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만난 인연
오늘 새벽 미사 어딘가에서 오늘 조우를 예상했던가. 그럴 리가. 별일 없었다. 예전처럼 변함없는 날이었다. 미사에 다녀오고 아침을 먹고 요가방에 다녀왔다. 갈까 말까의 수영장에서 라커룸에 막 들어섰을 때 울리는 카톡을 무시하려 했다. 무심히 들여다본다.
‘제니아, 자네 초임지 근무할 때 00을 기억하니?’
그럼이다. 물론. 남쪽 바닷가 교육청 첫 직장에서 그 언니는 우리 사무실에서 가장 당찬 여직원이었다. 할 말은 확실하게 하던 이였다. 언니가 학무국장에게 점 찍혀 그 아들과 결혼하면서 직장을 떠났고 나는 오래 그를 기억한다. 그 언니를 묻는 문자가 온 것이다. "물론, 꼭 한번은 보고 싶은 이야!" 바로 답이 온다. ‘경동 스타벅스에 있단다.’
"기다려주오. 오늘을 놓치면 또 40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만감이 교차한다. 그 당시 순진무구였던 나를 챙기며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조언하던 언니다.
이산가족의 만남이 이런 느낌일까. 난 80년대 초 이산가족 찾기 작업에 흥분했었다. 그리 오래 떨어져 있으면 느낌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젊은이들이 40년 만에 만나는 그 언니와의 조우에 뭐라고 말할까?
하기야 ‘조심해, 잘 알아봐’하는 녀석도 있었다.
극장을 개조한 찻집은 가파른 계단식이어서 내가 들어섰을 때 아스라이 멀리 높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느라 차를 하지 않았다고 하여 부지런히 주문하니 나는 신세대도 아니요. 그때의 열아홉도 아니어서 숨차다.
40년이 훌쩍 지난 언니는 서울 아줌마의 세련을 한껏 지니고 있다. 세월의 갭이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 옛날을 아낌없이 소환한다. 서로를 나눈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매개자가 있었고 그 는 그동안 내 얘기를 아주 많이 세세하게 해 놓은 상태.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아서 나인지 몰랐을 뿐.
고급 푼수.
‘자주 만나자’ ‘아니올시다’
오늘 하루 반갑다. 나의 어린 시절, 몹시 어렵고 어리바리하고 숙맥이었던 내 과거, 내 열아홉을 기억하는 이는 곤란하다. 난 적어도 그곳을 탈피하여 서울 사람이 되었고, 그곳에서 날 기억하던 사람들을 모두 부하직원으로 만들 만큼 열심히 살았다.
해가 차가운 빌딩들 사이로 숨어들 무렵, 우리는 헤어졌다. 난 흔쾌히 헤어진다. 그리고 내 기억 한편을 새로이 쓴다.
‘언니!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