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벌판 - 문체

by 이순직

1. 문체란


국어사전을 보면 문체는 ‘지은이의 개성이나 사상이 나타나 있는 문장의 특색’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한자를 그대로 새기면서 좀 더 쉽게 풀어내어 문체는 글의 몸이라고 하면 어떨까?


뼈와 살을 비롯하여 피·털·손톱·발톱이 있기에 우리 몸은 머리와 몸통·팔·다리를 이룬다. 몸이 서고 걷고 달리고 앉고 일어서고 눕고 하면서 우리 사람은 살아간다. 그런데 이러한 몸은 제각각 전체에서 보는 이에게 어떤 인상을 풍긴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참 건강해 보인다든지, 몸이 구부정하다든지 또는 멋있다든지, 요즘 하는 말로 섹시하다든지. 잘 빠졌다는 시쳇말도 있다. 이 말들은 모두 몸 전체에 나타나 있는 인상을 평가한 것이다.


뼈와 살·피·털·손톱이 우리 몸을 만들듯이 음절과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여럿 모여 단락을 이룬다. 다시 단락이 여럿 모여 글 한 편을 이룬다. 그리고 우리 몸이 그렇듯 우리가 읽고 쓰는 글도 각각 제 나름대로 전체에서 어떤 인상을 지니고 있다. 이 전체 인상이 문체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나서 사랑하다 죽는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사는 한 큰 틀에서 볼 때 생각과 행동이 전체에서 엇비슷한 부분이 많다. 일반성과 상식에 따라 행동하고 그에 따른 생활 감각과 습관을 다들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개인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행동은 모두 다르다. 이것을 일러 개성이라고 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있지만 얼굴 생김새와 지문이 다 다르다. 한 사람도 다른 이와 똑같은 이는 없다. 생김새와 지문뿐이 아니다. 감정과 사상도 다 다르다.


말과 글도 이와 같다. 우리 모두 한국어로 말을 하고 한글로 글을 쓴다. 같은 도구를 쓰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개성이 드러난다. 글쓴이가 쓰고자 하는 내용, 그의 취향, 글을 쓰는 버릇에 따라 그리고 좀 더 구체성 있게 지적하자면 문장을 길게 쓰느냐 짧게 쓰느냐, 어떤 단어를 즐겨 쓰느냐 따위에 따라 느낌이 다 다르게 나타난다.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한다. 다음 문장을 보자.


1.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문장은 여러 가지 형태로 다시 쓸 수 있다.


1-1. 당신이 지난여름에 하신 일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1-2. 네가 지난여름 한(꾸민, 저지른) 일을 나는 다 안다.

1-3. 지난여름 네놈이 한 짓을 나는 알고 있다.

1-4. 나는 알고 있다, 지난여름 네가 한 일을.


전하고자 하는 뜻만 볼 때 다섯 문장은 모두 같다. 그러나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이 다 다르고 그에 따라 전체 인상은 다 다르다. 물론 인상을 뜻의 일부라고 보면 이 문장들이 지니고 있는 뜻은 다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어쨌든 전체 인상은 다른 것이다. 밤하늘에 별만큼이나 사람도 많고 글도 많다. 그러나 그 느낌이 다 다르다. 이렇게 다른 느낌이 바로 문체다.


2. 문체는 시대마다 개인마다 다르다


시대와 공간이 가장 큰 틀에서 문체를 결정한다. 이 사실을 생각해 두자. 쉽게 얘기하면 옛날 글과 오늘 글이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 근대 이전 그러니까 1920년대까지만 해도 말과 글은 퍽 달랐다.


홍색이 거룩하여 붉은 기운이 하늘을 뛰놀더니 이랑이 소리를 높이 하여 나를 불러 저기 물밑을 보라 외치거늘 급히 눈을 들어 보니 물밑 홍운을 헤치고 큰 실오리 같은 줄이 붉기 더욱 기이하며 기운이 진홍 같은 것이 차차 나 손바닥 너비 같은 것이 그믐밤에 보는 슻불빛 같더라 차차 나오더니 그 위로 작은 회오리밤 같은 것이 붉기 호박 구슬 같고 맑기 통랑(通郞)하기는 호박보다 더 곱더라.

(의유당, 동명일기)


조선 후기에 나온 수필이다. 글에 운율이 배어 있고 ‘-더니, -더라’체를 쓰고 있다. 요즘 우리가 쓰지 않는 방식이다. 이런 글을 읽으면 예스럽다는 느낌을 누구나 갖게 된다. 예스러운 문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독립신문 창간사다.

우리신문이 한문은 아니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거슨 샹하귀천이 다보게 홈이라 또 국문을 이러케 구절을 떼여 쓴즉 아모라도 이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속에 있는 말을 자세이 알어 보게 함이라 각국에셔는 사람들이 남녀 무론하고 본국 국문을 몬저 배화 능통한 후에야 외국 글을 비오는 법인대 죠션셔는 죠선 국문은 아니 배오드래도 한문만 공부하는 까닭에 국문을 잘아는 사람이 드물미라 죠선 국문하고 한문하고 비교하여 보면 죠선 국문이 한문보다 나흔거시 무어신고하니 첫째난 배호기가 쉬흔이 됴흔 글이요 둘째난 이글이 죠선 글이니 죠선 인민 들이 알아서 백새을 한문대신 국문으로 써야 샹하 귀천이 모도보고 알아보기가 쉬흘터이라 한문만 늘써 버릇하고 국문은 폐한 까닭에 국문만쓴 글을 죠선 인민이 도로혀 잘 아러보지못하고 한문을 잘알아보니 그게 엇지 한심치 아니하리요.


지금 글에 비교해 보면 철자법과 띄어쓰기 체계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홈이라, 드물미라, 무엇 인고하니, 한심치 아니하리오’ 따위 구절은 오늘날 잘 쓰지 않는 말투다. 이는 한문 번역투이면서 말하듯이 쓰는 글이 아니라 글을 따라서 쓰는 글이다. 이러한 문어체를 오늘날 말투로 고치면 ‘-하다, 드물다, 무엇이냐 하면, 한심하지 않을까’가 된다. 앞글과 마찬가지로 말을 따라 쓴 글이 아니며, 그래서인지 호흡이 길고 격식과 품위를 따져서 쓴 글 같다.

다음 글은 1921년 창간된 동아일보의 창간사의 일부이다.

蒼天에 太陽이 빛나고 大地에 淸風이 불도다. 山靜水流하며 草木昌戊하며 百花爛發하며 鳶飛魚躍하니 萬物 사이에 生命과 光榮이 充滿하도다. 東方 亞細亞 무궁화동산에 二千萬朝鮮民族은 一大光明을 見하도다.


우리말이 아니라 한자가 주인이 되어 있는 글이다. 아직도 운문이 배이 있고 어미 ‘~도다’는 지금에 느낄 때 예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근대 이전에는 생활 현장에서 입으로 쓰는 말과 글이 퍽 떨어져 있었다. 이른바 문어체다. 그러나 근대 이후 말과 글은 그 거리를 퍽 좁혔고, 지금 우리가 읽고 쓰는 글은 우리가 평소 하는 말과 퍽 가깝다. 언문일치체요 구어체다. 그렇다고 말과 글이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았다. 전에 비하여 가까울 뿐 말과 글을 최대한 붙여 쓴 글이 가끔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조금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일부에는 아직도 그 버릇이 남아 있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해 물으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신약성경 마가복음 4장 10~13절)


이 글은 앞에 예로 나온 글과 문체가 다르지 않다. 문어체이고 운율이 배어 있다. 성경이 처음 우리에게 나타난 때가 구한말이다 보니 그 당시의 표기법에 따라 번역하였기에 이렇다. 설교와 암송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고 성인의 권위를 설명하는 글이다 보니 옛 습관이 그대로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진 듯하다. 이 글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문장으로 고쳐 본다.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해 묻자,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였다. 이는 그들이 보지만 알지 못하며 듣지만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 텐데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신약성경 마가복음 4장 10~13절)


그다음 큰 틀로는 역시 글의 종류를 생각해 볼만하다. 글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은 글을 쓰는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글의 인상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당연하다. 설명문은 글쓴이의 개인감정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으니, 문체의 방향은 건조하고 간결하기 쉽다. 논증문은 글쓴이의 주장과 감정이 어느 정도 끼어드느냐에 따라 또 다 인상이 다르다. 학술논문은 퍽 건조한 쪽이고 신문 사설이나 칼럼에 실리는 글, 가벼운 평론은 그에 비해 좀 더 부드럽고 유연하다.


그런가 하면 감상문은 개인 정서와 취향을 자유롭게 펼치는 것을 본질과 목적으로 하는 글이므로 형식면에서 설명문이나 논증문에 비해 그 기술 범위가 넓고 내용도 훨씬 부드럽고 유연하며 화려하다.


1. 벌레

낮에는 벌써 90 몇 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러나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傳令使)가 전등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老炎)에 단 심신을 식혀 주고 있다. 그들이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귀뚜라미들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의 전초역(前哨役)을 맡아 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들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가을이다」하는 기분을 부어 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靜謐)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말로,「인젠 확실한 가을이구나!」하는 영추송(迎秋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들치고 튀어나온다.


2. 달

전등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환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밖에 가득 차 흔든다.

「아?」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 아래 마당 가운데 섰다. 쳐다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은 수정덩이가 도시의 무수한 전등과 네온사인에게 나 보아란 듯이 달려 있다.


저 달이 생긴 뒤로 몇 사람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꼬집고 하였을까? 울기는 누구누구며 웃기는 누구누구?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하면서도 다정도 하다. 성결(聖潔)한, 숭고한, 존엄한 그의 위력에 나는 다시 내 자리에 쫓겨 들어왔다.…(하략)…

(이희승, 청추수제(淸秋數題))


이 글에는 가을을 느끼는 정서가 가득 담겨 있다. 글쓴이는 자기 정취를 한껏 살리고 실감을 자아내려고 노력한다. 형식도 약간 파격이다. 가을을 대표하는 사물을 대표 소재로 정하고 각각 번호를 주어 문단을 끌어가고 있다. 귀뚜라미는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이고 달은 ‘쳐다보아도 눈부시지 않은 수정덩이’다.


문체를 나누는 기준으로 제시된 것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건조, 화려, 간결, 만유, 강건, 우유체’ 따위다. 이 기준에 따라 이 글의 문체를 정하자면 가을에 젖은 마음이 촉촉하니 건조하지 않고 그렇게 요한한 수사법이 쓰이지는 않아 화려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가을이 안으로 차분히 가라앉고 자기 성찰이 시작되는 계절이라서 그런가, 문장의 호흡이 더러 길고 그 흐름이 부드럽다. 그래서 만연체이고 우유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 문체는 개인마다 다 다르다. 사실 글을 읽을 때 우리가 좀 더 즐겁게 여기는 것은 개인마다 다 다른 데서 살펴지는 문체다. 예를 들어 갑과 을 두 사람이 같은 주제로 동시에 논설문을 쓴다고 하자. 그 주장 내용과 뒷받침 문장을 세우는 방식은 물론 문체도 다르다. 글을 읽는 재미 가운데 이러한 새로운 개성을 만나는 기쁨이 자못 크다. 또 글을 쓰는 목적이 우선 내 뜻을 남에게 진실하고 효과 있게 전달하는 데 있기는 하다. 그런데 남하고 다른 나만의 문체를 가꾸고 이를 표현하려는 욕구 또한 글을 쓰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다음에 몇 개 예를 들어 본다.


산다는 것은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수수(授受) 속에서 살아간다. 말은 곧 사람이다. 말은 인품의 표현이요 수양의 나타남이다. 고운 말을 쓰는 사람은 마음이 고운 사람이다. 더러운 말을 쓰는 사람은 마음이 더러운 사람이다. 말은 마음의 표현이다. 마음은 말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말속에는 마음이 있다. 말은 마음의 집이다. (안병욱, ‘산다는 것은’)


아주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다. 의미 전달에 쓰이는 낱말 말고 개인의 느낌을 나타내는 낱말은 거의 없다. 글쓴이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알리는 데에만 온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런 문체를 흔히 건조체라고 하는데, 어찌 보면 강건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반면 아래와 같이 아주 길게 문장을 쓰는 경우도 있다.


며느리로 말한다 하여도 이에는 더할 수 없는 것이, 작달막한 키에 얼굴 하나는 반반하고, 마음씨 또한 더 착할 수가 없다 하지만, 원래 부모 없이 자란 데다가, 남의 집 애기업개나 부엌데기로만 커 시집이라고 온 터라, 길쌈을 한다거나, 품을 팔아 잔돈을 마련하여 살림 늘릴 시샘 한 톨 가진 바라고는 애초에 없고, 그저 서방이 벌어오는 대로 지져 먹고, 볶아 먹고, 이웃이나 형제간 좋자 하는 대로 푼푼이 나누어 먹을 줄만 알 뿐이며, 남편 끌어안고 잠자고 애 낳는 일 외에, 무슨 장사라든지 왼데 출입을 하여 본 바 없으므로, 그 해수 기침이 이 겨울 들어 더 심해진 시어머니의 장삿길을 무슨 재주 부려 막을 수는 없는 터였다.


이 글은 문장 12개를 이어 붙여 놓았다. 웬만해서는 보기 힘들게 호흡이 길다. 이렇게 길게 쓰는 것은 물론 전체 글의 주제 내용과 깊은 연관이 있어서일 테지만, 일단 보기에 매우 유연하고 느긋하다. 그런가 하면 늘어지면서 지루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며느리가 지닌 성품을 설명하는 데 이 문장의 목적이 있다면 목적을 다 이루기 전에 문장이 끝나지 않고 있으니 대상에 대한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체는 어떤 내용을 드러내려고 특별히 골라 쓰는 것이 아니다. 먼저 글쓴이가 고유하게 지닌 개성이 바탕과 원인이 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어떤 효과가 생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글에서 보듯이 남다르게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글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굳어진다.


땅 속 저 밑은 늘 음침하다.

고달픈 간드렛불, 맥없이 푸르끼하다. 밤과 낮이 달라서 낮엔 되우 흐릿하였다.

겉으론 황토 장벽으로 앞뒤 좌우가 콕 막힌 좁직한 구뎅이. 흡사히 무덤 속같이 귀중중하다. 싸늘한 침묵, 쿠더부레한 흙내와 징그러운 냉기만이 그 속에 자욱하다.

곡갱이는 뻔질 흙을 이르잡는다.. 암팡스레이 내리쪼며.


퍽 퍽 퍽-

이렇게 매떨어진 소리뿐. 그러나 간간 우수수 하고 벽이 헐린다.

영식이는 일손을 놓고 소맷자락을 끌어당기어 얼굴의 땀을 훑는다. 이놈의 줄이 언제나 잡힐는지 기가 찼다. 흙 한 줌을 집어 코밑에 바싹 들이대고 손가락으로 샅샅이 뒤져 본다. 완연히 버력은 좀 변한 듯싶다. 그러나 불통 버력이 아주 다 풀린 것도 아니었다. 말똥 버력이라야 금이 온다는데 왜 이리 안 나오는지.

(김유정, 금따는 콩밭)


이 글을 쓴 이는 그때 그 지방에서 쓰던 낱말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문장 또한 그때 그 말투에 따르고 있다. 그래서 그만큼 현장성이 짙고 실감이 두드러진다. 그때 그 시절이 그대로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인상은 그려내고자 하는 인물의 성격, 주제와 더불어 이 글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문체에 따른 효과일 것이다.


아래에 있는 시 작품은 향토성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 1930년대 북국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정서를 그려내려고 그때 쓰이던 말을 일부러 모아놓았다. 이러한 의장은 글쓴이가 지닌 개성 어린 문체를 이루어냈으며 아울러 시인의 작품세계를 완성한 요인이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 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 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 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멫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 ‘여우난골族’, 1936)


벌 : 매우 넓고 평평한 땅

고무 : 고모, 아버지의 누이

매감탕 : 엿을 고아낸 솥을 가셔낸 물. 혹은 메주를 쑤어낸 솥에 남아 있는 진한 갈색의 물.

토방돌 : 집채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오리치 : 평북지방의 토속적인 사냥용구로 동그란 갈고리 모양으로 된 야생오리를 잡는 도구.

안간 : 안방.

저녁술 : 저녁밥. 저녁숟갈.

숨굴막질 : 숨바꼭질.

아릇간 : 아랫방.

조아질 :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리며 해찰을 부리는 일. 평안도에서는 아이들의 공기놀이를 이렇게 부르기도 함.

쌈방이 : 주사위

바리깨돌림 : 주발 뚜껑을 돌리며 노는 아동들의 유희.

호박떼기 : 아이들의 놀이

제비손이구손이 : 다리를 마주끼고 손으로 다리를 차례로 세며, '한알 때 두알 때 상사네 네비 오드득 뽀드득 제비손이 구손이 종제비 빠땅' 이라 부르는 유희

화디 : 등경. 등경걸이. 나무나 놋쇠 같은 것으로 촛대 비슷하게 만든 등잔을 얹어 놓은 기구.

사기방등 : 흙으로 빚어서 구운 방에서 켜는 등.

홍게닭 : 새벽닭.

텅납새 : 처마의 안 쪽 지붕이 도리에 얹힌 부분.

동세 : 동서(同壻).

무이징게국 : 징거미(민물새우)에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인 국.


그런데 다음 글은 이 글들과 반대가 되는 문장으로 전혀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릿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 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흘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精神奔逸者)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半 ) -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領受)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그만둔 모양이오, 굿바이.

굿바이.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貪食)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위트와 패러독스와…….

그대 자신을 위조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輕便)하고 고매(高邁)하리라.

……하략…… (이상, ‘날개’)


이 글을 읽어보면 우선 문장의 뜻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피로할 때 정신이 은화처럼 맑아진다는 진술은 일종의 역설이다. 그것은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행위나 자신을 위조하는 행위가 차라리 경편하고 고매하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이러한 뒤바뀐 태도와 그에 따른 진술이 이 글이 지닌 특성이면서 바로 주제인데, 시대를 앞서가는 새로움과 난해성을 특징으로 하는 문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남들이 다 알고 있는 낱말과 어절을 골라 쓰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새롭게 낯선 말을 골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과는 어려운 한자와 그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웠을 외국어를 거침없이 사용하는 데서 온다. 특히 ‘-하오, -리라’ 체와 ‘굿바이’라는 단어를 새기면 일상과 상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또는 멀어지려는 듯한 글쓴이의 태도, 삶을 느낄 수 있다.


3. 문체는 어디서 생기나


그러면 실제 문체는 글의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 음절 하나가 써지기 시작하면 문체는 그 움이 튼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내는 각 음성은 제 나름대로 인상과 느낌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어머니(母)를 가리킬 데 쓰는 낱말이 우리나라에서는 [어머니]이고, 미국은 [mother], 독일은 [mutter]라고 한다. 3국 공통으로 음성 [m]이 들어 있다. 이 음성이 사람에게 뭔가 포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고 무조건 사랑을 주는 존재인 어머니를 가리킬 때 쓰인다는 것이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지만 ‘하하’와 ‘허허’가 다르고 ‘이리저리’와 ‘요리조리’ 또한 각각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각 음성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사실에 따라 일정 음성을 즐겨 써서 음절을 운용할 때 우리는 색다른 느낌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시작품에서 일정 음성을 즐겨 쓰면서 그를 바탕으로 운율을 이루어낸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오르는 아침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는곳

내 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시문학, 1930)


이 시에는 모음 ‘ㅗ’와 ‘ㅡ’(도드네, 도른도른), ‘ㅔ’(가슴엔 듯 또 핏줄엔 듯)와 자음 ‘ㅁ'(가슴, 마음)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퍽 깊은 곳에 흐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마음은 마치 가늘고 긴 물결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흐르고 있다. 같은 음절, 음성을 일부러 되풀이하여 이러한 효과를 얻고 있다. 그런데 같은 시 작품이지만 다음 시에서는 그 양상이 퍽 다르다.

올 어린이날만은

안사람과 아들놈 손목 잡고

어린이 대공원에라도 가야겠다며

은하수를 빨며 웃던 정형의

손목이 날아갔다

작업복을 입었다고

사장님 그라나다 승용차도

공장장님 로얄살롱도

부장님 스텔라도 태워주지 않아

한참 피를 흘린 후에

타이탄 짐칸에 앉아 병원을 갔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

기름먹은 장갑 속에서 꺼내어

36년 한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

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봉천동 산동네 정형 집을 찾아

서글한 눈매의 그의 아내와 초롱한 아들놈을 보며

차마 손만은 꺼내 주질 못하였다

하략

(박노해, 손무덤)


음성이 미치는 영향과 그에 따른 정취는 이 시에서 관심 밖에 놓여 있다. 시 작품이지만 산문을 적당히 잘라 늘어놓은 것이라 하여도 틀리지 않다. 이 시에서 시인은 객관성에 서서 다만 열악한 현실만을 보여 주려고 한다. 운율은 사실 시 작품뿐만 아니라 산문에서도 감정이 풍부하게 드러나거나 절정에 이를 때 가끔 쓰인다. 그러나 대개 운문에서 문체를 이루는 중요한 자질로 쓰이고 있다.


다음 어떤 낱말을 쓰느냐에 느낌이 많이 다를 수 있다. ‘마누라’와 ‘부인’, ‘여편네’ 그리고 ‘반려자’, 집(안) 사람 들은 모두 개념은 같지만 느낌이 다 다르다.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문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 그리고 ‘연모한다.’가 같은 개념을 나타내지만 다가오는 정감은 다 다르다.


그리고 이 낱말들을 이어 쓰는 형태소 즉 어미와 조사를 어떻게 쓰느냐가 또 다르다. 예를 들어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렇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 문장에서 ‘것’을 ‘게’로 하면 좀 더 구어체에 가까워지고 ‘그렇다’를 ‘그렇소. 그러하옵니다. 그래’ 따위로 끝맺으면 각각 다른 느낌을 주는 것으로 문장이 바뀐다.


우리말은 조사와 어미(연결어미, 종결어미 대부분 ‘다’ 체)의 형태가 참 여러 가지로 변한다. 그에 따라 느낌이 다 다르다. ‘푸르다’는 단어는 ‘푸르스름하다, 짙푸르다, 푸르팅팅하다, 시퍼렇다…’ 따위로 변할 수 있는데 그때마다 느낌이 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 문장을 보자.


하늘이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내 마음도 푸르고, 그대 얼굴도 푸르다.

이 문장을 역시 여러 가지 형태로 다시 쓸 수 있다.

하늘이 푸르니 바다도 푸르고, 내 마음이 푸르니 그대 얼굴도 푸르다.

하늘은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 내 마음은 푸르고 그대 얼굴도 푸르다.

하늘이 푸르러 바다가 푸르니 내 마음도 푸르고 그대 얼굴까지 푸르다.


조사와 어미를 달리 쓰면서 여러 문장으로 바뀌었으며 그에 따라 느낌이 다른 문장이 되었다.


또 문장을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다. 주어와 목적어의 순서를 바꾸거나 능동 문장을 피동문으로 바꿀 때 그리고 명사 문을 풀어쓸 때 각각 느낌이 다르다. 그러나 문장의 길이와 구조에 따라 가장 큰 변화가 있는 듯하다. 주어와 서술어를 하나씩만 거느리고 문장을 짧게 쓰는 경우가 있고 그와 달리 복문·중문·혼문 따위를 구사하면서 문장을 길게 가져갈 때가 있다. 문장이 길면 지루하고 늘어지는 느낌과 반대로 유장하고 한가로운 맛이 있기도 하다. 문장이 짧으면 늘어지지 않고 간결 또렷하다. 반면에 자주 뜻이 끊어져 신중하지 못하고 가벼운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잚은 문장을 좋아하는 듯하다. 예문을 하나 읽자.

낮 동안의 시끌벅적함이 사라진 고요한 밤에 가장 좋아하는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담아놓고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 처음 데이트를 하러 갔던 그날처럼 빗소리가 들리는 이 순간에도 ‘사랑 그리고 행복’이란 주제에 대해 글을 쓰면서, 지난날 받았던 선물들을 꺼내 볼 수 있는 저의 모습을 보며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은은한 행복에 젖어듭니다.

우선 이 글은 좀 긴 듯하다. 물론 읽는 이가 받아들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작의 이음새가 어색하고 지루하다는 느낌도 있다. 의미가 뒤엉킨 있기도 하다. 읽은 이가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문장을 나누어 고쳐 정리한다.


낮 동안의 시끌벅적함이 사라진 고요한 밤, 가장 좋아하는 머그잔에 커피를 가득 담아놓고 지금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있습니다. 과제를 제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처음 데이트를 하러 갔던 그날처럼 빗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사랑 그리고 행복’이란 주제로 글을 쓰면서, 지난날 받았던 선물들을 꺼내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모습을 보며 ‘난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은은한 행복에 젖어듭니다.


다음 굵게 쓴 부분을 고쳐본다. ‘낮 동안의 시끌벅적함이 사라진 고요한 밤’은 ‘시끌벅적했던 낮이 끝나고 고요한 밤이 왔다.’ 또는 ‘시끌벅적했던 낮이 끝나고 밤이 왔다. (밖은) 고요하다.’ 쯤으로 고칠 수 있다. 그렇게 고치고 나면 다른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또 ‘머그잔’과 ‘커피’를 도자기잔과 녹차쯤으로 바꾸면 어떨까. ‘과제를 제출’은 ‘숙제를 끝내려고’ 또는 ‘숙제를 내려고’로 고치고 ‘키보드’는 ‘지판’이 아니면 그냥 ‘글자’라고 하면. 데이트도 외래어인데 다른 적당한 말이 없을까 생각해 보다. ‘듭니다.’를 ‘-든다, -드네’로 바꾸면. 말할 것도 없이 느낌은 다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문장이 모여서 단락을 이루는데 이 단락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글 전체의 느낌이 다 다르다. 두괄식과 미괄식이 다르고 쌍괄식이 다르다. 단락의 길이·단락의 수와 종류·배치·접속어의 사용 여부와 사용 방식 따위를 눈여겨볼 만하다. 예문을 보면서 생각해보자.

서울은 재미난 도시다.

골동품 같은 집이 있다.

남의 담장에 기댔을망정 쓰레기통 옆에 놓였을망정 아담한 차림새로 구중궁궐 부럽잖게 꾸밀 대로 꾸미기도 했다.

추녀 끝에는 방울 같은 새를 앉히고 납작한 완자창도 달았다.

쌍희자(雙喜字)를 아로새긴 세렴(細簾)도 늘였다.

이 집에는 떡국도 팔고 진짜 냉면도 있다. 맛 좋은 개장국도 한다.

노동자 빈민은 물론 한다하는 신사도 출입을 한다.

이 집에는 계급의 구별도 없다.

땅바닥에는 검둥이란 놈이 행여 동족의 뼈다귀나 한 개 던져 줄까 하고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기다리고 있다.

이래 봬도 하루의 수입이 물경 만 원을 넘기는 것은 누워 떡 먹기다.

더구나 이 집의 재미난 것은 주추 대신에 도롱태를 네 귀에 단 것이다. 아무 때나 이동할 수 있다.

순경 나으리가 야단을 치는 날이면 지금 당장에라도 훨훨 몰아갈 수 있다.

주인 부처는 진종일 영감 그린 종이를 모으기에 눈코 뜰 새 없다가 도시의 소음이 황혼과 함께 스러진 뒤 참새 보금자리 같은 이 집 속에서 신화 같은 이야기를 도란거리다가 고요히 꿈나라로 들어가고 만다.

재민(災民)들은 이렇게 가지각색으로 살고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란 별의별 재주가 다 있어…….

- 김용준, '근원수필'(1948)에서


이 글은 일 문장 일 문단에 가깝게 문단을 쓰고 있다. 주제문+뒷받침 문장이라는 구조로써 문단을 이루는 논설문에 비해볼 때 이 글은 각 문단 사이에 인과나 논리에 다른 연결성이 없다. 그렇다고 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원래 감상문에서는 논리 연결성이 없다고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읽고 쓰기에 여유로워 보이며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에 폭넓은 여유와 정서가 깃들어 있다. 전체에서 글이 짧지만 오히려 느낌과 생각이 풍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다음 글은 글쓴이가 자기만이 지닌 의욕에 따라 문단을 새롭게 쓴 예이다.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여타의 세상일들이 그러하듯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설령 사라졌다 한들, 또 그것이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래저래, 죽은 사람도 있고 죽은 고시원도 있는 거겠지.

살다보면, 말이다.

이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 고시원의 밀실이 생각난 것은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뉴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를 보고 있는데 그냥 그 고시원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오른 것이다. 마치 쥐의 몸에서 자라난 귀처럼. 엉뚱하게, 쑥쑥.

(박민규, ‘갑을고시원체류기, 2004)


문장이 아니라 짧은 어귀를 서서 문단 하나를 이루고 있다. 마치 문단과 문단 사이에 깊은 골을 파놓은 듯하다. 우선 보기에 매우 새로운데 그 자체로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앞뒤 문맥에 따른 의미 내용을 이 어절 문단이 한데 모아 놓고 읽는 이는 이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4. 문체 가꾸기


글을 쓰면서 자기에게 맞는 문체를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하다. 글을 쓸 때 독자를 생각해야 하지만 처음에는 글쓴이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얘기를 진실하게 써야 한다. 물론 상황이 글쓴이를 어떤 방향으로 강하게 이끌 때도 있다. 그러나 문체는 개인이 지닌 개성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고 일부러 꿰어 맞춰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기주장이나 믿음, 느낌을 그대로 펼치면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 문체를 가꾸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좋은 문체를 생각하여 제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일 수 있으나 의식하기만 한다고 되지 않는다. 마치 법률을 만들어 세우듯 문체 하나를 택하여 못으로 박아두어 늘 쓰는 것도 아니다. 먼저 어떤 문체를 보고 마음에 들어 그것을 무조건 쫓는 버릇도 좋지 않다. 다만 몇 개 문체를 살펴서 자기에게 맞는 유형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체는 곧 개성이다. 그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특성이다. 글이 지니고 있는 내용과 결국 이어져 있지만, 먼저 그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문체를 바라보고 느끼는 일은 즐겁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자신이 좇을 만한 문체의 방향을 생각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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