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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강 Mar 22. 2023

넓은 도로

내비게이션은 필요 없어

수십 번도 더 다닌 길인데 항상 내비게이션을 쓴다. 가끔은 어떻게 30분 거리를 못 외우냐고 자책하기도 한다. 길눈이 어두워서인지, 항상 졸린 새벽에 운전을 해서인지. 집에 어떻게 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많다. 오후에 낮잠을 잔 덕인지 머리도 맑다. 설사 길을 잘못 들어 강변북로에서 자유로를 탄다고 해도 괜찮다. 기어를 P에서 D로 바꾼다. 비상등을 끈 다음 좌측 깜빡이를 켜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다. 자동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신호를 기다리면서 애플 카플레이가 연결되어 있는 휴대폰을 집어든다. 유튜브 뮤직을 켜 새벽의 모험에 어울리는 선곡을 한다. The Isely Brothers의 ‘Footsteps in the Dark’에 자연스레 손이 올라간다. 몇 시간 전 차에서 먹은 편의점 김밥 냄새가 아직 머무른다. 속이 울렁거린다. 초록색 신호로 바뀌고 엑셀러레이터를 살짝 밟는다. 차가 울렁인다.


내비게이션이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한다고 말을 해주지 않으니 어색하다. 내 기억이 맞는지 불안하지만 운전하기는 훨씬 수월하다. 머리의 용량이 남는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표지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로 나가면 합정역이구나.” 생각한다. 또 다른 시뮬레이션도 한다. 앞 차가 갑자기 멈출 경우 차선 변경을 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사이드 미러를 체크한다. 도로가 넓어졌다.


어릴 적 아버지의 프라이드 차가 생각났다. 운전석 뒤에 앉아서 마치 내가 차를 운전하는 양 허공에서 손을 휘젓곤 했다. 그날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프라이드의 가냘픈 와이퍼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그래도 도로 앞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잠시 멈췄다. 밖은 이미 어두웠다. 얇은 차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비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버지는 다시 차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도로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어디로 빠져야 하고,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막상 빠져야 하는 상황에는 빠지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는 들어갔다. 익숙한 길이 나오니 손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강변북로를 빠져나와 월드컵 경기장 앞을 지날 때는 평소가 내비가 알려주는 빠른 골목길이 아니라 큰길로 갔다. 도로가 다 똑같이 생겨서 어디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확실치 않았다.


빌라 건물을 위로 띄워서 만든 주차 공간에 주차했다. 무사히 도착해서 뿌듯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주차 자리가 한 자리밖에 없었다. 아침에 차를 빼줘야겠지. 조용한 차 안에서 아침 6시 알람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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