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오늘도 살았습니다.
한 남성이 칼을 들고 쫓아온다. 짙게 깔린 어둠 속에서 나를 노려보는 그의 살기 어린 눈이 온 세상을 시뻘겋게 뒤덮는다.
꿈이다. 오랜 세월 망각해 왔던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불시에 삶으로 뚫고 들어왔다. 어스름한 새벽, 몸을 떨며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살아 있구나."
해리 현상.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게 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기억과 감정을 분리한다. 그렇게 살아왔었다. 다른 일로 내원했던 상담소에서 어느 날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을 때 왠지 모를 미시감을 느꼈다. 분명 나의 일인데, 타인의 관점에서 과거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경험했지만 겪지 않은 일 같았다.
시간이 지나 어머니가 상담 사실을 알게 된 후 이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충격적 이게도 엄마의 기억은 나와 달랐다. 톺아보니 그날 이후 몇 년간의 기억도 일부 소실되어 있는 듯했다. 연관된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하이얀 실뭉치들이 머릿속 이곳저곳을 어지러이 굴러다녔다. 화이트아웃되어 있었다.
재작년 즈음인가. 중학생 시절 교복을 우연히 찾았다. 시야에 옷이 들어오자마자 무의식 깊숙한 곳 묻혀 있던 감정이 벌컥 튀어 올랐다. 중학교 시절은 곧 내게 그 일을 연상시키는 시기였나 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차마 감당하기엔 버거운 감정이어서 그랬을까. 고통을 설핏 인지는 했지만, 정서적 아픔보단 신체적 증상으로 일상에 통증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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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몸의 증세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는 어린 시절의 마음을 제대로 직면했다고 여겼었는데. 꿈을 꾼 뒤 깨달았다. 실체적 공포는 내면 더 깊숙한 곳에 똬리를 뜬 채 언제 나타날지 고심하고 있었구나.
칠흑 속 감정들이 하나둘 어둠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하자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세포 하나하나를 바늘로 쑤시는 듯하다. 집 앞에서 그 일을 겪었었다. 여전히 십수 년째 같은 곳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그날 이후 단 하루도 집 밖이 무서워 외출을 꺼린 적이 없었다. 그토록 완벽히 그날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꿈을 꾼 이후로는, 늘 걷던 길 위에 칼을 품은 한 남성이 나를 노려보며 서 있다.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어졌다. 질식감이 단번에 나를 휘감는다. 공포감에 숨이 옥죄어 온다. 혹시 또 그런 일을 당할지도 몰라. 밖은 위험해. 나가면 안 돼. 다시 비슷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잠깐, 당장 내일 출근은 어쩌지? 이 상태로 일상생활은 가능할까? 나 앞으로 어떡하지? 병원에 입원이라도 해야 하나?
해리되어 있던 그날의 감정들이 둑이 터지듯 현재의 나에게 하염없이 쏟아져 내린다. 이제라도 감당해 달라는 울부짖음이 느껴진다. 이 모든 걸 견뎌낼 수 있을까. 이러다 정신이 온전치 않아 곧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해일처럼 밀려오는 검은 파도에 생을 지탱하던 힘을 잃어가던 순간. 옅은 숨을 몰아쉬며 허우적대던 나를 끌어올리는 누군가의 다정하고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있잖아. 그날 이후로 너는 같은 길을 아무 일 없이 수천번 수만 번 다녔지 않아?
너의 아픔을 알고 그곳을 수없이 같이 걸어준 사람도 있었지 않아?
생각보다 세상은 운 없이 그토록 위험하면서도 의외로 안전한 곳일지도 몰라.
그러니 너의 고통을 이해하지만, 조금쯤은 덜 두려워해도 괜찮단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지금의 나와,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란다."
밖으로 나갔다. 수없이 안온하게 존재해 온 날들 위에 서있는 현재의 나를, 수렁에 빠져있던 과거의 나에게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질식감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있다"는 안도의 감각을 좇기 시작했다.
그날의 나는 그 자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마음에 심었을지라도 지금의 나는 온전히 숨 쉬고 있다. 그날의 나는 집으로 걸어오다 그 사람의 발에 짓밟혀 넘어졌을지라도, 오늘의 나는 무수히 무탈히 걸어온 날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그날의 나는 그로부터 사력을 다해 도망쳤을지라도, 이제의 나는 누군가와 함께 손을 잡고 그 길을 무사히 지날 수 있다. 과거의 나는 삶의 일부이되 현재의 나와는 같지 않다. 그렇게 나는 너의 두려움보다 꽤 많이, 안전하다.
칠흑의 밤에도 빛은 비취 인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살아있다. 질식감의 끝에서 피어나는 생의 감각을 매만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