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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기 Mar 13. 2017

친구에게 전화문자를 보냈으나 응답이 없다

친구에게 전화문자를 보냈으나 응답이 없다. 만일 그와 좋은 관계라면, 1. 이 친구가 전화번호가 바뀌었나? 사고가 났나? 의심할 것이다. 
만일 그와 나쁜 관계라면 2. 이제 나를 무시하는군, 나랑 말도 걸기 싫다는거지.
이렇게 부정적으로 해석할 것이다.

껄끄러운 관계라면 그 친구에게 말하지 않고, 냉냉하게 지내다가, 그 친구가 같이 쇼핑가자고 연락오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할 것이다. (흥, 내 문자를 씹을때는 언제고 이제 쇼핑가자고? 아쉬울때만 연락하는군) 친구는 자신의 선의를 알아주길 바라고 지난번에 전화기 고장으로 연락을 못했던 것을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줄것으로 기대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냉냉함이다.  

전화문자불통이라는 사건이 둘 사이를 더 멀게 만들어놓았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의사소통의 미숙으로 단정지을 것이다. 서로 자기 입장을 상대가 알아듣게 설명하면 해결될 문제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한 가지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여러가지로 해석을 할 수 있다. 긍정적, 부정적. 주인공은 이 사건을 상대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부정적으로 해석했다. 왜 하필이면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것은 그 친구와의 과거의 경험이 부정적인 감정을 남겼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말투에서 점차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게된 주인공은 급기가 친구가 문자도 수신하지 않자, 완전히 대놓고 무시한다는 감정이 커지게 됬다. 무시당함은 상대에게 자기가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정이다. 친구가 자기가 아쉬울때는 먹을 것을 들고 다가오고, 정작 주인공이 힘들때는 나 몰라라한다면, 주인공은 자신이 상대로 부터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지적 능력에 상관없이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을 존중하는지 무시하는지는 쉽게 파악한다. 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조건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면 그들이 멀어져 간다. 자기 힘으로 독립적으로 헤쳐나가는 사람은 남을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 고립된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남을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대적인 사람일수록 주변 사람들을 존중해주어야 그들이 내가 어려울때 손을 내밀어준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데살로니카 전서 5장)"

주변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들에 대하여 '감사함'을 절로 가지게 된다. 그들이 내 주위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이다. 그러니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감사'가 '기쁨'과 연결되는 것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할때 '기쁨'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에게 감사함을 눈빛으로, 말로, 물질로 표현하게 되면, 그들이 기뻐한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나도 기뻐진다. 감사함의 상태가 가져다주는 분위기는 '안정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의 포옹을 하고 음식을 같이 나누는 심리적 효과는 안정감이다. 여러 사람들이 따스한 감정의 울타리를 형성해서 둥그렇게 하나가 되는 형태가 감사함이 창조한 광경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하지 않아서 자신의 일거리가 늘었다든지, 자신의 업적을 주변에서 인정해주지 않고 오히려 강제로 뺏어가려고 할때, 사람들은 공격과 방어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남보다 자신이 더 가져가야 한다는 생각을 여러사람들이 가지면 경쟁상태가 된다. 경쟁은 긴장을 낳는다. 긴장은 불안감을 초래한다. 따라서 상대를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전쟁의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상대의 공격에 몸은 잔뜩 움추리게 된다. 상대가 나를 존중해주지 않고 무시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나도 상대를 존중해줄 수 없다. 서로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때 사건이 하나 발생하면 상대는 그 사건의 저의를 선의라기 보다는 악의로 해석하게 된다. 사람의 머리속은 단순하다. 악인은 하는 일이 모두 악한 행위만 한다고 믿는다. 이때 자신은 선인이 되고, 자신이 하는 행위는 모두 선행, 최소한 정당방위가 된다. 심지어는 남을 때리고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먼저 때렸다고 말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국제정치에서 흔하게 발생한다. 선제적 방어공격. 적국이 하는 모든 행동은 자국의 안전에 위협을 주는 악의적 행동이다고 믿는다)

의사소통의 미숙으로 오해가 발생하고 서로 갈등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의 상식과 기준에 맞추어서 상대를 먼저 규정한다. 저 사람은 악인인가 선인인가. 마치 자신은 객관적인 심판관의 입장에서 상대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사람은 공평한 자연법에 의거하여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다. 상대가 자신을 존중해주면 그 사람의 행동을 웬만하면 좋게 해석해준다. 하지만, 상대가 평상시에 자신을 무시했다면 그의 행동을 악의적으로 해석해준다.

자, 여기서 처세술의 원리하나가 생겨난다. 
내가 남들에게 수용되려면, 즉, 이해받기를 원한다면, 내 주변 사람들을 존중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존중해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고 충성한다. 내가 돈을 주고 고용한 하녀라고 해도, 그녀로 부터 충분한 서비스를 받고자 한다면, 그녀를 존중해주어서 그녀의 충성심의 동기를 존중감에서 찾게 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즉, 상대의 마음을 뺏는 것이다. 다른 말로 덕이라고 한다. 군자는 덕으로 소인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은 소인을 아랫사람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소인을 대인처럼, 마치 살아있는 예수나 부처처럼 존중심을 가지고 대하라는 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상대에 대한 존경심은 돈으로 결재된 이상의 서비스를 만들어낸다. 물론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 상대를 존중해주라는 말은 아니다. 존중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독일 철학자 칸트의 말대로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내 이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만남 그 자체가 인생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사람들 대하는 것이다. 나의 목적중심으로 사람들 대할때 우리는 종종 주변사람들의 쓸모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내가 필요하면 다가가고, 무용한 사람은 멀리하게 된다. 그런 표정을 상대가 못읽을리 없다. 그래서 서로 시큰둥한 사이가 된다. (지가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해)

사람들은 언제가 자기 취향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이웃을 존중하지 않는 습관은 평상시에 존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흔하게 발생한다. 자신이 원하는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다면, 타인을 존중하는 것이 어색할 수 있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상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기 쉽다. 이렇게 자기가 슬픈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종종 소홀하게 대한다. 고립이 지속된다. 상대로 부터 무시당할때 사람들은 화가 난다. 남들보다 화를 잘내는 편이라면, 자신이 무시당한 세월이 길다는 말이 된다. 아쉽게도 세상을 살면서 만나게 되는 불특정 사람들은 나를 존중해주기 보다는 무시하기 일쑤다. 왜냐하면 자기 사는 것도 바쁘기 때문이다.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먼저 인정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고, 자신을 존중해줄 사람도 자기 자신이다. 상대가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고 존중해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보았자, 상대는 더 멀리 도망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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