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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준은 또다시 자신이 태어난 성남의 주소지로 갔다. 물론 옛 그림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쭉쭉 뻗어오른 고층 아파트. 할머니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아파트의 긴 그림자만 석양의 거리에 드리워져 있었다.
이 황혼의 어스름 그림자 속 어딘가에서 연준은 태어났다. 그곳에서 3년을 살고 또 다른 성남으로 이사했다. 할머니는 그 뒤에도 몇십 년을 그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혹 누구를 기다린 것일까?
오지 않는 아들을?
하지만 아들은 죽었다. 실종이 아니라. 가위에 피를 흠뻑 묻힌 채.
돌아오지 않을 아들을 기다리며 어머니는 피 묻은 가위를 수건에 싸서 고이고이 간직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기다린 것이다.
죽은 아들을.
살해된 아들을.
왜?
왜……?
할머니…….
연준의 눈에 눈물이 돋았다.
아들의 피 묻은 가위를 거두는 어미.
그 가위를 버리지 않고 수건, 탄식처럼 새하얀 수건에 싸서 품에 감추는 어미.
연준은 갑자기 깨달았다.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가위의 비밀을.
몸서리치는 애절한 비밀. 결코 세상에 알려서는 안 될 처참한 진실.
할머니처럼 연준도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끔찍한 진실.
참척(慘慽).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
그 일을 부모가 만들어야 한다.
이제 연준은 그 어미를 대신해 땅을 파야 했다.
아파트 그림자보다 더 새카만, 칠흑 같은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암흑의 어느 한 지점에.
아들의 시신을 묻는 것은 어미의 몫으로 남겨두자.
별 없는 밤 아무에게도 들킬 필요 없는 절망의 마음을 그 무시무시한 흙구덩이에 쏟아붓게 하자.
어둠 속에서 힘껏 치켜들어 아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억겁 불귀의 쇠붙이를 내리꽂은 그 손, 남은 평생 후회하며 가슴을 칠 그 손으로 봉분 없는 아들의 무덤을 만들게 하자.
연희 자신의 힘겨운 길만큼이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을 며느리의 목숨을 앗아간 아들.
자신의 피붙이보다 이 경우 그 험악한 세월을 견뎌낸 한 여인의 삶이 연희에게는 더 소중했으리라.
부산 피난민촌에서부터 모진 시간들을 함께 견뎌낸 아들보다 눈물도 흘리지 못할 만큼 고단했을 한 여인의 삶이 연희에게는 더 값지게 보였을 것이다.
아들보다 더 아끼는 며느리의 생명을 취한 자에게 연희는 스스로 심판을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들의 피가 묻은 가위는 설명할 수 없다.
고성 땅에서 도주한 사랑, 또한 그곳에서 유골로 발견되기도 하고 자기 눈앞에서 불에 타 죽기도 한 사랑하는 가족들. 이와 같은 상실의 지옥을 겪으며 살아온 연희에게는 더 이상 생명의 상실은 용인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그래서 남의 생명을 취한 자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했을 테지.
법보다는 연희 자신의 손으로.
완벽한 밤이 거리에 내리고 휘황한 불빛들이 건물에서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거리를 달려 연준은 집으로 돌아갔다.
가슴이, 손이 덜덜 떨리는 채.
할머니…….
연준의 눈에서는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집에 막 도착했는데 전화가 왔다.
윤 회장이었다.
“아, 나 윤이오. 저녁시간 내가 방해한 거요?”
“아닙니다. 이제 막 집에 들어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전화 드렸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일이 있어서…….”
“음음음,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험. 아니, 그런데 내가 좀 이상하게 됐어. 음…….”
“저…….”
“허 참, 지난번 내가 이야기한 집 있잖소. 왜 그 이태리 유학하고 왔다던…….”
“아, 예 예 예.”
“손 사장이 답이 없기에 나도 그런가 하고 말았는데, 그쪽에서 손 사장에 대해 좀 알아본 모양이오. 기분 언짢게 생각지는 마시고……. 아니, 이거 참……. 그쪽에서 나한테 다리를 잘 놓아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이거 내가 뭐 중매쟁이도 아니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