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님의 노벨상을 축하드립니다
스레드에서 한 분의 글을 보았다. 예술은 왜 항상 고통스럽고 아픈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담긴 글이었다.
조금 더 행복하고 즐거운 글을 쓸 수는 없을까. 왜 다들 힘들고 슬프고 고통받는 것들에 대해 얘기를 하는 것일까 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심하여 댓글을 남겼다. 댓글을 남긴 뒤 생각에 잠겼다.
왜 예술은 그토록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헤집어서 다시 보게 만들고 고통과 아픔 슬픔을 다시 보여주고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걸까. 과거는 그냥 덮고 지나가면 되는 것 아닌가. 잊고 나면 좀 덜 아플 텐데 왜 자꾸 그걸 다시 헤집어두는 걸까.
나의 생각은 이렇다. 예술을 단순히 유흥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된다. 그저 단순한 재미와 오락의 정도라고 생각하면 실망할 수 있다. 예술은 예술가들이 느끼는 사회와 삶 그리고 감정과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그건 행복과 즐거움을 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괴로움과 고통 슬픔과 고뇌 상실감을 동반한다.
이미 우리 삶에서 지워지지 않을 지워질 수 없는 역사와 인간의 폭력성과 부조리, 고통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그걸 승화시키기 위해 예술로 표현해 낸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아프고 슬프기 때문에 그걸 해소하고 영혼을 위로하고 이 사실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그래서 후세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니까 말이다. 어떠한 부조리를 겪었을 때 불편함과 가슴 묵직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겪었을 때 대중들에게 알리고 이해받고 공감받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며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을 가진 사람들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 중 하나라고도 생각한다. 죽을 거 같으니까 예술로 승화시키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 나는 ‘작가가 작품을 토해낸다’라고 표현한다.
보통은 예술가들이 그런 큰 감정을 느낄 때 창작을 하게 되니까 말이다. 기쁨과 행복감은 쉽게 휘발된다. 금방 잊히고 당장이 즐겁기에 기록하고 남겨야 하는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깊고 어두운 감정은 다르다.
내뱉고 알리고 토해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고통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예쁜 껍데기에 싸서 내놓을 수도 포장한다고 내용물이 예쁘고 재밌어지지도 않는 것들이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예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본질은 결코 아름답고 숭고하고 순수하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날것의 순수함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이 잔혹하고 이기적이고 난폭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런 인간 군상들 날것들이 내 눈앞에 펼쳐지고 낱낱이 보이기에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다. 나의 콤플렉스나 나의 약점과 단점들을 보기 싫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것들은 최대한 숨기고 없는 듯이 살아가고 싶지 굳이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나 타인의 눈을 많이 의식하고 공동체 사회에서 튀면 안 되고 묻어가는 것을 선호하는 한국에서는 더더욱이 이런 불편함과 불쾌한 내용들이 보기 싫고 피해버리고 싶은 과거이기에 묻어두고 또 묻어두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고통스럽다. 읽기에 쉽지 않고 많은 감정소모를 동반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유독 그런 매체나 이야기들의 영향을 크게 많이 받는 타입이라 충격을 주는 영화는 보지도 못할뿐더러 딥한 이야기의 소설을 읽으면 밥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며칠 잠을 못 자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사실 한강 작가님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저서를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시도는 해봤지만 감정공명이 너무 크게 일었기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7년 전 채식주의자를 처음 읽었다. 반 정도 겨우 읽은 후에 헛구역질을 해서 멈추었다. 이후로는 그 책을 펴보기가 무서웠다. 나에게 너무나도 큰 자극을 주는 책이었기에. 그리고 3년 전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역시나 3분의 1 정도 읽었을 때 덮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눈물이 나서 그리고 꿈에 나올까 봐 두려웠다. 이걸 읽고 내가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무서웠다. 그래서 역시나 덮어두었고 다시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가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느꼈다. 문자만으로 타인의 정신과 육체를 이렇게 자극시키고 충격에 빠트리고 휘둘리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니. 너무나 놀라웠고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에 이런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도 경이로웠다. 그래서 이 분은 크게 일을 내실 분임이 분명하다고는 속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고작 문자로 쓰인 글일 뿐인데 그것만으로 내가 이렇게까지 휘둘리게 되다니 말이다. 이 전에도 한국 문학과 유럽 문학책을 여러 번 읽어봤지만 이런 적은 손에 꼽았다. 작가님의 저서 중 하나인 '흰'은 괜찮았고 '희랍어 사전'도 감정이 깊지 않아 괜찮다는 추천을 받아 천천히 감정동요가 크지 않은 것들부터 차례로 독파해 볼 예정이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곁에 누군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다면 그때가 되면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이 항상 정답은 아니고 슬픔과 고통도 성장에 꼭 필요하고 느껴야 하는 중요한 감정이다. 물론 힘들지 않고 잔잔하고 평화로운 행복이 지속되는 게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또 나태해지고 그 상황에 무뎌져서 새로운 자극을 찾기 위해 다른 것들을 시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생에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이 있는 거고 당연히 슬픔과 고통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인생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그런 게 없다면 발전도 깊게 사유해야 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예술은 아프고 보기 싫은걸 다시 보게끔 우리 눈앞에 들이밀고 유쾌하고 행복하고 즐겁지 않지만 그럼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억해야 하는 사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건 한낱 유흥이 될 수는 없지만 깊이 의미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충격적인 아픔과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결국 예술은 계속해서 대중을 자극하고 참여와 기억에 남을 감정을 일으켜야 한다.
창작의 고통과 고통 속의 창작은 작가들의 숙명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무당이 신내림을 받는 것처럼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 들고 멈추지 않는 빨간 구두를 신은 것도 같다. 그럼에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내가 이걸 해야만이 살아갈 수 있고 살아있음을 느끼기에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멈출 수 없는 멈추지 않는 기차에 몸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