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엽서
정욱은 호텔에서 나와 차를 몰고 서쪽으로 향했다. 조금만 가면 바닷가다. 정욱은 EN356 지방도를 타고 마세이라(Maceira) 마을을 거쳐 EN356-1 도로로 들어가서 A8과 N242 고속도로를 지난 다음 마르팅간사(Martingança) 마을 한복판을 통과해서 드디어 대서양이 바라다보이는 페드라 도 오우로(Pedra do Ouro)에 도착했다. 그리고 해안가 프라이아 다 페드라 도 오우로(Praia da Pedra do Ouro) 모래밭으로 곧바로 향했다. (포르투갈어에 대한 식견이 전혀 없어서 알파벳 발음대로 표기한 것을 양해하기 바란다.) 해안가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약간 황톳빛 느낌이 도는 모래밭. 그리고 그 너머로 이어지는 시퍼런 바다. 바로 대서양이다.
정욱은 미국 보스턴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뉴욕으로 내려가다가 케이프 코드 국립해안에 들러서 대서양을 오랫동안 감상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보스턴이나 뉴욕에서 본 대서양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제주도 남쪽에서 바라보는 바다나 미국 동부에서 보는 바다, 포르투갈 서해안에서 감상하는 바다가 다를 리 없지만, 그 위치나 마음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특히 지금 정욱이 서 있는 이 페드라 해변은 어딘지 정다운 느낌이다. 이곳에서 남쪽 리스본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쯤에는 유명한 나자레(Nazaré) 해변이 있다고 하는데, 어쩐지 조용한 성격의 도희는 그곳 번잡한 곳보다는 다소 조용한 이 페드라 해변을 더 좋아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도희는 부모와 함께 리스본에서 살았지만 대도시의 해변보다는 역시 시골에 가까운 이곳 페드라 해변을 상상하면서 그 엽서에 그림을 그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은 맞다. 정욱이 알지는 못하지만, 실제로도 도희는 자신이 포르투갈 여기저기를 여행하는 도중 바로 페드라 해변에 와서 보았던 바다를 기억하고 그 그림을 그렸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 그림을 보고 정욱이 그 장소까지 찾아와 줄 것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그림 속에서라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것은 정욱의 상상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포르투갈 해안에서 하필 바로 이 바닷가를 찾은 것이 정당화되니까.
정욱은 주머니에서 그 엽서를 꺼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장면과 가장 가까울 듯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주변에서 몇몇 현지 사람들이 정욱을 보고 손을 들어준다. 요즘은 동양사람 보는 것이 낯선 일도 아닐 텐데 그래도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고마웠다. 정욱도 손을 들어 답했다.
정욱은 해안가를 따라 북쪽으로 주욱 걸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주황색 지붕의 마을을 지나서 잠시 올라가다가 정욱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한 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엽서의 그림과 비교해 보았다.
맞다. 바로 저곳이다. 아니, 저곳이어야 한다. 정욱이 도희를 만난 것이 운명적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이 해안가로 온 것 역시 운명적인 것처럼, 저 장소가 정욱의 눈에 띈 것도 운명과도 같이 정해진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욱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엽서의 그림과 여러 번 비교해 보았다. 맞았다. 바로 이 장소다. 뒤쪽은 숲으로 이어지고, 앞으로는 모래밭 너머 시퍼런 바다가 펼쳐지는 곳.
엽서의 그림과 너무 똑같다. 도희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이곳에 다녀간 다음 그 광경을 잊을 수 없어서, 또한 마음으로 늘 그리고 있는 그 장면에 정욱과 자신을 집어넣고 싶어서 엽서에 그 장면을 담았을 것이다.
정욱은 그곳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흰 구름 몇 조각. 엽서 그림과 똑같았다.
정욱은 왼쪽을 돌아다보았다.
아,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욱 옆에는.
정욱은 엽서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도 정욱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희미한 머리칼 그림만 있을 뿐.
그렇지만 나머지는 아주 똑같았다. 아니, 하나가 빠졌다. 엽서의 남자는 보이지 않는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정욱 옆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도 없지만.
정욱은 저도 모르게 왼팔을 들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사람, 도희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런데 웬일일까……?
도희가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정욱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이 아닌가?
정욱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서 확인하지는 않았다. 도희가 틀림없으니까. 게다가 옆으로 뻗어서 감싼 정욱의 손과 팔에 따스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도희의 민소매 어깨에서 느껴지는 아리한 그 감각.
맞다.
도희 바로 그녀.
정욱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러나 놀랍지는 않았다. 당연하니까. 도희는 그 엽서를 보내면서 정욱에게 오라고 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정욱에게 그 장소를 찾아와 앉아서 그 그림을 완성하라고 한 것이었으니까.
그래, 맞다. 정욱은 그 그림을 완성했다. 정욱 옆의 빈칸을 채운 것이니까.
그날 밤 정욱은 근처 호텔에 들어가서 작업을 한 가지 했다.
정욱과 도희는 같은 대학 미대를 다녔다. 정욱은 중간에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한 다음 2학년이 된 도희를 만났다. 도희는 회화 전공, 정욱은 조각 전공. 대학을 졸업한 다음 도희는 부모님을 따라 포르투갈로 갔고, 정욱은 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준비한 뒤 미국으로 유학 갔다. 그러나 정욱은 미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마 뒤 돌아왔다. 그리고 한국의 한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곧바로 휴학했다. 어려서 몇 번 앓았던 폐결핵이 또다시 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욱은 치료를 소홀히 했다. 담배는 원래부터 안 피웠으나 술을 지나치게 마셨다. 무력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그 탓에 최근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그런데도 병원에도 가지 않고, 약도 제대로 먹지 않으면서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도희가 옆에 있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정욱은 저녁때 호텔에서 나와 근처를 다니며 진흙을 잔뜩 모아왔다. 그리고 그것을 물에 개어서 꼭꼭 뭉쳤다. 그런 다음 두 손으로 조몰락조몰락하면서 조그만 테라코타 작품을 만들었다. 도회와 정욱. 아까 낮에 있었던 그 장면 그대로. 엽서의 그림이 아니고, 실제로 오늘 낮에 있었던 그대로.
엽서에는 뒷모습만 있었지만, 정욱은 앞모습만 만들었다. 여자와 남자. 정욱은 정성을 들여 여자의 모습을 다듬었다. 그렇게 잠시 지나자, 아…….
도희가 탄생했다. 치렁치렁하던 머리칼, 지혜가 돋보이는 듯 약간 튀어나온 이마, 북극 만년설 한가운데의 호수처럼 맑고 깊은 눈, 작고 오뚝한 코, 토라진 것처럼 꼭 다물고 있는 입술, 작고 가냘픈 턱, 앙증맞은 귀……. 영락없는 도희다.
정욱은 도희를 앞에 놓고 한참 바라보았다.
“바보…….”
그러나 도희는 말을 못 한다.
“바보…….”
정욱은 놀렸다.
“바보…….”
그래도 도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불만인 모양이다.
정욱은 낮에 사온 페드라 해변 사진엽서 케이스에서 엽서를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 뒷면 공백에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만든 진흙 테라코타를 보고. 그 테라코타의 앞모습. 연필로. 스케치.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남자에게 기댄 듯한 자세. 그러나 그 한쪽은 아직 진흙 덩어리 그대로다.
그래도 정욱은 정성껏 스케치했다. 토라진 여자와 그 옆의 아무런 형체도 갖추지 않은 진흙 덩이.
그림이 완성된 다음 정욱은 창가에 세워놓고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놀려댔다.
“바보야, 왜 토라졌니?”
그러나 바보는 말이 없었다.
정욱은 또다시 놀렸다.
“바보야, 바보야…….”
몇 번 그러고 나니 정욱은 시들해졌다.
정욱은 팔을 축 늘어뜨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엽서가 놓인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리고 스케치 옆 주소란의 빈칸을 채워놓았다.
발신인 - Hyun, DoHee. 주소는 그 호텔.
수신인 - Lee, JeongWook. 주소는 서울에 있는 정욱의 개인 작업실.
그 다음 미리 사온 우표도 붙였다. 서울까지 제대로 갈 수 있게.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