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은 피를 토했다. 꽤 많이. 처음에는 어쩐지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약을 가져오려 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어쩐지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가져오지 않기로 했다.
정욱은 진흙 한 덩이를 떼어내면서 쿨럭했다. 그러자 피가 콱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또 쏟아졌다. 또다시.
한참 몸을 진정시키자 간신히 피가 멎는 것 같았다.
그러자 괜히 마음이 삐뚤어진다. 피가 더 나왔으면…….
콸콸콸콸. 수돗물처럼, 폭포수처럼.
그리고 이 방 전체를 적시고 문 아래로 흘러나가 복도를 거쳐 계단으로 내려가 호텔 밖으로 흐르는 것이다. 그 다음 저 앞 모래밭을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거지. 그러면 얼마나 신날까…….
정욱은 비릿한 피 냄새가 배어 있는 입을 손으로 문질렀다. 좀 전에 잘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손등에 약간 피가 묻어났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욱은 화장실 휴지와 수건으로 카펫에 떨어져 흩어진 피들을 박박 닦아냈다. 비누칠도 해서. 그러나 시커먼 얼룩은 모두 지워지지 않았다.
쳇, 세탁비 엄청 물어야겠군. 돈도 얼마 안 가지고 왔는데. 신용카드는 이미 한도 가까이 차 있으니까 결국 집에 전화해서 도움을 청해야 하려나 보다 생각하니, 그것이 괜히 짜증이 나는 것이었다.
정욱은 떼어낸 진흙 덩이를 집어 바닥에 내던졌다.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진흙을 얼른 집어올렸으나 카펫에는 벌써 진흙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될 대로 돼라!”
정욱은 소리질렀다. 세상을 향해서.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리고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과 진흙 자국을 향해서.
정욱은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잠시 그대로 있었다. 마음이 불안하다. 요동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냥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리고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정욱의 눈에 조그만 진흙 덩이가 보였다. 아까 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가 다시 집어들어 탁자에 올려놓은 진흙.
정욱은 한숨을 푹 쉰 다음 진흙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마음은 멍한 채.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어떤 장면을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가 걸려든다.
회화(繪畵)는 말없는 시요,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 시모니데스(Simonides)
시모니데스는 올림픽 경기장에서 승리한 선수들에게 바치는 축사이자 송시(頌詩)인 에피니키온(epinicion)을 짓던 시인이다.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생존했었다고 한다. 에피니키온은 승리자들을 앞세우고 행진할 때 부르는 노래를 말한다. 특히 페르시아 대군을 격파한 스파르타 방어군에게 바치는 시모니데스의 송시는 기념비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송시 중 현대 시에서 가장 주목받는 것으로는 윌리엄 워즈워스의 〈어린 시절 회상을 통한 영혼불멸송〉이 있다. 영어로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라는 긴 제목에 어울리게 역시 아주 긴 시이다.
그 장시(長詩)의 첫 연과 마지막 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Thanks to the human heart by which we live,
Thanks to its tenderness, its joys, and fears,
To me the meanest flower that blows can give
Thoughts that do often lie too deep for tears.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나는 소망하련다, 내가 살아가는 날 동안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이어지기를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인간의 마음에 힘입어
그 부드러움, 그 기쁨, 그 경외감에 힘입어
이 땅의 가장 미천한 꽃 한 송이조차도 내게 속삭여 준다
때로는 너무 심오하여 눈물조차 나지 않는 깊은 생각들을
그림을 떠올리다가 시에까지 생각이 미친 자신에게 정욱은 비웃었다. 이 엄중한 때에 생각이 엉뚱한 데로까지 날뛰니.
하긴 아무려면 어떠냐? 아무도 없고, 아무도 듣지 못하고,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보지 않고, 하물며 아무도 탓하지 않는 이곳 멀고 먼 타향의 방 한 칸에서 무슨 짓인들 못 하랴.
정욱은 머리를 흔들고서 진흙에 집중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었다. 사실은 절반의 완성이지만.
두 사람의 등만 만든 것이다. 앞쪽은 그냥 진흙.
하지만 그나마 한쪽 사람의 등만 제대로 만들었고, 나머지 한 사람, 여자는 손으로 주무른 듯 뭉뚱그린 형태다.
정욱은 또다시 엽서를 꺼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등을 그렸다. 역시 스케치.
그러다가 피를 쏟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조짐을 알아차리고 얼른 화장실로 뛰어갔다. 덕분에 화장실 바닥이 검붉은 물감으로 물들었다.
핏빛 회화!
그렇다. 이것은 하나는 회화요, 시다. 이 세상에서 이처럼 처절한 시이자 회화가 어디 있겠는가. 포르투갈 해안가 호텔 방에서 온몸을 바쳐 만든 검붉은 형이상학.
정욱은 비틀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입을 대강 닦고 물로 헹구었는데도 비릿한 냄새가 난다.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피비린내.
정욱은 엽서를 한 장 꺼내와서 남자의 뒷모습만 있는 진흙 테라코타를 그림으로 옮겼다. 역시 스케치로.
그러고 나서 발신인과 수신인을 썼다. 도희와 정욱을.
그런 다음 남자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속삭이듯이. 크게 말하면 또 피가 나올 것 같아서.
“바보, 바보들…….”
[다음 화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