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이야기
10대 이야기
1
현희는 요즘 고민이 많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신의 점수로 수도권 대학에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물론 인문대 커틀라인 낮은 곳은 괜찮지만 송희는 꼭 영문과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학과를 갈 것인가, 지방대 영문과를 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아니면 사범대 영어교육과도 괜찮을 것 같은데, 사범대라고 해도 절대 만만치 않다. 1년 재수할까? 수시에서 꼭 합격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떨어져서 할 수 없이 정시를 봐야 하는데 수능 점수가 예상보다 훨씬 적게 나온 것이다. 하지만, 수능성적은 좀 아슬아슬하지만 현희는 정부기관으로부터 큰 상을 받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이상기온이라고 한다. 하룻밤 사이에 영하 5도로 떨어진 것이다. 그렇잖아도 추위에 약한 현희는 코트는 물론 털모자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고 새벽부터 논술학원으로 향했다. 토요일이라 거리는 한산했지만, 현희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걷는 바람에 앞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상대방도 그랬는지 모른다. 사람도 별로 없는 넓은 보도 한가운데에서 어떤 남자와 정면으로 부딪친 것이다. 게다가 마침 바닥에 물기가 있다가 그것이 얼어붙었었는지 현희는 부딪친 순간 비틀거리다가 발을 옮긴다는 것이 그 미끄러운 곳을 디뎌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상대방 남자가 얼른 다가와 현희의 몸을 잡고 일으켜 주려 한다. 그러나 현희는 몸을 움츠려 남자의 손을 물리친 다음 몸을 옆으로 비틀어서 간신히 일어났다. 그때 어떤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찌릉찌릉 몇 번 울린다. 남자는 노인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현희에게 향해 다가와서 옷을 털어주려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현희는 몸을 피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직접 몸 여기저기를 보면서 손으로 툭툭 털었다. 그리고는 화도 나고 창피하기도 한 마음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목도리로 입까지 가리고 있었는데,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갈기머리가 새벽바람에 약간 살랑거리며 흩날리고 있었다.
그 순간 현희는 멈칫했다.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목도리를 약간 풀고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바쁘게 걸어가다가…….”
현희는 그 다음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도,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오히려 현희 자신이 자기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하며 쩔쩔맸던 것이 생각났다. 어떻든 현희는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는 머리를 숙인 것이다. 그러자 상대방도 한 번 더 머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아주 바쁜 듯이 종종걸음으로.
현희는 돌아서서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저 남자 와일드 윈드의 그 드러머 아냐……?
2
현희는 학원에 가서도 하루 종일 새벽의 일 생각으로 마음이 붕 떠 있었다. 게다가 그 일을 누구한테 말을 할까 말까로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특히 와일드 윈드라면 지구 끝까지 쫓아다닐 것 같은 외사촌 여동생 연미에게는 꼭 알려주고 싶은데, 그 말을 하고 나면 그다음이 감당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망설이고 있었다. 왜 사인이라도 받지 그랬느냐,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새벽에 마주친 사람이라고 해봐라, 그렇다면 언니 동네에 그 사람이 산다는 것인데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 자기가 언니 대신 새벽에 마주친 사람이라고 하고 연락해도 되겠느냐 등등.
현희는 이제는 그 드러머보다도 연미 때문에 더 머리가 복잡했다. 머릿속으로는 벌써 연미한테 연락한 뒤 시달리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아이고, 관두자. 말 한마디에 천냥 빚 갚는 게 아니라, 천년 짐 지게 되겠다.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손은 자꾸 핸드폰으로 가서 벌써 연미 번호를 누르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전화가 왔다.
현희는 무슨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라 소스라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앗, 연미다!
현희는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얼른 전화를 받았다. 평소보다 싹싹한 목소리로.
“응, 연미야? 웬일?”
“어머, 언니. 많이 아팠겠다.”
뭐, 뭔 소리야? 아프다니…….
“많이 다치지 않았어? 지금 어디야? 내가 가도 될까?”
“아냐, 여길 어떻게 와? 나 지금 수업 듣고 있거든. 나중에 전화할게.”
현희는 속삭이는 소리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고는 얼른 끊었다. 사실은 지금 점심시간은 지났지만,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어 강의실에서 나와 휴게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여기저기 현희처럼 마음이 뒤숭숭한 아이들이 앉아서 핸드폰 들여다보며 메모를 하기도 하고, 창밖을 멍하게 내다보기도 하고, 노트에다 무엇인가 끄적거리기도 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대……? 혹시……?
맞아. 엄마가 얘기해 준 게 틀림없어. 엄마는 그 입이 방정이란 말야!
현희는 아침에 학원에 가면서 전철 안에서 엄마에게 전화해서 아프다고 징징거렸다. 엄마는 깜짝 놀라 무슨 일이냐고, 교통사고라도 난 거냐고 먼저 속사포처럼 퍼부어대며 현희가 말하기도 전에 벌써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난리를 쳤었다.
엄마, 그게 아니고…….
얘, 너 어디니? 아빠한테 나가보라고 할게. 너 거기에 꼼짝도 하지 말고 있어.
(아이고, 내가 전화를 하지 말걸…….)
엄마, 그게 아니고…….
여보, 이것 좀 받아봐. 현희가 사고가 났대. 어떡해, 우리 현희. 어제 수능발표가 났는데 오늘 사고가 나면 대학 어떻게 가……. 여보, 빨리 전화 좀 받으라니까!
현희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징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한 것을 후회했었다. 그리고는 아빠에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나서 일찍 들어오라는 아빠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언니!”
?
현희가 설마 하면서 고개를 돌렸더니 휴게실 유리문 밖에서 문을 살짝 연 채 들어오지는 못하고 고개만 삐죽 내민 채 손을 흔드는 여자아이.
현희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쓰러지려 해서 간신히 붙잡았다.
얘, 너……!
현희는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데 온 거야?
그러나 연미는 손을 들어 둘째손가락을 앞으로 내밀고 흔들면서 입 모양으로만 말을 한다.
나 들어가도 돼?
현희는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서 나와 문 쪽으로 걸어갔다. 현희는 유리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러자 연미가 펄쩍 뛰듯이 들어온다. 그리고는 곧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며 ‘나 괜찮아?’ 하며 역시 입으로만 말한다.
“어떻게 온 거야?”
- 언니가 걱정돼서.
연미는 이번에는 속삭이는 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주변을 여기저기 둘러본다. 그러고 나서 신기하다는 듯이 말한다. 역시 속삭이는 소리로.
- 학원 잘 해놨네. 나도 여기 다닐 거야.
현희는 연미의 팔을 붙잡고 자신이 앉았던 자리로 데리고 갔다.
“왜 왔어, 여기까지?”
“언니 걱정돼서.”
이제야 비로소 연미는 제 목소리를 내며, 그러나 여전히 낮은 소리로, 또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대답한다. 아무도 이쪽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는데.
현희는 탁자에 펼쳐놓은 것들을 가방에 쓸어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유리문 쪽으로 걸었다. 연미도 얼른 일어나서 졸졸 쫓아왔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