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가라앉던 날들에서 빠져나왔다.
이번엔 26일 걸렸네.
에너지가 조금씩 올라온다 생각했었는데 어제 새벽에 일찍 깨서 잠이 잘 안 오더니 오늘 아침부터는 우울할 때와는 다른 행동들을 할 수 있었다.
일찍 출근하기,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 먹기, 식욕이 도는 것, 잘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 일에 집중해서 할 수 있는 것, 해보고 싶다는 생각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지는 것, 말을 먼저 걸게 되는 것, 감정이 느껴지는 것, 많이 웃게 되는 것들 말이다.
저녁 먹고 아이와 호떡 사 먹는 산책을 하러 나가서 걸으면서 엄마와 통화를 했다. 요즘 잠은 어떻게 자냐는 엄마의 물음에 다시 잠이 안 온다고 대답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엄마는 계속 ‘네가 왜 그럴까.. 언제 나을꼬.. 엄마가 뭘 해주면 빨리 나을까. 엄마가 뭔 죄를 지었길래 네가 그렇게 힘드냐. ’ 이러신다. ㅎㅎ 왜 엄마 죄라고 생각하는지.. ㅎㅎ 나도 나중에 나의 아이가 힘들어하면 내 죄라고 생각하게 되려나? 모르겠다.
”한참 좋을 때인데,, 한참인데. 이럴 때를 그렇게 보내서 어쩌노“
이렇게 말하시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길바닥에서.. 아이랑 같이 걸어가고 있었는데도..
나도 이렇게 좋은 시절을 우울증과 경조증을 왔다 갔다 하면서 냉탕 온탕을 반복하는 게 정말 아깝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까.
양가 부모님 다 건강하시고 우리 부부 안정적으로 각자 일 잘하고 아이 건강하게 쑥쑥 자라고 너무 예쁜 지금이 황금기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 황금기를 이렇게 왔다 갔다 휘청거리며 보내는 내가 답답하고 싫다. 그런데 마음대로 안된다. 휘청거리고 싶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태풍이 계속 온다. 후.. 그런 답답함에 눈물이 왈칵 났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서…
아이를 낳고 증상이 심해져서 양극성 장애 진단받고 약 먹은 지 이제 5년 차. 우울할 때는 약도 별로 효과가 없다. 이번에 너무 힘들어하니까 분노를 좀 줄여주는 약이라고 항우울제를 하나 더 늘려주셨다. 약이 줄어들지는 않고 계속 늘어난다… 근데 우울할 때는 약도 잘 챙겨 먹지 않는 게 가장 큰 문제지. 약효가 없는 것 같아도 꾸준히 복용하고 그래도 정말 없으면 약을 변경하던지 증량하던지 해야 하는데 다 귀찮다고 아예 먹지를 않으니… 이런 내가 제일 답답한 건 나 자신이다.
우울할 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할 힘도 의지도 없다. 모든 게 싫고 비관적이고 염세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경멸하며 힐난한다. 힘들다고 누워있는 애를 자꾸 줘 패니까 계속 ko 상태로 누워있을 수밖에.. 분노가 너무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분노를 줄여주는 약을 추가해 주셨다. 나는 나를 왜 이렇게 싫어할까. 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나를 너무 싫어한다. 그 어떤 순간에도 상황에도 나를 가장 잘 아는 나 스스로가 내 편이 되어준다면 얼마나 든든하고 좋을까. 근데 나의 최대 적은 나다. 욕심이 너무 많고 그걸 충족하지 못하거나 노력하지 않으면 정말 무지막지하게 힐난한다.
우울할 때 나를 비난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수용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의사 선생님과 상담 선생님 모두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심지어 나조차도 내담자들에게 말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못한다. 우울을 수용하는 것이 나에게는 정말 어려운 일임을 이번에도 느꼈다.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하고 겨우 출근하고 머리도 며칠째 못 감고.. (우울할 때 씻는 게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뭘까.. 좀 더 공부해 봐야겠다. 우울해서 못 씻고 오는 학생들 진짜 백번 공감..) 책상에 앉아서 시간만 때우는 내가 너무 한심하고 싫다. 월급 루팡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다. 기분이 진짜 더럽다.
그런데 이렇게 온탕 냉탕을 왔다 갔다 해도 5년 동안 아주 큰 일은 없었다. 내가 죽도록 고통스러웠을 뿐..(가족들이 힘들긴 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울할 때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 같다(내가 회사에서 잘린다던지, 이혼당한다던지..). 현실이 아닌 내가 만들어낸 생각들 때문에 이토록 괴로울 수가.. 벼랑 끝에 몰려서 이제는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뿐인데 사실 벼랑이 아니라는 거.. 마치 3D 그림 같다. 실제가 아님을 지나고 나면 알지만 겪는 당시에는 늘 진짜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다.
그래도 5년 전에 비하면 정말 개과천선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좋아졌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 진폭이 줄어들고 있다. 내가 믿는 구석은 이거 하나다. 미약하지만 계속 나아지고 있다는 점.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질 거라는 점. 이거 하나 붙잡고 간다. 엄마에게도 이 말을 하고 긴 통화를 마쳤다.
내가 우는 것을 봤는지 아이가 내 손을 꼭 잡고 괜스레 웃어준다. 나도 따라 웃는다. 그리고 맛있게 호떡을 먹었다. 다시 걸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