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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기 Jun 18. 2017

페북에서 Unfollow 하는 이유

94년도에 처음 캐나다로 이민 왔을 때 몇 년간은 한국소식과 문화에서 멀리 떨어져서 지냈다. 한국 관련 소식은 일주일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한국식품점 입구에 쌓여있는 교민신문을 집어 들어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바쁘게 한 4년을 지내다가 부부가 둘 다 취업도 하고, 자녀들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한국식품점에서 대여하는 VHS 비디오테이프로 유명한 드라마, 모래시계, 등등을 빌려서 볼 수 있었다. 지척에 지내는 한국인 가족들과 빌려온 비디오를 돌려서 보는 것이 주말을 보내는 낙중에 하나였다. 


캐나다에서 산다는 것은 한국에서 멀리 떨어져서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라는 것은 이런 정보의 단절과 함께 절감할 수 있었다. 정보란 내가 그 방향으로 가서 굳이 캐내서 알아야 할 것도 있는 반면, 지하실에 먼지와 함께 사용하지 않는 생활소품을 자선단체에 기증하는 것처럼 털어버려야 할 것도 있다. 모든 정보는 알면 알수록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정보는 집착해야 하는 것과 멀어져야 할 것이 있다. 


거리에 비례한다. 가까운 곳에서 발생하는 것들은 내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바가 크다. 하지만 먼 곳에서 벌어지는 것은 미미하다.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사는 사람이 차로 한 시간을 달려아 하는 곳으로 이사했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친밀도는 떨어진다. 사람이 붙고 떠나는 것처럼, 엮일 가능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교통이 발달하기 전이라면, 손편지 고이 적어서 우체통에 넣을 정도로 그 사람과의 일은 추억앨범에 넣고 말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새로 이사 온 이웃이 차지하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그와 다시 빈번하게 왕래하게 된다. 


매일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연말 세금 보고도 같이 하는 사람이 오늘 이빨이 아파서 깍두기를 먹을 수 없다고 하면, 한국에 사는 고교 동창이 장흥에 놀러 가서 돼지갈비를 먹었다는 소식과 같은 급으로 뉴스에 올라올 수 없다. 우리 집도 아니고, 동창도 아닌 어떤 사람이 두 가지 소식을 접하면, 이빨이 아파서 깍두기 못 먹는 사람이나, 장흥 가서 갈비 먹는 사람이나 그저 그런 사소한 개인적인 소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주관적으로 보면, 식구가 깍두기 못 먹는 것은 동창이 갈비 먹는 것보다 100배는 중요한 사안이다. 


1994년으로 돌아간다면, 동창이 갈비 먹는 사진을 캐나다서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정보통신 인프라의 한계가 자연스럽게 떠난 사람은 떠난 채로 잊어버리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우라질....


SNS라는 것은 죽은 귀신도 천당에서 갈비 먹는 장면을 현세의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천당 가서 시냇물에 발 담그고 갈비랑 소주를 먹으면서 사진을 페북에 올렸고, 소감을 구구절절 올린 것을 현세에 사는 자식들이나 친구들이 본다면, 사는 게 싱겁고, 혼란스럽지 않을까. 


쓰러지시고 응급차 오고, 산소 호흡하다가 사망 판정받고, 장례식 하고, 50 제지 내고, 부의금 받고, 이런 모든 사건들이 지나고 난 뒤에, 천국 가신 장인어른이 일주일이 멀다고, 천국에서 드시는 음식, 경관, 주요 사건에 대한 단상, 다른 죽은 이들이 적은 글을 퍼오기 등을 한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허물어져도 너무하다고 분개할 것이다.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가 얼마 전까지 우리 식구였다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는 것이고 남은 가족은 그가 없는 생활을 다시 꾸려나가면서 적응해나가야 하는 과제가 남는 것이다. 그러다가 손주들이 결혼해서 새 며느리나, 사위가 들어오고, 자식을 낳고 하면서 가족은 새로운 구성원으로 진화하고, 학교 졸업하고 직장 잡은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둥지를 찾아서 떠난다. 


삶은 이렇게 누군가 떠나기도 하고 등장하기도 하면서 흘러가는 것이다. 친구나 지인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동안 같은 학교, 직장에서 수다하면서 지내던 이들도 졸업하고, 이직하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언제 한번 만나서 밥이나 먹자'하면서 인사하고 돌어선다. 생활공간에서 멀어진 사람을 굳이 대통령의 하루 일정처럼 파파라치가 돼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정신상태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멀어진 사람에 대하여는 정보를 받아보지 않는 것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서, 통근기차 안에서, 페북을 열어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주로 애독하는 신문사를 follow 하는데, 어떤 경로로든 친구가 된 사람들의 잡다한 소식, 음식상, 여행 경치, 웃긴 동영상, 졸업, 생일, 취업, 심지어는 심심하다는 글까지 시시각각으로 올라온다. 페북은 친구에 대하여 잘못된 정의를 하고 있다. 페북에서 말하는 친구란, 1. 연락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친구다. 2. 친구는 친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싶어 한다. 


아니야, 아니거든...


그건 대학 기숙사에서 지내는 심심하고 호기심 많은 20대가 생각하는 친구거든.


그래서 나는 이런 글들이 올라오면 열심히 Unfollow를 한다. 내가 follow를 신청한 적이 없는데 친구를 맺는 순간 자동으로 follow가 되어버린다. 페북은 정보를 알려주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정보로부터 내 관심사가 분산되는 것을 저항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알고 지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잊어버리고, 모른 채로 남겨두는 것이 새로운 것을 알아내고 내가 성장하는데 필요한 태도이다. 나와 생활적으로 연관돼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관심 가지고 집중하는 분야에 더 몰두하는 것이 현재를, 그리고 내게 주어진 삶을 fully 충만하게 살아내는 길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중요하고, 그와 만나서 커피를 마시는 지금이 중요하다. 페북은 이런 집중을 은근히 방해한다. 그래서 매일 가지치기하면서 내 글을 적거나, 내가 찾아서 follow 한 사람이나 뉴스매체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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