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은 남아 있는 커다란 진흙에서 한 덩이를 떼어냈다. 그러나 곧바로 작업하지 않고 떼어낸 진흙을 멀찌감치에 갖다놓고서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못생긴 진흙 덩이를.
정욱은 잠시 뒤 진흙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또다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정욱은 기억을 떠올렸다. 도희를 처음 만난 날을.
그날 정욱은 학교 작업실에서 저녁 늦게까지 있다가 나오는 중이었다. 가을이라 해가 제법 일찍 졌다.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웬 여학생이 서 있었다. 복도의 불이 켜져 있었으나 등이 오래되어 불빛이 누렇고 희미해서 처음에는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정욱은 아마 자기가 아는 사람인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여학생을 등진 채 말을 툭 던졌다.
“여기 왜 왔어? 지금 문 잠그고 나가는 중이야.”
그러나 여학생은 말이 없었다.
정욱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여학생이 잠시 노려보듯이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걸어가는 것이었다.
아차, 실수했다. 젠장.
여학생의 걸음걸이를 보니 꽤 화가 난 듯하다. 성큼성큼 걷는 것이다.
정욱은 난감했지만 그냥 뒷모습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로 그 다음 날, 정욱은 한 강의실을 지나가다가 마침 안에서 나오는 여학생과 마주쳤다. 어제 바로 그 학생이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데다 화구가 들어 있는 듯한 큼직한 마대 자루 같은 가방을 또 하나 손에 들고서 힘겹게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강의실 안에서는 왁자지껄 요란한 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고. 학년이 달라서 그런지 처음 보는 학생이지만, 같은 미대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았다.
정욱은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얼른 얼굴을 돌려서 피하려 했는데, 여학생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학생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정욱 옆을 지나갔다. 하지만 막 지나치다가 마대 자루 가방이 정욱의 다리에 걸리면서 약간 흔들거리더니 끈 하나가 툭 끊어지면서 입구가 벌어지며 내용물 일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해서 만났다. 별로 낭만적인 만남은 아니다. 그러나 그 뒤 정욱이 몇 번 그 여학생을 뒤쫓아가서 말을 걸고 사과하고 그래서 간신히 마음이 풀린 그 애 도희와 도서관 입구 벤치에 함께 앉으면서 분위기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도희는 정욱이 미대 선배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욱이 처음부터 투박한 반말로 나온 것이 밥맛이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날 조각실로 조교를 찾아갔다가 처음 보는 인간에게 무시당한 것 같아서 상당히 기분이 상했었다고 한 것이다.
그 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인연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구나 하고 정욱은 생각했다. 그러나 뭐 어떠랴. 그런 식으로라도 만났으니 다행이지. 사실 정욱은 그때까지 변변히 여자친구를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몇 번 만난 여자는 있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주로 차이는 쪽이었다. 그래도 두 번인가는 정욱이 찼다. 정욱은 그것에 늘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도 찬단 말야. 여자에게 굶주린 거 아니라고.
젠장,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개는 늘 혼자 지내면서 남들 데이트하는 거 부럽게 바라보며 상상 속에서만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만난 뒤에 그동안 제대로 데이트 못 한 것 한풀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늘 함께 붙어다니게 되었다. 미대에서 화려하게 소문이 날 정도로.
“바보야…….”
정욱은 진흙을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진흙을 손에 잡고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지나서 두 형체가 만들어졌다. 한 형체는 남자. 왼팔을 뻗어 누군가의 어깨에 두른 듯한 자세. 그러나 그 나머지 한쪽은 아무런 형체가 없는 진흙 덩어리 그대로일 뿐이다.
자신보다 약간 작은 진흙 덩이에 팔을 두르고 있는 남자.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집 세고 퉁명스러운 모습이다. 헝클어진 머리칼 아래로 사납게 쏘아보는 듯한 툭 튀어나온 눈. 뭉툭한 코. 그 아래 화난 듯이 꽉 다물고 있는 입. 게다가 턱까지도 고집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욱 자신.
정욱은 자신의 사진을 보거나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남자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남자가 자신인 것을 안다. 정욱의 머릿속에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나 방금 주물러 만든 진흙 인간이나 아주 똑같았으니까.
“너도 바보다.”
정욱은 방금 만든 진흙 남자를 보고 한마디 한 뒤 먼저 만든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바보고.”
정욱은 발걸음을 뒤로 옮기면서 두 바보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바보 듀엣이군. 그렇지, 바보들아?”
정욱은 멀찌감치 뒤로 가서 두 바보를 한눈으로 바라보면서 혀를 날름 내밀었다.
“바보, 바보들…….”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아무리 놀려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놀림당하는 두 바보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러고 나서 정욱은 또다시 엽서 한 장을 꺼냈다.
그런 뒤 새로 만든 진흙 덩이를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한참 뒤 엽서에 주소를 적었다. 수신인 이정욱, 발신인 현도희.
다 끝난 다음 우표를 붙였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