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乃愁人耳獨聽 | 하내수인이독청
연준은 납골당으로 갔다. 가위와 수건을 잘 포장해서.
할머니 앞에 섰다. 그 옆에 강은수 소좌.
연준은 강 소좌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아직은 어색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다. 할아버지라고 하는 강은수, 아버지 강수연. 그리고 연준 자기 자신.
강은수, 강수연, 강연준.
지금 이들 삼대가 함께 섰다. 할머니와 함께. 아니, 그 소녀와 함께. 그 소녀는 연준이 부산에서 찾아 데리고 왔다. 아미산 공동묘지에서. 이제는 한 어미가 된 소녀를. 그 아기와 함께.
하 참, 이처럼 아이러니한 모임이 또 있을까?
언젠가 연준이 가위를 가지고 장난 놀다 손을 찔렸을 때 할머니가 기겁을 하며 뱉은 말.
- 니 어미처럼 죽고 싶어?
이 말로 인해 연상되는, 참으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일.
연준은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워버리려 할수록 자꾸만 떠오르는 끔찍한 생각들.
혹……, 만일에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머니의 죽음이 가위와 관련이 있다면……, 그렇다면……, 가위에 묻은 피는 어머니의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왜……?
게다가 아버지는 실종되었다. 실종된 사람의 피가 가위에 묻어 있다……. 무슨 뜻인가?
연준은 할머니 유골함 앞에서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소녀 연희를 좇아 긴 여행을 했다. 연준은 실제로 소녀를 느꼈고 들었고 보았다. 소녀와 동행하며 소녀의 절규를, 소녀의 방황을, 소녀의 절망을, 소녀의 생명력을 체득했다. 또한 소녀가 생산한 새 생명의 울음소리도 들었다.
이제는 할머니 차례다. 할머니와 동행해야 한다. 할머니의 삶을 연준이 직접 겪어야 한다.
거래처 윤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세도 지긋하고, 제법 큰 기업을 운영하는 업계의 큰 거물이다. 업계 모임에서 여러 번 만나 인사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날 때마다 반갑게 대해 주고 가끔 등도 두드려 주고 해서 연준으로서는 밉보이지는 않았다 생각하고 있었던 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직접 연준한테 전화할 리는 없다. 엄청난 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한.
불길한 일인가……?
“잘 지내시오? 좋은 소식 있다고 들었소.”
“네, 무슨……?”
“허허, 창고 재고 다 처분했다면서? 요즘 경제도 어려운데 다행이오. 그동안 열심히 살아서 복 받았지 뭐.”
“그냥 싼값으로 넘긴 겁니다. 회사가 어려워서.”
“잘했어, 잘했어. 요즘 그렇게라도 해서 살아남아야 해. 아, 그리고 내가……, 음, 하나 이야기할 게 있는데……. 아 참, 조모님께서 타계하셨다고?”
“아, 예, 두어 달 전에…….”
“흠, 그 얘기도 내 들었소. 손 사장을 애지중지 키워주셨다고 했는데……. 그래서 지금 가족도 없이 혼자 산다고 들었소만……. 아, 서론이 너무 길었네. 실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양반이 나이 마흔 넘은 조카딸이 있다는 게요. 한번 결혼했다가 실패했다는데, 30대 초반에 그랬다는 게야. 그리고 지금까지 혼자라는데, 여자는 꽤 참하다더군…….”
이태리에서 성악 유학을 했다는 여자. 그곳 남자와 만나서 결혼을 하고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성격과 문화 차이로 몇 년 동안 싸움만 하다 결국 헤어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딸은 처음에는 한국에 데려와서 키웠으나, 남자 쪽 집안에서 집요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이태리로 보냈다. 그 대신 (아마도 딸을 포기하는 대가로) 상당한 돈을 받은 모양이다. 그 당시 부친이 하던 사업이 갑자기 어렵게 되어 그 돈은 부친에게 가고, 여자는 대학에 강의 나가다가 최근 뒤늦게 전임강사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 동안 딸의 인물이나 경력이 너무 아까워 부친이 여기저기 선을 보게 하려 했던 모양인데 그때마다 여자가 거부해서 한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다 나이가 마흔을 넘어서니 부친이 강제로라도 사람을 찾아주려고 알아보던 중 어찌어찌하여 가까운 지인을 통해 윤 회장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 손 사장을 추천했소. 사업이야 지금 좀 어렵다 해도 손 사장이 성실하니 곧 크게 일어설 거요. 게다가 가족이 없다고 하니, 이거 좀 실례되는 말이 되기는 하겠지만 내 솔직히 말하리다, 저쪽에서 오히려 더 나서는 게요. 저 집안에서는 성사만 잘 되면 더준을 크게 키워줄 심사도 있는 모양입디다.”
연준은 며칠 동안 고민했다. 쉽게 말하면 데릴사위가 되라는 것이다. 연준 자신에게는 아무 피붙이가 없으니 다루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겠지. 뭐 사실 연준으로서도 손해날 것 없는 거래다. 그러나 외국유학을 하고 애도 하나 낳은 여자, 그것도 이태리 남자하고 살았던 사람이 연준 정도로 만족할까? 집안도 그렇고 학벌에 현재 직업도 화려한 여자가 연준 같은 피라미하고 놀아줄까? 부모야 딸의 나이가 있어서 마음이 급하다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속마음은 어떨 것인가…….
마음이 싱숭생숭.
사실 연준으로서는 이렇게 살다가 정말 장가도 못 가보고 몽달귀신 되는 것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리 되면 우리 가문은 끝나는 거다.
뭔 가문씩이나…….
어떻든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우울했다.
할머니 과거를 잘 몰랐을 때는 그깟 가문이 뭐 대수냐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연희 그 소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게 되고부터는 그 기막힌 사연을 통해 삼대로 이어진 가문이 연준에게서 끝난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해지곤 했다.
그냥 한번 보는 거지 뭐. 안 되면 그만이고.
연준은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도 왠지 위축이 되는 것이었다.
요즘 세상 외국유학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대학교수라는 것도 뭐 그렇고 그런 거고, 집안은 좋다고 했지만 삼성쯤 되는 것은 아닐 테고…….
아차, 성악이라고 했나?
사실 연준은 음치다. 지독한 음치. 흔히 겸손하게 말하는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음치. 지금껏 애국가와 교가 말고는 옛 유행가 몇 개밖에 부를 수 있는 게 없다. 최근에 금순이 노래 하나가 추가되긴 했지만. 게다가 그런 노래조차 연준이 부르면 옆 사람 다 도망간다. 친구들이나 업계 모임을 통해 노래방에 여러 번 끌려다녔지만 얼굴만 화끈하게 되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터였다.
웃긴다. 음치와 성악가.
아서라. 클래식의 클 자도 모르는 주제에…….
연준은 그렇게 시원하게 정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연준에게 갑자기 대전에 갈 일이 생겼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한 거래업체에 들렀다 가야 했다.
연준이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가서 일을 보고 나왔는데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너무 오래된 고물차라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을지 몰라 걱정하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차를 고칠 시간이 없어서 KTX를 타고 가기로 했다.
대전까지는 서울역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사실 시간만 맞춘다면 승용차 타고 가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대전에 가서 택시 타고 이동한다면 시간적으로도 승용차하고 큰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승용차 몰고 가며 졸음과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연준이 KTX에 올라 좌석에 앉았다. 창가 좌석에는 중후해 보이는 남자가 먼저 타서 앉아 있었다. 연준은 자리에 앉으면서 서로 얼굴이 마주쳐 까딱하며 머리를 숙였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머리를 살짝 숙인다.
열차가 출발하고 나서 얼마 지나자 창밖을 바라보던 남자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낸다. 연준은 무심한 척 앞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옆좌석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연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남자는 앞 의자 등받이에서 간이탁자를 내렸다. 그리고는 노트를 펴서 무엇인가를 쓰는 것이었다.
연준이 무심코 바라보니 한자, 아니 한문이었다. 한자를 길게 내려쓰는 것이었다. 마치 족자나 병풍의 한시처럼. 연준은 사실 한문은 잘 모른다. 한자야 생활에서 쓰는 몇 안 되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것이 문장으로 이어지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읽기도 힘든 것이다. 그런데 남자가 아래로 거침없이 내려쓰는 한자는 달필이었다. 보기에도 근사했다.
“잘 쓰시네요.”
연준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나오고 말았다.
남자가 돌아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갑자기 연준은 머쓱해져서 머리를 살짝 숙이며 말을 했다.
“아, 죄송합니다. 방해를 해서.”
“별 말씀을요. 아닙니다. 괜히 옆에서 신경 쓰이게 해드린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남자는 미국에서 온 교포라고 했다. 십 몇 년 전에 한국에 왔다 간 뒤 오랜만에 다시 왔다고 한다.
“미국에 계시면서도 한자를 잊어버리지 않으신 모양이네요.”
“그냥 간간이 심심하면 써보는 거지요 뭐. 저는 한시를 좋아하는데, 알고 보면 한시가 꽤 운치가 있어요.”
“지금 쓰신 건 어떤 시입니까?”
“아, 이건…….”
남자는 노트를 들어 보이면서 말을 잇는다.
“두 가지를 썼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최치원 선생의 것이고, 아래쪽 것은 이홍위가 쓴 ‘자규시’라는 겁니다.”
“최치원은 들어봤지만 이홍위는 처음 듣는 사람인데…….”
“아, 제가 잘못 말을 했네요. 단종, 단종 아시죠?”
“물론이죠. 단종. 세조한테 죽은…….”
“맞아요. 단종의 이름이 이홍위(李弘暐)입니다. 왕위에는 3년 있었고, 17살에 죽었죠.”
단종애사(端宗哀史). 소설가 이광수가 쓴 소설.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에 1년간 연재되었다.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들은풍월로 아는 지식이다. 그 책을 바탕으로 해서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지.
“열일곱 살 어린 나이인데 그런 한시를 썼나요?”
“단종은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는 훨씬 영특한 왕이었습니다. 아까운 분이었죠.”
남자의 눈이 반짝인다.
“저 한시는……?”
“아, 이 한시. 이것은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쓴 시인데, 아마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던 것 같습니다. 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모르지만, 이 시에는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 그 심정이 절절히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월로 유배된 지 4개월 만에 사약을 받았거든요.”
연준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종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참담했다.
“이 시는 유배 길에 자규루(子規樓)에서 지었다고 해서 자규시(子規詩)라고 하는데, 자규는 피를 토하면서 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 또는 접동새를 말합니다. 자규는 두우(杜宇)라고도 하고, 두우는 두견새를 말하지요. 사실은 소쩍새와 두견새는 다른 새이지만, 옛사람들은 두루두루 같이 썼던 모양입니다. 좀 복잡해요.”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한다.
“단종이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나타낸 시로군요.”
“그렇죠. 사실 제목보다 시가 더 슬픕니다. 아니, 처절하다고 해야겠지요.”
이렇게 해서 남자는 시에 대한 강의를 길게 이어나갔다.
여기에 그 시를 옮겨본다.
一自冤禽出帝宮 |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 궁에서 나와
孤身隻影碧山中 | 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그림자 되어 푸른 산을 헤매는구나
假眠夜夜眠無假 | 가면야야면무가
밤이면 밤마다 잠은 이루지 못하고
窮恨年年恨不窮 | 궁한연년한불궁
영원무궁 지나도 이 원한 지울 수 없어
聲斷曉岑殘月白 | 성단효잠잔월백
새소리 끊긴 새벽 산마루 달빛은 창백한데
血流春谷落花紅 | 혈류춘곡낙화홍
봄 계곡에 지는 꽃은 피같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먹어 애달픈 소리 듣지 못하고
何乃愁人耳獨聽 | 하내수인이독청
어찌 수심 깊은 내 귀에만 밝히 들려오는가
대전에 다녀오고 나서도 며칠 동안 이 시가 연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치 그 소녀 연희, 아니 할머니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 같았다. 고성의 심심산골에서 나와 남한 땅 이곳저곳을 헤매며 설움과 원망에 울고 그리움과 애처로움에 마음을 적신 한 여인의 일생.
연준은 이 시를 붓글씨 잘 쓰는 분을 소개받아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유리액자에 담아 거실에 걸어놓았다.
참으로 읽을수록 애처롭고 또한 할머니 생각이 절절히 떠오르게 하는 시였다.
아니, 할머니가 아니라 그 소녀 연희 말이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