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원한 지울 수 없어

by Rudolf

*


소녀는 바위에서 일어섰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이 소녀를 밀치듯 달려와서는 어지러이 휘날리는 소녀의 머리칼과 저고리 고름을 타고 소녀의 등 뒤로 흩어져 달아난다.

그와 동시에 그 바람에 맞서고 거스르며 억척으로 마주 달려오는 희미한 기운이 등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질긴 목숨의 기운이.

돌아서면 안 되는데도 소녀는 억지로 억지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바다의 거친 바람이 소녀의 등을 때린다.

소녀는 바다 대신 그림자 진 산맥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져 가는 산맥도 바다 못지않게 무서웠다.

잠시 후면 밤이다.

파도 속보다는 차라리 밤의 어둠이 더 저주스러울 것 같았다. 소녀는 그 저주가 자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지남철에 끌리듯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바다의 뒷바람이 도와주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바닷가 흙길을 소녀는 허청허청 걸어갔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유령의 길 같았다.

소녀는 남쪽으로 향했다.

왼쪽은 시퍼런 파도, 오른쪽은 울울창창한 산맥.

그 사이로 난 한길을 소녀는 걸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소녀는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밤의 그림자겠지.

그림자 숫자가 많아졌다. 점점 커져갔다.

사람들.

사람들 뒤로 먼지가 인다. 흙먼지.

차량이 오는 것 같았다. 우르릉거리는 소리.

군인들.

소녀는 길 한복판에서 몸이 굳어졌다.

국방군?

도망가야 하나?

공산당의 여자는 붙잡히면 안 되는데…….

그러나 소녀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범과 마주친 강아지처럼.

군인들이 처벅처벅 다가오고 있었다. 총부리를 아래로 위로 좌로 우로 겨누고서. 그 뒤로 먼지를 일으키며 따라오는 지프와 트럭, 그리고 탱크.

길은 순식간에 수많은 군인들로 뒤덮였다. 요란한 탱크 굉음과 함께.

소녀는 그래도 길 한복판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한 군인이 앞으로 나서서 연희에게 다가왔다. 조심스럽게.

군인이 한 손을 높이 든다. 그와 동시에 뒤쪽의 군인들이 멈춰섰다. 총구를 소녀에게 향한 채.

군인들 뒤에서 따라오던 지프, 그 뒤의 트럭과 탱크도 멈춰섰다.

갑자기 해 저무는 태백산맥 아래 비포장 해안도로가 긴장감과 적막감에 휩싸였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총구와 탱크의 포구가 한 점을 향해 조준되고 있었다.

산골 소녀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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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은 큰길로 뛰어나갔다. 찾아야 한다. 소녀.

길에서 찾지 못하면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라도 살펴봐야 한다.

연준은 마음이 바빠졌다. 맥박이 빨라졌다. 호흡도 거칠어졌다.

포장도로 한복판으로 나가서 섰다. 여기저기에서 울리는 클랙슨 소리.

연준은 앞쪽을 살피고 뒤로 돌아서서 멀리까지 발끝으로 서서 손바닥을 눈썹 위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좌우도 돌아다보았다.

차도에서 차창을 내리고 고함치는 사람들.

연준은 몸을 돌이켰다.

다시 절벽 쪽으로 뛰어갔다. 날이 완전히 어둡기 전에 절벽 쪽을 더 살펴야 한다.

그러나 연준은 절벽 끝에 가서 멈춰섰다. 물새 몇 마리가 연준의 머리 위를 돌아 절벽 아래쪽으로 활강하며 내려간다.

아니다. 소녀는 바다로 가지 않았다.

한 생명이 아니라 두 생명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연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지금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소녀가 살아야 한다.

연준은 확신을 가지고 다시 도로로 향했다. 지나가는 차들. 벌써 헤드라이트에서 빛의 줄기들을 내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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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은 북으로 다가오는 차량들 속에서 국방군을 보았고, 남으로 멀어져 가는 차량들 속에서 소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렇게 생각했다. 확신했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연준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연준은 달려가서 군인들 속에 섞이고 싶었다. 소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준은 저 멀리 남쪽으로 멀어져 가는 차량들의 뒤꽁무니를 향해 손을 흔들 뿐이었다. 마음이 아니라 실제로.

생명…….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여러 끔찍한 사고나 사태나 전쟁으로 한순간에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는 것을 연준은 보았다. 언론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그러한 반면 생명은 또 얼마나 끈질긴 것이냐.

단 하나의 여린 생명이 광기와 폭풍과 절망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악착같이 피어나는 것. 이 또한 너무도 많이 보아오고 알아왔던 일이다.

이제 완전히 어둠에 잠긴 동해안 육이오에서 어떤 희망을 보게 될지 연준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다 위에 뜬 별들을 바라보았다.

참 많다. 별들이.

투명한 공간만 같았던 그곳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시끄러운 도시 같았다. 한적한 동해바다가.

하늘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시가 되어 야간조명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연준은 땅에 거꾸로 서서 휘황한 하늘을 내려다보았다.

희망이 생겼다.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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