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엽서

by Rudolf

여덟 번째 엽서



정욱은 또다시 진흙 한 덩이를 떼어냈다.

가슴 속이 아프다. 흙 묻은 손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정욱은 이 증상을 잘 안다. 기관지 내 동맥에 상처가 난 것이다. 정욱에게는 폐결핵과 함께 기관지확장증이 있기 때문이다. 기관지, 특히 우폐 중엽을 지나는 기관지가 크게 확장되어 동맥이 노출되어 있어서 혈관 벽이 팽창된 탓에 조그만 자극에도 파열되기 쉬운 것이다.

거기에 결핵까지 겹친 탓에 세기관지와 허파 벽 등에서 출혈이 일어나고 있다. 잘 치료하기만 하면 건강을 지킬 수도 있겠지만, 정욱처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으면 사실 백약이 무효하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정욱은 치료에 소홀해 왔다. 그나마 술담배를 끊은 덕분에 다행히 지금까지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지만, 지금의 상태로서는 결핵보다는 기관지확장증이 더 위험할 수 있다. 동맥이 자꾸 터져서 피가 허파에 고이게 되면 긴급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이 먼 나라 포르투갈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려나 의문이다. 대사관에 미리 연락이라도 해두면 모를까, 잘못하면 타향에서 큰일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잘 아는데도 정욱은 무사태평이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정욱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적어도 이 밤이 지날 때까지는 그런 사실을 묻어두고 싶었다. 지금은 밤이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어둠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한 시각에 냉철한 판단에 의지하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면 감성을 극대화해서 현실의 삶이 아니라 소설적인 인생의 의미를 더듬는 것이 옳은가?


Ultima thule


세상의 끝, 또는 극한을 나타내는 라틴어다. 지금의 정욱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이다. 마지막까지, 종착역까지 달리는 것이다. 그 마지막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갈 것이다. 그곳까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이곳 정욱이 있는 곳이 바로 세상의 끝이 될 수 있다. 정욱은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바다에 빠지게 된다. 더는 갈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정욱은 세상의 끝까지 온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더는 갈 곳이 없는 상태. 막다른 골목과 같다. 이차대전 이후에 절망에 빠진 젊은 세대들을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 즉 ‘막다른 골목의 세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정욱은 지금 자신이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정욱 자신이 선택한 길이니까. 그래서 후회는 없다. 그러나 절망은 있다.

정욱은 가슴이 아픈 것을 참으면서 진흙 덩이를 세심히 다루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빚으리라. 그러나 완성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완성의 미를 만들 작정이다. 그러나 뒷모습의 아름다움만. 그런 다음 앞모습은 상상하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내 여자의 자태를.

시간은 벌써 자정을 훨씬 넘어 내일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벌써 미래가 된 것이다.

“오빠는 항상 과거에만 살고 있는 것 같아.”

도희가 말했었다.

“원래 그래.”

“왜 미래를 생각하지 않아?”

“두려워서 그래.”

“뭐가 두려운데?”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겁쟁이네. 사람은 다 죽잖아.”

“그래도 죽는 건 싫어.”

“나는 죽는 거 무섭지 않은데.”

도희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먼저 죽은 것인가? 죽는 게 무서운 나 정욱은 지금껏 살아 있고? 하지만 지금 이 상태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물론 죽은 것도 아니다. 산 것과 죽은 것의 중간. 하지만 그런 것이 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정욱의 상태가 산 것도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닌 상태가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밤이어서 잘 모르겠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밝혀지겠지. 산 것인지, 죽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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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생각은 이리저리 흩어져도 그러나 정욱의 손은 세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테라코타를 완성했다.

여자의 뒷모습. 그러나 남자의 모습은 없다. 다만 진흙 덩이일 뿐. 단 하나, 진흙 덩이에서 팔과 같은 것이 뻗어나와 여자의 어깨까지 가 닿아 있다. 마치 팔을 뻗어 두른 듯이.

그것이야 어떻든 여자의 뒷모습은 마치 살아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톡 치면 뒤돌아볼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모습이 없으니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정욱은 앞모습 없는 여자의 이름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밝힐 수는 없다. 얼굴이, 앞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여자에게 누가 이름을 붙여주겠는가? 아니, 이름이 있어도 어떻게 부르겠는가? 명찰조차 달려 있지 않은데.

그런데도 이미 이름을 알고 있다고 하는 그 오만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쿨럭!

오만 대신 피가 나왔다. 정욱의 입에서. 그러나 양은 많지 않았다.

정욱은 두 손으로 피를 받아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지만 가능한 한 발소리는 내지 않고. 잘못했다간 얼굴 없는 여자를 깨울 것만 같아서.

세면대에 피를 쏟고 나서 정욱은 변기 뚜껑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죽는 것인가……?

정욱은 생각했다. 아니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 더, 조금만 더 살자.

정욱은 화장실에서 나와 진흙 테라코타 앞에 섰다. 아니, 뒷면 등 쪽으로 섰지. 앞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 바보구나. 얼굴을 지웠으니.”

죄책감이 일었다. 정욱 자신이 누군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놓은 여자. 그런데도 정욱은 도희의 이름을 떠올렸다.

정욱은 또다시 엽서 한 장을 꺼내왔다. 그리고 그렸다. 스케치.

다 완성된, 여자의 뒷모습만 있는 진흙 테라코타의 그림. 너무 외로웠다. 뒷모습만 있는 여자의 진흙 사람이.

“바보.”

그러나 정욱은 뒷모습만 있는 여자가 바보인지, 그렇게 만든 정욱 자신이 바보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정욱은 엽서에 발송인과 수신인을 써넣었다. 각각 도희와 정욱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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