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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호 Feb 11. 2019

단정하고도, 단정해서 어쩐지 이상한 결합.

Deerhunter, [WHEAD?] (2019)

이것으로 여덟 번째 앨범이다. 호옹이.

 디어헌터(Deerhunter)의 지난 작품들과 한 데 놓고 비교해본다면 [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d?]는 꽤나 정갈하다. 편곡의 구성단위들은 차분하게 정돈돼있으며 질감은 때로 명징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기까지 하다. 소리를 깨끗하게 전달하는 바로크 팝 풍의 하프시코드와 또렷하게 선율을 내어놓는 건반, 쉽사리 뭉개지지 않는 브라스 섹션, 좀처럼 바스러지지 않고 제 질감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드럼 등 성분들 대부분이 단정하게 모습을 보이고 공간 곳곳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음장을 부옇게 덧칠하는 톤이나 너른 사운드스케이프, 드론, 노이즈, 여타 변칙과 같은 밴드 본연의 독특한 요소들도 존재하지만 그들의 행동 양상은 과격하지 않다. 게다가 개개의 성분들이 우열을 가리겠다며 엎치락뒤치락하거나 제 자리에서 이탈하거나 다른 성분을 압도하는 일도 없을뿐더러, 이따금씩 들어온 왜곡이 곡 전반을 완연히 뒤덮는다거나 기존의 성분들을 변모하게 하는 일 역시 없다. 애초에 러닝타임을 길지 않게 조절하고 진행 구조와 사운드 구성에 쉽사리 틈을 만들지 않으니 이렇다 할 소요가 발생할 여지 또한 많지 않다. 그렇기에 낯설게도 앨범에는 사운드의 작위적인 과잉이나 결핍 역시 발견되지 않는다.


 예컨대 분위기의 차분함은 [Halcyon Digest](2010)에도 내리 앉은 바 있다. 그곳에서 디어헌터는 예의 격절하는 기타와 드럼 비트를 제거하고는 긴 호흡 위에 여러 악기와 갖은 이펙트를 단속적으로 배치해 정적이고도 여유로운 장면들을 만들었다. 혹은 편곡의 단정함이라 할 것은 전작 [Fading Frontier](2015)에도 존재했다. 보다 팝적인 해당 작품을 만들면서는 로리 슈피겔(Laurie Spiegel)의 옛된 전자음악이나 알이엠(R.E.M.), 인엑시스(INXS)와 같은 1980년대 팝과 록의 멀끔한 전형들을 가까이 두며 편곡의 짜임새를 세밀하게 제어했다. 그럼에도 돌발을 일으키는 밴드 특유의 비선형성이 두 앨범의 러닝 타임 도처에서 고개를 들고 그 산물을 노출했으니, [Halcyon Digest]의 공간에서 발생한 큰 결핍은 되려 실험적인 요소의 적발을 위한 적확한 장이 됐고, [Fading Frontier]의 여유롭게 부유하는 사운드는 때로 주변에 여백을 만들며 적요한 긴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럼, 다시 [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d?]를 얘기해 보자. 개별 수록곡에는 앞선 음반과 같은, 사운드의 대담한 전복이나 명확한 전소가 존재하는가. 또는 형식을 격렬하게 뒤흔드는 대담한 장치가 존재하는가.  ‘Détournement’, ‘Tarnung’과 다소 전위적인 같은 트랙들마저도 큰 요동 없이 정갈하게 형질이 유지되는 이번 작품의 사운드는 이 물음에 쉽게 긍정할 수 없게 한다. 이는 이 앨범을 초창기의 음반들과는 물론, 유사한 성질을 가진 [Halcyon Digest], [Fading Frontier]과도 구별하게 하는 이유다.


 그래서 이 앨범은 팝적인 멜로디가 특히나 두드러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노이즈 록, 슈게이징, 앰비언트, 뮈지크 콩크레트, 크라우트록 등이 가진 텍스처 위주의 사운드 콜라주와 실험적인 장치들에 멜로디를 파묻는 기존의 행위가 현저히 줄어들다 보니, 밴드가 곧잘 써내는 간결하고도 명료한 선율은 여타 요소들에 방해를 받지 않고 수면 위로 올라온다. 예를 들어 ‘Death in Midsummer’의 하프시코드, ‘What Happens to People?’과 ‘Element’, OMD 풍 신스팝 인스트루멘탈 ‘Greenpoint Gothic’의 키보드, ‘Futurism’의 기타에 실린 긴밀한 모티프들은 제 모습을 지키며 어렵지 않게 곡 전반을 관통한다. 어떠한 변주나 독주가 지나간 다음에도 자신들이 본래 있던 위치로 금세 복귀하고, 앰비언트 사운드와 같은 성분들이 슬그머니 침투하는 가운데서도 특별한 소란 없이 자기 기능을 실현한다. 또한 선율의 선명성은 브래드포드 콕스(Bradford Cox)의 보컬 라인을 통해서도 상당 부분 발생한다. 음악의 전방에 있는 보컬은 ‘Element’나 ‘Plains’, ‘Futurism’에서처럼 모티프를 공유하며 멜로디에 힘을 보태거나, ‘What Happens to People?’에서처럼 키보드 라인이 끝날 때쯤 독립적인 제 선율을 탄력적으로 등장시켜 앞선 모티프를 강조하거나, ‘No One’s Sleeping’에서처럼 자신만의 캐치한 선율을 내보이는 식으로, 곡 내의 모든 선율을 도드라지게 한다.


 앨범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첫 지점은 여기 있다. 이 음반은 잘 꾸며진 사운드 표상의 집합체다. 구성 성분들을 가지런히 쌓아 올리는 편곡, 치밀하게 매만진 사운드 마감, 엄격하게 단속한 난해성, 찰랑거리는 팝 멜로디가 서로의 존재를 교환하며 작품을 만든다. 이목에 단번에 들어오는 사례들은 작품에 산재한다. 멜로디를 정갈하게 전하는 하프시코드, 절제된 앰비언트 사운드와 기타 솔로가 깔끔하게 모였다 흩어지는 ‘Death in Midsummer’, 평행하는 건반과 기타가 각각 유려한 선율을 연주하며 조화를 이루는 ‘What Happens to People?’, 그루비한 리듬 위에서 기타와 보컬을 통해 하강하는 선율을 반복하고 강조하는 ‘Futurism’, 펑크 리듬을 기반으로 한 ‘Plains’ 등을 이 맥락에서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겠다. 또 주 선율을 축으로 바로크 하프시코드와 스트링 풍의 키보드, 브래드포드 콕스의 보컬을 세밀하게 결속해놓은 ‘Element’도, 음장을 잠시 어지럽게 만드는 크레셴도 구간을 두 차례 내보이고도 선율의 발랄함을 무너뜨리지 않는 ‘No One’s Sleeping’과 보컬 라인에서의 탈락과 왜곡을 의도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후경의 멜로디와 사운드 편곡을 단단하게 유지하는 ‘Nocturne’도 선율과 배치, 형식의 단정함이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분명 이 작품은 사운드 자체로도 굉장히 좋은 팝 앨범이다.


Deerhunter - Death in Midsummer (Official Video)


 그러나 이 말끔하고 부드러운 사운드는 어떤 텍스트를 위한 현장인가. 브래드포드 콕스가 펼치는 가사를 다음과 같이 읽으려 한다. 긴 시간 동안 그의 텍스트는 공허와 허무로 적잖이 귀결돼왔다. 이 귀결을 거슬러 가보면 분노와 좌절을 비롯한 밖으로의 표출이 있고, 그 너머에는 자기혐오 혹은 자기 학대로 대표되는 안으로의 작용이 있으며, 그 이전에는 불안과 고독, 단절, 고통을 전유하는 유한한 삶에 대한 원초적인 인식이 있다. 그의 가사는 그래서 대체로 어둡다. 많은 화언으로 늪을 이룬 허무에 침잠할 때는 음습하고, 몇 안 되는 언어가 날리는 공허를 횡행할 때는 황량하다. 이러한 경향 혹은 색채는 이번 앨범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간 대개 1인칭의 정서를 주로 내보여온 브래드포드 콕스의 텍스트가 3인칭의 관찰을 다수 취한다는 점이 전과 차이를 보이나, 대상에 대한 인식을 언어로 변환하는 기조에는 큰 변이가 없다. 여전히 서늘하다. 정치적 맥락에 연결 가능할 대상을 만났을 때도 그의 인식은 전복을 꿈꾸는 혁명가로서의 포박이나 폭로를 시작하려는 고발자의 추적 등, 변혁적 실천으로 연결되는 사유와는 상이한 성질을 갖는다. 세계로부터 그가 습득한 장면들, 이를테면 삶을 향한 개인들의 무상한 투쟁이나 정신질환과 폭력, 환경오염, 일상에 범람하는 뉴스들은 그를 거쳐서 결국 공허와 허무로 환원된다. 1인칭 자화상의 부산물인 나르시시즘이 아주 미약하게 놓여있던 자리에는 이제 대상에 대한 연민이 동일한 질량으로 들어서지만, 이 역시 이렇다 할 낙관 따위로는 절대 변형되지 않는다. 이번 앨범의 노랫말도 거칠고 피폐한 서정들로 뒤엉킨다.


 긴장감을 씌운 사운드와 자멸하듯 서정을 소진하는 텍스트를 우리가 알고 있던 디어헌터 음악의 양 축이라 하겠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규칙이나 관계는 없더라도, 가사를 가진 음악에서 사운드와 텍스트가 대개 한 테마를 두고 재현, 모방, 동질화, 유비화, 투사 등의 작용을 통해 연대한다고 봤을 때, 디어헌터의 지난 음악 대부분은 어느 정도 정합적이라 생각한다. 이들 또한 통상의 음악처럼 사운드와 텍스트 사이에 일정한 정서가 존재함을 상정하게 하고 그 둘을 한 데 어울리게 했다. 왜곡과 균열을 커다랗게 쌓아 올린 과잉을 통해 너저분한 혼란을 연출하거나, 사운드와 사운드 사이에 넣은 아득한 고요로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한 평안을 조성해, 불안과 긴장이 엉긴 텍스트에 상응하는 음향을 그렸다. 초창기의 흐리멍덩하고 어수선한 노이즈 록, 슈게이징 사운드가 그랬고 [Monomania](2013)의 시끄러운 펑크 사운드가 그랬다. 여러 재료가 어지럽게 교차한 채로 넓고도 거친 음장을 횡행한 [Halcyon Digest]의 사운드 콜라주도 역시 텍스트와 맞물렸거니와, 단정하게 엮인 편곡을 갖추고서도 부옇게 떠다니던 탓에 긴장을 자아내고 이따금씩 이질적인 장치의 간섭을 받은 [Fading Frontier]의 스타일도 (그 전작들보다는 비교적 덜한 정도이지만) 음과 문자 간의 정합성을 확보했다.


 지난 작품들에서 일어난 사운드 상에서의 과잉과 결핍이 텍스트가 가진 일련의 테마와 정합적인 관계를 형성했다고 한다면, 심지어는 정합적이다 못 해 때로는 합목적적인 관계까지도 형성했다고 한다면, 이 앨범에는 그러한 관계의 작용이 현저히 드물다고 할 수 있겠다. 텍스트가 발휘하는 우울의 서정은 다분히 유효하나 팝 사운드는 더없이 정갈하고 명징하고 짜임새 있게 움직인다. 예처럼 노이즈가 과격하게 발산하거나 개러지 록의 기타 리프가 뛰어나오는 행위는 없다. 혹은 사운드에 아예 빈 공간만을 남겨두는 행위도 없다. 음악은 균형감 있게 정돈되고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제어된다. 설사 붕괴나 난입, 분광이 일어나더라도 과하게 번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갈무리된다. 그 안에서 찰랑이고 들썩이는 선율이 번식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텍스트와 사운드는 유리한다. 둘 사이에 생긴 거리로 인해, 트랙 개개의 텍스트를 함축한 표제어로부터 사운드를 확신하는 일이 어려워졌으며 사운드와 노랫말 사이의 개연성을 확인하는 일이 힘들어졌다. 상실과 단절로부터 긴장을 상상하고 삶의 매몰과 폭력으로 인한 불안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부드럽고도 유려한 음악성을 포기하지 않고 편곡의 결속을 쉬이 상실하지 않는 그 모습은 불균형적이다.


 이 지점에서 내세울 수 있는 가장 적확한 예는 ‘No One’s Sleeping’과 ‘What Happens to People?’일 테다.  ‘No One’s Sleeping’부터 본다. 이 곡의 제재는 2016년 조 콕스(Jo Cox)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 극우주의자 토마스 메어(Thomas Mair)에게 살해된 사건이다. 다시 말해 곡은 폭력이 조성한 공론장에서 함께 나온 사운드와 텍스트의 결합체일 텐데, 이 두 질료가 각각 취하고 있는 정조가 오묘하게 다르다. 사운드를 우선 얘기하자. 그리 느리지 않은 템포 위에서 더블링을 통해 질량을 확보한 드럼은 비트를 리드미컬하게 늘여놓는다. 곡의 시작점에서 하프시코드의 명징한 음색을 타고 흐르는 하강 선율, 브래드포드 콕스의 몽롱한 가창을 거친 보컬 멜로디는 모두 짤막하고 명료하고 캐치하다. 곡에서 두 차례, 브라스와 앰비언트가 함께 사운드 콜라주를 이루는 중간 열여섯 마디는 다소 실험적이나 난해성의 정도는 과하지 않다. 브라스 섹션의 선율은 규칙적으로 승강을 반복하고 세기는 점점 거세져 되려 활력적이다. 그야말로 경쾌함을 위한 장이다. 바로크 풍이 깃든 아트 팝 사운드는 가뿐하게 작동한다. 텍스트는 그러나, 사운드와는 다른 정조를 포섭하기로 한다. 공론장 한복판에서 가사는 공포와 경계를 인식하고 추출한다. 곧, 몇 안 되는 어휘를 준비해 느슨한 은유로 얽은 뒤 허공에 가볍게 뱉어낸다. ‘아무도 잠들지 않는다’는 표제어 외에는 반복되는 문구가 없으니 공중에 흘린 언어를 다시 주워담지도, 되살피지도 않는 셈이다. 새삼 이상하다. 사운드는 가볍게 율동하는데 가사는 끔찍하고 건조하게 메마른다. 두 기호가 긴밀히 부합하는가 묻는다면 좀처럼 긍정하기 어렵다. 상응점을 찾는 일도 버거워진 데다, 둘의 형상이 그저 같은 공간에 놓여있기만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What Happens to People?’로 넘어간다. 밴드는 이 곡을 ‘감정의 종말에 대한 애도’라 했다. 인식에 있어 물음이 첫 번째 작용임을 생각해보면, 가사를 시작하며 재차 반복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물음은 감정의 상실에 대한 자아의 지각이 이미 인식까지 나아간 증거일 테다. 이어 코러스를 보자. ‘나’를 중심으로 서술되기 시작하는 후렴구들은 상실에 대한 인식이 일정한 판단에 도달한 결과일 테다. 그러니 이 곡은 상실을 주제로 하는 지각과 인식, 판단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현장이겠다. 그뿐인가. 애초에 애도라는 것은 상실이 선재해야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이며 증상이라 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사는 상실이 일으킨 만가다. 상실은 곡을 관통하는 텍스트적 주제고, 상실의 확장하는 변주는 그 내용이다. 이제 사운드를 보자. 복잡하지 않은 아르페지오로 구성된 모티프가 리버브 톤의 기타와 건반을 매개로 울림을 반복한다. 두 악기가 가진 가벼운 선율뿐 아니라 뒤따르는 보컬도 잘 들리는 멜로디를 복제한다. 앞선 ‘No One’s Sleeping’을 포함해, 음반 전반에서 확실한 위치를 점하는 드럼은 여기서도 음향을 선명하게 내며 곡 전체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그리고 그 리듬은 템포가 변동하는 중에도 촘촘히 유지된다. 상기한 요소들 외에도 편곡의 주 성분들은 부유하는 음장 속에서도 제 선율을 치밀하게 지켜낸다. 더 나아가, 템포의 변화, 앰비언트 사운드의 확장 등의 변칙적인 장치가 개입함에도 건반 중심의 편곡은 무너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What Happens to People?’은 안정적인 트랙이다. 그러니까, 상실이 확장한다고 앞서 설명했던 이 곡은 한편으로 접근성이 상당한 선율들을, 단정함을 지속하는 사운드 구성을, 팝 트랙으로서의 안정성을 획득해나간 결과이기도 하다. 모순적이게도 여기, 각자의 몸집을 키워가며 서로를 배태하려는 상실과 안정이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더 보자. 정박자에 맞춰 차분하게 선율이 늘어선 모티프와 이를 정갈하게 체현하는 하프시코드의 음향은 ‘Death In Midsummer’의 음악을 견인하는 두 성분이다. 이 둘은 음장의 전면에 나서 러닝타임의 전체에 큰 줄기를 형성한다. 곡의 중반에서 일어나는 기타와 신시사이저의 난립에도 차분함, 정갈함의 위상에는 흔들림이 없다. 그 상태에서 곡은 묵시록적인 은유들을 품는다. 거대담론에 의해 쉽게 으스러져버리는 개인들의 무력한 삶은 단정한 곡 속에서 말끔하게 소멸을 맞이한다. 이와 같은 방정한 아포칼립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생태의 붕괴를 다룬 ‘Element’에서도 한 차례 더 등장한다. ‘Futurism’에도 잠시 머무르자. 산재하는 우울한 뉘앙스의 어휘들은 곡 특유의 댄서블한 사운드에 맞춰 춤을 추게 됐다. 소울 풍 그루브가 이를 위한 무대고 하강하는 주제 선율이 음운을 실어야 할 안무다. 특별한 장치의 개입 없이 캐치하고 리드미컬한 사운드 구성만으로 견고하게 굳은 이 곡에서 우울질의 언어와 무난히 대응할 성분은 주제 선율 속 마이너 스케일 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Plains’는 어떠한가. 제임스 딘(James Dean)의 마지막 영화 [자이언트](1956)의 촬영지인 텍사스주 마파에서 곡을 제작하며, 옛 인물의 종장 위에서 허무의 감응에 사로잡힌 브래드포드 콕스와 밴드 멤버들은 되려 아프리칸 리듬을 한 가득 집적한 뉴웨이브 스타일을 꺼내 든다. 죽은 자의 인적과 생동하는 리듬, 공허한 시어와 풍부한 사운드가 바로 이곳에서 상응한다.


 이 시점에서 [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d?]가 매력적인 또 다른 이유를 다음의 해석을 통해 찾고자 한다. 사운드 표상은 텍스트가 빚는 테마와 궤를 달리한다. 궤를 달리함으로써 생기는 결과는 간극의 생성이다. 그리고 이 간극은 앞선 음반들과는 다른 의미의 긴장을 산출한다. 이는 어떤 모양의 긴장인가. 잘 정리된 사운드, 멜로디로 구성된 음악적 요소와 다소 무거운 주제를 지닌 텍스트적 요소가 각각 양극단으로 향해 가며 만드는 팽팽한 긴장이라 할 수 있다. 또는 사운드와 가사가 한 데 모였으나 각자 다른 색을 칠해대는 데서 오는 긴장이라고 칭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 이 상이한 성질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전염하거나, 충돌하는 데서 오는 긴장으로도 해석 가능하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통상성, 관습성으로부터 이탈하고서는 하나의 곡을 애매성의 영역으로 밀어 넣어 발생한 긴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예 편이하게 총칭하기 위해, 하나의 성악곡을 두고 벌어지는 판이한 개사들로부터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가 오래전에 확인한, 사운드와 텍스트 간의 무수하고도 ‘탄력적인’ 결합 가능성이 빚어낸 이질적인 산물로서의 긴장이라고도 대강 일컬을 수 있겠다.


 이러한 긴장에서 발로하는 효과도 살펴보자. 가장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지시성의 하락이다. 찰랑이는 팝 사운드는 마냥 밝은 존재의 현전만을 담당할 수 없게 됐으며, 반대로 암울한 서정을 가진 가사도 죽어가는 장소를 전전하는 존재로만은 살아갈 수 없게 됐다. 상이한 분위기 혹은 상황을 자아내기에 생래적으로 상대를 목적할 수 없는 두 기호는 인위적으로 서로를 의지한다. 그래서 지시성의 하락은 한편으로는 핍진성의 하락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개연을 희미하게 함으로써 사운드와 텍스트의 연결은 정직함을 잃고 창작물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안은 이러한 일련의 발효 과정 전후에 놓인 인과다. 지시성과 핍진성, 정직함과 설득력의 연이은 하락에 선행하는 것은 관습적인 규칙을 비껴가는 일이며, 이 하락에 잠복하는 것은 예상을 어렵게 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일은 [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d?]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감응을 혼란스럽게 하고, 트랙을 넘기며 찾아올 미래의 매 감응을 낯설게 혹은 불확정적이게 한다. 따라서 만일 앨범에 놓인 사운드 전반과 텍스트를 완전히 합치된 것으로 누리겠다면 둘 사이의 간극에서 배어 나오는 온갖 긴장, 이로 인한 혼란과 생소 또한 함께 향유해야 하겠다. 다시 말해 이 작품에 잠재한 재미는 사운드, 텍스트뿐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부산물까지도 함께 진동할 때 비로소 발한다.


 이쯤에서 브래드포드 콕스와 멤버들이 가진 감각이 대단하다고 말하고 싶다. 요컨대 이들은 혼잡한 세계 속을 부유할 줄 아는 작가들이다. 그리고 그 자신들이 몸을 실은 혼류 속에서 전위의 비선형질이나 규칙적인 팝 음악, 혹은 서정이 잠복한 언어나 무의미한 화언, 또는 세상의 종말과 몰락하는 영혼과 같은 특정한 대상들을 포착하고 건져 올릴 줄 아는 작가들이다. 동시에 자신들이 건져 올린 것들을 때로는 익숙한 균형 위에서 구축하고 때로는 낯선 구도로 연결할 줄 아는 작가들이다. 그 결과로 생기는 미묘한 긴장과 충돌하고 연대하고 협력할 줄도 아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감각은 [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d?]에서 다시 한번 새로이 극대화되며 격렬하게 작동한다. 사운드와 텍스트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무수한 접합의 경우를 온전히 신임하고서는 그 가운데서 문득, 멀끔하고 뚜렷한 팝 음악과 부정으로 가득한 언어의 연결을 발견하고 배치한다. 그렇게 사운드에 다수 머물렀던 혼란들은 한층 더 큰 단위로 빠져나와서는 사운드와 텍스트 사이에 진입한다. 사운드의 단정한 정형성도 밴드의 창작 전반을 점거한 비정형의 실증을 위해 수단처럼 독특하게 기능한다. 앨범의 재미있는 긴장은 분명 날선 감각이 있어야 가능했으리라.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디어헌터는 좋은 팝 앨범을 만들었다. 좋은 선율들을 곳곳에 적재하고 [Fading Frontier]보다도 조금 더 밀도 있고 차분한 사운드를 조직해 잘 들리는 선율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음악을 조정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사운드와 텍스트가 가진 통상의 연결고리를 허술하게 하며 또 다른 긴장을 이끌어냈다. 이 긴장은 밴드가 전에 만든 긴장과는 또 다른 양태이니 조금은 신선하고 낯선 긴장이라고도 하겠다. 한때는 이들의 사운드를 불친절한 것이라 생각했다. 몇 장의 앨범이 지나고 난 뒤 이들의 음악에 익숙해져서 그 특유의 모양새가 친절하다고 생각했을 때, 밴드는 내가 오래전 친절하다고 여겼던 ‘다른’ 사운드를 사용함으로써 은연중에 어색함을 자아냈다. 그리고 밴드는 이제 그 친절한 사운드를 기이하게 사용함으로써 되려 불친절하게 작동하게끔 만들었다. 사운드가 기이하게 다가왔던 밴드에게서는 이제 앨범 그 자체로 기이한 산물이 나왔다. 그래서 [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d?]를 어떠한 발견의 장이라고도 하고 싶다. 감각을 동원해 표상들이 가진 으레의 지시를 약화하며 앨범에서는 의외의 연결이 살아나고 예상 밖의 착시, 오해까지도 일어난다. 이 매력적인 이들과 모두 마주한다는 것은 너무도 흥미로운 일이다.


-수록곡-

1. Death in Midsummer

2. No One’s Sleeping

3. Greenpoint Gothic

4. Element

5. What Happens to People?

6. ‘Détournement’

7. Futurism

8. Tarnung

9. Plains

10. Noctu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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