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섭식장애입니다. (9)

by 리솜

오래도록 분노의 화살이 내게 향해 있었다.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나 보다.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어야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그 일은 그가 순수해 보이는 나를 속이려 작정했기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이 사실을 명백히 인정하게 되기까지 십여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머리로 인지하는 것과 마음으로 수용되는 것 사이에 이토록 긴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이전엔 자책 안에 갇혀있었던 것 같다. 그를 믿지 말 걸. 더 단호히 거절해야 했는데. 바보같이, 왜 넘어가서는. 주변의 누군가가 혹여 네 탓이 아니라고 해도, 글자로서 머리에 인식될 뿐 마음 깊이 들어오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먼저 "그 어린애가 뭘 안다고."라며 맑고 순수하며 연약했던 스무 살 무렵의 소녀 앞에서, 항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새끼의 거기를 한 열 대는 걷어차 줘야 되는데.


그날 이후 그와 비슷해 보이는 체형이 시야에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그만큼은 아니지만 삽시간에 기분이 가라앉거나 슬퍼졌다.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은 익숙해져 가는 우울과 함께 관성적 무기력을 낳았다. 그런데. 이번에 분노가 한 번 제대로 올라온 뒤로는, 며칠 전 그와 비슷해 보이는 체격의 남성이 지나가는데 나도 모르게 속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 더러운 머릿속에서 어떻게 나를 구슬릴지 궁리하는 꼴이 떠올라서. 찌질한 사회 부적응자 새끼. 그딴 하찮은 놈 때문에 십수 년을 자책하며 보낸 나의 세월이. 아리다.


건강해지기 위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싶어졌다. 그에게 내어준 하루하루가 가여워서. 홀로 견디며 밤을 지새던 숱한 우울에게 미안해서. 작고 여리고 한없이 순한 너를 탓해온 시간이 안타까워서. 상한 몸이 안쓰러워서.


선물 같은 날들을 내어주고 싶다.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전하다고, 그러니 마음 놓고 먹고 자고 곁의 사람들과 함께 해사하게 웃으며 살라고. 스스로 묵묵히 감당해야만 한다고 여겨왔던 처절한 외로움에 손을 뻗어 한껏 꽉, 몸이 부서져라 안아주고 싶다.


더는 혼자가 아닐 거라고. 곁에서 손을 잡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