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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어느 날에

by 제니아

'25. 1월의 어느 날에


그는 늘 '비움'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면서 내게 '넌 채움의 연속'이라는 말을 했었다.

채움과 비움은 반대의 의미만이 아니다. 채움에서 점차 비움으로 가는 게 아니라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다듬어간다.


퇴임하면서 한꺼번에 몽땅 비움일 것을 염려했다. 어느 날 일상이 사라지며 상실의 시간을 거치기도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베개에 머리를 대면 5분 안에 잠이 든다. 단 한 번도 불면의 증세는 없었다. 심지어 초저녁 쏟아지는 잠으로 인해 고충을 느낄 정도이다. 새벽 두 시를 넘어 세시. 전례 시간이라면 잠시 후면 일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서너 시간을 더 잘 수 있다. 하지만 네 시 다섯 시를 총총히 넘긴다. 내가 오늘 왜 이러나.


잠을 못 잔, 면접장에 나서는 나를 남편은 기꺼이 바래다준다. 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면접장은 10분 만에 끝이 났고 예감은 좋지 않았다. 개운하지 않은 기분.


사흘 후, 발표가 났고 '예비 합격생'이라고 했다. 처음엔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발 빠른 태세 전환으로 나를 다독였다. '예비하신 대로 하소서'는 내 기도 제목이었다. 뭔가 다른 뜻이 있겠지. 도와준 분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기분을 달래기 위해 다음 동작을 단행했다. 합격통지서를 받은 방송대 등록을 하고 바로 수강 신청을 했다.


그래도 알아는 보자는 심정으로 전화기를 돌렸다.

'예비 합격생은 몇 명인가요?' '두 명입니다.'

'예년에 미등록자는 몇이나 되나요?' '한 명 정도입니다.'

'그럼 제가 예비 몇 번인지는 알 수 있나요?'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2월 0일 메일 드립니다.'


'면접 후 희망 고문은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지만 마음을 비운다.


월급을 일정하게 받는 것도 아니요, 일주일에 삼일을 종일반으로 수업에 참여해야 하고, 왕복 세 시간을 마다하지 않은 건, 올 한해 고생하면 내년부터는 봉사단에 소속된다는 게 좋았다. 같이 하는 분들도 궁금했고 수혜자인 할머니들도 궁금했다. 식문화로서 행복한 삶을 나눈다는 단체에 진심으로 음식을 신성시하는 내가 끌렸던 부분이다.


작년 한 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그동안의 나 정도면 무난히 통과할 것이라는 자만은 나를 반성하게 했다. 요 며칠 말수가 줄었다. 대학 입학 보결생의 심정을 한껏 맛봤다.


50+센터에 지원서를 쓴다. 집 근처 복지관에 지원한다. '혹시 알아? 방송대 졸업반 때 실습처로 쓰일지도.'

무엇보다 신기한 건 면접 연습 때 '만일에 합격하지 못하면 차선으로 어떤 봉사를 하실 건가요?'를 힘껏 외웠었다. 그대로 되었다. 아마도.


또 이렇게 소중하고 진기한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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