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6 목요일
태어나서 처음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았다.
염색을 하지 않아 희끗한 머리카락이 왠지 나이 들어 보였겠지…? 순간 당황스럽고 살짝 서운했지만,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이야? 하며… 애써 담담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올라오는 감정을 지긋이 눌렀다.
자리를 양보한 청년이 어색해 하지 않도록 두 말 않고 재빨리 청년이 비켜준 자리에 앉았다. 덕분에 논현에서 판교까지 여섯 구간을 아주 편안히 이동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경험이었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나?’
지하철 안에 서 있는 승객들을 보니 아주 젊어 보이는 사람들 빼곤 다 나랑 비슷해 보이는 중장년이 많았다. 물론 나처럼 머리가 희끗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염색을 하고 다니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 친구들이 나 때문에 자리에 편히 앉아 있지 못하겠군’ 생각하니 괜히 앞으로는 노약자석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아… 괴롭다 ㅜ)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
부모와 자식을 둘 다 돌봐야 하는 나이,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50대 중반 즈음에. 아직 하늘의 뜻을 알지도 못했는데
이제 나도 늙어가는구나 느낀 날.
인생의 반을 지나쳐 왔네… 하면서 뒤를 돌아보니,
치열했던 지난 시절의 분주함과 부모님 세대 또는 손위 세대들이 보기에 알맹이 없이 살아온 바보같은 내가 보인다. (알맹이란 언제든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재산을 말한다. 알맹이가 없다는 표현은 그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실제로 고정 수입 없이 지낸 최근 몇 년 동안의 힘겨운 마이너스 재정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 돈을 모으기 보다 쓰는데 더 관심이 많았던 탓에 요즘 들어 자식의 불안한 노후를 걱정하시는 집안 어르신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그런데, 알맹이 없이 살아온 누군가도 어쩌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희끗한 머리 때문에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염색은 하고 싶지 않다.
염색을 하더라도 희끗한 머리를 완전 까맣게 물들이고 싶진 않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렇게 까망에서 희끗함을 지나 하양이 천천히 스며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이 좋다고 느끼기 때문 아닐까?
세번째 소원.
천천히 스미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