…방종이 민주주의가 아니고 무책임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제발 자제하기 바란다. 그리고 위법행위는 강력하게 처벌하고, 그 처벌은 법에 따라야 한다.


② 짧게 쓰자

글은 이렇게 써야 된다느니 저렇게 써야 한다느니 하는 조언들이 때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이런 선입견이나 충고에 매이지 말고 그저 자기 쓰고 싶은 대로 자연스럽게 쓰면 그만이다. 모름지기 우리 모두 자기 체험에서 글쓰기 요령을 터득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래도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미덕이 있다면 되도록 문장을 짧게 쓰라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그러해서 길게 쓰고 싶다거나 제 나름대로 내용 전개 효과를 생각하여 길게 써야 한다면 마땅히 길게 써야한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하는 까닭이 없다면 주어 하나에 서술어 하나로 끝나는 문장에 하나에 뜻을 담아 짧게 써내려가는 것이 좋다. 그래야 쓰는 이는 글을 써내려가면서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고 읽는 이 또한 글을 읽으면서 좀더 쉽게 내용을 알 수 있다.


특히 학생들이 쓴 글을 보면 대체로 너무 길다. 이는 학생들이 지니고 있는 문체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어디까지나 글을 많이 써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버릇이다. 생각과 말을 차근차근 글로 옮기는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자기 생각을 펼치려 할 때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많은 생각을 한꺼번에 머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쏟아놓으려 하니 문장은 할 수 없이 그리고 쓸데없이 길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때때로 문장의 앞과 뒤가 뒤틀어져 비문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길어진 문장 대개 읽기에도 힘겹고 지루하다. 그래서 문장이 길어진다 싶으면 좀더 차분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예가 참 많다. 올바로 글을 쓰고 앞으로 개성 어린 문체를 가지려면 이점을 먼저 이겨내야 하겠다. 예를 몇 개 들고 알맞게 고쳐 본다.


예문 1)

시골에서 29세의 나이로 4대가 살고 있는 대가족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장은주 씨의 일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가족의 세끼 밥을 가족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은 물론 집안일이나 행사를 야무지게 해내가며 노래를 배우기 위한 꿈을 위해 노래연습 또한 게을리 하지 않는 그녀의 능력은 거의 슈퍼우먼 수준이었다. 외며느리라는 자리에 서서 5살도 채 되지 않은 2명의 아이들과 시어머니의 병간호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항상 긍정적으로 행동하여 주위사람들까지 모두 그녀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녀의 매력이 너무 부러웠다.


이 글은 문장이 너무 길어 문맥이 어수선하고 그래서 내용이 매끄럽게 전달되지 않는다. 길게 쓴 문장에 다른 폐단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친 글)

29세의 나이로 4대가 살고 있는 시골 대가족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장은주 씨의 일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대가족의 세끼 밥을 가족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은 물론, 집안일이나 행사를 그녀는 야무지게 해낸다. 게다가 노래를 배우려는 꿈을 위해 노래연습 또한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러한 그녀의 능력은 거의 슈퍼우먼 수준이다. 외며느리라는 자리에 서서 다섯 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 두 명과 병든 시어머니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항상 긍정적으로 행동하여 주위사람들까지 모두 그녀의 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러한 그녀의 매력이 너무 부러웠다.


아래 글 역시 문장이 길어져서 지루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내용을 원활하게 펼치지 못했다. 생각을 소단위로 끊은 다음 이를 적절한 연결어미나 접속어를 써서 다시 이어야 한다.


예문 2)

그때 그렇게 순수하고도 강렬하게 불행을 실감했던 것은 아마 지금 벌어진 이 상황이 온전히 나의 몫이고, 내가 헤쳐 나가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이, 처음 느껴 보는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가, 어린 나에게 그렇게 몸서리 쳐질 정도로 무서웠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고친 글)

그때 그렇게 순수하고도 강렬하게 불행을 실감했다. 아마 그 상황이 온전히 나의 몫이고, 내가 헤쳐 나가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 느껴 보는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가 어린 나에게 그렇게 몸서리 쳐질 정도로 무서웠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예문 3)

처음 코엘류 파울뉴가 쓴 ‘11분’에 나오는 여주인공에 관해서 쓸 생각이었다. 브라질 태생인 여주인공 마리아는 고향을 떠나 스위스로 가서 스스로 창녀가 되어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게 줄거리이다.


이 글은 문장을 길게 쓰다가 내용이 뒤죽박죽이 되었고 결국 아주 틀린 문장이 되고 말았다.


고친 글)

처음 코엘류 파울뉴가 쓴 ‘11분’에 나오는 여주인공에 관해서 쓸 생각이었다. 브라질 태생인 여주인공 마리아는 고향을 떠나 스위스로 가서 스스로 창녀가 되었다. 그리고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 것과 그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깨달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이것이 이 작품이 지닌 줄거리이다.


③ 쉬운 우리말로 쓰자.

글은 말에서 왔다. 말이 먼저 생기고 한참 뒤에 글이 나왔다. 글은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보조 수단이다. 그러므로 글은 말에 가까울수록 좋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말을 무리 없이 그대로 잘 옮겨 놓은 글이 좋은 글이다. 말과 글이 서로 분명히 다르기는 하다. 말은 그 본질이 음성인데, 이 음성에는 높낮이와 고저가 있어 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생각을 나타낼 수 있고, 또 말하는 때의 상황과 말하는 이의 몸짓에 따른 도움을 받기도 한다. 글은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글은 말을 100% 담아내지는 못하는 한계가 있다. 말과 글은 이런 면에서 퍽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역시 글은 우리의 생활과 가까울수록 좋다. 어려운 단어나 딱딱한 개념어, 외래어와 외국어 따위는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쓰고 있는 쉬운 우리말을 찾아 쓰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물론 관념어와 공식어를 꼭 써야 할 곳과 때가 있기는 있다. 피할 수 없으면 쓰되, 그렇지 않을 때에는 되도록 쉬운 말을 즐겨 써야 좋다. 그래야 글쓴이도 수월하게 글을 쓸 수 있고, 읽는 이도 편안하게 글을 읽으면서 그 내용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떤 내용이든 어디에서 발표되는 것이든, 글은 되도록 많은 사람이 쉽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바람직하다. 뜻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전문용어나 외국어 따위 굳이 낯설고 어려운 말을 헤프게 쓸 까닭은 없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글이 너무 많다. 어려운 한자말을 너무 즐겨 써서 어렵고, 영어 투로 글을 쓰니 이것은 또 어색하여 어렵다. 학술논문이나 문학작품이 특히 그렇고, 각종 공문서도 마찬가지다. 아래에 있는 예문은 문학평론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이름이 나 있는 어느 문학잡지에 실려 있다. 그런데 누가 읽으라는 것인지, 쓸데없이 어려운 말로 뒤틀어져 있다. 문학을 전공하는 이나 글쓴이 자신과 같은 문학평론가가 아니면, 대한민국 땅에서 이 글을 읽고 별 어려움 없이 그 뜻을 헤아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쪽에서는 아쉽고 한쪽에서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쉽게 고쳐 본다.


예문1)

이 글을 단지 고은의 시와 나아가 민중―민족문학에 대한 비판의 맥락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이다. 크게 보면 황종연의 문제제기가 지닌 생산적 차원은 무엇보다 그 동안 많은 한국문학이 자발적으로 망각하고 있었던 보편가치에 대한 문학의 관계맺음을 근원에서 다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논의는 지금 한국문학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로서도 중요한 참조지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21세기 한국문학의 미래를 성찰하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굳이 2000년대 한국문학의 현재를 진단하는 이 글을 문학과 정치의 만남을 기대하는 황종연의 제안을 주목하면서 시작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김영찬, ‘2000년대, 한국문학을 위한 비판적 단상’, 창작과 비평)


고친 글)

그렇기 때문에 단지 고은의 시와 나아가 민중, 민족문학을 비판하는 맥락에서만 이 글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크게 보면 황종연의 문제제기는 그 동안 많은 한국문인이 스스로 잊고 있었던, 보편가치와 문학이 관계를 맺는 것을 근원에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여기에 그 생산적 가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논의는 지금 한국문학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 되어 중요한 참조지점을 알려 준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21세기 한국문학의 미래를 성찰하는 문제와 마땅히 이어져 있다. 2000년대 한국문학의 현재를 살피는 이 글을 굳이 문학과 정치의 만남을 기대하는 황종연의 제안을 주목하면서 시작하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이러한 글 버릇, 문체는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쓰는 공식문서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될 수 있으면 어렵게 쓴다. 왕과 양반이 민중을 지배하던 중세부터 일본강점기 때를 거쳐 군사독재시대까지 이어진, 국민하면, 그저 다스리는 대상으로 여기고 만 권위주의 세력이 말과 글에서 먼저 국민을 찍어 누르려고 이렇게 글을 어렵게 쓰는 듯하다.

앞에서 이미 예롤 든 글을 다시 보기로 들어 고쳐본다.


예문 2)

대행지역 쓰레기 봉투(50L)

- 생활계폐기물 -

1.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전용 봉투에, 재활용품은 품목별로 분리 배출하여 주십시오.

2. 재활용품 및 음식물쓰레기를 이 봉투에 혼합하여 배출할 시 2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합니다.

3.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할 시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됩니다.

4. 이 봉투는 성북구 (주)태안환경에서 청소하는 지역에서만 사용하여야 합니다.


고친 글)

대행지역 쓰레기 봉투(50L)

- 생활 쓰레기 -

1. 음식물 쓰레기는 음식물 전용 봉투에, 재활용품은 품목대로 따로 나누어 버려 주세요.

2. 재활용품이나 음식물쓰레기를 이 봉투에 섞어서 내놓으면 2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매깁니다.

3.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매깁니다.

4. 이 봉투는 성북구 (주)태안환경에서 청소하는 지역에서만 써야합니다.


아래 글에는 쓸데없이 어려운 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일본말 문장이 눈에 띤다. 쉬운 우리말을 써서 고쳐본다.


예문)

일본 측의 각성이 중요하다. 우익세력은 물론 일부 각료들까지도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미화하는 등의 망언으로 한일관계를 훼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우선 그런 일이 재발하지 말아야 한다.


고친 글)

일본이 깨닫고 뉘우치는 것이 중요하다. 우익세력은 물론 몇몇 각료까지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한 것을 미화하는 망언으로 한일관계를 해치는 일이 퍽 많다. 먼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지금까지 문법에 맞게 짧게 쉬운 문장으로 글을 쓰자는 말을 했다. 거듭 말하지만 문체는 나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다. 그런데 이 개성이 그냥 생기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글쓰기를 하면서 자기 글을 갈고 닦은 뒤에 생긴다. 참다운 나의 문체가 생기기 전에 우선 이 세 가지 사항을 익혀야 하겠다. 이에 익숙해지면 그때 자기의 뜻과 취향에 따라 문법을 깰 수도 있다.다 알다시피 시나 소설 같은 예술문은 이러한 파격을 일부러 좇는다. 또 어떤 효과를 좇아 글을 길게 써 볼 수도 있을 것이다.


④ 외국말 버릇에서 벗어나기

얼마 전(2008년 7월 29일) 텔레비전에서 ‘상상플러스’라는 오락방송을 본 적이 있다. 거기에 ‘우리말 더하기’라는 시간이 있었다. 일정한 외국어나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어 보는데 설문 조사를 거쳐 확정한 우리말 표현 몇 개를 숨겨 두고 연예인들이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날 문제에 오른 외래어는 ‘skinship’이다. 이 말은 원래 영어가 아니고 일본식 영어라고 한다. 우리가 이미 우리말처럼 아무 스스럼없이 그리고 불편 없이 ‘스킨십’이라고 쓰는 낱말이다.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이에 대한 우리말을 공모한 결과, 1번 살뽀뽀, 2번 사랑손길, 3번 피부교감, 4번 닿음정, 5번 다솜(사랑이라는 뜻)짓이 나왔다 한다.


이 방송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 이 방송이 참 유익하고 의미가 있다고 여겼고 둘째 우리가 외국어를 얼마나 분별없이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점을 되새기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외국어 특히 영어에 완전하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아니 그 전에 우리 역사가 걸어온 길을 더듬어 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말은 외국말에 치여 왔다. 중국말과 글이 아주 오랫동안 우리말과 글을 지배했고,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일본말이 우리말을 억눌렀는가 하면, 해방 뒤에는 영어가 우리 삶 전반에 스며들어 왔다. 요새는 몇몇 표현이나 그에 따른 낱말 차원이 아니라, 아예 영어를 통째로 가져다 쓰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고급관리나 상업 연예인들 사이에 이런 버릇이 도드라지는데 아래에 있는 노래는 이러한 사정이 만들어낸 문화상품이라고 할 수 있다.


so hot

wonder girls

왜 자꾸 쳐다보니 왜왜왜

내가 그렇게 예쁘니 이이

아무리 그렇다고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좀 쑥스럽잖니 이이

내가 지나갈 때 마다 아아

고갤 돌리는 남자들 을을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이

I'm so hot 난 너무 예뻐요

I'm so fine 난 너무 매력 있어

I'm so cool 난 너무 멋져

I’m so so so hot hot

언제나 나를 향한 눈길들이 이

항상 따라오는 이 남자들이 이

익숙해 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왜 아직 부담스러운지

조용히 살고 싶은데 에에

다른 여자애들처럼 엄엄

엄마는 왜 날 이렇게 낳아놔서

내 삶을 피곤하게 하는지

I'm so hot 난 너무 예뻐요

I'm so fine 난 너무 매력 있어

I'm so cool 난 너무 멋져

I’m so so so hot hot

Everybody’s Watching me Cause I'm hot hot

Everybody’s Wanting me Cause I'm hot hot

언제나 어디서나 날 따라 다니는

이 스포트 라이트

어딜 가나 쫓아오지

식당 길거리 카페 나이트

도대체 얼마나 나일 들어야

이놈의 인기는 사그러들지 원

섹시한 내 눈은 고소영

아름다운 내 다리는 좀 하지 원

어쩌면 좋아

모두 나를 좋아 하는것 같애 오노~

Please leave me alone all the boys be loving me

girls be hating me they will never stop

Cause they know I’m so hot hot


요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노랫말이다. 인기에 따라 차례를 매기면 이 노래는 으뜸이다. 잘 모르는 이가 보면 미국 노래를 우리말로 풀어쓴 것으로 잘못 알 수도 있다. 가사에서 거의 반이 영어로 되어 있고 가수 이름조차 ‘원더걸스’이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우리 시대가 세계화 시대라는 사실을 또렷하게 실감해야 하지 않을까. 외국에 노래를 수출해서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뜻이 이 노랫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헤아리지 않으면 달리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 사람이 부르고 한국 사람이 듣는 노래에 이토록 영어가 많이 끼어든 까닭을.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이 나라 어디에서나 요즘 매일 이 노래를 부르고 듣고 있으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치 못할 일이 있지도 않은데 한국 사람이 미국말을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노래뿐만이 아니다. 이미 오랜 전부터 이른바 가요 시장을 휩쓰는 노래는 이렇듯 미국말에 푹 빠져 있다. 또 노랫말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일상에서 쓰는 우리말과 글에 미국말과 글이 퍽 많이 섞여 있다.


사람은 지니고 있는 정신에 따라 살고 정신은 말과 글로써 나타낸다. 그래서 말과 글은 그 민족의 정신이요 삶이다. 그 무엇보다 앞서 말이 그 민족을 있게 하고 그 민족의 삶을 끌어간다. 그러므로 남의 말과 글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말과 글을 먼저 살려야 한다. 우리 정신과 문화를 우리말로써 아름답고 훌륭하게 가꾸고 또렷이 세운 뒤에 남의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미국말이 우리말을 점점 먹어들어 간다. 그것도 절실하게 필요해서 그렇지 않다. 이러한 꼴이 몇 년 더 이어진다면 미국말은 외국어가 아니라 공용어가 될 판이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지만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고유한 우리말만을 가지고 우리 마음대로 살았던 적은 없다. 아주 오랫동안 중국 글자를 써왔다. 우리가 쓰는 낱말의 70% 이상이 한자로 되어 있다. 이것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지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쓰다 보니 이제 우리말이 된 것이다. 산(山)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뫼’이지만, 일상에서 ‘뫼’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제 산은 우리말이 된 것이다.


그 다음 36년 동안 일본말과 글을 억지로 쓰다보니 그 영향을 크게 받아, 우리말에는 일본말이 남기고 간 찌꺼기 흔적이 많다. 일본인이 물러간 지 오래 되었지만, 그 버릇은 지금도 여기저기 또렷하다. 그리고 해방이 된 뒤에는 미국말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중국말과 일본말은 강요된 것이었지만,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이제는 세계화라는 개념에 따라 우리 스스로 미국말을 따라잡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고유한 우리말을 옆으로 제쳐 두고 남의 나라말을 가지고 이리저리 얽어서 쓰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말을 생각하고 우리말을 가려 써야 하겠다. 그래야 우리 한국 사람이 우리 정신과 문화가 지녀야 할 틀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 이미 우리말이 된 것은 우리말로 받아들이되, 필요한 외국말은 조심하여 받아들이고, 꼭 쓰지 않아도 되는 외국말은 버려야 하겠다.

이제 마치 얼룩처럼 우리말에 끼어있는 외국말의 흔적을 몇 개 찾아보자.


ㄱ. 중국말

우리가 쓰는 낱말은 한자에서 온 것이 참 많다. 이 말들을 다 남의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필요 없이 어려운 한자를 쓰지 말아야겠다. 우리가 즐겨 쓰는 우리말이 있으면 한자말 말고 그 말을 쓰도록 하자.

다음은 거의 습관이 되어버린 구문들이다.


① 본(本) - 우리말 : 이

② 및(及) - 우리말 : 그리고, 또, 와(과)

③ 내지(乃至) - 우리말 : 또는

④ ‘-ㄴ 바(所), -에 대(對)하여, -로 인(因)하여'


ㄴ. 일본말버릇

① 관형격(속격) 조사 ‘-의’ 남용

② 어색한 피동문 : ~되어진 예) 이야기되어진 것이다.

③ ‘~에(게) 있어서(의)’와 ‘~으로서의’, ‘~에 의하여’ 남용

④ 방불케 하다 - 彷佛하다

⑤ 새빨간 거짓말, 흥분의 도가니, 애교가 넘치다, 종지부를 찍다, 마각을 드러내다, 기라성(綺羅星) 같다

⑥ 보다 높이, 뿐만 아니라

⑦ ~에 다름 아니다. 주목에 값하다. 있을 수 있다. ~는/(었)던 것이다

⑧ ~적(的)


ㄷ. 영어말버릇

① 인칭대명사 ‘그녀’ ‘그’ - 우리말에서는 ‘그녀’와 ‘그’라는 대명사를 쓰지 않는다.

② 관형절 사용

③ 피동, 사동 구문

④ 가지다(have), 수량사 위치 : 다섯 개의 사과→사과 다섯 알

⑤ 대과거 ‘-왔/었었-’ 사용

⑥ 문장부호 ‘- -’(숨김표)

⑦ 좋은 아침, ~하지 않으면 안 되다,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불행을 가져오다, 몸을 눕히다, 관계하는 한해서는

⑧ 나의 할머니, 나의 집 → 우리 할머니, 우리 집


3. 감상문과 논증문 쓰기


감상문이고 논증문이고 쓰는 법이 따로 있지는 않다. 법을 따지는 일은 그다지 의미가 깊거나 어떤 또렷한 효과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같은 감상문이라고 할지라도 글 한 편마다 지니고 있는 꼴과 내용이 다 다르다. 그러므로 모범 하나를 세워 그에 따라 글을 쓸 수는 없다. 형식면에서 감상문보다 제약이 좀더 많은 논증문에서도 사정은 이와 마찬가지다. 따라서 쓰기 법칙을 세우려 시시콜콜 따지지 않으려 한다. 이제까지 이야기했던 사항들을 다시 새기면서 다만 감상문과 논설문을 쓸 때 좀더 주의해야 할 점을 몇 가지 덧붙인다.


① 감상문

먼저 무엇을 쓸 것인가, 주제를 또렷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억지가 아니라 자기가 쓰고 싶어서 쓰는 글이라면 주제는 이미 또렷이 서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생활에서 우러나온 절실한 이야기로써 주제를 삼아야 하며 꼭 하고 싶은 이야기이가 내용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주제란 오랫동안 깊게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민하고 삭힌 결과 고인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잠깐 사이에 반짝하고 떠오른 생각이나 남에게 들어 안 이야기를 가지고 글을 쓰면 안 된다. 비록 반짝 생각이라도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의 실마리를 잡고 알게 모르게 계속 생각해온 주제이어야 한다.


머릿속에서 주제를 바로 세웠으면 그 다음 글의 구조와 구성을 가늠한다. 글의 구조야 글의 종류에 따라 가면 되고, 구성은 좀더 구체성 있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설계도를 자세하게 짠다. 느긋하게 전체에서 글의 대강을 훑어보면서 생각을 좀더 가다듬고 내용을 좀더 충실하게 한다.


감상문의 소재와 주제가 되는 것은 거의 한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사건이나 특별한 정황에 따른 느낌을 쓰는 글이 있고 자연이나 인생 자체를 놓고 보는 글이 있을 수 있다. 사건을 끼고 도는 글을 쓸 때는 사건이나 상황 서술을 효과 있게 해야 한다. 느낌은 곧 사건에서 나오는 것이니, 사건을 잘 전해야 그에 따른 감정과 정서도 독자가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사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이야기 전달에 가장 적절한 부분을 잘 선택하여서 효과 있게 글을 구성해야 한다. 그리고 설명이 필요한 때에는 설명을, 묘사가 필요한 곳에서는 묘사기법을 알맞게 쓸 수 있어야 한다.


책이나 여러 가지 공연·시사문제·자연 풍경 들을 보고 감상문을 쓸 때가 있다. 독후감은 여러 감상문 가운데 우리에게 퍽 익숙하다. 우선 감상대상에 나타나는 내용을 요약 제시한다. 이때 물론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대상을 보게 된 까닭과 과정 따위를 덧붙여 이야기를 시작해도 좋다. 그 다음 감상을 이야기하는데 가벼운 평을 덧붙여도 좋고 내 삶에 비추어 그 내용을 새롭게 해석한 뒤 내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내용을 덧붙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제 예문을 들어서 쓰는 요령을 얻는 데 길잡이로 삼을까 한다. 먼저 일정 대상을 보고 자기 느낌을 쓰는 감상문을 보자


전 세계에 메아리친 우리의 독립정신

- <윤봉길>을 읽고


언제인가 우리 선생님께서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일까 하고 물으셨다. 그때 우리는 호랑이, 도깨비, 괴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독재나 암흑이라고도 했다. 원자 폭탄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무식이라고 하시며, 공부를 하는 것은 그러한 무식의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 때는 솔직히 말해서 그 뜻을 잘 몰랐고, 다만 우리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말씀이라는 것만 알았다.


그런데 윤봉길 의사에 관한 전기를 읽으면서 나는 우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에 짓밟히게 된 원인이 무식에 있다고 믿고, 자신도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시골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아가는 무식한 농민들을 가르치기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야학회를 열고 농민 독본을 지어서 가르치는 한편, 월진회와 수암 체육회 등을 만들어 농촌 계몽과 자주 독립 정신 고취에 노력했다. 윤봉길 의사의 이러한 노력은 곧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난 뒤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나이 23세 때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계속 하던 그는 1932년 4월 29일, 침략자 일본인들을 향하여 폭탄을 던지고, 그들에게 잡혀서 25살의 젊은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그러나 일본인들을 향하여 던진 폭탄은 우리 민족 분노의 폭발이었고, 세계에 메아리친 자주 독립의 함성이었다.


우리는 독립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배우고 힘을 길러야 한다. 무식하기 때문에 남의 침략을 당하는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어른이 쓴 글이나 어린이가 쓴 글이나 사실 그 뿌리와 원형은 같다. 그래서 어린이의 글을 예문으로 보았다. 오히려 어린이가 쓴 글에서 글의 참모습을 더 잘 볼 수도 있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민족 분노의 폭발이라고 풀이한 것과 더욱 열심히 배우고 힘을 길러야겠다는 다짐 들이 퍽 판에 박아낸 듯 하다. 글쓴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적어야 무슨 글이든 그 글이 사는데 이 글을 쓴 어린이는 그 점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린이가 쓴 글이라고 생각해 두자. 그리고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보고 깨우친 것을 새로운 힘 차원에서 또렷하게 밝히고 있으니 독후감으로서 지녀야 할 뼈대를 제대로 갖춘 셈이다.


감상문은 다른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보고 느낀 점을 진실하게 쓰면 된다. 무엇을 보았는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꾸밈없이 말하고 느낀 점을 자기 삶과 이어 풀이하면 된다. 특별하게 생각해야 할 형식과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글쓴이 자신이, 참말 무엇을 느꼈느냐 아니냐 하는 것뿐이다.


예문 2)

레바논에서 돌아오지 않는 편지

오연수/소설가


그는 콜라만 마셨고 닭튀김은 손도 안 댔다. 한국에서는 가축을 죽이기 전에 이슬람 의식을 치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떤 육류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욱 경건해진 듯했다. 2003년 '한국 이라크 반전평화팀'의 현지 파트너였던 그는 무척 어렵게 비자를 받아 우리나라에 잠시 다니러 왔다. "바그다드 시민들은 요즘 행복해. 열 시간에 한 시간씩만 들어오던 전기가 요즘은 일곱 시간마다 들어오거든. 그 한 시간도 십 분마다 이삼분씩 끊기지만. 수돗물이 언제 나올지는 기약이 없지. 미국이 3년 동안 이라크에서 한 일이 이거야.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고? 살아야 하니까."


그의 친척 몇 명은 팔루자에서 죽었고, 처갓집 식구 한명은 아부 그레이브 근처에서 미군 탱크에 받쳐 죽었고, 친구 둘은 바그다드의 알 후리야라는 그의 동네에서 괴한들의 총에 맞아 죽었고, 또 한명은 시내 한복판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나는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한국인 친구들을 만나러 와줘서 고맙고, 또 너무나 미안했다. 평생 술 한 방울 마셔본 적 없다는 그에게, 내가 취해도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너그럽게 웃으면서, 자기가 한국까지 와서 술을 안 마신다고 미쳤다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반대로 부탁했다. 창밖에서 조용히 비가 내렸다.


"왜냐고? 그들에게는 주기적으로 전쟁이 필요해. 발작 같은 거지. 우리는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면 아, 또 때가 됐나보다 해." 역시 무척 어렵게 우리나라에 잠시 와 있는 한 팔레스타인 시인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을 침공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별로 경건하지 않은 그와 나는 포장마차에서 많이 마시고 술김에 대판 싸우기까지 했다. 나는 폭우 속으로 뛰쳐나와 집에 와버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술이 깨고 나니 물론 그에게 미안했고, 자기 혼자 내버려두라고 홍알거리며 간이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뒷모습을 떠올리고는 슬퍼졌다. 그는 80년대 후반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 당시 십대였던 이른바 ‘장미의 세대’다. 수두룩하게 죽어나간 친구들을 위해 한사람마다 한편씩 연작시를 쓰고 있는데, 아마 평생 써야 할 거라고 했다. 지금도 계속 친구와 친지들이 감옥과 길바닥에서 죽어가고 있으므로.


나는 올 초에 '인사미술공간'이 마련한 '시제일치'라는 영화제에서 레바논 영화를 몇 편 보았다. 그중 다큐멘터리〈내전〉(모함마드 수에이드 감독)은 전쟁의 후유증에 관한 것이었다. 한 사나이가 전쟁이 다시 터질 거라는 강박증에 걸려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고 담배만 피워대더니, 전쟁 때 폭격당해 버려져 있는 건물에 들어가 계단을 하염없이 걸어올라 가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 주변 인물들은 그에 관한 추억을 회고하다가도 결국은 자신이 겪은 전쟁 이야기를 한다. 모든 이야기가 전쟁으로 수렴되고, 죽은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두가 전쟁의 후유증을 앓는다.


우리가 '레바논 내전'이라고 알고 있는 1982년 전쟁은 실은 이스라엘, 미국이 개입하고 이웃 아랍국들이 연루된 국제전이었다. 이스라엘에서 특별훈련을 받고 온 기독교 민병대가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쳐들어가 사흘간 1~3천명(언제나 무더기로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숫자는 부정확하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죽이기도 했다. 이제 다시 전쟁이 터졌으니 영화 속 죽은 남자가 사로잡혔던, 전쟁이 다시 터질 거라는 강박관념은 병이 아니라 현실인식이었던 셈이다.


많은 정세 분석가들이 이번 레바논 전쟁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판짜기'의 예정된 수순일 뿐이라고 말한다.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그리고 레바논. 그러나 판짜기란 자기가 판을 짜거나 구경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새로 짜여지는 그 판 속에 들어 있는 당사자들로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요동치는 재앙이 아닐 수 없다. 팔레스타인 도시들은 어디나, 어느 거리나 반쯤 무너져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말할 것도 없고, 이라크도 2003년 공식 종전 이후 점점 더 망가져간다고 한다. 이제 베이루트마저 가자지구, 카불, 바그다드와 흡사하게 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성공한다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이란의 테헤란도 그렇게 될 것이다. 판짜기의 실제 내용은 파괴와 학살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가장 강한 사람들이 미국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인 듯싶다. 자기들이 그런 짓을 해도 아랍인들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내가 아는 그 사람들은 비록 살아남았으며 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지언정, 너무도 힘들고 고통스럽게 보였다.


이제 장마가 끝나면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우리에게 시간은 이렇게 착착 흘러간다. 그러나 며칠 전 바그다드로 돌아간 내 친구는 어떨까. 그가 말하기를 바그다드에서는 매순간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그 모든 순간마다 공포와 분노의 영원한 지속을 느낄까봐 겁난다. 똑바로 앉아 감자튀김만 집어먹던 그를 생각하면, 순간 미쳐버릴 것 같다. 석 달 뒤면 제 나라로 돌아갈 팔레스타인 시인은 연작시를 쓰는 틈틈이 우산 없이 장맛비를 맞으며 걸어 다녔다고 했다. 한국의 정상적인 삶의 리듬에 젖어 있다가 팔레스타인에 돌아가 거기서 삶보다 더 흔한 죽음에 적응하지 못할까봐, 자기를 훈련시키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훈련한들 석 달 뒤에 적응이 될까?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 적응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또 다른 이라크 친구는 내게 불길한 이메일을 보냈다. 자기는 이번 전쟁이 지상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아마겟돈 전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기를 빌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세상이 끝나버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고 했다. 70년대 말에 태어난 그의 첫 기억은 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던 폭탄이었다. 레바논 사태,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다시 레바논 전쟁, 그리고 60년 동안 희생양인 팔레스타인. 늘 전쟁 속에서 살아왔던 그로서는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려면 세상이 끝나야만 할 것 같지 않겠나. 나는 할말이 없었다. 세상이 존속하기 위해서 지구 어디선가 전쟁을 대가로 치러야만 한다면, 누구를 위한 세상이고 존속인가?


한국에 한번 왔다가서 종종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레바논 여성작가는, 얼마 전 내가 보낸 이메일에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하긴 컴퓨터를 켤 경황이 없을 것이다. 그도 베이루트를 떠나 피난을 갔을 텐데 어디로 갔을까? 내게 구경시켜주겠다던 그의 고향, 아름다운 남 레바논도 쑥대밭이 되었으니. 시리아 국경을 넘었을까? 시리아가 예정된 다음 판짜기 대상이라는데? 한두 달 뒤에도 그로부터 답장을 받지 못한다면, 나 또한 이 더러운 전쟁과 함께 세상이 중단되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창비주간논평, 2006.08.01)


이 글은 중동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참상을 간접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뒷면에 어린 실상을 날카롭게 그리고 투명하게 드러내며 그 내막조차 또렷하게 진단한다. 그러나 글의 초점은 친구가 겪는 전쟁과 고통에 맞추고 있다. 이방인 친구들이 겪는 공포와 슬픔이 극한에 이르렀음을 말하면서 글쓴이는 깊은 공감을 가지고 그들의 처지를 깊이 염려한다.


‘똑바로 앉아 감자튀김만 집어먹던 그를 생각하면 순간 미쳐버릴 것 같다'는 대목에서 글쓴이의 감정이 지나치게 넘쳐나는 느낌이 있지만 이글이 감상문이니 그다지 크게 흠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글쓴이가 지니고 있는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니 글을 읽는 재미와 보람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일정 대상에 따른 느낌을 벗어나 글쓴이의 인간성 자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외국 친구를 아주 따듯한 눈길로 바라본다. 친구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긴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을 살상하고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전쟁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다.


다음은 우리나라 수필 문학에서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는 피천득의 ‘인연’을 보자.


인연

피천득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힘 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온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꼬(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꼬는 ‘스위트피’를 까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주었다. ‘스위트피’는 아사꼬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聖心)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꼬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꼬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꼬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 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꼬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꼬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을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 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아사꼬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도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삼 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꼬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꼬 신발장은 어디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꼬와 나는 밤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꼬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을 들러 미우라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서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이 독립이 돼서 무엇보다도 잘 됐다고 치하를 하였다. 아사꼬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꼬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꼬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꼬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꼬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꼬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꼬는 나와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늘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이 글을 사랑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까. 사랑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요즘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감각에 비추어 보자면 많이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야기 내용이 아주 맑고 잔잔하다. 사랑의 고전이라고 하면 또 어떨까. 어쨌든 사랑이야기이기는 하다. 글쓴이인 피천득 선생님이 마음에 늘 담아두었던 여자이야기이니까. 30년 세월을 담아내고 있다. 퍽 드물게 긴 세월이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글쓴이는 한 여인을 바라보면서 그대그때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분량은 2,500자에 그친다.


2,500이라는 글자 수는 30년을 담아내기에는 짧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무리가 없다. 아사꼬와 글쓴이는 약 10년을 사이에 두고 세 번 만난다. 이 세 번 만남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글쓴이는 이 모두를 비슷한 분량으로써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30년 동안 겪은 이야기를 펼치는 데 있어 글쓴이가 선택한 매듭은 세 개인데 이 매듭 세 개를 같은 분량으로 감당하고 있기에 전체에서 균형과 안정감을 이루어내고 있다. 이러한 균형감에 묻혀 사연을 좇다보면 이천오백 글자가 30년 시간을 감당하기에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현재→과거 30년→현재라는 시간 구성은 회상 구조에 따른 것으로서 앞뒤에 이야기 축을 마련하여 이러한 효과가 있게 미덕이다.


또 아사꼬와 아사고를 바라보는 마음을 묘사하고 설명하면서도 30년을 넉넉히 가늠하는 묘사력을 보이고 있다. 자세히, 구구절절하게 마음을 늘어놓기보다는 아사꼬를 바라보며 얻은 깊은 인상을 비유법으로써 묘사하고 있다. 30년에 걸친 아사고의 모습은 ‘스위트피→목련→(시든) 백합’으로 이어진다. ‘구두→우산→뾰족집’은 보조 비유어라고 할까. 이 낱말들에는 아사고의 모습이 새겨져 있어 그녀의 몸짓과 더불어 그녀의 모습을 아주 효과 있게 비추어낸다. 더불어 아사꼬를 깊이 사랑하는 글쓴이의 마음이 그대로 고여 있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비유가 지닌 힘을 잘 쓰고 있다. 비유에 따른 절제의 미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글쓴이의 마음은 여기저기에 직접 드러나기 있기도 한다. ‘스위트피는 아사꼬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라든지 ‘나는 얼굴이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꼬 생각을 하였다’에서 아사꼬를 그리워 하는 글쓴이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십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에서는 아쉬움과 회한이 가득한 글쓴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장에서도 글쓴이의 마음은 절제의 미학을 잃지 않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이 느낌, 이 마음이 바로 이 글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이 감상문이라고 볼 때 우리가 이 글에서 얻는 기쁨은 바로 이 아름다운 절제로 나타난 글쓴이의 마음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에서 아직도 아사꼬를 그리워하지만 그 마음을 끝내 안으로 숨기는 글쓴이의 자세는 절제의 미학을 완성하고 있다. 그리움이 어려운 만남으로 열매를 맺거나 때로 격정이 솟는 사랑의 몸짓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은 애틋한 사랑을 겪고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하는 글쓴이의 마음에 어리는 물결은 성숙한 삶의 경지요 모습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되뇌는 말은 그의 마음이 결코 열정이 다한 상태가 아니라 아직 사랑이 촉촉이 젖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러한 성숙한 생의 경지는 절제의 아름다움과 함께 사랑의 울타리를 넘어 이 작품에 어린 수준 높은 성과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감상문은 책이면 책·공연물·명승지 따위 일정 대상과 우리를 이끌어 가는 일상 더 나아가 인생 전체를 소재와 주제로 한다. 따라서 감상문을 읽을 때 우리는 대상에 속한 객관 성질이나 정보를 얻거나 함께 살펴야 할 의견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글쓴이의 정서와 성품 그리고 인생 자체를 바라본다.


② 논증문


주제를 세우고 개요를 짜는 것은 논증문과 설명문이 다르지 않다. 다만 논증문은 주장하고 남을 설득하는 목적이 또렷한 글이므로 논증문을 쓸 때에는 논리성에 다른 구성을 생각해야 한다.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설득력을 갖추지 않으면 글을 쓰는 목적을 이룰 수 없다.


논증문에서 특히 중요한 요소는 논거이다. 논거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다. 따라서 이 근거가 약하고 애매하면 안 된다. 근거는 논증문의 생명이므로 글을 쓰기 전에 이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실증을 바탕으로 주장을 펼치는 논증문에서는 근거자료가 더욱 정확해야 한다. 또 자신이 직접 겪은 일과 조사, 관찰한 사항, 위인의 말과 행동, 옛날이야기, 격언과 금언 따위를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데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선 주장하는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고 자신의 주장을 효과 있게 뒷받침하여 잘 살려낼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다음 예문을 읽고 논증문을 쓰는 데에 필요한 기본 요소를 새겨 보자.


성장주의에 갇힌 저출산대책, 패러다임을 바꿔라

황정미(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사회의 급격한 출산율 하락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5년 현재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08로 세계 최저수준인데, 쉽게 말해 출산이 가능한 가임연령(15~49세)에 있는 여성 한명이 평생 출산하는 평균 자녀수가 1.08명이란 의미다. 합계출산율이 인구규모를 유지하는 수준인 2.1 이하로 떨어진 것은 1983년경인 데 반해 저출산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2000년 이후였다. 인구가 늘어나면 모두 가난해진다는 개발독재 시절의 캠페인을 지나치게 학습한 나머지 눈앞에서 출산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미처 대응할 생각조차 못한 채 십수 년이 흘렀던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정부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설치와 이른바 '새로마지플랜2010'(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의 수립, 시민사회단체와 노동조합 및 기업이 참여하는 저출산·고령화사회협약 체결 등 나름대로 분주한 일정을 밟아왔다. 이제 저출산 문제는 시대적인 과제로 인식되고 있지만 과거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미래를 잘못 진단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여전히 성장제일주의의 렌즈를 통해 저출산을 바라보는 것이다. 대다수 정부보고서는 저출산의 사회적 효과를 신생아 감소, 생산연령 인구의 감소와 부양비 증가라는 '양적' 차원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저출산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다. 정책 목표는 '적게 낳자'에서 '많이 낳자'로 역전되었지만 좀더 깊이 들어가 보면 출산과 양육을 보는 근본 시각은 과거 개발 국가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고출산이 성장을 저해한다고 보았다면 이제는 저출산이 성장을 위협한다고 하니 결국 성장제일주의 담론으로 수렴하는 셈이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러나 저출산 그 자체를 ‘경제현상’으로만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산업발전을 지원하고 건설경기를 부양하듯 출산을 늘릴 수는 없다. 결혼과 출산은 반드시 해야 한다거나 결혼적령기가 따로 있다는 인식은 이미 상당히 약화되었다. 결혼연령의 상승과 비혼(非婚) 인구의 증가, 이혼과 재혼의 증가 등은 한국사회에도 친밀성의 구조변동이 진행 중임을 보여준다. 개인과 가족, 여성과 남성, 정서적 친밀성과 경제적 부양의 관계는 위계적이고 전통적인 가족규범의 경계를 넘어서서 이른바 탈산업사회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단지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 출산을 늘려야 한다는 발상은 매우 시대착오적이다.


두 번째는 국가정책으로 직접 출산을 줄이거나 늘릴 수 있다고 믿는 과도한 국가개입주의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1960년대 말부터 보건소와 가족계획협회는 국제기구에서 제공하는 피임기구와 피임약을 전국적으로 보급하고자 시술대상 여성을 모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나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기구나 약물의 보급이 이후 여성 건강에 어떤 부작용을 미쳤는지 제대로 조사를 실시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산아제한정책의 어두운 이면, 여성의 몸에 대한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개입의 부작용과 문제점을 겸허하고 솔직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출산장려정책에도 경계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이른바 출산 축하금 지급, 출산관련 의료비의 보험적용 확대, 불임부부의 시험관아기 시술 지원 등을 하고 있다. 건강한 출산을 위한 지원 자체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출산의 증대만을 목표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이른바 출산장려정책은 분만을 전후한 수개월의 짧은 기간에 혜택을 집중시키는데, 그 이유는 건강한 신생아를 얻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신생아 수가 늘어나면 저출산·고령화가 초래할 사회문제가 해결되는가? 출산 이후에는 더 큰 문제, 곧 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치며 자립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저출산 대응책을 단지 결혼과 출산의 테두리에서만 찾는 것은 매우 편협한 시각이며 다른 중요한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가령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사회적 무관심으로 방치되거나 해외로 입양되는 문제, 통일 이후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될 북한 아동의 열악한 성장환경, 나날이 늘어나는 이주노동자 문제 등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제 출산은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며 각자가 행복 추구나 가치관에 따라 결정할 문제가 되었다. 쌍춘년, 속칭 황금돼지해를 맞이하여 결혼과 출산이 상당히 늘어난 현상을 보면 무리한 정책개입보다는 행운을 원하는 자발적인 시민의 선택이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저출산이 심각하다고 하면서도 출산의 주체인 모성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편향적이며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저출산 대책은 일차적으로 생물학적 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모성사망률이 높았던 근대화 시기에는 생물학적 모성에 개입하는 모자보건 정책이 중심이 되었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보건의료 써비스가 제도화된 오늘날 어머니의 역할은 '낳는 것'뿐 아니라 '잘 키우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에 대비하는 가장 좋은 방안은 '많이 낳는 사회'가 아니라 '잘 키우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잘 키우는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단지 낳는 존재로만 보는 편협한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2005년 인구조사 결과 전국의 가구주 중 21.9%는 여성이었는데, 다섯 집 중 한 집은 여성가장이 이끌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15세 이상 여성의 절반 정도가 이미 경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웬만한 중산층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이제 취직을 못하면 결혼하기 어렵다는 말이 여성에게도 해당된다고 한다.


요컨대 출산의 고통과 헌신적 양육으로 상징되는 단일한 모성상은 이제 복잡한 시대의 다양한 모성상, 즉 가족부양을 책임지는 어머니, 일하는 어머니,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어머니, 개성과 성공을 추구하는 어머니 등으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획일적인 출산장려가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머니들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를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 모두 양육과 보살핌을 분담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성, 특히 어머니를 고용하려면 기업의 입장에서 추가비용이 든다고 흔히 말한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직장보육시설 운영, 근무시간 단축 등에는 어느 정도 돈이 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비용을 사회가 함께 분담하지 않고는 '잘 키우는 사회'로 나아갈 방법이 없다. OECD 국가의 예를 보더라도 여성이 경제활동을 많이 하는 국가일수록 출산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저출산으로 고민하는 한국, 일본,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공통점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50% 수준 또는 그 이하에 머물러 있다는 것과 더불어 가족주의가 중시되고 부계중심의 가족규범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초저출산 문제를 단지 경제성장의 위험요소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잘 살아보기 위해 지금까지 우리가 고집했던 방식, 예를 들면 배타적 민족주의, 이기적 가족주의, 경제성장우선주의, 남성중심의 가부장주의 등이 고착되면 될수록 더 큰 위기가 닥쳐오리라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성장제일주의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재생산과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아닌가를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차례다. (창비주간논평, 2007.5.29)


저출산·고령화는 현재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공동체 유지를 근본에서 위협하고 있는 매우 심각한 난제이다. 글쓴이는 이 문제의 중심 요소를 들추면서 그에 얽힌 원인과 의미를 제 나름대로 진단하고 뒤이어 적절한 근거를 대면서 문제 해결을 좇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먼저 문단을 따라가면서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펼쳐내고 있는지 살펴 정리해 보았다.


1. 문단 1→ 현상 1: 저출산 문제는 이미 오래 전에 그 실체가 심각하게 드러났으나 개발 독재 시절에 굳어진 인식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2. 문단 2→ 현상 2: 이제 저출산 문제는 시대 과제가 되었으나 문제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1, 2문단은 저출산 문제를 소개하고 우리가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알린다. 그래서 이 두 문단이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를 내놓은 서론이 된다.


3. 문단 3·4→ 진단 1 : 경제에 미치는 영향 차원에서 저출산을 생각하는 자세는 가족관과 결혼관이 다양해진 오늘날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4. 문단5→ 진단 2 : 과거 여성의 몸을 일방에서 억압했던 국가개입주의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다.

3·4·5문단은 본론이 펼쳐지는 첫 마당에서, 우리 정책과 그 정책이 바탕으로 깔고 있는 여러 생각이 어떻게 잘못되었나를 밝히고 있다. 현상을 진단한 부분으로서 다음에 나올 주장의 바탕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5. 문단 6→ 주장 1 : 출산증대만을 목표로 삼는 저출산 정책은 적절치 못하다.


6. 문단 7→ 근거 2 : 저출산 대책을 결혼과 출산에서만 찾는 자세는 매우 편협하며 이밖에 육아와 교육 따위에도 관심을 지녀야 한다.


7. 문단 8→근거 3 : 이제 출산은 개인의 행복 추구에 다른 문제가 되었다. 6문단에 비로소 글쓴이의 주장이 나왔다. 출산 위주의 대책은 옳지 못하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7·8문단에 그 근거가 실려 있는데 출산 뒤에 생기는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사실과 옛날과 다른 오늘날의 가치관을 근거로 내놓았다. 결국 출산 자체를 강요하다시피 하지 말고 자발적인 선택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글쓴이는 주장하고 있다.


8. 문단 9 →현상3+주장2: 모성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생물성에만 머물러 있지만 이제 모성의 역할은 단지 출산에 그치지 않고 올바른 양육으로 옮아갔으니 저출산 문제에 가장 잘 대응하는 정책은 양육 조건이 훌륭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9. 문단 10→근거4: 오늘날 우리 시대는 여성이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이 되었다.


10. 문단 11→주장3: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제 나름대로 양육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사회가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11. 12문단→근거 4: 이러한 추세에 발을 맞춰 여성 정책을 펴지 못한다면, 저출산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

9~12문단에서는 주장과 근거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 여성의 사회 진출은 이미 대세가 되었으니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하고, 여성이 자녀 양육을 잘 할 수 있도록 사회 차원에서 도와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저출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서는 이제까지 펼친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말하며 글쓴이의 주장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글은 저출산에 따른 고령화 문제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우선 저출산에 얽힌 정부와 우리의 인식을 되돌아보면서 이 사회현상을 진단하고 있다. 이 진단은 전체에서 보아 앞으로 펼칠 주장의 일차 근거가 된다. 뒤이어 글쓴이는 출산증대 위주 정책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데 여성의 사회 지위와 역할이 변했다는 전제에서 진단과 다른 직접 이유를 대면서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볼 때 이 글은 저출산이라는 문제를 외면이 아니라 사회 인식 변화라는 내면에서 깊이 있게 다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먼저 현상에 대한 진단을 글의 바탕으로 내놓고 그 다음 문제에 대한 주장과 그를 뒷받침할 근거를 또렷하게 대고 있다. 논증문이 지녀야 할 요소를 두루 갖춘 셈이다. 그래서 이 글은 논증문의 한 전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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