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이야기
4
방과 후, 송우는 축구 골대 뒤 벤치에 앉아 있었다. 꼭 소년을 기다리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요즘 늘 그곳에 가서 앉으니까. 그 사실은 학교에서도 다 안다. 처음에는 모두 송우가 축구부 아이들 운동하는 거 구경하는 것으로 여겼다가 나중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집에서도 안다. 온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다. 하늘에서 왔다는 소년까지 알 정도니까. 송우는 자신이 하늘나라에서도 유명인사가 된 모양이라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나도 참 요란하게 사는구나…….
오늘 축구부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어제 시합이 있었으니까 오늘은 쉬는 모양이다. 시합에 지고서 쉬는 게 그리 편치는 않을 것이다. 하긴 시합이야 늘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거니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송우는 그것이 바로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애들은 애들답게. 우리 팀이 시합에서 지면 속상할 줄도 알고, 시합에서 진 아이들과 마음을 함께할 줄도 알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다. 그런데 송우는 레슬링 스파링에서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 별 감정이 없었다. 그렇다고 레슬링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송우는 또래에 비하면 체격이 다소 큰 편이지만, 그렇다고 거구는 아니다. 기운은 같은 체격에 비하면 조금 달리는 느낌이고. 하지만 송우는 그런 것들 다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냥 레슬링을 하면 하는 것이고, 안 하면 마는 것, 늘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공부도 그랬다. 학원에 가서 배우거나 혼자서 이것저것 뒤져가며 공부하거나 모두 그게 그거였다. 피아노는 어렸을 때 일찌감치 기초는 다 끝냈고, 더 이상 배우고 싶지 않던 차에 바이올린 선생님을 소개받아 그것도 웬만큼은 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싫었다. 집에서 아무리 야단쳐도, 학교에서 닦달을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 송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연애’도 그렇다. 반 아이들은 선희가 송우에게 다가가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양인데, 송우로서는 선희에게 고맙다는 것 외엔 특별한 감정이 없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연애를 실컷 할 텐데 지금부터 그런 데 휘둘려서 소문내고 싶지 않았다. 그 애도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송우에게 먼저 다가와서 말 붙이고 하지만, 혹시라도 ‘연애’ 감정이 있었다면 오히려 공개적으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다른 애들한테는 송우에게처럼 그렇게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송우는 그 부분이 좀 신경이 쓰였다.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그런데 오늘 오후수업 때 선희의 세정제를 빼앗아 버린 뒤 그에 대해서 송우는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선희나 다른 어느 누구도 송우에게 와서 그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았고. 설령 물어보았다 해도 송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는 선희가 과학실에서 나오다가 송우를 보았다고 했다. 오늘은 어떨까? 지금도 어디선가 송우를 보고 있을까? 화가 나 있을까? 그러나 송우는 그에 대해서 더 이상은 생각지 않기로 했다. 변명할 수도, 고백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 소년이 정말로 나타날까 하는 생각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 애가 오늘도 나타날까?
송우는 자신이 소년이 ‘온다’고 하지 않고 두 번씩이나 ‘나타난다’고 표현한 것이 문득 생각났다. 재미있다. ‘온다’고 해도 될 걸 왜 ‘나타난다’고 했을까? 핸드폰으로 ‘나타나다’를 찾아보니 몇 가지 뜻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소년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나와서 눈에 뜨이다’가 가장 그럴듯했다. 그리고 그 예문으로 ‘별이나 달이 나타나다, 증인이 나타나다’가 나와 있었다.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이 그냥 보이거나 다가오는 것보다는 특이한 경우 또는 무엇인가 특별한 의미를 두고 싶은 사람이 보이거나 다가오는 것을 뜻하는 듯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소년은 ‘온다’가 아니라 ‘나타난다’가 적합할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기대감이나 호기심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소년이 나타날 시간쯤 되어간다.
송우는 기분이 묘했다. 한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로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송우 자신이 ‘보여질’, 아니 ‘보일’ 것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으로 마음이 조금 들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 ‘보여지다’와 ‘보이다’에 대한 것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사람들이 흔히 ‘되어지다’나 ‘보여지다’는 말을 쓰고 있는데, 어느 분이 그에 대해 비평, 아니 비판을 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지다’는 동사나 보조동사, 보조형용사 또는 접미사로 사용되고 있는데, ‘되어지다, 보여지다’에서 ‘지다’는 보조동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일본어식 표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우리말로 그냥 ‘되다, 보이다’로 하면 될 것을 의식적으로 너무 강조하다 보니 국적 불명의 표현이 된 듯하다는 것이다. 또한 소유격인 ‘의’가 너무 많이 사용되는 것도 일본식 표현의 잔재일 수도 있다고 한다. 송우로서는 너무 어려서 그러한 문화적, 어법적 문제를 판단할 수는 없으나 뭐 일본식 표현의 잔재라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그렇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직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선희가 어디에선가 자신을 보는 것은 아닐까? 송우는 문득 과학실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교실 쪽도. 그 주변도 둘러보았다. 저 어디선가 선희가 내다보고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교문 쪽을 돌아다보았다.
앗! 소년이 벌써 교문으로 들어와 운동장 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언제 나타난 거지?
송우는 소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틀림없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학교 정문은 물론이고 울타리 너머로는 지나가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 하늘에서 왔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축구 골대나 벤치 옆에서 짠하고 나타나지 않고 왜 꼭 정문에서 나타나 걸어오는 것일까? 여기까지 오는 게 귀찮지도 않은가?
송우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다.
하긴 이 상황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이냐? 소년 자체가 비논리적인데.
송우는 머리를 살짝 흔들고 소년이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년의 걸음걸이는 곧바르고도 일정했다. 서두르거나 일부러 느릿거리거나 하지 않고 가볍고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마치 땅과의 마찰 없이 걷듯이. 그러나 소년의 그림자나 발 딛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땅을 밟고 걷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해서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맞네. 우주인이 아니라.
송우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어제의 공중부양은 잊어버리자.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하니까. 도만 많이 쌓으면. 그러니 아마도 어디에 가서 좀 특이한 수련이라도 쌓은 것으로 치자. 인도나 티베트 같은 데 가면 그런 사람들도 꽤 있을 테니까. 그것 말고 소년이 송우의 마음을 읽고 말하기도 전에 미리 답하는 것은 텔레파시 같은 종류로 설명하면 되겠고.
소년은 어제처럼 밝은 표정으로 송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잘 있었니?”
소년이 묻는다. 그리고는 어제처럼 송우 옆에 앉는다. 송우는 혹시나 하고 소년의 엉덩이와 벤치 사이를 눈여겨보았다. 그러나 평범했다. 송우는 자신의 엉덩이 쪽을 바라보고 나서 비교해 보았다. 다를 것이 없었다. 송우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맞구나.
“맞아. 나 사람이야.”
“…….”
또 시작이군.
“그래, 오늘 다시 시작하자.”
송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게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잘하는 거야. 그렇게 호흡을 조절하면 마음도 안정이 돼.”
송우는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짜증이 났던 것이다. 송우로선 거의 하지 않던 행동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다.
“너 뭐냐? 지금 나한테 뭐 하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살아온 중에서 첫 번째 감정표현이네.”
“뭐라고?”
“지금처럼 그렇게 해.”
“무슨 말이야?”
“남들처럼 살아.”
“뭐라는 거냐고?”
“앉아서 얘기하자.”
어이가 없었다. 송우는 선 채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일어날까?”
송우는 한숨을 푹 쉬며 도로 앉았다.
“오늘은 어땠니?”
“뭐가?”
“학교.”
“잘 알잖아. 내 마음속도 알고 있으면서.”
“아냐. 그건 잘 몰라.”
“장난하지 마.”
“정말이야. 나는 네가 나한테 하려는 말만 알 수 있을 뿐이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하려는지 그런 건 몰라. 다만, 네가 나한테 말하려고 하는 것, 그것만 알 뿐이야. 그것도 네가 말하기 직전에 마음먹은 것만.”
어이가 없었다. 공중부양도 하고 남이 말하려는 것도 미리 알아서 대꾸하고 그래서 엄청난 초능력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더니 기껏 그 정도뿐이었어? 어이구, 그러셨구나. 하긴 뭐 그 정도도 대단하다. 우리는 그런 능력 없는데. 그런데 여긴 왜 나타나신 거야? 그 정도 능력 자랑하시려고?
“그런 건 아냐.”
뭐?
“너한테 해줄 이야기가 있어서 온 거야.”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냐 하면……, 원래는 너 스스로 깨닫게 해주려 했는데, 네가 보기보다는 성격이 급한 것 같아서.”
얼레?
“얼레가 아니라 걸레.”
?
“알 텐데? 잘 알고 있잖아. 내 말 맞지?”
“…….”
“네가 걸레를 사용한 짓 말이야.”
“…….”
송우는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세밀히 살피듯이. 너 누구야? 이름이 뭐야?
“응, 내 이름은 양심이야. 네 마음속에 있는 양심.”
송우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난 거리낄 거 없어.”
“그럼 왜 오늘 선희 손세정제 빼앗았니?”
송우는 갑자기 숨이 탁 막혔다.
“말해 봐.”
송우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자, 여기 너희 반 아이들 눈이 다 너를 쳐다보고 있잖아.”
어디……?
“어디긴 어디야. 이 앞에 다 있잖아. 안 보여, 저 눈들?”
소년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빈 골대와 바람만 지나가는 넓은 운동장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저 눈들이 보이는데, 너는 안 보이는 모양이구나. 양심에 커튼이 쳐져서 그래. 커튼을 젖혀 볼래?”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소리긴. 걸레 이야기를 하는 건데.”
걸레……?
“그래, 걸레. 네가 걸레로 다 닦았잖아. 한 달 전에 말야. 그래도 모르겠어?”
걸레…….
“맞아, 그 걸레.”
그 걸레…….
한 달 전 과학시간에 학생들이 모두 과학실에 가서 두 조로 나뉘어 손 세정제를 만들었다. 한 조는 액체 형태, 또 한 조는 젤(gel) 형태로. 그때 액체 조는 60% 에탄올과 정제수와 글리세린을 준비했고, 젤 조는 에탄올과 정제수는 똑같지만 글리세린 대신 알로에 젤을 준비했다. 에탄올은 바이러스나 세균을 응고시켜 죽이는 역할을 한다. 글리세린은 보습력, 즉 손을 촉촉이 적셔주면서도 끈적끈적하게 해주는 용도고, 정제수는 에탄올을 희석시켜 준다. 이때 에탄올의 농도를 너무 높여주면 오히려 바이러스에 막이 생겨 에탄올이 침투하지 못해 효과가 없어진다. 더군다나 에탄올이 너무 많으면 피부에 자극을 주기 때문에, 에탄올의 농도는 62%가 가장 좋다. 즉, 에탄올과 글리세린의 비율이 6:4 정도 되는 것이다. 여기에 라벤더 오일 등 약간의 향내 나는 액체를 떨어뜨려 주면 냄새가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에탄올을 희석시켜 주기 위해 사용하는 정제수는 약국이나 전문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증류수와는 다르다. 정제수(purified water)는 필터를 거쳐 나온 물로서 미네랄 등은 포함되어 있는 대신 보통의 물에 녹아 있는 이온이나 고체입자, 미생물, 유기물, 용해된 기체 등을 포함한 모든 불순물이 제거된 상태의 물을 말한다. 그 반면에 증류수(distilled water)는 끓여서 나온 증기를 모아 식힌 것으로서, 글자 그대로 물 분자 외에는 아무런 불순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정제수는 냄새나 맛이 없으며, 약품의 용제나 시약 등으로 사용되지만, 주사용으로는 오직 증류수만 사용해야 한다.
한 달 전, 송우는 과학실 당번이어서 먼저 그곳에 가서 위의 재료들을 준비해 놓고 과학실도 정돈했다. 그리고 정제수 뚜껑을 열다가 실수로 바닥에 모두 쏟아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당황한 나머지 수돗물로 그 통을 채워놓았던 것이다. 그런 뒤 쏟아진 물은 대걸레로 깨끗이 닦아놓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선생님에게 정제수 쏟은 것을 말하려다가 공연히 일을 크게 벌이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세정제를 다 만든 뒤에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플라스틱병에 담아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나누어 가졌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세정제가 자랑스러운지 여러 번 손에 바르고, 서로 발라주기도 하고 그랬다. 그뿐만 아니라 교무실에 가서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나누어 드리고, 다른 반에 가서 떠들썩하게 자랑하며 나누어주고 손에 발라주고 그랬다.
하지만 송우는 교문 밖에 나오자마자 몽땅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렸다.
송우는 멍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생각나니?”
송우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머릿속이 텅 빈 채 진공상태 같았다.
“실험실 사고가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지? 과학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으니까. 초등학교 과학실이라고 해서 커다란 연구소와 다를 것 없어. 너는 정제수 대신 수돗물 사용한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겠지만, 만일 네가 정말로 연구소에서 실험하다가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봐. 너 때문에 엄청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거야.”
소년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아직 양심이 반은 살아 있어. 그때 그 일이 마음에 걸려 그 이후 학교 외에는 다른 학원에는 아무 데도 안 가고 너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었잖아. 지금까지도.”
소년의 눈이 빛났다.
“그래서 내가 찾아온 거야. 네 잃어버린 반쪽의 양심을 찾게 해주려고.”
소년은 일어났다.
“나는 이제 저 위로 올라갈 거야. 다시는 너한테 내려오지 않을 거고. 그렇지만 이제부터 네가 할 일은 잘 알고 있을 거야. 기대할게.”
소년은 뒤돌아섰다.
“선희 그 애 참 착한 소녀다.”
소년이 뒤돌아보며 미소지으면서 말을 한다.
“잘 해줘.”
소년은 다시 뒤돌아서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런데 네 발째부터는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 그리고는 하늘 계단을 걸어 올라가듯 허공에 발을 딛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왼발 오른발 한 발씩 차례로.
소년이 다시 뒤돌아보았다. 그러더니 얼굴을 옆으로 돌린다.
송우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왔는지 선희가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자 소년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