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이루지 못하고

by Rudolf

*


연희는 마을이 보이는 얕은 산 중턱에 서 있었다. 마을이 저 앞에 내려다보이지만 내려갈 수는 없었다. 연희의 집에서는 낡은 초가지붕이 벌써 시뻘건 불덩이로 변해 검은 연기가 자욱이 번지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이 연희네 집 주변에 모여서 웅성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연희는 충격에 휩싸여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달려 내려가고 싶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소리치며 울 수도 없었다. 다만 입을 틀어막고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 장면을 더는 볼 수 없어서 연희는 돌아섰다. 집에서 가지고 나온 작은 보따리 하나만 가슴에 안고 숲으로 들어갔다. 산은 단풍으로 울긋불긋 화려했다. 일부 나무는 벌써 잎을 다 떨어뜨리고 가지를 앙상하게 드러내놓고 있기도 했다.

어디로 가지……?

가을이라지만 강원도 산골은 금세 겨울로 바뀐다.

몸에는 그 흔한 감자 하나 없이 손에 든 조그만 보따리가 전부다. 그 안에는 스케치북과 연필, 지우개 같은 것들뿐이고.

게다가 만일 마을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시신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저대로 그냥 놔둬야 하는 것인가……?

또 북으로 끌려간 아버지하고 오빠, 큰아버지…….


*


연준은 머리를 흔들었다. 이것은 16살 소녀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너무 비현실적이다. 마치 피카소 그림처럼. 아무리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막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주어질 수는 없다.

연준은 다른 상황을 그려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을 뒷산 중턱에서 빤히 내려다보는 소녀의 눈에 비치는 영상과 심정은 방금 상상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게다가 환경은 또 어떤가. 강원도 동해안 산골마을의 10월 중순은 울긋불긋 꽃대궐 뒤에 감춰진 엄혹한 지옥을 조금씩 내보이고 있었을 것이다.

연준은 한국전쟁사와 같은 관련문헌을 찾아볼까 생각했다. 요즘은 각 도시나 지역마다 역사를 발굴해서 기록해 놓은 문헌이나 저서가 많다. 그리고 주민센터나 구청 등에서 호적과 관련된 여러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고성 마을의 노인들을 통하면 과거의 인물이나 그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특히 양민학살사건이란 참극에 대해서는 증언이나 전언 등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보를 연준 혼자 다 찾아다니며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나 업체도 많이 있을 것 같았다.

고성 통일전망대에 올라 휴전선 대신 서쪽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연준의 머릿속은 이리저리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연준은 머리를 숙였다.

인민군 장교와 바람나서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철부지 소녀. 어느 누가 좋게 회상해 줄 것인가? 그 소녀 자신도 평생 그 사실을 암흑 속에 감춰놓고 살았는데. 더구나 그 소녀로 인해 한 가정이 쑥대밭이 되었으니, 아무리 수십 년이 지난 과거라 해도 어느 누가 깃털만큼이라도 두둔해 주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평생 그 대가를 치렀다.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그리고 그 결과가 연준 자신인데, 어찌 장본인인 연준이 그 사실을 캐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그 마을에 가서 사죄하고 빌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죄인의 자손으로서 말이다.

연준이 자신의 생명의 한 뿌리인 고성에 와서 두 발 딛고 이렇게 서 있기는 했으나, 정겨움이나 기대감이 아니라 오히려 두려움과 죄책감이 갑자기 몸을 휘감는 것이었다.

연준은 힘없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할머니…….


힣z17-1.jpg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엄청 막혔다. 주말도 아닌데 이렇게 차가 밀리다니. 사람들은 이토록 바쁘게 산다. 일이든 관광이든 다른 무엇이든, 또는 연준 자신처럼 처연한 마음이든 아니든. 그렇게 힘들게. 복작거리며.

그래, 다들 사연이 많겠지.

하지만 이들 중에서 70년간 비밀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70년도 살기 힘든데, 70년간 죄책감을 지니고 산다면 그 마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중에는 무뎌져서 무감각하게 되는 걸까?

그러나 할머니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강은수 소좌의 그림과 색 바랜 수건에 싼 가위는 오랫동안 숨겨두기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담긴 상자에는 최근에도 남몰래 열어보았던 흔적이 있었다. 아마도 아주 자주 열어보았을 것이다. 상자 가장자리가 여기저기 많이 해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오래된 흔적 같지는 않았다.

할머니는 그 상자를 열고 스케치를 꺼내보며 강은수 소좌를 바라본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가끔은 그 가위도 펼쳐보았겠지.

그리움이 담긴 스케치와 섬뜩한 느낌을 주는 녹슨 가위.

참 묘한 조합이다.

연준이 꽉 막혀 있는 도로의 앞차 붉은 꼬리등을 바라보고 있는 도중에 강원도 가을 붉은 산골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IMG_688211.jpg


연희는 자신의 고향 외면리 마을을 등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곧장 북쪽으로 올라가면 금강산이나 장전 항구가 나온다. 어른들에게 그렇게 들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동과 서와 남과 북, 그 중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또한 이제 밤이 되면 기온이 급격히 내려갈 것이다. 이 산골에서는 10월 말에 눈이 오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남쪽으로 갈까? 그러다 미군이나 국방군에게 잡히면? 인민군 소좌와 연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마을사람 누군가가 그렇게 이를지도 모른다.

북쪽으로? 강은수 소좌를 쫓아간단 말야? 말도 안 돼. 우리 식구를 다 죽였잖아. 그건 안 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절대로.

서쪽으로? 태백산맥을 혼자서 넘겠다고? 연희는 고개를 흔들었다.

동쪽? 자신이 도망쳐 온 그 마을로 다시 간단 말야? 붙잡히면 엄마나 할머니처럼 맞아죽거나 불태워 죽을 것이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이렇게 살아서 뭐해? 나 혼자 어떻게 살아? 엄마 할머니 모두 내가 죽인 건데, 나 혼자 어떻게 사느냔 말야. 아버지 오빠도 모두 끌려갔잖아. 친척들도 다 끌려갔어.

연희는 이렇게 생각하는 중에도 저도 모르게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산 바로 아래의 비탈에 일구어 놓은 밭 가장자리를 돌아 남쪽 검장리 쪽으로 걸어갔다. 가능하면 마을 쪽으로는 가지 않고 산비탈 아래쪽으로 멀리멀리 돌았다. 중간에 멀찌감치에서 사람 그림자를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나무숲에 몸을 감추어 사람들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연희는 사천리 밖으로는 나가본 적이 없다. 장날에 어른들이 읍내로 갈 때 오빠는 종종 아버지나 큰아버지를 따라 다녀오곤 했었는데도 연희와 같은 여자애들에게는 대부분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람들 말은 많이 들어보아서 어디쯤 가면 어떤 광경이 나오는지는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저 남동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서 사천리 아래 제진리로 가면 바닷가로 나갈 수 있다. 그렇게 들었다. 연희는 산비탈에 올라 멀리로 바다를 바라다보기는 했지만 아직 바닷가로 나가본 적은 없다.

연희는 사천리가 어디이고 제진리가 어디쯤인지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형을 살피고 해 그림자를 보면서 짐작 가는 대로 들은 대로 조심조심 남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희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저쪽 멀찍이 산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주변에 숨을 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저 급히 주저앉을 뿐이었다. 주변에 높게 자란 풀들이 자신을 감춰주기를 바라면서.

연희가 숨을 죽이고 미동도 않은 채 앉아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

처벅처벅…….

연희는 두 눈을 꼭 감았다.

스무 걸음 남짓 거리까지 다가와 지나가는 발소리들.

건장한 남자들의 웅성거림. 게다가 철그럭철그럭…….

군인들 수통이나 총들이 흔들리고 부딪는 소리…….

연희는 저도 모르게 몸을 더 숙였다. 그러다가 가까이에 있는 풀에 닿은 모양이다.

스스스.

풀 스치는 소리.

연희는 숨이 탁 막혔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이런 데 반동놈들 숨어 있는 건 아니겠지?”

우악스런 목소리.

연희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뒤로도 온갖 욕설을 쏟아내며 군인들은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연희는 한 번 더 그런 상황을 맞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감.

군인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연희는 풀숲 사이에서 쪼그려 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고개라도 슬며시 올리면 ‘잡았다!’ 하고 누군가가 확 멱살을 잡고 들어올릴 것만 같았다.

연희는 울음이 터져나오려 했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간신히 참았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다 일어나려니 몸이 굳어서 말을 듣지 않는다.

천근만근 몸을 들어올리듯 연희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군인들이 간 방향은 무서워서 보지도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한참 동안 연희는 간신히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도 혹 누군가가 근처에 숨어 있을까 살피면서 걸음을 조심조심 내딛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 덕분에 발걸음도 빨라졌다.

한참을 걸어가서 산비탈을 돌자 갑자기 저 멀리로 바다가 보였다. 아마도 어른들 말대로 사천리를 지나 제진리로 나간 것 같았다. 그곳까지 가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말로만 듣던 바다. 끊임없이 펼치진 검푸른 물결. 하늘도 새파랗게 높았고, 그 파란 공간 저 멀리로 하늘이 색이 옅어지면서 내려앉으며 검은색 바다와 만나고 있었다.

바다를 본 연희는 갑자기 죽고 싶어졌다.

저 바닷가에 가면 절벽이 있겠지. 그곳으로 가자. 가서 몸을 던지면 된다.

그러나 날은 아직 밝아 죽는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갑자기 차가운 바닷바람이 연희의 얇은 흰 저고리 앞섶으로 파고들었다.


힣힣힣151.jpg


연준은 인천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면서 도로 양옆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파트나 고층건물의 불빛들을 보며 갑자기 미래도시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소녀 연희를 따라 고성의 가을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면서 헤매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지, 미래로 온 것이다. 70년 뒤의 세계로.

꽉 막힌 퇴근시간의 도로. 연준의 마음은 그보다 더 막혀 있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바깥 날씨는 따스한 봄날이다. 그러나 연준은 철보다 이른 강원도 산골의 늦가을 저녁 바닷바람에 가슴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소녀.

그는 어떻게 그 가을을 벗어날까? 또 겨울도.

가슴으로 끝이 날카로운 창이 날아와 꽂혔다. 깊이. 아팠다. 등까지 파고들었다.

아, 너무 아프다.

할머니.

그 소녀.

연준은 차창을 열었다. 옆으로 지나가는 낡은 트럭의 덜컥거리는 소리. 그래도 살 것 같았다.

송도 쪽으로 다가가자 길이 많이 뚫렸다. 저 멀리로 송도의 화려한 불빛들이 보인다. 저곳도 또 하나의 미래도시다.

연준은 동해안 과거에서 현실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서해안 미래로 들어갔다.


[다음 화로 계속]

이전 05화밤이면 밤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