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끼리 폰으로 서로 사진을 짝어준다. 복제시대는 20세기말에 시작되서 2019년에는 개인복제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아는 내가 자각하는 것과 매체속에 반사되어 복사된 형태로도 존재한다. 사진 속의 나는 바라보는 나와는 다르지만, 땀방울 하나가 이마에서 떨어져도 내 안의 세포가 있는 것처럼, 무한대로 복사되어 퍼져나간다. 이미 떠난 사람도 사진을 통해서, 동영상을 통해서 반복적이고 의식이 없는 채로 만날 수 있다. 예수가 지금 태어났다면 제자들이 양피지에 행적을 적기보다는 스마트 폰으로 동영상 찍고팟캐스트를 만들고 많은 백성들은 저마다 개인 소견을 댓글에 적기에 바빴을 것이다.
동영상과 챗팅댓글은 그 자체가 자아를 확대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 사람과 동영상에 녹화된 것은 차이가 난다. 보여지는 것이 실제와 차이가 나면서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기가 더 편해졌다. 실제와 인상의 차이는 마음보다 기능에 촛점을 맞추게 한다. 매체를 통해서 자신을 복사하고 생산하는 개인은 가정내에서의 존재와 미디어속에서 존재를 모두 경험하게 된다. 현실에서 복사된 다른 현실, 가상현실이 더 확실하게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친구는 카톡에서 '시공을 초월했다'고 적으면서 한국의 남쪽 바닷가 섬마을에서 탕수육과 소주를 두병 비우고 있다. 캐나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카톡상에서 실시간으로 말을 걸고 있다. 나에게 그의 존재는 카톡속의 인간이다. 오로지 문자만이 그와 교감할 수 있는 전부이다. 나를 그 섬에 데려다 놓고 같이 잔을 기울이는 것은 상상속에서나 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입을 다무는 것이 혼란스럽지 않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카톡으로 만나야 하나. 유명 연애인이 자신을 복사하여 인공지능을 집어넣어서 다중 챗팅을 할 수 있게 하면, 그 연애인과 팬은 밤마다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지만, 실제는 생산된 복제품과 교류한 것에 불과하다. 채팅을 통해서 남녀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 것이 아니라, 채팅을 통해서 복사 재생산된 비듬과 비듬이 만나는 것과 다를게 무언가. '애들아 밥먹자' 이 소리에 Exit 버튼을 누르면 상대를 바로 살해해 버릴 수 있다. 상대는 자신이 문자상으로 살해된지도 모른다. 이별을 문자하나로 혹은 씹어버리는 것으로 해결해버릴 수 있다는 것은 복재된 타인은 비듬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찮은 것이다.
개인복제시대에서 친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받는다. 페이스북만 해도 친구가 하루에도 수십명이 연결되고 분리된다. 친구는 완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