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리썬 Jun 20. 2020

퇴사를 했습니다

연봉 6000만 원인데 사표 낸 이유


모든 직장인의 꿈, 사표라고 하지요

저는 그 꿈이 없었습니다

저는 안정적인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안정이 독이 되는지는 몰랐습니다

안정은 정체의 또 다른 말이더라고요.

길게 정체하면 썩어서 악취가 나고요

그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도

늘 그 냄새를 맡으니 나중에는 일상이 되더라고요


요즘 10여 년을 한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드물지요

보통 2년여 다니다가 연봉을 높여서 이직하며

커리어를 쌓아 가더라고요

똑똑한 친구들이죠


저는 25살 이후

전문직 아닌 전문직으로 한 직업만 팠어요

대학 전공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택했기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한 시기였어요


그 당시에 저는 제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미쳐서 했던 일이 있었나

수능 때도 이렇게는 공부를 안 했겠다 싶었죠


오육 년 차 때는 꿈에서도 일을 할 정도로

일에 미쳐 살았던 것 같아요

밤에 자려고 누우면 오늘 한 일들이

천장에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죠

죽기 전에 스쳐간다는 그 파노라마요


또 이 일을 좋아하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함께 일하고 서로를 배운다는 게 참 좋았고요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좋아한 일이라서

매일 마감 시간에 시달리는 것도

빨간 날에도 항상 출근하는 것도

내 능력보다 더 뽑아내려고 쥐어짜는 것도

내 미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일이 재미있었어요

또 안정적인 수입이 있었고요


십 년 차가 되어 갈 때는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내 능력이 부족하구나

내 그릇이 종지 같구나

그리고 내 미래가 없구나

산업이 어떻게 바뀌어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내 이 설 자리는 없어지겠구나


이게 사표를 낸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어요


어느 때와 다르지 않게 야근을 하고

버스가 끊겨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어느 날

뒤차가 택시 뒷좌석 방향을 박았어요

제가 앉은 쪽으로 난 접촉 사고였어요

차가 움푹 파이긴 했지만

좀 놀라서 그렇지 몸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그다음 날 침대에서 못 일어나겠더라고요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당일 병가를 냈어요

오토바이에 부딪혔던 날에도  출근했던 나였는데

참 이상하더라고요


병원을 가니 뇌진탕이라며 처방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며칠 쉬고 다시 출근을 한 날

몇 분 몇 초가 아까운 마감시간에

계속 화장실에서 오바이트를 했어요

하루 종일 바이킹을 타는 것 같고 숨이 막혔거든요

좁은 화장실 안에서도 마감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

생각이 들면서도

머리 한편에서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 안 되겠다

생각들이 맴맴 돌았어요


그날부터 당장 병가를 냈습니다

선후배들이 몸부터 잘 챙기라고

이럴땐 이기적이어야 하는 거라고 말했어요

참 고마웠죠

그래도 죄책감은 절 갉아먹었어요


병가를 내고 여러 병원을 다녔어요

그런데 한의원 정형외과 대학병원을 전전해도

증상의 원인이 없더라고요

의사들이 하는 말이,

사고 후유증이 이렇게 심한 경우는 없다고

어지럽고 오바이트를 계속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저를 보는 눈빛이

마치 나이롱환자를 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것도 괴로웠어요


그렇게 다시 회사에 복귀를 했죠

그런데 숨이 안 쉬어지더라고요

찾아보니 역류성 식도염 증세라길래

내과를 찾았어요

그런데 의사가 말하길 이상이 없다며

혹시 정신과는 가봤냐고 하더라고요


나중에야 알았어요

마음의 병이 육체로 번졌다는 걸요

그래서 다시 병가를 냈어요


아무 생각 말고 1년 쉬라고 말해주는

상사들의 말을 뒤로하고 퇴사를 결정했어요


저는 다른 것들이 힘든 게 아니라

깊은 죄책감에 사표를 냈어요

다른 것도 아닌 죄책감이라니.

사표를 내는 그 순간에도 제정신은 아니었나 봐요

사표를 내는 이유가

피해주기 싫다는 죄책감이라니요


그래도 그때 선명하게 느낌 한 가지는

내가 회사를 그만둬야 나을 병이구나

싶었어요


왜냐면 그때 병가를 냈을 당시 저는

나도 모르게 높은 곳을 계속 찾아다녔거든요


10여 년간 한 가지 일만 했던

저는 다른 일을 배우지도 못했어요

다른 곳에 취업하기도 쉽지 않겠죠

다른 일을 시작하기도 쉽지 않겠죠


그렇지만

지금도 사표 낸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회사를 다닐 때의 저는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매일매일 회사를 그냥 다니면서

이 일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냥 버텨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야근이 끝나고 너무 심란해서 광화문 일대를

새벽까지 정처 없이 돌아다닐 때에도

내일 결근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 했죠


결근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내가 퇴사를 했을 땐

그땐 제가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회사를 그만두고 마음이 조금 나아지니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거창한 일은 아니었어요

사소하게 해보고 싶었던 그림 그리는 것

소소하게 해보고 싶었던 자수 배우는 것


그땐

정말 이런 소소한 일조차

나는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왜냐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겠죠


사람은 여러 종류의 타입이 있잖아요

여러 사람들과 어울림으로 충전하는 사람과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충전을 하는 사람

저는 후자인 거죠


저는 전자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회사생활을 버틸 수 있는 타입이었다는 걸

10년이 지난 뒤에야 알았어요


어느 타입이 더 낫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성향의 차이를 몰랐다는 것이에요


그 성향의 차이를 몰라서 저는 10년을 보내고

사표를 냈습니다

지금은 소소하게 살고 있어요

이제야 정신이 드는지 돈벌이 걱정이 되네요

퇴직금이 다 떨어져 가거든요


이제야 따뜻한 회사 품에서 차가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후회가 되지 않아요

이게 제 자리인 것 같아요

6개월 뒤엔 다른 말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땅을 치고 후회한다고요 허허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니

또 그런 날이 안 올지도 모르니

저는 이제

일기장처럼 영상을 찍으며 글을 적으며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살아가는 나날을 기록하려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OPkpk7OtLg



뭘 해야 할지 모른다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 앨런 와츠













작가의 이전글 기다릴게요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