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솜 Oct 22. 2024

온기를 담는 일이란,

햇살을 먹고 푸른 싹이 움트던 날의 기억.

  대학 동기들과 글쓰기 모임을 하고 있다. 서로 돌아가며 주제를 제시하는데, 한날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나만의 방법"으로 정해졌다. 이 친구들과는 벌써 약 15년 지기이지만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에 대해 공유한 적은 없었기에 고민이 됐다. 내가 지닌 삶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꺼내어 내뱉어도 괜찮을까.

  친구들을 믿지 못하거나 그들에게 말하기 싫어서 긴 세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세상이 두려워서였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안전하지 않다 느끼니 누구에게도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주변의 누군가에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이 아이들에게야 말로 가장 먼저 알리고 싶었다.


  고심 끝에 용기를 내어 당시 운영하던 블로그에 글을 게시했다. 처음으로 한껏 드러내 보는 나의 상처. 글 발행을 누르기 직전까지도 "올려도 될까."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한편으론 신뢰가 있었다. 이제 와서야 밝힐 수밖에 없는 나를 감싸 안아주리라는, 따스하고 포근한 온기에 대한.


https://blog.naver.com/leesom___/223447741642

  글을 읽은 친구들이 찢겨져 있던 상처에 약과 밴드를 조심스레 가져와 발라주기 시작했다. 그 안도감에 꽁꽁 둘러싼 갑옷을 벗은 나를 그제야 아이들에게 온연히 내보인 느낌이 들면서, 용기를 내기 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묵직한 마음이 담긴 애틋하고 소중한 위로들을 하나 둘 내 안에 담기 시작했다. 그중 한 친구는 내게 꼭 안아주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에 담긴 깊고 진한 진심이 물씬 느껴져 마음 한 켠에 그 말을 소중히 담아 두었었지.

  썼던 글이 어느덧 잘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오랜만에 글쓰기를 하던 친구들과 다 같이 모였다. 이 친구와도 반가운 인사를 하고 함께 식사 준비를 하는데 문득 잠시간 둘이 있을 때 친구가 "아, 맞다!" 하더니 내게 다가와 살풋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게 아닌가.

  사실 잊고 있었다. 마음속 담아뒀던 문장은 이미 그 자체로 내게 너무나 큰 위로와 지지가 되어 있었기에, 친구가 실제로 그 행동을 하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내게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하여 영문을 모르겠는 표정으로 친구를 보며 되물었다. "응?" 하고. 친구는 답했다. "전에 만날 때마다 안아 주기로 했었잖아."라고.


  그날엔 마침 생리 중이었는데, 내게 사실 월경이란 트라우마와 직결되어 있었다. 삶에서 운 없이 벌어졌던 범죄 중 가장 큰 사건이 생긴 날 불행히도 생리 중이었고, 이후로 없던 생리통이 점점 극심해져 갔었다. 하루에 약국약 한 통을 속에 다 들이부어도 매달의 기간은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앓았다. 참다못해 산부인과에 가서 주사를 맞으면 그나마 겨우 조금 견딜만해졌을 뿐. 해가 갈수록 심해져만 가는 증상에 혹여나 몸에 내가 모르는 큰 병이 있을까 싶어 병원에서 검진도 여러 번 받아봤지만 그때마다 자궁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원인 모를 통증에 매번 다가오는 월경이 두려웠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알게 된 생리통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신체화 증상'. 잊고 싶던 그날들을 몸은 선명히 기억했던 거다. 이 관계성을 알게 된 후 매달 돌아오는 월경은 내게 홀로 아픈 마음을 다독이는 시기였는데. 그런 날의 나를 친구가 안아주니, 삽시간에 눈물이 차 오르려 했다. 사실 이날은 다른 친구들의 경사를 축하하러 모인 날이기도 했어서 문득 지금은 울면 안 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참고 있다고 하니, 친구도 동일한 마음인지 "그래서 나도 지금 네 표정을 못 보겠어서 이러고 있잖아." 하며 애꿎은 아무것 없는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마음에 힘이 생긴다. 고맙고 또 고마운 친구. 네 덕에 살아갈 힘 한 줄기가 진흙 속에서 움틀거리며 피어올랐다. 햇살을 한가득 담은 너의 온기를 먹고 그 자리에 푸르른 잎 하나가 돋아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생의 의지를 소실한 날들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