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무궁 지나도

by Rudolf

窮恨年年恨不窮 | 궁한연년한불궁

영원무궁 지나도 이 원한 지울 수 없어


며칠째 비바람이 몰아쳤다. 어느 누구는 봄장마 같다고 한다.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봄장마. 조금은 생소하다. 하긴 요즘은 봄여름갈겨울 구분 없다. 어느 계절이고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며, 가뭄도 연중 어느 때나 일어난다. 날씨까지도 복잡한 세상 따라가는구나…….

회사 사정이 좀 어렵게 되었다. 한 철만 지나도 유행이 새로 바뀌던 것이 무슨 복고풍이 불었는지 옛 스타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예 몇십 년 전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좋으련만 불과 1~2년 전 유행하던 패션이 다시 붐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그러니 새로운 디자인이 오히려 너무 눈에 튀어서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 같았다. 발 빠른 업체들은 일찌감치 이 기류를 감지하고 대폭 할인잔치를 해서 자금유통에 숨통을 틔워놨지만, 연준은 미적거리다 창고에 재고만 잔뜩 쌓인 채 비싼 은행이자와 창고비용만 물고 있는 판이다. 그래도 아직은 견딜 만하지만 이대로 몇 달 더 지속된다면 사업을 계속해야 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 원래 넉넉한 자금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보니 이런 경우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연준은 친척이 없다. 혈족이라곤 할머니 한 분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혼자만 남은 것이다. 아버지 쪽이나 어머니 쪽 어디와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고성에 가면 할머니의 먼 친척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할머니가 숨기고 싶었던 과거가 다 밝혀진다. 그것은 할머니가 원치 않을 것이다. 연준 역시 마찬가지다.

할아버지 쪽은 함경남도 함흥이라 했으니 이북오도청을 통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한들 무슨 이득이 있으랴. 할아버지는 양민들을 집단학살했다고 한다. 그것이 용서되거나 정상참작이 되는 일이겠느냐. 오히려 연준의 삶에 짙은 그림자만 더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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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쪽은 어떨까? 그러나 할머니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이름 석 자와 생년월일만 알 뿐이다. 돌아가신 날짜하고. 그밖에는 고향도 본도 모른다. 가족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할머니가 한두 번 흘려서 한 말밖에.

네 어머니도 저 북에서 내려와 떠돌다가 우리 집에 들어왔지.

아마도 전쟁고아로 자라 여기저기 헤매다가 아버지를 만난 것 같았다. 어머니 자신도 스스로의 뿌리를 모르고 있었을지 모른다. 혹 실종되었다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연준에게 피붙이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연준은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연준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왜 연준에게 결혼하라고 재촉하지 않았을까?

“할머니, 나 색시 얻으면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다니?”

“아니, 색시 얻으면 어떻겠느냐고?”

“좋지.”

“그냥 그 말뿐이야?”

“…….”

보통의 경우 홀 손자가 나이가 차면 본인보다도 집안에서 더 애가 닳지 않을까? 더군다나 마흔이 넘도록 총각이라면 매일같이 재촉할 것이다.

그러나 단 한번도 할머니는 결혼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물론 연준도 결혼에 대해서는 거의 내비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예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묻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 보통의 할머니라며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족보 없어, 할머니?”

“그런 거 필요 없어.”

“내 친구들 늘 조상 자랑하던데.”

“자랑할 게 있는 모양이지.”

“우리는?”

“…….”

혹시나, 혹시나 검은 피나 붉은 피가 우리 가족에게 더 이상 흘러가는 것을 할머니는 원치 않았던 것일까?

연준은 갑자기 소름이 확 돋았다.

내 피 속에는 무엇이 흐르는 것일까?

학살의 피? 빨갱이의 피?

나이 열여섯 소녀를 통해 그 저주받은 피가 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거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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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는 바위절벽 위에 올라섰다. 바다는 파랗지 않았다. 검푸른색. 아니, 오히려 검은색으로 부르고 싶었다. 어떤 징조라도 품은 듯 불길하고도 저주스러운 시커먼 색. 게다가 그 불길한 색은 우르르 소리를 몰고 절벽에 달려와서 부딪는 악귀 같았다. 연희의 식구들을 끌고 간 인민군처럼.

연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 저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저들이 끌고 간 아버지와 오빠 속으로.

그리고 바다는 또한 연희에게 저주를 퍼붓는 마을사람들이었다. 연희의 초가집 지붕에서 시커먼 연기와 함께 널름대며 퍼져가는 시뻘건 불덩이였다. 마당에 쓰러진 어머니와 할머니 위로 퍼부어지는 몽둥이였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차라리 나를 때려! 나를! 나를 때리란 말야!

연희는 바위 위에 주저앉았다.

이제는 눈물도 말랐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연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꽉 막힌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온다.

터져나온다.

어마이―!

할머이―!

그러나 우르르거리는 파도 소리에 묻혀 연희의 절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희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하! 하!

하악! 하악!

연희는 천천히 일어섰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저녁 바다에서 몰아치는 가을바람이 꽤 차가웠다. 얇은 무명옷만 입은 연희는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추위로 몸을 떠는 것이 아니라 절망과 죄책감에서 떠는 것이라고 연희는 느꼈다.

먼발치에서만 본 바다. 마음 한구석에서 환상의 나라처럼 여겨져 늘 동경했었던 푸른 바다. 그러나 실제로는 검푸른색에다 설렘이나 낭만이 아니라 절망과 죽음과 공포가 망망히 펼쳐져 있었다.

무서웠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사나운 이빨을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과도 같았다. 파도치는 바닷물은 액체가 아니라 말로만 들어왔던 무시무시한 상어 이빨처럼 뾰족뾰족한 가시들의 무덤처럼 보였다.

연희는 바위 끝에 가서 섰다. 단발머리가 어지럽게 흐트러지고 새하얗게 빨아입고 나온 저고리 고름이 연 꼬리처럼 휘날렸다. 연희는 저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는 작은 보따리를 바람이 채가지 못하도록 손으로 꽉 쥔 채 가슴 품에 바짝 붙여서 안고 있었다.

연희 몸이 흔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넘실거리는 파도의 이빨들.

연희는 눈을 감았다.

몸이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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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은 벌떡 일어섰다.

시간이 없다. 빨리 가야 한다. 소녀를 찾으러.

연준은 차에 올랐다. 또다시 고성으로 향했다.

연준은 연희의 목소리를 들었다. 절규를 들었다. 할머니를 부르고 어머니를 부르는 처절한 외침. 파도 소리에 묻혀 사라진 그 절규가 한반도를 횡단해서 연준의 귀로 파고든 것이다. 연준은 그 절규를 듣는 데 70년이 걸렸다. 너무 늦게 도착한 절규.

연준은 소녀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기다려!

조금만 기다려!

빨리 가야 한다. 늦으면 안 돼. 바닷가 그 절벽, 해가 지는 절벽.

가서 손을 잡아주어야 해.

희망이 있다고 말해 주어야 해.

늦으면 안 돼.

고성으로 들어선 연준은 7번 동해대로를 통해 올라가다가 제진검문소 조금 아래에서 좁은 비포장도로로 들어가 바닷가 절벽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녀는 그곳에 없었다.

그 대신 태백산맥의 검은 그림자가 절벽 끝에 걸려 있었다.

연준은 소녀를 찾아다녔다. 바위틈, 수풀 속, 구불구불 작은창자처럼 휘어지고 뒤틀린 바다 나무들 가지 사이, 검은 파도 위에서 일어나는 회색빛 물거품 속, 마구 밀려드는 사나운 파도 속, 저 멀리 주검들의 평야처럼 펼쳐진 바다 끝 희뿌연 절망의 공간까지 샅샅이 뒤졌다.

소녀는 없었다.

연준은 절벽 위에 섰다.

바다를 바라보았다.

천지의 공간 사이에, 바다와 육지 사이에 연준 혼자만 있었다. 소녀 없이.

저 아래에서 들려오는 절벽에 부딪는 파도 소리.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70년 전의 소리. 소녀의 울음소리.

그래, 들려오고 있었다.

너무 처절했다.

연준은 괴로웠다.

소녀 대신 절규했다.

할머니―!

소녀야―!

봄날 저녁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러나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연준은 두 손을 입에 갖다대고 다시 한번 외쳤다.

소녀야―!


[다음 화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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