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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기 Mar 06. 2017

속죄의 날

알랑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읽으며

상처란 반드시 눈쌀을 찌부릴 정도로 남에게 못되게 행동했을때 남는 것은 아니다. 솔직하게 자기 기분을 말했어도, 살짝 짜증을 냈어도, 혹은 당연히 아는 척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심하게 혹은 냉정하게 상대가 없는 것처럼 지나갔어도 남는 것이 상처다. 따라서 사람은 우리가 남에게 해를 끼친 것을 모두 기억해낼 수도 없거니와 대부분 그런 사소한 것이 남에게 상처가 됬을 것이라고 상상조차하지 못한다. 


우리 딸을 보고 그 아줌마가 말했다. 

"ㅇㅇ 이는 책을 보는 것을 과시용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그런 면을 딸이 가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 아줌마로 부터 들었다는 것이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딸이 겉멋이 들려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남의 눈에 띄었다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걸, 당사자의 부모인 나에게 말을 했다는 것이 화가 난다. 딸은 20대 초, 나름 방황을 했다. 책을 읽는 것을 어려서부터 좋아했고, 돈이 생기면 책을 너무 쉽게 사버린다. 그러나 독서의 깊이나 이해가 떨어지고 책을 끝까지 마무리 하기 보다는 피상적으로,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또 다른 관심사로 넘어가는 것을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알고 있었다. 부모가 되서 배운 것은 기다려 주는 것, 내 욕심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책을 가까히 하므로 언젠가는 젊은 시절 섭렵한 것이 나이먹어서 지혜가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래, 내가 정확하게 20대에 한 과정이 그러했다. 


요 며칠 동안 퇴근하면 집에와서 카라마죠프의 형제들이라는 두꺼운 소설책을 연신 읽고 있다.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은 800페이지가 족이 되는데도 마지막 장을 향해서 가고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적은 인간갈등에 흥미가 간다고 한다. 


아이들은 자란다. 내가 만난 수많은 20대들은 투박하고 격정적이고 어리석지만, 그것은 감성과 에너지가 넘치는 대신, 세상경험이 적어서 나오는 당연한 행동일뿐이다. 그런 모습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줄 사안이지 뭐라고 평가하고 점수매길 것은 아니다. 그 아줌마가 나에게 한 말은 내 딸에 대한 기대가 약간 실망을 가져온 것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을 나는 짐작한다. 누가 크게 보래? 그러나 아무리 친해도 남의 자식의 부정적인 면을 툭 던지는 말로 할 것은 아니다. 남의 부모에게 그 집 자식에 관한 것을 말하게 될때는 수동적으로 묻는 말에 대답하는 정도로, 그것도 장차 잘 될 거라는 격려로 해주어야 한다. 


상처란 그런 것이다.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면 양에 차지 않아서 답답한 적이 있고, 저렇게 살다가 어캐되나 걱정도 되고, 그래서 비슷한 부모들과 자식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 아줌마의 말이 문득 떠오르면서 기분이 상해지는 것은 그 아줌마를 일말 존경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이것은 인간사이에 상처라는 것이 예상치 못할 정도로 섬세하고 미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 또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행실과 말때문에 두고 두고 누군가에게 화가 나는 존재였을지 모른다. 아마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는 아내가 될 수 있고, 또한 내 부모가 될 수 있다. 


알랑드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습관중에 '속죄의 날'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 날은 성전에 나와서 우리가 알고 혹은 모르고 타인에게 한 행실에 대하여 반성하고 당사자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는 날이라고 한다. 유대인은 모두 회당에 모여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암송한다. 


"우리는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불충하게 행동했고, 

우리는 남의 것을 훔쳤고, 우리는 남을 비방했고, 

우리는 완고하게 행동했고, 우리는 사악하게 행동했고, 

우리는 뻔뻔하게 행동했고, 우리는 폭력을 일삼았고, 

우리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다음에 유대인은 반드시 각자가 짜증나게 만든, 화나게 만든, 아무렇게나 팽개진, 또는 여타의 방식으로 배신한 당사자를 찾아가서 진심 어린 회개를 전해야만 한다. (57쪽)


무신론자인 나는 이런 기회가 없다. 만나는 사람들은 직장동료들이고, 주말에나 가끔 지인들을 볼 뿐이고, 나머지는 식구들이다. 주기적으로 만나야 서로 상처를 준 것을 용서를 구할 것이고, 그들이 하나의 공동체에서 협동하고 살아가는 관계여야 한다. 


식구들에게, 그리고 직장동료들에게 내가 한 행동이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 없는지, 또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그 사람이 미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일 수 있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완전하지 못하여서 분별력을 자주 상실하는 사람일수도 있다. 어차피 불안전한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까.


교회나 절에 나가지 않지만, 최소한 일요일 날은 남이 나에게 상처준 것을 굳이 끄집어 내는 것보다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완고하고 이기적이고, 무례한 덕택에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는 주변사람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을 가지는 규칙을 가져야겠다. 허허,,, 이래서 아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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